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의 마지막을 장식한 원자폭탄의 투하는 말 그대로 한 시대의 종말과 새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제 인류는 스스로를 멸망시킬 무기를 손에 쥐게 됐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전쟁의 마지막을 인류 멸망의 가능성을 안겨 준 무기로 끝을 낸다는 건 완벽한 마무리였다.
트루먼은 왜 핵을 떨어뜨렸을까?
지금도 일본은 도쿄 대공습과 핵폭탄 투하를 언급하며, 자신들을 태평양 전쟁의 희생자라 포장하곤 한다.
“이미 승패가 결정 난 전쟁에서 도쿄 대공습과 핵폭탄 투하는 전쟁범죄와 다름없는 잔혹한 행위다. 조금만 시간을 줬다면, 전쟁은 평화롭게 끝이 났다.”
과연 일본인들의 주장이 옳은 걸까? 미국이 감정에 휩싸여 너무 성급하게 핵을 사용했던 걸까?
절차적 정당성
1945년 5월 8일은 기념할 만한 날이다. 트루먼의 대일 성명을 발표한 날이기도 하지만, 이날은 핵무기 사용에 있어서 ‘역사적인 회의’가 소집된 날이기도 하다.
트루먼이 대일 성명을 발표할 무렵 스팀슨은 ‘잠정위원회’를 소집했다. 그가 트루먼에게 보고했던 보고서의 내용을 그대로 실행에 옮긴 거다.
미국 정부와 군의 고위관료와, 과학자, 민간인 대표 14명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의 목적은 단순했다.
“핵무기를 사용할 것인가?”
이 당시 위원회의 분위기는 양측으로 갈라졌다. 과학자 그룹의 경우에는 핵폭탄 사용 시 발생할 수도 있는 ‘문제점’과 ‘비윤리적 측면’에 대해 말했다.
이에 반해 군 출신 인사들과 정부 측 인사들은 사용을 전제로 한 국제정치의 세력변화, 특히나 소련의 참전과 이후의 미국과 소련의 갈등에 대해 고민했다.
과학자의 양심, 군과 정부관계자들이 바라보는 전쟁 후의 국제정세 등등이 회의 탁자 위에 올라와 실랑이를 벌였지만, 이들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단순한’ 통계 하나가 등장하면서 이들의 설전은 사라졌다.
‘미군 사상자 숫자’
일본 본토에 가까워지면서 미군 사상자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이오지마, 오키나와 전투에서 보여준 일본군의 ‘악귀’같은 모습은 미군에게는 악몽의 다름이었다.
미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전쟁을 조기에 끝내야 하는 것. 이건 누구도 반대하지 못할 명분이었다. 아무리 미국이라지만, 언제까지 전시국채를 뿌릴 수만은 없었다.
1945년 6월 1일 잠정위원회는 하나의 보고서를 채택하게 된다.
1) 원자폭탄은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일본에 대하여 사용해야 한다.
2) 일본 정부에게 최대한의 심리적 충격을 줌으로써 그들이 무조건 항복의 수락에 대한 마지막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원자폭탄은 거대한 군사시설에 대하여 사용해야 한다.
3) 원자폭탄은 예고 없이 사용되어야 한다.
인류 역사상 미증유의 파괴력을 가진 무기의 사용 앞에서 미국은 최소한의 절차적 정당성을 밟아 가고 있었다. 일반인들의 생각으론 트루먼이 독단적으로 핵무기 사용을 결정한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미국은 나름 고민을 하는 척을 했다.
(트루먼에게 ‘핵’은 전쟁 이후를 담보할 수 있는 전략자산이었고, 굳이 트루먼이 아니라도... 그러니까 다른 지도자라도 핵의 사용을 주저하지 않았을 거다. 1945년 6~7월 미국 국내의 분위기라면, 핵무기가 아니라 더 한 무기라도 주저 없이 사용할 분위기였다)
이 보고서를 받은 트루먼은 결심을 굳힌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나는 며칠 동안 이 문제를 깊게 생각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보고서의 내용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잠정위원회의 임무는 내게 원자폭탄에 관한 조언을 하는 것이다. 모든 최종적인 책임은 나에게 있으며, 나는 이를 부인하고 싶지 않다. 보고서의 내용과 상관없이 나는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마침 나의 결론과 보고서의 내용이 합치했을 따름이다. 나는, 덴노와 그 군사 고문들로부터 진정한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제국을 분쇄하기에 충분한 파괴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줄 필요가 있다. 또한 원자폭탄으로 인한 인명피해보다 그로 인해 구할 수 있는 미일 양국의 인명이 몇 배나 된다는 것도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하는 게,
① 보고서의 내용과 상관없이 나는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마침 나의 결론과 보고서의 내용이 합치했을 따름이다.
② 원자폭탄으로 인한 인명피해보다 그로 인해 구할 수 있는 미일 양국의 인명이 몇 배나 된다는 것도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라는 대목이다. 트루먼은 원자폭탄이 완성되기 이전에 이미 이 미증유의 대량살상무기의 사용을 결심하고 있었다. 아울러 이 원자폭탄이 미군의 생명(덤으로 일본군도)을 구해낼 것이라 믿었다.
트루먼의 입장을 들은 잠정위원회는 원자폭탄의 사용에 대한 세부사항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이때 핵심이 됐던 게 ‘경고’와 ‘사용 시기’였다.
일본의 학자들 중 일부가 미국의 핵폭탄 사용이 ‘인종적인 편견에 휩싸인 감정적인 사용’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경고’의 부재였다.
“핵무기와 같이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무기가 있다면, 이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전쟁은 끝났을 수 있다. 일본 근처의 무인도나 인구가 적은 도서 지역에 경고와 함께 핵폭발을 보여줬어도 충분하다.”
과연 그럴까?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가정을 해보자. 핵폭탄 사용을 경고 하고, 무인도나 인구가 적은 지역에 위협용으로 떨어뜨린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 의견의 결정적 문제는 ‘현대의 시각’으로 당시를 바라봤다는 점이다.
미국이 아무리 돈이 많다지만, 핵무기를 마음대로 찍어내는 상황이 아니었다. 맨해튼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팻 맨(Fat Man : 농축우라늄 방식)은 겨우 3발이었다. 한 발은 최초의 핵실험에 사용된 트리니티(Trinity)였고, 한 발은 나가사키에, 나머지 한 발은 남아 있었다(플루토늄 방식의 리틀보이가 맨 마지막에 제조됐다).
이 당시 스팀슨 장관은 트루먼에게,
“매월 팻 맨 1발씩을 생산해 낼 수 있습니다.”
라고 보고했다. 아무리 미국이라지만, 항공모함 찍어내듯 핵무기를 찍어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몇 발 되지 않는 핵폭탄 중 1발을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경고용으로 사용한다?
(‘원자폭탄’에 한정해서 보자면, 당시 미국의 상황은 그리 여의치 않았다. 나가사키에 마지막 원자폭탄을 떨어뜨리고 나서 10개월 뒤 미국의 가용 원자폭탄 수는 겨우 7발이었다. 우라늄 폭탄의 경우는 최소한 3~4개월 이상 농축을 해야지만 폭탄을 만들 수 있었는데, 당시 생산시설의 기계적 문제로 생산이 정지된 상태였다)
잠정위원회는 경고 없는 조기 사용을 결정한다. 이때가 1945년 6월 21일이었다.
“원자폭탄이 완성되면, 경고 없이 바로 일본에 떨어뜨린다.”
미국 정부의 정책방향이 결정됐다.
트루먼의 의심? 스탈린의 욕심?
1945년 5월 이후, 그러니까 독일의 패망 이후 연합국 내의 균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외교사건’이 하나 있다. 얄타회담과 포츠담 회의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바로 트루먼의 특별보좌관인 홉킨스(H. Hopkins)의 모스크바 방문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1945년 4월 12일에 사망했다. 트루먼이 바로 대통령직을 승계했고, 겨우 한 달이 지난 1945년 5월 26일 홉킨스는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이 당시 쟁점은 소련의 ‘야망’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소련은 독일 패망 이후 유럽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대표적인 게 폴란드였다. 영국에 있는 폴란드 임시정부를 무시하고, 루블린에 있는 ‘친소정부’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거의 전쟁이 끝나가던 1945년 2월에는 소련 외무차관 비신스키(A. Ya. Vyshinsky)가 루마니아에 방문해 친소정부 구성을 독려했다.
동유럽을 소련의 발치에 두려는 행위였다.
영국과 미국이 항의를 했지만, 스탈린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연합국에게 화를 냈다. 스탈린의 소소한 ‘분노’는 이미 연합국을 질리게 만들었다.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이 영국과 미국에 항복했다. 이건 영국과 미국의 단독강화다!”
“대(對) 독일전 참전을 거부한 아르헨티나가 샌프란시스코 회의(1945년 4월~6월 사이에 UN창설을 위해 세계 50개국이 모여 국제회의를 했었다)에 참석하는 건 옳지 않다!”
“영국이 폴란드에 반(反) 소련적인 정부를 세우려 한다! 이건 소련의 권익을 침해하는 일이다!”
“프랑스가 전쟁 중에 무슨 활동을 했나? 전쟁 초반에 독일에 항복한 프랑스가 독일배상위원회에 참여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무기대여법을 왜 지금 중단하는 건가?”
스탈린의 요구사항은 끝이 없었고, 미국과 영국은 소련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그러나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스탈린에게는 아직 ‘대(對)일전 참전’이라는 카드가 있었고, 이걸 활용해 최대한 많은 걸 얻어내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반면, 유럽과 미국은 소련이 ‘새로운 적’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홉킨스가 모스크바로 날아간 거다. 외교적인 방법으로 최대한 ‘충돌’을 줄이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연합국의 ‘모양새’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이 자리에서 스탈린은 한 가지 약속을 한다.
“8월 8일까지 대(對)일전에 참전하겠다!”
루즈벨트가 살아있었다면, 좋아했을 이야기다. 그러나 여기에는 꼬리표가 하나 붙어 있었다.
“얄타 협정의 조속한 이행을 촉구한다.”
얄타 협정에서 얻은 ‘성과’를 조속히 받아내고 싶어 한 거다. 꼬리표는 길었다. 스탈린의 대일전 참전에는 ‘소박한’ 희망도 더해졌는데, 일본 점령에 소련도 참여하고 싶다는 의지를 이 회담에서 내비쳤다. 더불어 점령지역도 특정 지었다.
스탈린의 대일전 참전은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부른 꼴이 될 확률이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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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펜더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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