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며
따지고 보면 남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한 게 거의 20년이 되어감에도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어느 나라의 어떤 사건이든 인간 역사에서 보편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지역의 문화, 사회, 역사적 배경이 결합되는 것이 따로 있는데, 이걸 분리해내는 게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위의 장면은 본인이 제1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하는 소리다. 프랑스나 미국 출신의 남편과 결혼한 한국인 여자가, 혹은 그 나라의 처자와 결혼한 한국인 남자들이 배우자의 친척들로부터 저런 이야기, 하루에도 수십 번은 듣는다. 뭐 일정 정도는 교양의 문제지만, 상당부분은 거기나 여기나 우리의 삶이 너무 팍팍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일만 하면서 생계를 꾸리는 것 자체가 쉬운 게 아니다보니, 남의 일들에 대해 신경을 쓸 겨를도 없고.
일반적으론 이런 거, 문제 될 일이 없다. 그러나 남의 나라에서 벌어진 일의 배경이 되는 흐름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일인데 그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역적 특성으로만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지난달, 소설가 한강이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글이 한동안 화제였다. 작가, 혹은 시민이 해야 하는 일과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이 다르니 그 글을 갖고 벌어졌던 논란의 반복은 사양한다. 집중해야 하는 것은 한강이 그 글에서 자신이 광주 민주화운동을 담은 소설 ‘소년이 온다’를 준비했던 경험 부분이다.
그는 인류가 왜 타인에게 잔인하게 피해를 끼치는지 알고 싶어 2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 보스니아 내전과 아메리칸 인디언 학살 등을 조사했다고 한다. 그때 그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인간 이하(Subhuman)”로 여길 때 잔혹한 행위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국적과 인종, 종교,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누군가를 인간 이하로 여길 때 참극이 발생했다는 것.
Genocide, 즉 대량학살이 벌어지는 현장에선 한강 씨가 지적한 이 일이 공통적으로 벌어진다. 심지어 이거, 설명하는 방법도 있다. 바로 기억의 정치.
미얀마의 로힝야족 난민 사태와 관련해서 먼저 봐야하는 것은 이 부분이다. 이름과 위치만 다른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야길 하려면 잠깐 1940년대부터 90년대 사이의 동유럽부터 갔다와야 한다.
1. 기억의 정치(Politics of Memory)
요즘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유럽 나라들 중에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가 있다. 몇 년전 꽃보다 땡땡의 배경지였다는 게 그 이유. 그런데 이 나라들은 1991년 6월 25일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시작하기 전까지 '한 나라’였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와, 보스니아 핼 체고비나에 두 개의 자치주인 보이보디나와 코소보로 이루어진 꽤 큰 국가로 지도상으론 이탈리아 크기 정도였다.
2차 세계대전 후, 요시프 브로즈 티토(Јосип Броз Тито, 1892년 5월 7일~1980년 5월 4일)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건국했을 때, 그는 아주 적극적인 민족융합 정책을 펼쳤다. 무엇보다 이들 나라들은 상호 의존적인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전기와 천연자원 대부분을 연방 내의 다른 국가들로부터 공급받고 있었고, 유럽과 이어지는 물류의 대부분은 슬로베니아가 담당하고 있었다.
1991년에 발발한 내전은 지금의 국경선이 정리되기까지 무려 8년 이상을 끌었다. 최소 추산 14만에서 20만이 목숨을 잃고 약 75만 명이 실종되었으며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내전 발발 당시 세르비아의 대통령은 슬로보단 밀로세비치(Слободан Милошевић,1941년 8월 20일 ~2006년 3월 11일)였다.
나중에 전범으로 기소되어 유엔 구치소에서 세상을 뜨는 그는 세르비아 패권주의자였다. 이 인간의 특성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부터 드러난다. 1987년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계 주민이 알바니아계 경찰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벌어진다. 그때 그는 조사단으로 참여해 이런 발언을 한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조상과 후손들 때문에 (이 굴욕을 당하고도) 이 땅에 있어야 합니다. 아마 당신들의 조상이나 후손들에게 수치스러울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난 당신들이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인내하라고, 참으라고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반대입니다. 당신들은 나와 함께 이 상황을 바꿔야 합니다, 모든 진보적인 인민들과 함께 세르비아와 유고 슬리비아에서 말입니다.
나에게 혼자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마세요! 혼자서 할 수 없다는 걸 난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세르비아와 모든 유고슬라비아가 함께 바꿀 것입니다. 어쩌면 코소보에서 (우위를 가지고 있었던 세르비아의) 민족적 연결이 끊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는 이곳에서 살 수 없다고 떠나는 (세르비아인들의) 탈출을 멈추게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집에서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코소보의 경제적 기회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버리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87년 4월 24일 연설 - 원문링크)
말만 들어보면 영락없이 박해받는 소수를 대변하는 선지자 같다. 하긴 14세기 경엔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계가 다수였는데, 20세기 즈음에 코소보의 세르비아계는 전체 인구의 10% 정도에 불과하긴 했다. 하지만 정치가들의 발언이라는 건, 그 발언을 앞에서 듣는 사람들을 향해 하는 것들이 아니다.
밀로세비치는 이 연설로 박해받는 세르비아계의 지도자로 떠오르기 시작하고 다음 다음해인 1989년 유고연방의 세르비아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즉, 1987년 4월 24일의 저 연설은 코소보 지역에서의 소수자를 대변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유고연방에서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장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직에 오르자 본격적으로 연방 내 다른 민족의 권리를 제한하는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한 것이 74년 헌법에서 보장했던 자치주들의 자치권을 뺏는 것으로, 제1 타깃은 코소보였다.
그와 동시에 밀로세비치와 세르비아 지도자들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체고비나에 살고 있던 세르비아계에게 2차대전 당시 나찌에 협조했던 크로아티아인들이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했던 것을 기억하라고 선동하기 시작한다.
뭐 2차 세계대전 당시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학살은 꽤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당시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Ustaše) 정권은 크로아티아에 살고 있는 세르비아인의 1/3은 죽이고, 1/3은 추방하며 1/3은 카톨릭으로 개종시키겠다고 선언했었다. 대부분의 세르비아인들은 정교회 신자들이었거든.
그런데 우스타샤 정권의 이 말도 안 되는 선언은 실제로 실행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때 우스타샤 정권이 살해한 세르비아인들은 33만에서 39만 정도이며 최대 100만이 넘을 수도 있다고 한다.
이 사실만 놓고보면 밀로세비치와 세르비아 지도자들이 했던 “크로아티아인들이 우리를 학살했던 것을 기억하라” 라고 주장했던 것이 일면 설득력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아주 사소한(?!) 문제만 있을 뿐이다. 밀로세비치의 전임자였던 티토는 바티칸의 집요한 겐세이에도 불구하고 처벌할 놈들은 거의 대부분 처벌했다.
아마 이 포인트에서 놀라실 분들 많을 게다. 교황청이 크로아티아 전범 처벌에 겐세이를 놨다니? 믿지 못할 분들이 꽤 있겠지만,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그 Vatican City는 티토의 전범처벌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아니, 아예 대놓고 전쟁범죄자들을 빼돌렸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과 독일 나찌 옆에 앉아 계시는 목자는
당시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 교구의 스테피나치 대주교다.
이건 현대 카톨릭의 대표적인 흑역사다.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 교구의 대주교였던 스테피나츠(Aloysius Stepinac, 1898년 5월 8일~1960년 2월 10일)를 비롯한 크로아티아의 카톨릭 신부들은 우스타샤 정권이 자행한 유태인과 세르비아인, 그리고 집시들의 학살에 깊숙히 개입되어 있었다. 당시 기록들을 보면 일부 사제가 이들을 기관총으로 학살한 다음에 춤췄다는 이야기도 있다. 뭐 당시 교황 비오 12세는 히틀러와 정교협약을 맺었던 당사자기도 했고. 이 즈음에 크로아티아의 카톨릭 사제들만 상태가 이랬던 건 아니다. 스페인의 사제들 상당수는 프랑코 편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에도 한 장면 나오잖는가?
카톨릭 사제들 중에서 전범처벌을 받은 대표적인 인간은 미로슬라브 필리포빅(Miroslav Filipovic-Majstorovic 1915년 6월 5일~1946년)이다. 이 사람, 크로아티아에 만들어졌던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Jasenovac concentration camp)에서 학살을 주도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독일군(!)’에 의해 ‘전범(!)’으로 기소 되기도 했던 사람이다. 인종청소 하기 위해 가스실을 만들었던 그 독일군들이 체포할 정도였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나 하시겠나?
여튼 1945년, 유고에서 나치 독일이 물러서자마자 티토는 세르비아 학살사건 조사위원회를 만든다. 그리고 나치에 협력했던 이들을 재판에 세웠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수괴급들은 바티칸의 지원을 받아 다른 나라로 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티토 정부는 결코 포기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 학살극을 지휘했던 안톤 파블리치(Ante Pavelić 1889년 7월 14일~1959년 12월 28일)는 바티칸의 도움을 받아 이탈리아 로마로 숨어들었다가 아르헨티나로 도망갔다. 그리곤 후안 도밍고 페론의 대통령 자문역으로 떵떵거리고 살았다. 이땐 뭐 어떻게 하질 못했지만 1955년 군사쿠테타로 페론이 실각하자마자 유고정부는 아르헨티나에 안톤 파블리치의 송환을 요구한다. 그러자 이번엔 역시 군부독재 국가이자 카톨릭의 세가 강한 칠레로 도망간다. 유고 정부의 추적은 거기서 끊겼지만 후일 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톤 파블리치는 파라과이의 군사독재자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를 위해 한동안 일하다가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의 도움으로 1958년부터 스페인 에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거기서 죽을 때까지 크로아티아 해방운동(!)에 참여했다.
그렇다고 곱게 죽은 것은 아니었다. 숱한 암살 시도가 있었다. 1957년 4월 9일 파르티잔 활동을 하다가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던 블라고예 조보비치(Blagoje Jovović, 1922년~1999년 6월 2일)가 아르헨티나에서 암살을 시도했는데 그때 총 맞은 곳이 탈 나서 1959년 12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변호사로 우스타샤 정권의 내무부와 사법체계를 만들었고, 수십만을 죽인 학살수용소를 고안했을 뿐만 아니라 학살수용소로 유태인과 세르비아인, 그리고 집시들을 보내는 법안을 만들었던 것은 안드레아 아르투코비츠(Andrija Artuković, 1899년 11월 19일~1988년 1월 16일)였다. 그도 종전 즈음 스위스 여권을 갖고 미국으로 날랐다.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1945년 7월 전쟁범죄자로 기소했고 미국에 그의 송환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는 LA 카톨릭 교구의 적극적인 지원 때문에 40년간 추방되지 않았다. 기고만장했던 그는 1984년 11월 14일 미국의 반대쪽인 뉴욕에 여행 갔다가 거기서 체포된다. LA처럼 카톨릭 교구의 세가 강하지 않았던지라 체포된 후 2년만인 1986년 11월 11일 유고로 추방된다. 유고 법원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사형은 집행되지 않았고 자그레브의 병원에서 세상을 뜬다.
물론 우스타샤 전범 추적 과정에서도 정치적 고려는 있었다. 티토는 크로아티아의 카톨릭 사제들이 엄청난 전쟁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바티칸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은 가능한 한 피하려고 했다. 분쟁이 커지니까. 예를 들어 티토는 우스타샤 정권이 벌인 학살의 총책급임에도 스테피나츠 대주교를 전범으로 기소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기소하기 전에 교황청에 대주교 교체를 요구한다.
만약 교황청이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면 스테피나츠 대주교는 바티칸으로 돌아가서 잘 살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바티칸이 이걸 씹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믿거나 말거나 전범재판에서 스테피나츠 대주교가 전범재판에서 16년형을 선고받자 비오 12세는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해버린다.
여튼,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티토는 우스타샤 전범들을 꽤 철저하게 처벌했다. 단, 스테피나츠 대주교 기소건으로 바티칸과 힘겨루기를 한 이후부턴 재판장에 세우면 시끄러울 것 같은 인사들은 비밀경찰을 보내 조용히 암살해 버렸다.
사실 우스타샤 정권의 학살에 참여했던 이들 중에 처벌 받지 않고 떵떵거리고 산 이들은 성공적으로 남미로 도망간 이들 밖엔 없었다. 유고연방 국경 안에서 살았던 이들 중에 전범인데도 처벌 안 받고 산 경우는 거의 없었고.
그러니까 1991년에 밀로세비치를 비롯한 세르비아 지도자들이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정권이 세르비아인들에게 했던 “학살을 기억하라”라고, 저 놈들 때려잡아야 한다고 선동한 건 언어도단이었다. 처벌한 사람들은 다 처벌했는데 그때 처벌 받지 않은 무고한 크로아티아인들을 잡아 죽이자고 했던 거니까.
밀로세비치와 그 일당들은 애저녁에 벌 받았어야 할 놈들은 이미 처벌받았다는 사실은 의도적으로 배제한 상태에서, 세르비아인이 과거에 그들로부터 박해받았다고 하는 ‘기억만 선택적으로 기억 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즉, 기억을 조작했던 것. 이를 두고 ‘Politics of Memory’라고 한다. 바로 기억의 정치다.
밀로세비치의 전쟁범죄는 또 다른 반작용도 낳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그 잔혹함에 치를 떨었던 우스타샤가 크로아티아에서 다시 세를 얻고 있다. 세르비아인 학살의 책임자들 중 하나였던 스테피나츠 주교는 복자(로마 가톨릭에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켰거나 생전에 뛰어난 덕행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믿어져 공식적으로 신자들의 공경 대상이 된 사람. 준성인[準聖人])로 추대되어 자그레브 성당에 모셔져 있고.
2. 사람들은 바본가? 이런 걸 믿게?
Samuel S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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