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다가오고 있으니 슬슬 SNS와 각종 게시판에 인증샷으로 올라올 술을 생각해본다.
김재규 선생(당시 중앙정보부장)의 10.26 박정희 저격사건. 온 국민에게 충격(과 환희)을 준 그 사건이 있은 지 꽤나 긴 시간이 지났다.
현장검증 사진들에는 여러모로 머리 속에 남는 강렬함이 있다. 흑백 화면임에도 느껴지는 말라붙은 검붉은 핏자국, 포승줄에 묶여있지만 차분해보이는 김재규의 눈빛, 두 사람이 죽어나간 것과 대비되는 흐트러짐 없는 술상. 한 명의 독재자와 하나의 시대가 마무리된, 말 그대로 역사의 현장이 갖는 비장함과 함께 이상할 만큼의 당연한 일상 같은 느낌도 든다.
많은 사람들과 시간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사라져 갈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겐 남은 질문이 있다.
‘과연 그 술은 무엇이었을까?’
[시바스리갈 12년? 18년?]
현장 사진 속 상 위에 놓여진 술은 시바스 리갈로 보인다. 저퀄리티의 흑백사진으로 표기 숙성년수까진 보이지 않는다. 이 사진으로 인해 당시 박정희가 마셨던 술이 "시바스 리갈 12년이다", "아니다 18년이다"라는 주장들이 오고가곤 하는데 다행히 이 문제는 생각외로 쉽게 풀린다. 사건 당시 시바스 리갈의 제조사인 시바스 브라더스에서 시바스 리갈 12년은 생산하였지만 18년 제품은 생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바스 리갈 12년은 1938년부터 생산되었지만 18년은 1997년부터 생산되었다는 답을 페이스북 관리자부터 들을 수 있었다. 사건이 있던 해를 고려해보면 상 위에 놓여있던 술병의 정체가 시바스 리갈 12년임을 추정할 수 있겠다. '시바스 리갈 25년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25년의 경우 1910년대에 생산을 멈추었다가 2007년에야 생산을 재개하였기에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라 생각한다.
이런 식의 패러디도 있지만 18년 제품의 이미지를 이용하였으니 디테일이 아쉽다 하겠다.
뜬금없지만 경제학자인 장하준 선생은 <쾌도난마 한국경제>라는 책에서
"박정희는 자본가의 소비도 규제했습니다. 왜 그 시바스 리갈이라는 술 있잖아요? 박정희가 암살당할 때 마셨다고 해서 유명해진. 전 그 술이 엄청나게 좋은 술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영국에 가보니까 가장 싼 술입니다. 도대체 세계 어느나라에서 종신 독재자가 시바스 리갈을 마십니까?"
라고 말한적이 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시바스 리갈 12년이 그다지 고오급 위스키가 아님을 근거로 박정희가 보기드문 검소한 독재자였음을 주장한 것이다. 맞는 이야기다. 박정희가 검소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와 상관없이 실제로 시바스 리갈 12년은 고오급 위스키가 아니다. 단지 시바스 리갈이 아니더라도 보통의 12년 숙성 블렌디드 위스키라면 분식점 위스키까지는 아니더라도 고오급 위스키의 반열에 들기엔 어렵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박정희의 검소함이 아니라 시바스 리갈 12년이 고작 그 정도의 술임을 장하준 선생은 무려 영국까지 가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알고 저지른 검소함이 아니라 당시 누릴 수 있던 최대한의 사치가 고작 그 정도였다고 생각하는게 옳지 않을까 생각한다.
1970년대, “도라지 위스키”같은 유사위스키가 팔렸던, 수입 위스키라는 것은 볼래야 볼 수도 없었던(미군부대에서 나온 물건을 제외한다면), 양담배를 피웠다고 매국노 소리를 쳐듣던, 외국 여행이라는 것도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 했던 시기에 12년이건 18년이건 25년이건 상관없이 무려 스코틀랜드산 위스키를 마실 수 있었던 독재자에게 ‘검소’의 타이틀을 붙여주는 것은 어쩐지 이상한 일이다. 물론, '독재자'라면 국민이 굶어죽든 말든 사치를 남발하는 것이 마땅한 일임을 감안했을 때 남아프리카 어딘가에 있을 법한 여느 독재자 이미지처럼 벤츠, 각종 보석, 개인 비행기, 금 도금한 AK-47 같은 호화찬란함까지는 없었으니 ‘(상대적으로) 검소한 독재자’라고 주장해 온다면 뭐 이해해주고 넘어가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당시 한국과의 경제적인 비교에 도움이 될까 싶어 시바스 리갈 페이스북 관리자에게 1970년대 후반 시바스 리갈 12년의 영국내 가격(대충의 가격이라도)에 대해서도 물어봤지만 아쉽게도 알지 못한다는 대답을 받았다-
박정희의 검소함과는 별개로 장하준 선생도 무려 영국에 가서야 시바스 리갈 12년이 별 것 아닌 술임을 알게 될 정도임을 생각하면 박정희도 시바스 리갈 12년이 갖는 실제적인 가치에 대해선 잘 몰랐을 것 같다. 술알못까지는 아니더라도 실제적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한정적이던 시기이니 구하기 어려운 '양주'라는 존재의 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당시와는 경제적 배경 차이가 크니 비교하긴 어렵지만 2017년 현재 시바스 리갈 12년 1리터 제품을 5만원 정도면 구할 수 있다는 것을 당시의 박정희가 알았다면 이딴 것 말고 좀 더 고오급 위스키를 마련하라고 호통을 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상상해본다.
[로얄 샬루트 21년?]
'상 위에 놓인 병이 시바스 리갈 12년이냐 18년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어렵지 않게 나온 것에 비해 이 질문은 답하기가 쉽지 않다.
현장검증에 놓여 있지도 않았던 로얄 샬루트가 갑자기 왜 등장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고건 전 총리(사건 당시 행정 수석 비서관)의 인터뷰 내용이 원인으로 보인다.
『그날은 朴대통령께서 경호원을 부르더니 「내 침대 머리 맡에 양주가 한 병 있는데 가지고 오라」고 해요. 경호원이 가져왔는데 바로 이 「로얄 살루트」야. 朴대통령이 혼자 좋은 술을 마셨다는 게 쑥스러우셨는지, 「朴浚圭(박준규·당시 공화당 당의장 서리)가 미국 갔다 오면서 한 병 선물로 사왔어. 잠 안 올 때 한 잔씩 아껴 먹었어」라고 해요. 병을 들어보니 3분의 2쯤이 남아 있었어요. 그 자리에 10명쯤이 있었는데 한 잔씩 돌았어요. 처음 먹어봤는데 술 맛이 기가 막혀. 다들 「한 잔은 더 마실 수 있겠구나」 군침을 삼켰어요. 그런데 金桂元(김계원) 비서실장이 「각하, 남은 술은 침실에 갖다 두겠습니다」하고, 술병을 빼앗아 경호원에게 건네 줬어요. 朴대통령이 「어이」 하고 경호원을 한 번 부르기만 하고, 「술병 여기에 놔둬라」는 말씀을 안 하시는 거야. 얼마나 야속하던지 말이야(웃음)』
- 월간조선 2005년 3월호
박정희가 선물받은 로얄 샬루트를 굉장히 아꼈다는 일화가 그것인데 이를 토대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10.26 당시 마셨던 술이 시바스 리갈이 아니라 로얄 샬루트였고 사건 이후 현장을 지키던 신도 중 한 명이 평소 검소한 모습을 중요시하던 박정희가 저런 고오급 위스키를 마셨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간 쌓아온 이미지가 훼손될 것이 두려워 시바스 리갈 12년 병으로 바꾸었다는 주장 혹은 설화가 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가능성만을 생각하면 완전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소설이라는 게 '거짓이지만 실제로 있을 법한 이야기들'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할까. 하지만 실제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그다지 신뢰도가 높진 않아보인다.
이 주장의 핵심은 로얄 샬루트 21년을 시바스 리갈 12년으로 바꿔침으로써 박정희의 '검소함'을 훼손시키지 않으려 했다는 것인데 바꿔서 생각해 보건대, 만약 내가 그 신도였다면 박정희의 이미지를 위해서 바꿔치기에 멈추지 않고 그냥 위스키 병을 치웠을 것 같다. 그리고 술자리에 술병이 없는 것도 이상할 터이니 리얼리티를 보완하기 위해서 어딘가 있을 막걸리 병이나 주전자를 내놓았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더 극적으로 검소해 보였을 것이니 말이다. 굳이 ‘그나마 낮은 급의’ 위스키 병을 가져다 놓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당시 일반 국민의 인식에 로얄 샬루트 21년이든 시바스 리갈 12년이든 난생 처음보는 위스키와 여대생, 여가수가 기억에 남을 뿐이지 술의 숙성단위가 바뀐 것만으로 ‘어휴 우리 대통령님 시바스 리갈 12년 같은 저렴한 위스키를 마시다가 끝을 맞이하셨네 어쩌나 불쌍해서... ㅠㅠ’ 같은 반응을 보였을까? 그저 로얄 샬루트 21년을 애정했다는 박정희에 대한 이야기가 10.26 현장검증 사진과 겹치면서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朴대통령이 저녁을 같이 먹자고 수석들을 자주 부르셨어요. 일주일에 한 번 꼴이 더 됐던것 같아. 陸英修 여사 돌아가시고 나서 적적하신 거지. 나오는 술은 딱 두 가지예요. 한 번 막걸리가 나오면, 다음에는 양주야. 朴대통령은 막걸리에 맥주를 탄 「비탁」을 좋아하셨어요. 聞慶에서 국민학교 교사하던 시절 모심기를 하면서 막걸리 한 말에 「기린 비어」 한 병을 섞은 걸 먹어봤는데, 그 맛을 못 잊으신 거야. 양주는 궁정동 만찬 술상에 올라서 유명해진 「시바스 리갈」이 나왔어요』
- 월간조선 2005년 3월호
약간 번외지만 고건의 인터뷰를 보면 당시에 위스키를 꽤 자주 마셨던 것 같다. 술자리마다 시바스 리갈이 나왔는지는 확인할 수 없겠지만 연회용으로 상당량의 위스키를 준비해두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미군 부대를 통해서 구한 물건들이었리라.
마치며
현장검증 사진만으로 이야기 한다면 그날의 술은 시바스 리갈 12년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신도중 누군가의 조작으로 술이 바뀌었을 일이 있을 법도 하겠지만 앞서 적은 이유로 그다지 신뢰할 순 없는 수준이라 생각한다. 사실 가장 정확한 것은 당시 사건을 눈 앞에서 겪었던 신재순씨나 심수봉씨에게 물어보는 것이겠지만 뭐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그날의 술이 무엇이었습니끄아아아"라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저 가능성이 높은 것에 한 표를 행사하는 수준의 추정으로 끝내기로 하자.
그래서 나는 시바스 리갈 12년 설을 지지하는 바이다.
P.S.
엘리시움 묘원을 방문하실 분이 있다면 선생의 평안을 바라는 제 인사도 곁들여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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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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