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이라는 도시에 큰 애착은 없다. 초중고를 나왔으되 아버지 고향도 어머니 고향도 아닌 곳이고 서울생활 30년에 남아 있는 끈도 별로 없다. 초딩 친구들 정도. 그럼에도 나는 항상 부산의 프로야구팀 롯데 자이언츠가 잠실에 올라오기를 기다린다 . 9할은 최동원 때문이다.
조승우와 양동근이 최동원과 선동열 역을 맡은 영화 <퍼펙트 게임>은 꽤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한다. 특히 조승우의 연기가 더 빛을 발했다고 생각하는데, 고인이 와인드업 때 보여주었던 다이나믹한 킥킹(한창 때는 거의 이마까지 올라가던)을 거의 근사치까지 흉내를 냈고, 부산 사투리도 거의 흠잡을 데가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감동했던 것은 최동원을 그린 듯이 닮은 미소였다. 활짝 웃기도 하지만, 대개는 입을 오무린 뒤 조금씩 이를 보이며 그려가던 최동원 특유의 수줍은 미소.
<퍼펙트 게임>은 1987년 5월 16일, 불세출의 두 투수가 벌인 그야말로 '영웅적인' 투수전을 소재로 했다. 그 경기로 둘은 1승 1무 1패를 기록했고 이후 둘의 맞대결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보자면 선동렬을 떠오르는 태양이었고 최동원은 저녁 하늘을 붉게 물들이긴 했지만 지는 해였다.
선동렬은 더욱 승승장구하여 일본에서도 '쥬니치의 태양'으로 군림했고, 선수 뿐 아니라 감독으로서도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는 행운을 누렸지만, 최동원은 그 뒤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은퇴한 뒤 야구계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 하나 얻지 못하는 '야구계의 야인'(野人)이 되었던 것이다. 결정적 계기는 사뭇 야구와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그러나 야구선수들과는 무척 밀접한 문제로부터 비롯된다. 1988년 "선수상호간의 친목과 복지"를 내세운 선수협의회 결성 시도였다.
최동원은 선수협의회 결성을 앞장서 주장했고 궂은 일을 도맡았다.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하고, 체육부, 노동부 등에 적법성을 문의하고 마뜩잖아 하거나 겁먹은 선수들을 설득하고 부추기는, 까칠하고 귀찮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최동원의 코멘트는 영화 <퍼펙트 게임>에서 조승우가 멋지게 내뱉던 대사, "게임은 최동원이 끝냅니다. 이겨도 내가 끝내고 져도 내가 끝냅니다!"만큼이나 멋있다.
"누군가가 앞장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사실 제 생각만 한다면 선수회 만들 일 없습니다. 어려운 동료, 불우한 후배들을 돕자는 취지에서 저 같이 연봉 많이 받고 여유있는 선수들이 앞장선 거죠."
마침내 1988년 9월 30일 마침내 계룡산에서 선수협 대의원 총회가 개최됐지만 각 구단이 그야말로 온갖 힘을 다해 막아섰고 심지어 가족들을 동원해 선수들의 발을 묶었다. 정족수는 미달됐고 선수협의회 결성 시도는 무산된다. 결국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결성은 그로부터 12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선수협의회를 주동했던 최동원은 평생 벗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고, 또 그래야 마땅했던 (1984년 한국 시리즈에서 혼자 4승 1패를 거두며 롯데 자이언츠를 우승시킨 것은 세계 야구사에 남을 일이다)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그는 1984년 ‘코리언 시리즈’에서 자신의 철벽 투구로 돌려 세웠던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했다가 곧 글러브를 벗는다. 대한민국 야구사의 한 페이지를 빛낸 영웅의 퇴장 치고는 너무나도 초라하고 외로웠다.
이 최동원을 두고 군침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치인들이었다. “부산의 최동원”이라면 정치적 역량을 떠나서 인지도만큼은 부산 최강이 아니었겠는가. 1991년 봄, 31년 만에 지방자치제가 부활하고 6월 20일에는 광역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최동원의 거취는 그 해 봄 내내 부산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최동원 본인의 말에 따르면 “민주당으로부터는 3월 초부터, 민자당으로부터는 3월 중순께부터 각각 출마제의를 받아왔지만 아직 결정짓지 못하고 있다.”(시사저널 1991.5.9)라고 한다. 하지만 ‘학교 선배’인 기관원으로부터 “왜 사서 고생을 하려 하느냐?” 하는 충고를 받았다고도 언급하고 있는 바, 그는 이른바 ‘3당합당’ 뒤 거대 여당이 된 민주자유당 대신 야당 후보에 더 마음을 싣고 있지 않았나 추정된다.
사실 그가 야당을 택할 이유는 없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당시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 사무실을 거리낌없이 드나들면서 안면을 익힌 적이 있었고 주위에서도 ‘김영삼맨’으로 알려져 있었고 고등학교 선후배지간이기도 했다. 더구나 김영삼이 여당에 들어가 대권을 눈앞에 둔 마당에 최대 지지 기반이라 할 부산에서 야당 후보를 자임하는 것은 학교 선배인 기관원 말마따나 “사서 고생”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최동원은 야당, 그것도 ‘꼬마 민주당’이라 불리던 군소 야당을 선택한다.
그의 출마의 변은 이것이었다. “룰과 규칙의 중요성이 잘 드러나는 게 운동이다. 룰과 규칙이 존중되는 정치구조를 만들겠다.” 정치인에 앞서 스포츠맨의 눈에는 김영삼의 3당합당이 그렇게 미덥지 않았던 것 같다. 뿐인가. 최동원은 지역구도 하필이면 김영삼이 무려 8선을 했던 부산 서구를 점찍었다. 그야말로 1984년 코리언 시리즈에서 막강타선 삼성을 앞에 두고 “나 최동원이야!” 하며 성큼성큼 나섰던 그 기세가 아닌가. 이때 그가 포스터에 내세운 구호는 그야말로 최동원적(的)이다.
“건강한 사회를 향한 새 정치의 강속구”
그는 승리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심판의 말에 복종하며 규정을 어기면 탈락을 감수해야 하는 스포츠맨이었다. 그의 회고는 콧날이 시큰할 정도다.
“우리 가족 빼고 선거 운동원이 6, 7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 6, 7명도 내 친구들이나 학교 후배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운동원이 태부족해 참 힘든 선거였다.”
그러나 부산 시민들도 그들의 영웅의 정치적 성공에는 인색했다. 그 때 최동원이 당선됐더라면, 최고의 슈퍼스타이면서도 바닥을 기는 선수들을 위해 나설 줄 알았고 그들을 묶어 세우려다가 자신이 결박당해 쫓겨났던, 그래서 “야구판의 모순은 곧 사회의 모순이며 정치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믿음에 도달하여 새로운 도전에 나섰던 그가 정치인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했더라면, 아마 그의 인생은 바뀌었을 것이고 부산은 또 하나의 큰 정치인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 그는 낙선했고 야구계의 야인으로 떠돌다 많은 사연과 한을 가슴에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이제 세상에 없는 그를 선거 포스터를 통해 다시 만난다. 정치인이 아닌 투수의 표정이 보인다.
항상 스포츠 머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웃고 있지 않지만 여유가 넘치는, 그리고 마운드에서 타자를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는 얼굴은 필자가 롯데 자이언츠 팬으로 구덕 운동장을 좇아다니던 무렵, 멀리서나마 최동원을 연호하며 부르짖을 때 마운드에서 와인드업 하기 직전에 봤던 그 얼굴과 완전히 같다.
그의 명복을 빈다. 아울러 태양같이 빛났으면서도 음지의 서러움을 알았고 강자이면서도 규칙의 소중함을 알았던 그의 뜻이 저 포스터를 통해 기억되기 바란다.
동시에 그가 육신과 영혼을 불태운 한국시리즈를 만져질듯 생생히 기억하고 그 때문에 별로 소속감도 연고의식도 없는 롯데팬으로 머무는 처지로 그 후배들이 언젠가는 우승을 차지하여 그들의 위대한 선배 영전에 우승기를 바치게 되길 바란다.
'위대한'이라는 표현이 어색한 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에서 최동원과 알리를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스포츠맨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절정에서 바닥을 본 이들로서 바닥을 위해 절정을 포기한 이들로서 말이다.
롯데가 언젠가는 코리안 시리즈에 올라오기를 바란다. 그 마지막 경기에는 하늘색 바탕에 빨간줄의 예전 유니폼을 입어주기 바란다. 그리고 최동원을 다시 불러주기 바란다. 그 감동을 위해 나는 롯데를 기다린다.
필자의 신간
산하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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