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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는 영어공부를 RPG게임에 비교해서 설명했다. 뭘로 공부하든간에, 졸라게 반복만 하면 렙이 오른다고. 근데 미처 설명을 하나 못한 게 있다. 영어공부가 RPG이긴한데, 그냥 RPG가 아니라 와우(월드오브워크래프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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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라는 게임이 나를 비롯한 수많은 폐인을 양성한 까닭은, '만렙부터 시작'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단순 노가다로, 무한히 레벨이나 스텟을 올리는 게 목표인 여타 RPG겜들과 달리, 와우에서는 만렙을 찍고 무엇을 하느냐가 훨씬 중요했다. 만렙을 찍고 나서야 수많은 컨텐츠들(인던, 레이드를 돌면서 아이템 파밍을 할 수도 있고, 전장과 투기장을 돌면서 얼라들을 썰고 다닐 수도 있었다. 또한 일퀘며 숙련도며 틈틈히 해야할 소일거리가 넘쳐났다)이 비로소 열리기 때문에, 본 게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영어공부도 와우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영어로 단순 의사표현을 해내는 게 1차적인 목표가 될 수는 있지만, 영어 공부가 거기서 끝나지는 않는다. 비로소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될 때부터, 본 게임, 그러니까 1) 얼마만큼 상황에 맞추어 2) 정확한 표현으로, 3) 간결하게 자신의 생각을 옮기는 문제들이 시작된다. 그리고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이런 문제들은 최고의 아이템을 맞추는 것처럼 (맥뎀이 얼마나 붙고, 옵션이 최상인지)끝이 없다.


내 경험을 예로 들면, 미국으로 유학온 지 1년 정도는 영어실력이 빠르게 늘었다. 한국 살면서 영어를 쓸 일이 당연히 거의 없었는데, 매일 영어를 접하다보니 자연스레 영어가 늘었다.


(생각난 김에 고백하자면, 나에겐 EBS 고등학생 영어토론대회에 참가했다가,국제고 미국인들 한테 탈탈 털리는 장면이 지상파에 중계된 아픈 기억이 있긴 하다. 그때 말을 더… 더듬으면서 처참하게 털렸었는데 나에겐 지금까지 흑역사로 남아있다. 설마 자료화면이 남아있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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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학년을 마치고 나서, (중간의 군대 간 2년은 빼고) 남은 3년 동안 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되는데, 그 뒤로는 학교에 다니면서 영어 실력이 거의 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맨날 노는 애들이랑 놀고, 비슷한 전공수업만 들으니까 맨날 쓰는 단어 표현만 반복해서 쓰기 때문에 영어실력에 발전이 전혀 없는 것이었다. 똑같은 한국말이라도, 강의실 안에서 쓰는 한국말과 술자리에서 친구들끼리 쓰는 말, 직장에서 상사에게 쓰는 단어와 표현이 전혀 다르지 않은가? 나는 강의실 안에서만 영어를 배웠으니, 강의실 안의 영어만 반복 숙달되는 것이 당연하다.


내 와이프는 반대로 고등학교 때부터 각종 알바 (서빙, 매장 세일즈)를 해왔기 때문에, 일상 대화에는 매우 능숙한 편이지만, 강의실에서 보낸시간이 매우 짧은(?) 탓에 서류나 책을 읽는 능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영어를 배운 환경에 따라 영어실력이 다르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상황 못지않게, 나는 '정확도'란 문제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L과 R, P와 F, B와 V 엄연히 다른 발음들이다. 근데 나는 맨날 틀린다. 그 이유는, 내가 발음을 틀려도 상대방은 어지간하면 내가 무슨말을 하는지 정도는 이해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 몇 번은 그 발음이 아니다라고 상대방이 지적을 해줄 수는 있지만, 한 두 번 반복되면 내 발음은 원래 그렇구나 하고 넘어간다. 그래서 내 주변인들은 더 이상 내가 발음이 틀려도 뭐라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좀 더 뻔뻔해져서, 주위에서 지적해 주질 않으면 내 발음이 정확한 줄 알고 살아간다. 관성, 무신경함이 나은 참극이다.


물론, 뜻은 통한다. 발음 좀 틀려도 문맥이란 게 있고, 상대방도 내 엑센트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 때문에. 하지만 내 영어가 구리다는 사실만큼은 바뀌지 않는다. 특히 처음 만나는 대상일수록 선입견을 갖기 십상이다. 몇몇 똑똑한 유학생들이 면접에서 애를 먹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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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기가 수월해서, 발음의 문제를 지적했지만, '정확'이란 문제 속에는 표현, 문법, 어휘의 정확성도 포함된다. 전치사를 틀린다든가, 관용어구를 좀 잘못 썼다고 의사전달이 안 되지는 않는다. 대화의 맥락이란 게 있고, 모름지기 사람이란 눈치라는 게 있어서 거진 의사소통은 된다. 하지만, 상대방이 듣기에 분명히 어색한 표현이고, 이런 잘못들은 쌓이고 쌓여 혼란을 낳는다.


물론, 외국인인 이상 구수한 악센트에 좀 어설픈 표현을 쓰는 게 뭐 이상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이것들이 일상생활에 크게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월스트리트의 레전드라고 할 수 있는 투자자 조지 소로스의 영어는 엄청 구림에도, 무슨 일만 터지면 기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고견을 여쭙곤 한다. 중요한 건 그가 보여준 업적과 통찰력이지, 그의 영어발음의 정확성이 아니니까.


하지만, 나처럼 미국에 살아가면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일이 더 많은 경우에는 얘기가 좀 다르다. 다른 사람 밑에서 월급 받아가면서, 고객을 응대하려면, 가능한 이질감 없이 영어를 정확하게 구사하는 게 경쟁력과 직결된다.


마지막으로, 언어는 간결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외국인이 “딴지일보 편집장은 옷 입는 게 영 후지다”라는 말을 하고싶은데, '편집장'이라는 단어랑 '후지다'라는 표현을 모른다고 가정해 보겠다. 여기서 모른다는 건, 단어는 외워서 독해는 가능한데, 머리에 입력이 되지 않아서 실사용은 못 하는 경우도 포함한다.


그러면 이 외국인은, 자기들이 아는 단어들을 조합해서, 자신의 생각을 묘사하려 들것이다. 가령, “딴지일보에 공지 올리는 아저씨 있잖아... 그 아저씨는 내가 볼 때마다 쌀을 감싸는 포장지로 만든 것 같은 옷을 입는 것 같아. 그의 취향은 매우 이상해” 라던가 “딴지일보에서 글을 고치는 부서에서 제일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은, 보기에 매우 좋지 않은 옷을 매일 입는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그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생각을 옮길 적당한 단어를 모르기 때문에 말이 쓸데없이 길어지고, 표현들을 에둘러서 하게 된다. 그리고 말이 길어지다 보면, 오해의 소지 또한 생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쌀을 감싸는 포장지'로 쌀포대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비닐로 된 봉다리를 떠올릴 수도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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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씻퐈 뭘 어쩌라고?


내가 하고싶은 말은, 결국 영어공부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에 알던 어휘, 표현들을 단순히 재탕해서 어찌어찌 의사소통만해서는 영어실력은 늘지 않는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의식적으로 공부를 해야만 영어실력이 는다.


내가 했던 공부방법의 기본은 문장 단위의 암기였다. 내가 앞으로 쓰고 싶은 문장, 표현들을 통으로 가져다가 달달 외웠다. 고등학생 때는 연설문들을 암기했는데, 대중을 대상으로 쓰여진 것들이라, 표현이 쉬우면서도 지금까지 역사에 남을 정도로 잘 쓰여진 문장들이었다. 이걸 원어민이 녹음한 테이프를 사다가 (오바마 대통령 꺼는 직접 동영상을 찾아봤다) 반복해서 재생해서 따라했다.


대학생 때는 주로, 경제 신문기사(개인적으로 뉴욕타임즈나 월스트리트 저널 글을 좋아했다)나 잡지(이코노미스트지)를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이걸 일단 받아 적었다. 굳이 그 글들을 고른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글이기도 했고, 나중에 그런 글들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언행불일치). 그리고 모르는 단어들의 뜻과 예문을 도서관에 놓인 두꺼운 영영사전들에서 찾아보았다. 당연히 영한사전도 있고, 네이버 검색도 있었지만 (강조하자면 나는 아직도 20대다), 굳이 도서관에 갔던 이유는,


진짜 두꺼운 영영사전은 그단어가 갖는 뜻과 어감들을 자세하게 서술해놓는다. 그리고 영영사전에는 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적절한 예문들이 들어있다. 나는 뜻대신 이 예문들을 노트에 옮겨적고 외웠다.


직접 해보면 알겠지만 각 영영사전마다, 정의와 표현방법이 다르다. 가령 옥스포드사전이 가장 정석적인 정의를 제시한다면, American Heritage 사전은 좀 더 간결한 정의를 선호하고, 롱맨은 직관적이다. 이렇게 여러 개 사전을 비교해 가면서 공부를 하는 게 영어의 뉘앙스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건 진짜 개인의 취향 문제인데, 나는 품을 들여서 공부한 것이 왠지 암기가 더 잘 되었다. 구글링해 본 단어보다, 직접 책을 넘겨서 확인해 보고, 베끼고, 외운 예문들이 더 기억이 잘 됐다.


영영사전 놓고있는 게 왠지 겉멋잡기 좋았다


마지막으로, 면접을 준비할 때는 내가 모의 인터뷰에 대답하는 장면을 녹화해서, 학교 취업센터 직원이랑 돌려보면서, 내 대답들이 말이되는지, 알아들을 수 있는지를 확인했다.


이 글을 통해, 꼭 영어공부를 이렇게 하란 말이 아니다. 내가 했던 공부법이 꼭 당신에게 효율적일 이유도 없고, 당신이 지향하는 문체나 표현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힙합 땜에 영어를 배우는 거라면, 마틴루터킹 연설문을 외울 게 아니라 투팍 테잎을 들으시고, 영어로 글을 잘 쓰고 싶다면, Sense of Style 같은 책을 찾아보심이 맞다. 그 반대라도, 공부가 잘 된다면 그 방법으로 하시라.


(또 한 번 토익을 까자면, 토익은 비즈니스 영어를 측정하기 위한 시험이다. 이걸, 나는 중딩 때 왜 맨날 공부를 했고, 우리 누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기 위해 봤는지 정말 시간 낭비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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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맞는 공부법은 알아서 잘 찾으시라.  기본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원칙 몇 가지는,


첫째, 단어의 뜻보다는, 어구를, 어구보다는 문장을, 문장보다는 지문 전체를 외우시라. 가능한 큰 덩어리로 외워야, 머릿속에 입력이 잘 되고, 부분만 잘라다가 써먹기가 좋다. 연설문 혹은 신문기사를 선호한 이유이다.


둘째, 반드시 의식적인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 대충 뜻을 알았다고 넘어간 단어, 표현은 결코 내것이 되지 않는다. 나는 시간을 들여 영영사전에서 예문을 찾아 외운 표현만이 머릿속에 남아 일상생활에서 한 번이라도 써먹어 볼 수 있었다.


셋째, 나아지기 위해선 반드시 피드백과 교정을 받아야 한다. 비디오를 찍어서 돌려보든, 원어민교사를 찾아가든, 반드시 잘못된 점을 찾고, 이를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말을 안 한다고, 내가 정말 영어를 잘 하는 게 아니더라.


넷째, 다양한 표현, 일상생활에서 안 쓰는 생소한 표현들을 많이 접해봐야 한다. 나처럼 대학교 생활만 한 샌님이라면 무릇 술집도 좀 다니면서 미국 농담도 배워야 되고, 반대로 알바로 영어를 배운 분이라면 진득하게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해야 한다. 두번째와 맞닿아 있는 부분인데, 내가 모르는 영어표현을 배우려면, 당연히 그 표현들을 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정도인 것 같다. 나는 솔직히 말하건데, 이 네가지를 그다지 충실하게 지키지 못한 대학생활을 보낸 것 같고, 그 뒤론 먹고사니즘에 빠져서 지금도 몇 년전과 별 다름없는 후진 영어를 쓰면서 산다.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니 영어실력이 늘지 않는 공평함이 좀 재수없기까지 하다.


그러니, 갓 의사소통 문제를 해결한 영어초보들은 중수, 혹은 고수가 되기 위해 매일 노력하시라. 매일 쓰는 표현, 재탕 삼탕 해서는 영어실력의 발전이란 없을지어니, 평생 영어 초보로 남진 마시길.








씻퐈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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