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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략) 유감스럽게도 패전은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전제 하에 몇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패전은 국체호지(國體護持)에 큰 문제가 되겠지만, 지금까지의 영미여론은 국체의 변경을 주장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장래에 어떻게 변화될지 알 수는 없으나, 패전에 의해 국체의 변경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국제호지의 명분이나 패전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패전에 수반되어 발생할 수 있는 공산혁명입니다. (중략)

 

 

 

작금, 위급한 전황을 빌미로 일억옥쇄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은 우익인사들이겠지만, 그 배후에는 선동에 의해 국내를 혼란시켜 혁명을 달성하려는 공산분자들이 있습니다. 군부 내에서는 철저한 영미 격멸을 외치면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소련과 제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습니다. 금후, 전황이 더욱 악화되면 그들의 세력은 급속하게 확산될 수 있습니다.(중략)

 

 

 

전쟁 종결의 최대 장애는 만주사변 이래 오늘까지 시국을 좌지우지해온 군부 내의 일부 강경파입니다. 그들은 이미 전쟁을 계속 수행할 자신을 잃었지만, 지금까지의 면목 때문에 계속적인 저항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들을 일소하지 않고 조급하게 전쟁종결의 순서를 밟으면, 우익과 좌익의 민간 인사들이 그들과 함께 혼란을 야기할 것이므로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전쟁을 종결하고자 할 때는 그들을 먼저 일소해야 합니다.(하략)』

 

 

 

- 1945년 2월 고노에 후미마로가 덴노에게 올린 상주문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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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후미마로‘만’이 올릴 수 있는 상주문이었다. 일본 천황가의 식구이자(천황가에서 분가한 후지와라씨의 분파이다), 세습공작, 3번에 걸친 총리 경험.

 

그 만이 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당시의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정말 ‘그 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 상주문에서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게,

 

국체호지(國體護持)

② 군부 내의 일부 강경파

③ 공산혁명

 

이다. 당시 고노에는 전후의 공산혁명을 걱정했다. 상주문의 내용을 좀 더 살펴보자면,

 

『...특히, 1935년 인민전선전술에 의한 2단계 혁명전술을 채택한 이래, 최근의 코민테른 해산까지의 과정에서, 그들의 적화 음모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피상적이고 안일한 생각입니다.』

 

고노에는 패전 이후의 혁명을 진심으로 걱정했다. 이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조속한 종전과 군부 강경파의 제거를 건의했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 봐야 할 것이 ‘국체호지(國體護持)’ 란 말이다. 지금도 일본 우익들 입에서 종종 흘러나오는 국체호지. 도대체 국체(國體)란 뭘까? 사전적 의미로만 보자면, ‘주권의 소재에 구별되는 국가형태’ 혹은 ‘국가의 체면’ 등으로 해석 가능할 것 같은데, 여기서 쓰이는 국체호지의 본 뜻은,

 

“천황제의 유지”

 

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당시 고노에는 연합국이 국체호지. 즉, 천황제를 변화시킬 의지가 없으므로 종전협상을 해도 괜찮다는 논리로 상주문을 시작했다. 이 국체호지는 종전협상의 주요 쟁점이 됐다. 어쨌든 히로히토 덴노는 고노에의 상주문을 거절했다. 역시나 천황제의 보장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독자적으로 강화조약을 모색했다. 이미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이후 요시다 시게루와 함께 영국과 미국에게 화평 교섭을 추진했던 이력이 있던 고노에는(이때는 도조 히데키가 방해했다) 마지막으로 소련에 희망을 걸었다. 그는 모든 해외영토와 류큐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 치시마 제도 등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협상을 진행하려 했지만, 소련이 이를 거절했다. 직접 모스크바로 날아갈 생각까지 했지만, 이미 소련은 대일전 참전을 연합국들과 약속한 상황이었다.

 

여담이지만, 고노에는 종전 이후 맥아더와 천황제의 유지를 놓고 협상을 벌였다. 당시 고노에의 논리는,

 

“덴노를 중심으로 한 귀족세력과 재벌들은 군부의 개전을 막으려 했지만, 군부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전쟁이 시작됐다. 만약 천황제를 일본에서 제거한다면, 일본은 공산화 될 수도 있다.”

 

라는 주장이었다. 맥아더는 이에 수긍했고, 전후 일본 헌법의 개정작업을 고노에에게 맡기기로 했다. 물론, 이후 여론이 악화 돼 헌법 개정에는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고노에게 천황제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는 건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결국 고노에는 A급 전범으로 분류 돼 조사를 받게 됐다는 통보를 받고 음독자살을 하게 된다.

 

 

일본 Mamoru Shigemitsu (top hat) & Gen. Yoshijiro Umezu의 항복문서 조인 대기(1945.9.2J. R. Eyerman촬영).jpg

 

전쟁을 끝낸다는 것

 

전쟁을 시작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우발적인 충돌이나 정치적으로 무의미한 전쟁을 확인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전쟁은 정치적이다. 전쟁이 괜히 정치의 연장선이 아니다.

 

그렇다면, 종전은 어떠할까? 모든 전쟁의 끝은 ‘정치’다.

 

전쟁의 시작점에 군인이 있다면, 전쟁의 끝에는 언제나 정치인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종전은 개전보다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하다. 전쟁 기간 동안의 ‘감정’에 수많은 경제적 요인, 전후의 처리 문제까지 합쳐지면 개전보다 더 어려운 게 종전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상황이 더 복잡했다.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인해 미국 국민들의 감정의 골은 깊어졌고, 가미카제 공격으로 이 감정의 골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 거기에 태평양 전쟁 기간 내내 존재했던 ‘인종차별적 감정’이 더해졌다.

 

이런 감정적 문제에 더해 연합국 내의 복잡한 셈법이 더해졌다. 소련은 전후 일본의 영토에 대한 욕심을 보였고, 미국은 소련의 팽창에 긴장했다. 이 와중에 일본은 ‘국체호지’라 해서 천황제 사수에 모든 걸 걸었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하는 게 영국과 미국의 권력 교체다. 루즈벨트가 죽고, 처칠은 애틀리에 의해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2차 대전을 이끌었던 서방의 두 지도자가 ‘거의’ 동시에 사라진 거다. 이 권력 공백을 메운 건 맥아더를 두려워하던 트루먼이었다.

 

여기서 당시 일본을 ‘주제’로 한 국제정치 무대의 협상에 관해 설명해야겠다. 바로 연합국간의 외교회담이다. 전쟁 기간 내내 연합국들은 세계 규모 급의 이 전쟁을 어떻게 수행할지, 그리고 전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논의들. 아마도 세계 외교사에서 가장 유명한 회담들 중 하나일 것이다.

 

우선 전제해야 할 것이 당시 국제정세는 ‘전황’과 연결돼 있었다는 부분이다. 당연하다, 전쟁은 외교와 정치의 연장선상이다. 전황은 외교 교섭 테이블 위에서 훌륭한 판돈이 돼 주었다.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은 크게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선으로 쪼개져 있었는데, 소련은 독일과 싸우고 있었고, 미국은 독일과 일본과 싸우고 있었다. 독일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모두 연합국이었지만, 독일이 패전의 기색이 역력할 때쯤 되자 연합국들은 각자의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대목이다. 그리고 독일이 무너지자 소련의 대일본 참전 시기가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됐다.

 

일본이 ‘주제’가 된 연합국들의 회담들을 몇 개 이야기 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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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카사블랑카 회의

1943년 1월 14일부터 24일까지 개최된 카사블랑카 회의의 주요 의제는 시실리 상륙작전인 허스키(Husky) 작전의 수립이었다. 여기에 더해 ‘꽤’ 중요했던 것이 자유 프랑스군의 리더 둘을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 자리에 가장 가까웠던 이는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의 총사령관이자 프랑스군의 영웅인 앙리 지로(H. Giraud)였다. 샤를 드골( Charles André Joseph Marie de Gaulle)은 그 당시만 해도 젊고, ‘키만 멀대 같이 큰’ 어딘지 마음에 안 드는 군인이었다. 미국은 앙리 지로를 ‘대놓고’ 지원했다.

 

샤를 드골은 연합국 지도자들에게는 ‘악몽’이었다. 오만하고, 비협조적이며, 뻣뻣한 그는 연합국 지도자인 처칠과 루즈벨트에게 ‘비호감’으로 낙인이 찍혔다. 자유 프랑스라고 나름 정부 비스므리하게 만들었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연합국 지도자들에게 효용성을 증명해 보이지 못했다. 그나마 자유 프랑스의 가치를 인정한 처칠이 나름 애증의 관계로 샤를 드골을 인정해줬지만, 루즈벨트는 끝끝내 드골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루즈벨트가 드골을 인정해 준 건 1945년. 그것도 마지못해서였다. 루즈벨트는 드골을 싫어했다. 아니, 혐오했다.

 

당시 자유 프랑스의 수장이 될 만한 사람은 다를랑(J.F.Darlan)제독이었다. 비시 정권의 외상, 내상, 국방상 등을 역임하고, 횃불작전 당시 비시 정권의 북아프리카 총독 겸 총사령관이었던 그는 미군과 영국군 연합군이 상륙하자 독일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고 연합군과 휴전을 하며 협조했다. 그대로만 갔으면, 다를랑은 연합국 지도자들의 좋은 파트너가 될 뻔했으나, 안타깝게도 1942년 12월 암살당한다(드골의 암살 지시설이 강력하게 제기된다). 이 다를랑의 후계자가 바로 지로였다. 이후 프랑스는 드골파와 지로파로 나뉘어져 치열한 권력싸움이 이어졌고, 결국 1943년에 이르러 지로가 프랑스 민족해방위원회에서 축출되며 샤를 드골이 권력을 잡게 된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떻게 언급 됐을까?

 

당시 카사블랑카 회담의 결과를 발표한 부분 중 정치적 ‘의미’를 염두에 둬야 할 부분이 하나 있는데, 바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있을 때까지 전쟁을 수행한다는 대목이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할 대목이 바로 '무조건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이란 대목이다. 연합국은 처음으로 무조건 항복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선언적 의미라고 해야 할까? 당시 루즈벨트는 이 용어의 ‘과잉 해석’을 경계하며, 기자들에게 부연설명을 더했다.

 

“(상략) 이들 3국의 무조건 항복이란 이들 국가의 전쟁능력을 제거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장차 세계평화의 합리적인 보장을 뜻하는 것이다. 무조건 항복이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파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복과 다른 민족을 억압하려는 이들 3국의 철학을 파괴하는 것을 뜻한다.”

 

상당히 정치적이며 철학적(?!)인 접근이다.

 

 

② 제1차 카이로 회담

테헤란 회담에 참석하러 가던 도중 루즈벨트와 처칠이 카이로에서 장제스와 회동하면서 이루어진 회담이다. 이 회담을 통해 장제스는 처음으로 연합국 전쟁수행계획에 참여하게 됐다. 이 회담은 오로지 ‘일본’을 주제로 한 회의라고 보는 게 옳다. 이 회담에서 결정된 상황은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 영국은 독일이 패망한 이후에도 일본과의 전쟁을 계속한다.

둘째, 1894년 이래 일본이 침탈한 지역을 모두 환원한다. 이로 인해 만주와 대만, 팽호제도(澎湖諸島 : 대만에서 서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군도)는 중국에 환원하고, 한국은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라고 말했다)에 독립시킨다고 합의했다.

 

이제 영국, 미국, 중국이 ‘공식적으로’ 손을 잡고 일본과의 전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회담 결과 장제스는 미국과 영국의 전폭적인지지(정치적인지지 뿐만이 아니라, 물량지원도)를 받으며 일본과 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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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얄타 회담

1945년 2월 4일부터 12일까지 있었던 얄타 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수뇌와 외교장관, 군사 참모들이 참여한 회의 중에서 가장 중요한 회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중요했던 회담답게, 이후의 역사와 국제정세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으며, 각자의 나라에서 비난의 목소리와 의혹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던 회담이기도 했다.

 

“이 회담은 비밀로 해둡시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마음대로 자기들의 운명을 재단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매우 불쾌해 할 테니 말이오.”

 

 

 

- 윈스턴 처칠의 발언 중 발췌

 

윈스턴 처칠의 발언만으로도 회담의 ‘무게감’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을 결론삼아 먼저 말하자면,

 

“중요한 회담이나 거래를 하기 전에는 우선 심신(心身)의 안정을 찾아야 한다.”

 

란 중요한 교훈을 알려준 회담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시기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건강은 최악이었다. 이미 뇌경색으로 한 번 쓰러진 몸임에도 루즈벨트는 지구 반 바퀴를 돌아 흑해까지 가야했다(그리고 두 달 뒤 루즈벨트는 죽는다). 스탈린 역시 그렇게 타기 싫어하는 비행기를 타고 여기까지 날아왔을 때에는 이미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지난 4년간 전쟁을 진두지휘하며 그는 이미 기력을 빼앗긴 상황이었다.

 

그럼 처칠은? 물론, 처칠은 건강했다. 잠이 보약이라는 엉뚱한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얄타 회담은 대영제국의 ‘종말’을 의미하는 회담이기도 했다.

 

얄타회담은 미국과 소련의 두 정상이 만나 전후 세계의 판도를 정리한 회의였다. 즉, 미소 양국 정상회담이라고 보는 게 맞다. 영국의 처칠은 들러리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회담은 처음부터 소련에 유리하게 시작됐다. 소련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려, 회담 내내 미국과 영국 ‘손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이들의 이야기를 도청했다. 더구나 이들은 최강의 패가 있었다. 바로 ‘승리’였다.

 

1945년 2월이면, 유럽전선은 이미 연합국의 승리가 거의 확정된 상황이었다. 소련은 지난 4년간 2천만이 넘는 희생을 치르면서도 꿋꿋이 버텨냈고, 마침내 ‘베를린 레이스’의 결승점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연합국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제2전선을 열었다지만,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르덴 숲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했던 상황(벌지 전투).

 

소련은 기세등등했다. 여기에 루즈벨트의 ‘호의’가 더해졌다. 루즈벨트는 소련을 우호적으로 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앞으로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미국과 소련이 서로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일본’이란 꼬리표도 붙어 있었다. 유럽 전선이 정리 된 다음 소련군을 태평양 전선으로 돌리고 싶었다. 그렇다면, 소련의 환심을 사야 했다.

 

그 결과 루즈벨트는 소련의 요구사항을 거의 다 들어줬다. 처칠이 말렸지만,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다가갔다. 이미 영국은 초강대국의 반열에서 밀려나 미국과 소련의 들러리가 된 상황. 처칠의 발언권은 스탈린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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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회담의 주요 결정사항을 살펴보면,

 

첫째, 국제연합 창설의 승인.

 

둘째, 독일의 분할 점령. 이때 쟁점이 됐던 게 프랑스를 점령국으로 포함시키는 문제였다. 당시 스탈린은 프랑스의 점령국 지위 확보에 난색을 표했다.

 

“뭐 한 게 있는데?”

 

당연한 의견이다. 루즈벨트도 이에 찬성했지만, 유럽의 재건에는 프랑스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루즈벨트의 보좌관인 홉킨스(H. Hopkins)의 의견이 반영 돼 루즈벨트가 프랑스의 참여를 인정했고, 스탈린도 프랑스 점령지를 영국과 미국의 점령지에서 선정한다면 양보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합의를 도출했다.

 

셋째, 폴란드의 전후처리. ‘뜨거운 감자’였다. 애초에 소련은 런던에 있던 폴란드 망명정부를 승인했었는데, 전쟁이 거의 끝나가자 소련은 다른 생각을 품게 된다. 소련 국경의 안정을 위해서도 폴란드에는 친소 정권이 들어서야 한다는 거다. 그 결과 루블린(Lublin : 폴란드의 도시)에 있는 친소적인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나서게 된다. 런던의 임시정부와 루블린에 있는 임시정부가 부딪히게 됐다. 결국 3국은 폴란드의 정부형태는 폴란드 국민들의 투표로 결정한다는 일반론적인 원칙을 세웠다. 그 결과는 뭐... 미국과 영국이 순진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포기했다고 해야 할까? 일반, 비밀, 자유 투표라는 대원칙을 세웠지만, 이미 판은 소련이 다 깔아놓은 상황이었기에 폴란드는 소련이 ‘먹었다’

 

폴란드 국경선에 관한 합의도 있었지만, 이 역시도 소련 마음이었다. 소련과 접한 국경은 소련이 마음대로 정했고, 독일과 접한 국경 역시 소련이 일방적으로 그었다. 소련 마음대로였다.

 

넷째, 대(對)일전 참전. 이 역시도 소련의 ‘꽃놀이패’였다. 당시 스탈린의 주장을 들어보면,

 

“나는 일본이 우리나라로부터 빼앗아 간 것을 단지 되찾기만을 원한다.”

 

독일이 패망한 후 2~3개월 이내로 태평양 전선에 참전하겠다는 약속의 대가는 ‘꽤’ 비쌌다. 당시 미국과 영국은 소련에게 백지수표를 건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3국 수뇌들의 비밀 합의는 당시엔 비밀이었다(1947년 3월 미 국무성이 발표하며 세상에 공개됐다). 당시의 ‘참전 조건’을 살펴보면,

 

1) 외몽고의 현상유지. 즉, 몽고인민공화국을 계속 존속시킬 것

2) 1904년 일본에 양여한 권리의 복구. 즉, 남부 사할린과 그 인접 도서를 다시 찾고, 대련을 국제화하고, 이 지역에서 소련의 우월한 이익을 보호한다. 여순항은 소련에 조차하고 동청 철도와 남만 철도는 장차 설립될 소련-중국 합작회사가 관리한다.

3) 쿠릴 열도를 소련에 할양한다(이 대목 때문에 현재 일본과 러시아는 북방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다).

 

보면 알겠지만, 소련이 원하는 건 다 얻었다. 훗날 국제 정치학계는 루즈벨트가 너무 많이 양보한 덕에 전후 국제정세는 불안해졌다며, 회담 당시의 루즈벨트의 ‘판단력’의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많았다. 당시 루즈벨트의 건강상태를 의심하며, 이미 판단력을 잃은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인 의견으론 그의 판단력 문제가 아니라 루즈벨트의 ‘정세판단’에 착오가 있는 게 아닌가란 생각을 해본다.

 

루즈벨트는 소련을 우호적으로 생각했다. 싫든 좋든 간에 전후 세계 평화를 위해서 소련의 협력은 꼭 필요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일본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소련의 힘이 필요하다고 믿었다(가미카제 공격과 본토에 가까워질수록 극렬해 지는 일본군의 저항을 보면, 충분히 이해할만한 부분이다). 그 결과가 얄타 회담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전쟁 후의 세계질서를 결정하던 그때. 일본은 소련을 믿고(일소중립조약), 본토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이 얼마나 국제정치와 고립돼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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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러일전쟁]

 

2부

드레드노트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의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

 

최악의 대통령, 최고의 조약을 성사시키다

각자의 계산1

8년 의 회, 던 축 

일본은 어떻게 실패했나2

만주국, 어떻게 탄생했나

 

 

외전

군사 역사상 가장 멍청한 짓

2차대전의 불씨

그리고, 히틀러

실패한 외교, 히틀러를 완성시키다

국제정치의 본질

 

 

3부

태평양 전쟁의 씨앗1

태평양 전쟁의 씨앗2

도조 히데키, 그리고 또 하나의 괴물

일본을 늪에 빠트린 4명의 '미친놈'

대륙의 각성완료, 다급해진 일본

대동아(大東亞)의 환상에 눈 먼 일본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1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2

일본의 패배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1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2

천조국, 움직이다

 

 

4부

왜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하려고 했을까

신성불가침으로 만들어진 권력, 덴노(天皇)

일본의 반인반신, 덴노(天皇)의 오판과 태평양 전쟁

미국과 일본의 외교와 태평양 전쟁

정신력으로 전쟁을 결정한 일본

미국의 최후통첩, 헐노트(Hull Note)

진주만 공습, 두고두고 욕먹는 이유

인류 역사상 가장 병신같은 선전포고

미국, 2차대전에 뛰어들다

전통이란 이름의 살인, '무사도(武士道)'

맥아더의 오만, 태평양전쟁 필리핀 전장

일본, 필리핀의 물가를 100배로 만들다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을 이용한 방식

전쟁은 돈으로 하는 것이다

자살특공대 가미카제(神風)의 등장

일본의 비명이 종말을 재촉했다

 

 

5부

B-29, 지옥이 시작된 일본

불의 도시, 파국으로 향하는 일본

본토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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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괴물로 변해가는 일본

조약, 테이블 위의 전쟁

러시아 vs 일본 한반도에서 만나다

 

 

 

 

 

 

펜더

 

편집 :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