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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먼저 보는 것이 있고 유심히 보는 부분이 있다. 그 누구도 무얼 먼저 봐야 한다거나 어느 부분을 유심히 보는 것이 도리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개인 취향이라는 것이겠다. <남한산성>은 개인 취향상 반드시 봐야 하는 영화였다. 그래서 개봉하던 날, 경주 여행 중에 왕년의 시골 극장 같은 메가박스를 찾아들어 보았다. 그 느낌들을 주저리주저리 적어 보기로 했다. 이 또한 개인 취향이다. 공감할 수도 있고 고개를 저을 수도 있으리라.


1636년의 남한산성은 영화화하기에 충분한 서사를 지닌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묻혀 찾아든 전쟁과 농성, 암울한 공포 속에서도 시들지 않던 기대와 희망이 절망과 낙심으로 사그러들었던 47일의 겨울이었다. 그 속에 얼굴을 들이미는 사연과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번다했다. 영화 <남한산성>은 이 시기를 다룬 김훈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뼈대로 삼았다.


본디 영화는 원작을 뼈대로 하고 영상의 충실함과 각색의 교묘함으로 그 살을 붙인다. 더하여 감독의 의도와 배우의 연기가 혼을 불어넣으면 그제야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김훈의 <남한산성>이 이 영화의 뼈대를 넘어 살이 되고 감독과 배우마저도 비곗살로 더해진 느낌을 받는다.


소설의 언어와 영화의 대사와는 분명 다른 것일진대 지나치게 원작에 충실(?)한 대사들은 되레 몰입을 방해했다. 왕을 인도해 얼어붙은 강을 건네줬으나 오랑캐들이 와도 그 길을 안내해 주고 쌀말이나 얻어먹을 생각을 하는 뱃사공이나 극중 중요한 임무를 맡은 대장장이 서날쇠는 선비처럼 다듬어진 언행을 구사했다. 최명길과 김상헌의 급박한 현실 속에서 치고받는 논쟁이라기보다는 피차 잘 다듬어진 성명서 읽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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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간단하다. 김훈의 어투를 전혀 고치지 않은 것이다. 영화 보면서 이 다음 대사 내용은 무엇이고 어휘는 이러하리라 예측하고 몇 초 뒤 그럴 줄 알았어 중얼거리는 일이 반복된다면 영화 보는 재미가 어찌 반감되지 않으랴. 나는 영화를 보러 왔단 말이다.


영화 내내 최명길과 김상헌의 대결(?)은 불꽃을 튀긴다. 그러나 이 숨가쁜 대결도 김훈이 원고지에서 적은 대화 느낌 이상의 카리스마는 보여 주지 못한다. 척화와 주화의 논리는 화려하게 펼쳐지나 알멩이가 없다. 비주얼은 기막힌데 먹어보면 맹물 맛인 요리라고나 할까.


이 대결 구도 속에서 가장 덕을 본(?) 캐릭터는 물론 김상헌이다. 영화에서 김상헌은 남한산성의 군사 전략을 책임지는 자리에 올라 ‘대보름 협격 작전’을 전개할 뿐 아니라 임금의 항복을 맞아 할복까지 하는 비장한 모습을 보여 준다. 남한산성 47일 뿐 아니라 조선 왕조 역사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경륜을 보여 주는 (개인적인 평) 최명길에 맞서려면 그 정도의 비중(?)은 필요했기 때문일까.


남한산성의 핵심은 ‘척화냐 주화냐’가 아니었다. 현실과 명분의 싸움이었고, 그 명분은 나라도 백성도 아닌 사대(事大)에 갇힌 아집의 다른 이름이었다. 농성 중에도 명나라 황제에 행하는 정초 문안을 보면서 청 태종은 “내버려 두라.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을 몰랐다고 하는 것이 솔직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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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 앞에 자기네 백성이 어찌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버렸고, 오랑캐에 대한 경멸만 그득할 뿐 스스로에 대한 자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어리석음을 대놓고 펼쳤다.


한 마디로 겹겹 포위된 남한산성만큼이나 ‘꽉 막혔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김상헌은 그 논리들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다. 그가 주장한 ‘옥쇄’는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를 위해 장렬히 깨져 나가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의병들이 의주로 도망간 임금을 위해 전멸을 불사했듯, 조선인들도 명나라를 위해 다 죽어도 좋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이런 김상헌과 최명길이 ‘척화’와 ‘주화’의 대표 주자가 돼 맞서고 최명길이 인조에게 “상헌을 곁에 두시옵소서. 그는 충신이옵니다.” 운운하는 대사를 치는 장면은 매우 불편했다. (소설에 이런 장면이 나오는지 다시 읽어 봐야겠다.)


이 대결(?)을 미화하다 보니 더욱 중요한 요소들이 엑스트라가 되거나 장식품으로 배치되거나 아예 배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영화 초반에 청 태종은 성이 안에서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는데 원작 소설에도 주요하게 등장하고 실제로도 있었던 조선 군병들의 막판 반항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동상에 걸리고 얼어 죽었던, 엉뚱한 명령에 따라 성 밖을 나서다가 까마귀밥이 되기도 하고 성벽에 달라붙은 청나라 군을 쏘아 죽이던 조선군들은 이미 싸울 이유를 상실하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군인들은 행궁으로 몰려가 척화신을 내보내라고 아우성친다. “우리는 팔다리에 얼음이 박혀서 백발에 한 발도 맞출 수 없소.” 칼을 빼들고 위엄을 세우려는 승지 앞에서 비아냥거렸다. “승지가 칼을 빼니 산천이 떠는구려. 그 칼을 들고 적 앞으로 나아가시오, 우리가 따르리다.” 그리고 윗전들의 정면을 찌른다. “성을 지키는 까닭은 성을 나가기 위함이다. 우리는 살고자 한다. 묘당은 죽고자 하는가. 성을 지켜 살 수 없다면 성을 열어서 살게 해 다오.”


패배의 공포 속에서 얻은 삶에 대한 애착은 사람들을 격동시켰고 자신들의 삶을 무익하게 버리려는 극단적 원칙론자들에 대한 항거를 가져왔다. 어쩌면 성이 안으로부터 무너져 내리는 그 장면이야말로 실제의 남한산성에서나 소설 속 남한산성에서나 가장 극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지점은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임금의 출성 앞에서 머리 조아리고 엎드리는 끝까지 충성스러운 병사들만 있을 뿐이었다. 상헌과 명길의 논쟁의 내용이 뜨겁도록 치열하고 이병헌과 김윤석의 연기들이 홀릴 만큼 아름다웠으나 그들은 남한산성이라는 빙산의 일각이었을진대 영화는 빙산의 몸뚱이를 왕과 상헌과 명길의 삼각 구도의 바다 아래 감춰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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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남한산성>은 찾아서 보아도 좋을 영화라고 생각한다. 굳이 오늘에 빗대어 청이 누구고 명이 어디이며 당시의 조선의 행보와 오늘 우리의 갈 길을 대입하고 비교하지 않더라도 그 전쟁의 까닭과 과정과 결말과 후환을 짚어보는 자체로 유익한 시간일 수도 있다. 또 뼈대가 살이 된 애매한 상황에서도 김윤석과 이병헌의 연기 대결은 살에 윤기를 더하고 필요한 근육을 덧대 줄 만큼 인상적이다. 단지 아쉬울 뿐이다. 달리할 얘기가 많을 터인데 일종의 ‘영상 소설’로 그친 것이 안타깝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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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편집 :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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