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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라인 : 이 땅의 영화인들에게 바치는 헌사


스포주의. 배우(俳優)의 한자어는 배우 일에 뛰어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 중 배우 배 자의 파자는 사람 인人에 아닐 비非.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이승만은 대통령 시절 배우가 흉한 이름이라며 연기자로 부르자고 했다는데 동석했다던 배우 입장에서는 보자보자하니까 본인은 사람됨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싶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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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는 오늘도>


영화는 1막부터 3막까지 나누어 전개된다.


1막, '배우하기'는 등산과 같다. 문소리의 경우에는 간편복장으로 무리에 끼어 올라갔다.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장면들이 콜라주로 펼쳐지고 기어코 정상에 도착한다. 그런데 멋진 풍경을 뒤로하고 이들이 하는 일은 모여 서서 와들와들 떠는 것. 정상을 정복한 감흥같은 것은 굳이 말하자면 '춥다'는 것. 그 구체적인 풍경이 산 밑에서 만난 '아저씨팬'들과의 술자리에서 펼쳐진다. 배우 문소리를 다 아는양 떠드는 두 남자를 피해 밖으로 나오면 좀 전까지 편들어주던 친구가 따라나와서 이번엔 한국의 메릴 스트립이 되라고 참견이다.


"나는 메릴 스트립 아니야! 나는 그냥 나야!"


산을 또 올라야 한다고들 한다. 무한 경쟁같은 걸까. 그럴수록 풍경은 어슴푸레해지고 바람은 거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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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 '생활하기'는 배우 스위치를 끄고 싶은 문소리에게 사람들이 자꾸 스위치를 올려대는 것과 같다. 딸이 TV에 나오는 문소리를 보며 "엄마다!" 외치면 "엄마 아니야, 다른 사람이야" 정색해보지만, 결국은 친정 엄마의 임플란트 할인을 위해 병원에서 기념사진을 찍어줘야 하고 대출을 받을 때도 유명인이라 된다느니 하는 말을 듣고 앉아있어야 한다. 시어머니도 요양병원에서 유명한 며느리 자랑이 늘어지고 출연 제의를 거절할 때에는 온갖 싫은 소리를 듣는다. 그렇게 미안한 사람들만 늘어간다.


'이게 사람 사는 거냐' 싶은 세상살이가 여지없이 수두룩 빽빽 들어찬 1막과 2막. 3막에 이르면 연기와 삶에 대한 질문이 쏟아진다. 몸쪽 꽉찬 직구. 묵직하다. 아니, 무거운 영화는 아니다. 여배우를 향한 선입견과 욕망을 경쾌한 호흡으로 타넘어 간다. 문소리 역의 문소리 씨는 그 현장을 새된 비명을 내지르고 피하거나 벽을 향해 돌아서거나 썬글라스를 쓴다. 회피와 배려의 끝에는 짜증과 만취가 뒤따르는데 그때에는 매니저가 탈출을 돕고 남편이 부드럽게 타일러서 방으로 데려가곤 한다. 지친 여배우-인간이 소행성에 실려서 객석으로 충돌해 온다.


여기까지가 <여배우는>이 은유하는 3인칭의 우주. 문소리는 타인들이 붙여놓는 상품 태그에 타협하기도 하고 씩씩하게 돌파하기도 하면서 나아간다. 우리도 그렇게 살지 않나. ‘이게 사는 거냐’ 하는 사람 아닌 것 같은 인생들 말이다. 이 여정을 거쳐서 여배우가 <오늘도>에 도착한다. 이 행성은... 참, 이 영화는 알고보니 하루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1막의 첫 장면이 밴 뒷좌석에서 통화하는 문소리, 2막의 시작과 끝은 국도를 달리는 밴 안에서 짜증을 부리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밴 안에서 섭외 탈락 통화 이후, 배우 일을 생각하는 문소리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본 것이 1막이고 일상의 근심걱정을 주르륵 나열해 떠올려보는 것이 2막이다. 그 끝에, 유치원에 안 가겠다며 엉엉 우는 딸 연두의 말, '엄만 그렇게 살어, 난 내가 살고싶은대로 살꺼야' 라는 일갈을 떠올리며 현재로 돌아온 문소리. 무작정 밴을 뛰쳐나와 소리 지르며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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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드디어 문제의 3막이다. 매니저가 운전하는 검은색 우주선은 밤의 분향소에 도착한다. 분향소로 들어가기 전 출입국심사대처럼 긴장감이 감돈다. 정장차림으로 하이힐에 썬글라스까지 챙겨쓰고, 매니저는 분향소 입구까지 건들건들 배웅 왔다가 돌아간다.


"차에 가 있을께요."


"어, 금방 돌아갈 거야."


이제껏 시달렸던 그 현실로 금방 돌아갈거라 말하지만 그는 곧 배우들의 고향으로, 그림자들의 너울로 스며든다. 안 유명한 어느 감독의 죽음. 경건하게 분향하고 예를 갖춰 어린 상주와 인사한다. 나가려는데 조문객 없이 황량한 식당에 초로의 남배우가 도사리고 앉아있다가 '문스타'를 불러 세운다. 잠시 후 통곡하며 들이닥친 어린 여배우가 넉살좋게 합석하면, 죽은 감독의 부인과 아들까지 얽히며 영화는 클라이막스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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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막, '배우로 살기'는 "그거 예술 아니야"로 요약된다. 여기서 예술이란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 결과로 측량되는 말이다. 예술가가 되지 못했던 영화감독을 변호하고 또 해부하는 재판정에서 '검사' 문소리는 소리친다. 무능력해서 사라졌다고. 몇 가지 반전을 독자를 위해 생략하고 넘어가서 ─ 문소리는 조심히 방으로 들어가 죽은 감독의 아들과 함께 생전에 만들었다는 홈비디오를 본다. 그 영화의 배우들은 부인과 아들이고 시퀀스는 별 의미를 못찾을 예쁜 풍경들이었는데, 문소리가 울기 시작한다. 진실의 순간들이 펼쳐진다. 영화 속 영화에서도, 영화로써도.


예전에 어느 연극배우와 퍽 진지하게 연기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배우는 연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극 속에서만 진실을 드러낼 수 있어서 (연기를) 하는 거예요." 연기는 연기가 아니고 삶이 오히려 연기가 아니냐는 말이었다.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며 농담하던 어느 분에게 돌려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당신은 얼마나 진실되게 표현하고 행동하며 살았느냐 따져 묻고 싶다. 적어도 배우들은 고민한다. 연기와 진심을.


흔히, 불리워질 이름과 책임 속에서 3인칭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연기를 하지 않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리고 진실을 드러낼 무대가 있는가. 어느 곳에서 어느 누구와 마음껏 멱살잡이를 하고 욕을 지껄이며 대결할 수 있는가. 그리고 조용히 함께 흐느껴 볼 편안한 방바닥이, 사람이 있는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한 배우 겸 감독이 일상의 연기를 극복하고서 한조각 햇살처럼 맞이한 영화적 진실이, 그 묘지의 아침이 아름다워서 극장을 한동안 떠나지 못했다. 물론 곧 상상 속에서 문소리 씨가 극 중의 미망인이 되어 '좀 나가주시죠'라고 말해서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일어났다. 그래, 2차를 가자. 내 삶으로. 나가면서, 그 장면 속 배우들처럼 언뜻 하하 웃었던 것도 같다.






무리수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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