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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11.01 백암 박은식 서거


우리 역사에서 ‘탄핵’으로 파면된 대통령은 박근혜만이 아니다.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임시의정원의 탄핵 의결로 면직되었다. 이승만이 독단적으로 국제연맹에 제출한 위임통치 청원서가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의 진행을 기하기 불능하고 국법의 신성을 보존키 어려울뿐더러 순국 제현을 바라보지 못할 바”라는 것이 탄핵 사유였다. 이승만 탄핵 직후 임시정부의 혼란상을 수습할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가 바로 박은식이다.


사실 박은식 또한 처음에는 여느 조선 유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도(西都)에서 제일가는 학자’라는 평을 들으며 위정척사를 부르짖던 이들 중 하나였다. 동학농민전쟁을 ‘동비들의 반란’으로 표현했고 갑오개혁에 대해선 ‘사설(邪說)’, 즉 그릇되고 간사한 말이라 비판했다. 이런 보수 유학자를 ‘전향’시킨 것은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였다. 독립협회의 소장파로서 만민공동회에 참여했고,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어 진보 언론인의 길을 걷기도 했다. 봉건 잔재에 발목 잡혀 시대 변화를 보지 못하고 나라가 망하고서까지 복벽주의를 말하던 유학자 무리와는 분명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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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없어지자 박은식은 중국으로 망명해 많은 역사책을 집필했다. 이미 노년기에 접어든 53세의 일이었다. 대표작인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도 이 시기에 쓰였다. 억압과 저항의 기록을 쓰며 그는 자신을 ‘태백광노(太白狂奴)’와 ‘무치생(無恥生)’이라 불렀다. 백두산 아래에서 나라를 잃고 미쳐버린 노예이며, 그러고도 살아있으니 부끄러움도 모르는 인간이라는 의미였다.


한국사를 공부하는 수험생에게 <한국통사>의 서문은 꽤나 익숙할 것이다.


“역사가 있다는 것은 국혼이 존재하는 것과 같다. … 국교, 국학, 국어, 국문, 국사는 혼에 속하고 전곡, 졸승, 성지, 함선, 기계는 백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혼이 있는 자는 백에 따라서 죽고 살지 않으므로 나라에서 국사를 가르치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게 된다. 오호라, 지금의 한국은 이미 백은 죽었다고 할 수 있으나 소위 혼이라는 것이 남아 있는가, 아니면 이미 없어져 버렸는가?” (이 말은 100여 년 뒤 어느 ‘무치생’ 대통령의 ‘국정 역사교과서를 읽지 않으면 혼이 비정상이 된다’는 희대의 어록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박은식이 해외에서 역사 연구에만 몰두한 샌님은 또 아니었다. 신규식ㆍ이상설 등과 더불어 신한혁명당을 조직해 무장투쟁 노선에 동참했고, 1917년에는 신규식ㆍ신채호ㆍ조소앙 등 독립운동가 13명과 함께 대동단결선언에 서명했다. 국민주권을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천명하며 뿔뿔이 흩어진 독립운동 단체를 모아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3ㆍ1운동 소식을 듣고는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촌에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조직했다. 노인단에는 미국에 있던 서재필이 가입했고 홍범도 장군 또한 참여했다. 서울역에서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는 간도 요하현 지부의 책임자였다.


1919년 그가 그토록 외쳤던 통합된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수립되었다. 독립과 개혁 의지에 불타는 민중을 목도하고 잔뜩 희망에 차 박은식은 서둘러 상하이로 들어왔다. 그는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과 사료편찬위원회의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임시정부는 곧 이승만의 외교론, 이동휘의 무장투쟁론, 그리고 안창호의 중도론으로 갈라졌다. 이들 세 파벌은 다시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이념으로, 서북파와 기호파라는 지역으로 다시 분열됐다. 무책임하고 일방적인 언행으로 비판받던 이승만은 임시정부에서 불신임을 받고 하와이로 떠나버렸다. 임시정부의 미적지근함을 비난하며 상하이를 떠나는 이들 또한 속출했다. 분열은 또 다른 분열을 낳는다. ‘창조론’과 ‘개조론’ 등 다양한 타개책이 나왔으나 이는 오히려 더 격심한 내분을 불러왔다. 창조파는 새로운 임시정부를 세워 본격적인 무장투쟁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했고, 개조파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근거로 임시정부의 골격은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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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파에 속했던 박은식은 임시정부의 무능과 분열을 비판하며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비롯해 근본적인 대개혁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창조파와 개조파, 현상유지파의 갈등 한가운데에 박은식이 서게 된 것이다. 당시 김구와 김규식, 여운형은 그에게 “국민대표회의를 강행한다면 이완용 이상의 역적이 될 것”이라는 극언을 퍼붓기도 했다. 이 사실을 듣고 격분한 박은식의 아들 박시창이 김규식의 집에 찾아가 거칠게 항의하다 김구에게 얻어맞아 갈비뼈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결국 박은식의 주장대로 1923년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 71개, 지역 23개 대표 125명의 참석으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이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되레 이에 불참한 세력과의 갈등만 깊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승만이 탄핵되자 국무총리로서 대통령 대리를 맡고 있던 박은식이 제2대 대통령에 추대됐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수난의 시작이었다. 이승만은 재미교포의 임시정부 후원을 즉시 차단했다. 이번에는 해외에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이 박은식이 ‘불법 쿠데타로 대통령 자리를 뺏은 원흉’이며 ‘일제의 간첩’이라는 마타도어를 퍼뜨렸다. 그의 대통령 재직 기간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다. 1925년 4월 박은식은 임시정부의 체제를 이승만이 고집하던 대통령제에서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개헌을 실시한 후 스스로 물러났다. 누군가는 이 모습을 이승만의 권력욕과 비교하며 그의 멸사봉공을 칭송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모습에서 그의 한없는 외로움과 절망을 느낀다. 대통령을 사임하기 직전 그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더욱 그렇다.


“사지 육신은 빌려서 가지고 있는데, 돌아보면 만상(萬象)은 허허롭기만 합니다. 진짜의 나는 과연 어디 있는 걸까요? 고서(古書)를 옆에 끼고 옛 은거지로 돌아가면 진짜의 나를 찾을 수 있을는지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얼마 안 돼 박은식은 기관지염이 심해지며 상하이의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서거 직전 그는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을 불러 이런 유언을 남겼다. “첫째, 독립운동을 하려면 전족적(全族的)으로 통일이 되어야 하오. 둘째, 독립운동을 최고 운동으로 하여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 방략이라도 쓸 수 있는 것이오. 셋째, 독립운동은 오족(吾族) 전체에 관한 공공사업이니 운동 동지 간에는 애증ㆍ친소의 별(別)이 없어야 하오.” “내가 비록 늙었으나 통사를 썼고 혈사도 썼거니와 반드시 광복사도 쓰고 말리라”라고 누누이 말했다던 ‘다시 못 볼 노(老)소년(박은식 서거 당시 <동아일보>의 사설 부제)’이 1925년 11월 1일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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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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