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언젠가 시리즈가 끝나면 독후감을 쓰리라 벼르고 있는 책이 있다. 김명호 교수가 쓴 <중국인 이야기>다. 근데 이게 언제 끝날 줄 몰라서 미루고만 있다. 땅 넓고 사람 많은 중국이라 그런지 우리 귀에 쟁쟁한 인물부터 듣도보도 못한 요상한 이름들까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그 인물 하나 하나가 개성이 넘치고 역사에 남긴 자취들도 오만가지 형상이다. 잡다한 형용사 다 제쳐놓고 ‘참 재미있다.’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땅도 사람도 중국의 수십분의 일이지만 현대 한국을 인물 중심으로 엮어 놓으면 <중국인 이야기> 못지 않게 흥미진진할 것 같다고 말이다.

툭하면 수천 년, 심하면 1만 년 전 우리 ‘민족’의 허깨비를 쫓는 것보다 비록 역사에 속해 버렸으되 손 뻗으면 만져질 듯한 인물들을 건조한 사실의 박제로부터 석방하여 그들의 생생한 일면들을 재현해 낸다면 얼마나 구수하고 짭짤할 것인가. 어디까지나 남의 이야기(?)인 <중국인 이야기>에 어찌 못미칠 것인가.

i.jpeg

최근 그 단초가 됨직한 책 하나를 발견하고 순식간에 탐독했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 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이다. 대한민국이다. 즉 분단된 38선, 전쟁 후 휴전선 이남에 세워진 헌법상 민주공화국의 ‘설계자들’이다. 거기에 추가로 규정된 것이 ‘학병 세대’다. 무슨 뜻일까.

저자 김건우 교수의 말을 빌려 보자. “일제 말 전쟁에 동원되어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전쟁터로 끌려갔던 사람들, 제국 최고의 고등 교육을 이수했지만 친일의 전력이 없는 이들, 정확히는 친일을 요구받기에 너무 ‘젊었던’ 이들”이다. 몇 달 전 생애 최고의 곤욕을 치렀던 안경환 교수에 따르면 “일제 말기 조선의 최고 청년 지식인 겸 집적체였고 엄연한 대일본 제국의 지적 수준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던 집단”이다.

일제 말 대학을 다니던 연령층, 즉 위로 1917년생부터 아래로 1923년까지 1920년을 전후해 6~7년 정도에 걸쳐 태어난 이들이다. 왜 1923년인가. 1923년 12월 이후 태어난 이들은 ‘학병’이 모집대상이었지만 1924년생부터는 ‘징병’ 대상이 된다. (옛날 어른들에게서 ‘묻지 마라 갑자생’이라는 말 들어 본 적 있으신가? 1924년이 바로 갑자(甲子)년이었다.)

해방 공간과 분단이 굳어지는 상황에서 많은 한국 사람들은 결국 “남이냐 북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하는 햄릿 신세가 돼야 했는데 이 책에서 소개하는 ‘학병 세대’는 당연히 남쪽을 택한 사람들이다. 즉 ‘왼쪽’과는 척을 진 ‘오른쪽’들이었다.

그러나 오른쪽이라고 다 같은 오른쪽은 아니었다. 김건우 교수는 이렇게 질문한다. “한국의 산업화 시대에 정부 정책을 주도한 사람들이나 민주화 진영에서 저항했던 사람들이나 모두 이념적으로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이 학병 세대의 다양한 ‘오른쪽’들을 둘러 보는 것은 단풍이 흠뻑 든 북한산 진달래 능선을 걷는 느낌과 같다. 공산주의라면 치를 떨었고 김원봉을 미인계나 쓰는 양아치 취급한 골수 우익 장준하는 평안도 출신이다.

차별받던 지역민으로서 공동체 의식이 일찍부터 강했고 기독교가 성했던 평안도 사람들은 대거 월남한다. 그 중 일부는 서북청년단이라는 악마가 됐지만 장준하, 백낙준, 김준엽, 지명관, 양호민 등은 <사상계>의 주역으로서 한국 우익의 큰 흐름을 형성한다.

2017040500074_0.jpg

최남선의 사후 친일 시비에 아랑곳없이 그 죽음을 애도했고 친일 작가로 손꼽히는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을 만들었으며 5.16 마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으로 찬미하던 장준하가 박정희 정권의 가장 강력한 적수가 되고 “모든 통일은 선이다. (설마 적화통일도?)”라고 선언하기까지 이르는 그 드라마틱한 변천 과정은 글자 그대로 다이나믹이다. 그 와중에 백기완도 등장하고 함경도 출신으로 김재준 등과 함께 ‘한신 그룹’을 형성하는 문익환도 인상 깊게 지나가며 왕년의 <사랑방 중계>에서 듬직한 어르신으로 등장했던 오리 전택부도 얼굴을 내민다.

시종일관의 평생을 극우보수적 시각을 견지하며 필봉을 휘두르던 선우휘같은 인물이 알고보면 평안도 사람이라면 일단 접어 주는 지역주의자(?)였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는 평안도 출신이던 재야인사 계훈제나 함석헌을 비롯해 사상계든 무엇이든 친정부든 반정부든 평안도라면 “내레 형이고 너는 동생이다.”는 “우리레 남이가?” 정신으로 감싼다. 리영희 교수가 조선일보 외신부장 시절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기사로 구속됐을 때 리영희를 석방시키는 댓가로 선우휘는 편집부장 자리를 내려놓을 정도였다니 더 할 말이 없다. 그러고보니 리영희 교수도 평안북도 사람이다.

장준하와 함께 사상계를 만들던 사람들의 행보도 참 흥미롭다. 사상계 편집 위원 출신 중에 총리가 세 명이다. 김상협, 현승종, 유창순. 롤러코스트의 폭도 크다. 사상계 편집위원이었던 한태연은 유신 헌법을 기초하게 되고, 역시 사상계에서 한몫을 했으며 정치교수로 파면되는 등 강골이었던 황산덕은 글쎄 저 유명한 인혁당 ‘사법 살인’ 당시 법무장관이 된다.

한때 사상계에서 필봉을 휘두르던 이가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사법 살인 진상 공개 요구에 ‘의법조치’를 호언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는 가운데, 당시 천주교의 핵심이라 할 두 사람, 지학순과 김수환 역시 ‘학병 세대’였다. (언젠가 김수환 추기경이 일본군복을 입은 사진을 가져와서 친일파니 뭐니 시덥잖은 시비를 벌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구 출신의 세계 최연소 추기경 김수환과 평안도 출신의 원주 교구 신부 지학순은 유신 시대의 암흑 속에서 힘차게 타오르는 횃불같은 존재였고 그들의 궤적을 쫓다 보면 원주의 장일순이 보이고 김지하가 나타나고 기독교의 거목이자 역시 학병 세대인 강원룡이 또 하나의 관계와 사람의 고리를 엮는다.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한국 최고의 구약학자로 명망 높았던 문익환이 별안간 투사가 되어 세상으로 나오고 문익환이 전두환 정권에 피를 토하며 저항하던 80년대, 유신 시절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갈 곳은 감옥”이라고 부르짖던 지학순 주교와 역사학자로서도 기자로서도 으뜸 순위에 있던 지사(志士) 천관우, 그리고 앞서 말한 강원룡은 약속이나 한 듯 전두환 정권에 머리를 굽혔다. (강원룡 목사는 핑계가 있긴 하다)

밑의 신부들이 지학순 주교더러 “당신이 말하던 건 도대체 뭡니까?”라고 항의하고 윤보선 전 대통령과 더불어 시대의 변절자 ‘윤천지강’이라는 낙인까지 받는 분위기에서 말이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 책에도 해답은 없다. 그러나 그를 짐작케 할 퍼즐 조각들은 책 곳곳에 보물찾기 쪽지처럼 산산이 흩어져 존재한다.

2017101901657_0.jpg

언급한 이름들 외에도 이 책에는 수많은 ‘오른쪽’들이 등장한다. 단풍의 색이 다르고 물든 정도가 다르듯 그 모두는 저마다의 빛깔로 역사의 한켠을 장식하다가 땅에 떨어져 갔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무는 그들이 썩어 만들어낸 부엽토(腐葉土)로 인해 양분을 얻기도 하고 병충해를 입기도 했다.

흥미진진 페이지를 넘기면서 점점 단단해졌던 생각은 대충 하나였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때 형형색색 산을 수놓고 사방을 물들이던 오른쪽들의 살아생전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보수니 진보니 해 본들, 아직은 우리는 그들의 손바닥에서 놀고 있는 손오공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다. 보시라.





필자의 신간


206481696.jpg





산하


편집: 꾸물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