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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후이혼’이란 신조어


지난 몇 년 사이 일본 사회의 화두로 등장한 단어 가운데 ‘사후이혼’이란 신조어가 있다. 사후, 즉 죽은 뒤에 이혼을 한다는 이 조금 자극적인 신조어는 사실은 불가능한 단어 조합이었다. 배우자 중 한 쪽이 사망하면 실제로는 이혼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사후에 과거 배우자의 가족 즉 인척들과 관계를 끊는 ‘인척관계 종료 신고서’를 제출할 수 있을 뿐인데, 이 신고서 제출이 급증한 것을 일본 언론이 알기 쉽게 표현하기 위해 ‘사후이혼’이란 단어가 등장했고, 이것이 순식간에 사회적 화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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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척관계 종료 신고서’


인척관계 종료 제도는 물론 과거에도 있었다. 그동안은 그다지 사용되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 종료 신고서 제출 건수가 급증하고 있다. 2010년에 1,911건에 그쳤던 제출 건수는 2015년에 2,783건으로 늘었다. 10년 전의 1.57배에 달하는 숫자다. 일본의 남녀 평균수명을 통해서도 쉽게 유추할 수 있듯이, 이 제도를 이용하는 것은 대부분 여성이다. 이 경우 사망한 배우자에게서 유산을 상속받거나 유족연금을 수급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으며, 종료 ‘신고서’라는 용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관청의 허가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죽은 배우자의 친척의 동의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서류 한 장으로 인척 관계를 일방적으로 청산할 수 있다.


법적인 의무가 특별히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고, 딱히 금전적인 이득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남들이 보기엔 남편이 죽었다고 해서 그런 매정한 서류를 제출하다니 너무한 것 아니냐는 식의 말을 듣기 딱 좋은, 단점 밖에 없는 제도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제도를 쓰려는 사람이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2. 세대차이


법적으론 남편 사후 시부모를 부양할 의무가 없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법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실제로는 시부모를 모시고 살다가 남편이 사망한 뒤 시부모 부양을 거의 전적으로 며느리가 부담하게 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문제는 현대 일본에서 남편이 자연사할 정도의 연령대인데 시부모가 생존해 있는 경우, 그 시부모는 상당한 고령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적어도 가족 관계에 대해서만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사고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나이를 먹은 사람 가운데 일부가 아들이 죽은 뒤에도 며느리가 자신들을 돌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고마워하긴커녕 이런 저런 불평불만을 늘어 놓으며 심각한 스트레스를 주다가 어느 날 인척관계가 종료됐다는 걸 알게 되고 망연자실하는 에피소드는, 일본 언론이 사후이혼 사례를 보도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시킨 단골 메뉴였다.


세대차이는 반드시 10대 청소년과 그들 부모 세대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부모 세대와 조부모 세대 간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지금 노년 세대 부양을 직접적으로 담당할 처지에 놓인 장년 전후의 세대는, 그 시대가 허락한 한에서는 열린 교육을 받고 사회 생활도 하면서 살아 온 세대다. 남편을 고른 것은 나니까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도 꾹 참아 주더라도, 남편의 부모까지 평생을 인내하고 버티겠다는 선택을 한 기억은 없다는 말이 나오지 않으면 이상한 노릇이다. 그리고 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노년세대 가운데 일부는, 그저 말이라도 좀 곱게 하고 감사하다는 표현이라도 꼬박꼬박 했으면 좋았을 것을 어른의 위신을 세우겠다고 나이 먹을 만큼 먹은 며느리에게 큰소리를 치다가 “그 사람은 더 이상 당신 며느리가 아닙니다”라고 국가가 인정해 주는 상황에 부딪치고 마는 것이다.



3. 가족의 묘


인척관계 종료 신고서 제출을 희망하는 여성에게 이유를 물으면 “남편이나 남편 친척들과 같은 묘지에 안치되고 싶지 않다”라는 대답이 돌아오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일본은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한 뒤 가족이 같은 납골당에 모셔지는 경우가 많은데, 남편 쪽, 즉 시가의 묘에 함께 안치되는 것을 거부하는 여성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응답은 인척관계 종료 원인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늘 상위에 들어갈 정도로 상당히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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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테레비>의 방송 'Goody!' 중 한 장면


일본의 한 시사 방송에서 이 사후이혼 문제를 다룰 때 여성이 남편이 죽은 뒤 인척관계를 끝내고 싶어 하는 이유로 “같은 묘지에 안치되기 싫어서”가 상위에 랭크 된다는 말을 들은 한 중년 남성 패널이 '이건 너무 무례하다' '정이 없다' '지금까지 가족으로 함께 살아 왔는데 저런 말을 하다니' 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이야기를 길게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역설적으로 그 장황한 코멘트를 들으면서, “아, 이래서 사후이혼이 느는구나”라는 일종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 남성 패널이 대표하는 일본의 중장년 이후 남성들은, “같은 묘지에 함께 안치되고 싶지 않다”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저 말의 의미는 사실 간단하다.


일본 사회의 일부 가정은, 며느리를 ‘가족’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가족인데 같은 가족묘지를 거부하다니 무례하다가 아니라, 같은 묘지에 안치되고 싶을 정도로 동등한 가족으로 대우하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정이 있다 없다 따지는 것이 우스운 일이라는 뜻이다. 인과관계가 바뀌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장년층 남성이 많이 남아있는 한, 그들과 동세대 여성들은 더 많이 이 제도를 이용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예상한다. 남편이 사망해 결혼이란 끈이 끊어진 이상, 가족으로 대하지는 않으면서 의무만 요구하려 드는 인척들과의 관계를 이어갈 필요는 어디를 찾아봐도 나오지 않을 테니까.



4. 가족이 되는데 걸리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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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명절 추석이 다가오고 있다. TV에서는 화목한 명절 풍경을 전하는 특집방송이 이어지는 가운데, SNS에서는 도대체 누가 추석이란 걸 만들었냐는 분노의 외침이 터져 나오고, 한 달 뒤 “설/추석 명절 뒤 이혼 급증”이란 헤드라인 아래 실제로 명절이 계기가 된 이혼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대량 발생했다는 뉴스가 포털을 장식하는 계절이 다시 도래한 것이다.


이젠 명절을 마무리하는 중요한 연례행사처럼 느껴지는 “명절 이혼 급증” 뉴스를 살펴보다 보면, 결국 [가족]에 대한 합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족이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라며 누군가는 희생을 강요당하고, 희생을 강요당한 쪽은 “가족이라면서 나만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라고 분개한다. 그러다 결국 “이것도 못할 거면 가족이라 부를 수 없다”와 “이게 가족이라면 그 가족에게서 벗어나겠다”가 모여 도장이 찍힌 이혼 서류만 쌓여가는 것이다.


이번 추석의 풍경은 조금은 다르길 희망해 본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폭력이 지난 설에도 용인됐고 지난해 추석에도 허용됐으니 이번 추석도 괜찮으리라 생각하다간 이것이 가족이 함께 보낸 마지막 명절이 되는 가정만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사후이혼 급증이 던져주는 메시지 가운데 내가 특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사후이혼을 선택하는 여성 가운데 다수가 수십 년씩 결혼생활을 이어왔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 오랜 기간 동안, 사별한 남편과 시가로 불리는 인척들은 그 여성에게 “우리는 가족이다”라는 확신을 심어주지 못했다. 그렇게 오랜 기간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음에도 한 명의 사람을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사후이혼이란 일견 매정해 보이는 행동의 책임이 과연 그 여성에게만 있는 것일까.


남이 모여 가족이 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시간이 반드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힘을 믿고 게으르게 기다리기 보단, 지금 내가 상대방을 ‘가족’으로 대하고 있는지, 그 가족이란 말이 혹시 상대방의 희생 속에 내가 안락함을 누리는 상황의 다른 표현은 아닌지 한 번쯤 돌아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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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추석은 한 가정이라도 더 많은 가정에서, ‘가족’이 모여 ‘가족으로서’ 서로를 존중하며 보내는 명절이 실현되길 바란다. 모두 즐거운 명절 보내시길.




알려지지 않은 주시자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