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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고 재미없는 썰을 하나 풀려고 한다. IMF를 겪었던 초딩시절을 돌이켜보면, 어제까지 같이 놀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빈 자리만 남기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런 일이 있고 얼마 뒤엔 동네 어른들의 수다 속에서 '누구누구네 집 와이프가 애 데리고 야반도주했대', '누구네 집 아빠가 자살했대' 등등의 흉흉한 소문이 퍼지는 것을 주워듣곤 했다. 한국 경제에 있어서 어떤 의미였는지는 차치하더라도, 내 나름대로 정의한 IMF는 한국 사회에 '대이혼 시대'를 여는 포문이었다. 아슬아슬 이어가던 우리 가정도 대이혼시대의 높은 파도는 피해갈 수 없었으니, 유난히 좀 덜 떨어졌던 초딩이 마침 역사스페셜을 보느라 엄마의 가출에 동참하지 못한 것은 웃픈 에피소드로 남겨두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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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서울신문(링크)



여차여차 쿵짝쿵짝 중간생략 끝에 중학생 즈음이 되었다. 그때쯤 새로이 정립된 형제 관계를 정리해보면, 어머니가 다른 형이 한 명,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 한 명,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른 형이 한 명 덜커덕 생겼으니 어리둥절할 법도 했다. 작고하신 양부친께서는 나의 성씨를 바꾸는 것에 고심하시다가, 내 의향을 묻고는 굳이 바꾸지는 않으셨다. 성씨뿐 아니라 이름까지 전부 바꿔야 했는데 바꾸려는 이름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조심스레 사양했다. 사실은 그때 짝사랑하던 아이가 내 이름을 제법 좋아해서 그랬다.

 

그런데 이쪽(?) 집안으로 덜커덕 넘어와 보니, 4남 2녀로 구성된 양부친의 형제 남매들 가운데에 한 가정을 빼놓고 모두 이혼과 재혼을 반복했다는 괴랄한 역사가 깔려있었다. 심지어 한 가정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것이 가풍이라면 조금은 애달픈 일이나, 이런저런 애로사항이 발생할 때마다 추석에 일가친척이 몰리는 일이 줄어들어 상차림의 수고가 덜해졌다는 점에서는 나름 소소한 이로움도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장손 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구석에서 퍼질러 자는 사촌들을 마냥 좋게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도 휴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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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장손 노릇은 해야겠는데 차례 때마다 상당한 뇌내 혼란이 피어올랐다. 나는 절을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도 그 고민은 이어져 열심히 차례상을 차려놓고 정작 장례지도사처럼 술 따르는 역할만 맡았다. 양부친께서 "너도 절해라"는 말씀을 하시고 삼촌들이 마치 잊고 있었던 듯 이구동성으로 그 말을 따라 한 그 순간 후로는 빼박 장손이 되고 말았지만. 내 위로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른 형이 한 분 계시긴 하지만, 그쪽도 안습의 가정사가 있어서 장손 노릇을 맡기기엔 피차 난감한 지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때의 경험은 남의 집 딸래미로 자라오다가 뜬금없이 다른 집 조상을 향해 절해야 하는 며느리들, 내게 있어 어머니와 숙모들의 감정이 무엇인지 어렴풋한 느낌을 남겼다. 명절 음식 하느라, 차례 끝나고 차려야 하는 식사 준비에 바쁘다는 핑계로 절 타임을 스킵하던 작은어머니들에겐, 사실은 남의 집 조상에게 절하기가 다소 민망하거나 거부감이 있다는 이유도 숨어 있지 않았을까. 기저에 깔린 '우리 부모에게도 잘 못 해드렸는데'라는 회한과 함께.

 

절하는 문제가 정리되면서 이제 혼란스러울 일은 없을 줄 알았지만, 역덕 기질은 사라지지 않아서 나는 양부친께 족보를 펴놓고 이것저것 여쭙는 어리석은 일을 했다. 관심이 있었기도 했지만, 실은 양부친과의 대화할 거리들이 그런 것밖에 없었다는 것도 주요한 이유였다. 역사 속의 떡밥들을 하나씩 풀다 보니, 넘어온 집안의 할아버지께서 독립군 말기에 잠깐 몸담으셨고, 광복 후에는 김구 계열에서 활동하셨으며, 박정희의 쿠데타에 반대하는 쪽에 섰다가 5.16 이후 이런저런 이유로 군복을 벗은 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거기까지 알게 되니 원래 자라왔던, 박씨 집안을 좀 뒤져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아뿔싸, 굵직굵직한 친일파 조상님들의 이름이 떡하니 있고, 거기에 가지를 치며 내려오는 가운데 친부의 아버지, 즉 할아버지의 이름이 보였다. 어쩐지 그 어려웠던 시대에 '한량처럼 사셨다'는 친부의 흐릿한 말에 위화감이 들던 게 괜한 것이 아니었다. 사대문 안의 양옥에 살면서 이화의 졸업생과 결혼한 것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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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자 나는, 새로운 가정의 훌륭한 역사에 긍지를 느껴야 하는지, 아니면 원래 있던 가정의 부끄러운 역사에 자괴감을 가져야 하는지 충공깽에 빠져 매일 같이 마음속에 혼세마왕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통에 한동안 근현대사를 멀리하며 지냈다. 딱히 친일파 조상님을 둬서 재산을 물려받았다든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든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단 말은 아니라는 점 강조해서 부정에 부정을 더하고 싶다), 아무튼 친일파의 매국 행위에 분노하며 책을 읽던 것이 고작 얼마 전 일이기에, '알빠여 쓰레빠여'하며 덮고 지나갈 수는 없는 문제였다. 조선 후기의 시인 김삿갓(김병연)은 홍경래의 난 때 조부 김익순이 반군에 투항하는 바람에 역적 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나는데, 역적 김익순의 죄를 한탄하는 명문을 지어 급제했다고 전해진다. 그것이 실로 부끄러워 벼슬길을 버리고 삿갓을 쓰며 전국을 유람했다는데, 그쯤은 아니라도 발톱만큼은 비슷한 감정을 느끼긴 했다. 나 따위, 벼슬길은커녕 생계에 허덕이는 소시민일 따름이니 그런 거창한 부끄러움은 들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덮어놓고 무시하며 살 수는 없었기에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독립기념관에 지원한 적이 있었다. 가카의 고졸 채용 확대 정책이라는, 내가 가카 덕을 볼 가능성이 유일한 정책 덕에 내 사연을 담은 자소서를 냈지만, 면접관들의 관심을 끄는 데까지만 성공하고 당연하게도 낙방했다. 그렇게 또 덮고 사나 싶을 때, 딴지에 쓰는 잡다한 글 중 건국절 기사를 쓸 일이 있었다. 쓰면서 잊었던 괴로움이 마구 샘솟았다. 그래서 위안부 박숙이 할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고 또 글을 쓰게 되었다. 찌질한 것이 죄라면 무기징역감이지만, 딱히 지은 죄도 없는데 이상하게도 양할아버지의 긍지보다, 친할아버지의 부끄러움이 항상 발목을 잡고 있다.

 

좌충우돌하는 가정사를 겪고, 또 나라는 개인이 유난히 덜 떨어지다보니 한가지 결론을 얻었다. 그리곤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난 아이를 낳으면, 성을 그냥 와이프 쪽으로 할게요." 그 생각은, 중딩 시절 읽던 박경리 쌤의 <토지>에서 빌려왔다. 길상이와 서희는 결혼하고 두 아들 환국과 윤국을 낳는데, 이들의 성을 서희 집안의 성씨인 최 씨로 붙인다. 한창 동생과 성씨가 다르다는 이유로 놀림 아닌 놀림을 받던 때라 예민해져 있었는데, 이 대목을 읽고 나답지 않게 확신에 찬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나의 패기 있는 선언에 어머니께서는 "그 꼴을 해서 네가 결혼을 하긴 하겠냐?"라는 말로 되받아치셨지만. 팩폭은 아프니까 그냥 무시하기로 하자.

 

이번 차례엔 양부친의 밥이 올라갔다. 작고하신 양부친은 뇌경색, 심부전증 등등의 합병증으로 돌아가셨고, 친부는 현재 뇌경색으로 투병 중이며 요양 병원에서 생활하고 계신다. 아흔이 넘으신 외할머니는 얼마 전 넘어지셔서 뇌출혈로 중환자실에 계신다. 나는 병도 안 걸렸건만 뇌가 굳어버린 것처럼 글이 점점 퇴보한다. 여러모로 우울한 추석이었지만, 동시에 거의 20여 년간 쓸데없이 나를 괴롭혔던 혼란함이 다소 옅어진 추석이었다. 인간은 역시 돈이 들어야 책임이 느는 법이라고, 차례상에 내 돈이 들어가기 시작하니 드디어 남의 조상이 내 조상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는 간사한 이야기는 양심상 살포시 적어두려 한다. 그 덕분에 혼란함이 옅어졌으니, 좋은 게 좋은 거, 메데타시 메데타시 아니겠는가.

 

'대이혼시대'를 겪은 내 또래들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혼란함 속에서 자라왔을 것이다. 어떤 이는 무시하고, 어떤 이는 주어진 롤을 그냥 잘 수행했을수도 있다. 명절에 담긴 의미, 그런거 아무리 되뇌이며 마음 속 곳간에 잔뜩 쌓아봐야 어떤 가카새, 아니, 쥐새끼가 훔쳐먹는지 자꾸만 어딘가로 사라지기만 할 뿐이라 아예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모두들 고생 많았을 명절, 특히 '대이혼시대'를 겪어 유난히 혼란스러웠던 명절을 보내왔을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올해도 고생했다는 말을 드리고 싶다. 이혼이야 부모의 선택이지만, 뜻밖의 새 조상을 얻었던 자녀들이 겪었을 혼란스러움은 사실 다소간 민망한 부분이라 가슴 속 안에 꾹꾹 담아놓고 외면하면서 살아오기 마련이다. 다 쓰고 나니, 다들 별문제 없이 잘 적응했는데 유난히 나만 덜떨어져서 혼란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노파심이 들지만, 한두 명쯤은 더 있겠지 뭐.






빵꾼


편집 : 딴지일보 인지니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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