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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2013년 대구에서 발생한 폭력 사건 현장입니다. 전과 40범의 한 남자가 쓰레기 문제로 다투다 이웃 노인을 주먹과 둔기로 때려죽이려던 찰나 이 청년이 몸으로 막아서 참사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제 오늘 어떤 분과 쪽지 대화를 나눴습니다. 예전에 <긴급출동 SOS 24>를 맡으며 주워듣고 어깨너머 봤던 사건들과 유사한 일들에 대해 물으셨고 주변의 아픈 사정에 대해 말씀하시더군요.

아무래도 개입을 해야 할 것 같다며 이것 저것 말씀하시고 누군가를 만나고 신고를 서두르시는 모습을 보면서 참 기뻤습니다. "우리 애한테 너희들은 가만있어. 어른들이 알아서 할게, 그랬는데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아요." 말씀하시는 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한 얼굴 모를 사람이 떠올라 왔습니다.

언젠가 저는 한 매맞는 '아내'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남편은 폭행의 잔인함과 무지막지함으로 따져서는 긴급출동 SOS 1년 역사에서 1-2위를 놓치지 않을 걸물이었습니다. 의처증의 소유자로 기억나는데, 술에 취하거나 정신을 놓지 않은 상태에서도 지극히 태연하게 아내를 짓밟는 폭력신공의 소유자였지요.

아내가 가장 심하게 폭행 당했던 것은 내밀한 집안이 아니라 대로변이라고 했습니다. 이혼을 요구하자 법원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법원 앞 지하철역에서 마주친 직후 주먹이 날아들기 시작했고 칼바람 휘몰아치는 길거리에서 아내는 차가운 아스팔트에 뺨을 댄 채 자근자근 밟혔습니다.

"무서웠어요. 집안에서 맞을 때보다 더 무서워. 왜 그러냐 하면 난 거리에서 그렇게 맞을 줄은 몰랐거든. 누가 와서 도와 주거나 경찰이 곧 오거나 그럴 줄 알았죠. 그런데 그 기대가 무너지는 거야. 사람들이 말려도 남 일에 참견 말라고 악을 쓰면 무서워서 가 버리고, 이년이 제비한테 홀려서 재산 다 말아먹은 년이고 새끼 학비까지 제비에게 갖다바친 년이라고 소리소리 지르는데, 거짓말 같이 사람들이 끌끌 혀 차고 가는 거야. 뭐라고 말도 안 나와요 나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이게 다지..."

멀리 법원이 바라보이는 길거리에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죽을 것 같은' 공포에 빠진 아내에게 구원의 손길이 닥친 것은 정신없이 맞기 시작한 20분쯤 지나서였다고 했습니다. 한 당찬 아가씨가 남편의 폭력을 가로막고 나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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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 앞에 딱 서서는 때리지 말라고, 한 대만 더 때리면 신고할 거라고 하면서 핸드폰을 들이밀어 남편 눈 앞에. 112가 찍혀 있었대나 봐요. 그 핸드폰 딱 쥐고 그때부터 우리 둘을 따라다니더라고. 남편이 골목으로 들어가니까 골목까지 들어와."

이 얘기를 들으면서 저는 한 여장부가 의기 철철 넘쳐 흐르는 눈매를 빛내며 핸드폰을 높이 치켜든 채 남편을 위압하는 멋진 장면을 머리 속에서 편집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험악한 주먹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코웃음을 치면서 한 대 쳐 봐라 응? 하면서 차가운 미소를 머금는 대찬 처녀의 부르쥔 주먹과, 그녀의 등장에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남편의 얼굴을 교차 편집하다 보니 심각한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도 흐뭇한 감탄사를 흘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허허 참 대찬 아가씨였네요."

그런데 아주머니는 그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대찬 아가씨가 아니었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하면서 의아한 눈빛을 던지자 아주머니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말을 이었습니다.

"그 아가씨 말리는 내내 파들파들 떨고 있었어요. 우리 신랑이 주먹을 쥐고 때릴듯 하면 주저앉아서 엄마야~ 그랬다니까. 내 보기에도 나만큼 겁먹었던 것 같애. 핸드폰도 두 손으로 쥐고 있는데 바들바들 떠는 게 보였어요. 그런데도 계속 뒤따라 오는 거예요. 이빨 딱딱 부딪치면서 아저씨 때리지 마세요, 신고할 거예요... 신고할 거예요... 하면서."

처음에 남편은 아가씨의 만류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지만 아가씨가 112를 기어코 누르고 예의 겁먹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위치를 알려 주는 지경에 이르자 아내에 대한 폭력을 멈추었고 골목길에 지하철 역까지 따라붙으며 아줌마를 놔 주라고, 안 그러면 신고 한다면서 '이빨을 딱딱 부딪쳤던' 가냘픈 처녀와 마누라를 놔 둔 채 자리를 떠 버렸다고 합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이름도 못 물어봤어요. 그런데 다시 만나면 막 웃으면서 물어볼 것 같아요. 도대체 무슨 용기로 날 구해 줬냐고. 우리 신랑이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이 야리야리한 아가씨가 말이야. 그런데 날이 지날수록 고마워져요.

힘도 없고, 겁도 많은 아가씨잖아요. 덩치 좋고 젊어 팔팔한 청년들도 많이 지나갔거든. 그런데 그 아가씨가 내 목숨을 구해준 거예요. 오버 한다고? 아니에요. 나 그날 자살했을지도 몰라요. 길거리에서 그렇게 비참한 꼴 보이고 살아갈 기력 없었을 것 같아."

지금도 아주머니는 버스를 타거나 길을 가면서 그때 그 아가씨와 체격과 인상이 비슷한 이들을 보면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고 두 번 세 번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그녀를 만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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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이후로도 남편으로부터 비롯되는 죽음 같은 공포를 몇 번 맛보았지만 그때마다 아가씨의 떨리던 목소리와 손을 생각하며 저항을 시도한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이혼 뒤로도 찾아와서 스토킹을 했고, 그게 우리와 만난 이유였죠) 그리고 언젠가 자신도 술 퍼먹고 마누라를 북어 취급하던 한 남자의 앞에 뛰어든 적이 있노라며 웃었지요.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를, 가냘프기 짝이 없고 대차기보다는 유약함에 가까운 아가씨가 드러내 준 용기가 한 사람을 바꾸었던 겁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우주를 구한 것이다라는 격언에 진실성이 담겨 있다면, 그녀는 우주를 구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가면서 많은 '현장'과 우리는 마주칩니다. 아닌 것 같아도 다 만나게 됩니다. 눈여겨보느냐 외면하느냐 무시하느냐 끼어드느냐의 차이지. 그 모두에 끼어들고 함께 싸우고 막아 주기엔 내 처지가 너무 바쁘고 빈약하며 귀찮을 수도 있지만, 힘도 없고 결기도 빈약한 주제에 파들파들 떨리는 두 손에 받쳐든 핸드폰을 무기로 야차같은 폭력 남편에 맞섰던 여장부답지 않은 여장부를 떠올리면, 문득 그 분주함과 나약함과 무관심이 슬몃 붉은 빛을 띠며 수그러듭니다.

오늘 역시 그런 분과 쪽지 대화 나눌 수 있어 기뻤습니다. 그분이 돕는 이에게도 행운이 따르고, 또 아울러 그분에게도 아주 큰 행복이 깃들기를 바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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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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