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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전염병 예방법(Contagious Diseases Prevention Actos)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를 쫓아간 법률이었다.


도시로의 집중, 중앙집권화된 대단위 상비군.


나폴레옹은 근대를 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경험하고 있는 국민교육, 사회복지, 국민개병 등등의 모든 제도들의 뿌리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시작됐다. 수 만, 수 십 만의 병력을 단시간 내에 교육 시켜 전장에 보내기 위해 기초적인 교육이 필요했고, 언어의 통일(표준어)이 절실했다. ‘국민’이란 개념, ‘국가’란 개념을 만들기 위해 민족주의란 게 필요했고, 이를 위해 전통이 날조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의 상당부분은 ‘국가’란 허상을 보좌하기 위해 근대 시절에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전쟁이 일회성이었다면, 산업혁명은 구조의 완성이었다. 젊은 남성들은 도시로 몰려들었고, 여성들은 부족했다. 여기에 더해 19세기가 되자 남성들의 결혼연령이 극적으로 ‘늦춰’졌다(요즘 같은 느낌이랄까?).


이유는 간단하다. 


“경제적 요인”


돈이 없는 남성들은 결혼하기 힘들어졌다. 산업 생산력의 발달, 이로 인한 눈높이의 상승 등등 남자들이 결혼하기 힘든 시절이 됐다. 물론, 여기에는 남성들의 ‘욕심’도 한몫을 했다. 이 당시 30세가 넘는 노총각은 흔했지만, 이들이 원했던 이상적인 신붓감 나이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다(당시의 평균 수명을 고려해보라!). 그에 걸맞는 경제력이 필요했다.


여기에 더해 멜서스의 <인구론>이 힘을 얻게 된다. 나이 먹은 남자들, 특히나 사회경제적으로 성공과는 거리가 있던 노총각들은 자식을 ‘덜’ 가지는 쪽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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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당시 노총각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피임 아니면, 매춘. 아니, 도대체 왜? 


이 당시 사회분위기는 피임을 하느니 차라리 매춘을 하라는, 지금으로선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연출됐다. 이유는 바로 ‘기독교’였다. 피임을 반대하는 천주교의 입장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거다.


이 대목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게 당시 도드라진 ‘고급 창녀’의 등장이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사회 기득권층을 위한 고급 창녀들은 존재했었다. 그러나 19세기 유럽의 영국, 프랑스처럼 고급 창녀들이 넘쳐나던 시기는 드물었다. 이유는 크게 3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는데,


첫째, 교육기회의 확대.


산업혁명 이후 공교육이 확대 됐다. 이전까지의 교육이란 말 그대로 인류 문명 전체를 배우는 지혜의 향연이었다. 즉, 플라톤부터 시작해 대혁명 전후를 한 백과사전파까지 교육자의 취향에 따라, 그리고 교육 받는 이들의 필요에 따라 인류 문명 전체를 아우르는 교육이 주로 이루어졌다. 교육을 받는다는 건 소수의 기득권 계층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일상생활에 동떨어진 순수한 학문의 탐구라고 해야 할까?(19세기 이후의 교육체계는 인류 전체로 보면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리고 지금 다시 19세기 이전의 교육체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점점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의 공교육 목표는 달랐다. 국가와 기업이 필요로 하는 노동자와 국민을 만들어 내기 위한 교육이었기에 최소한의 ‘필요’만 채워지면 됐다. 그 핵심은,


“글을 쓰고 읽을 줄 알면 된다.”


였다. 기록적으로 문맹률이 떨어졌다.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 여성들의 문맹률도 떨어졌다. 고급창부들은 읽고 쓸 수 있게 됐다. 야망이 있는 여자라면, 손쉽게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사회 지도층과 대화의 주제를 넓혀 갈 수 있었다.


둘째, 이중적인 남녀관계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시절만큼 이중적인 시대도 드물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타이틀을 쟁취하게 된 영국. 이 당시 영국은 겉으로는 엄숙주의를 표방했다. 음란과 퇴폐를 배격했지만,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돈’ 앞에서 런던은 퇴폐문화의 온상이 됐다. 여기에는 문화적인 문제도 한몫을 거들었다. 우리나라의 40대 중년 부부들이 농담 삼아 하는 말이 하나 있다.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냐. 그런 건 밖에서 해결하고 오는 거야.”


언제부터인가 부부의 형태가 사랑을 중심으로 한 애정관계에서 의리를 중심으로 한 동지적 관계로 변했다는 걸 농담으로 표현한 말이다.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절의 영국(그리고 유럽이)이 그랬다.


“섹스는 2세 생산을 위한 최소한의 활동에 멈춰야 한다.”


왜 그랬던 걸까? 간단하다. 여성을 신격화 한 거다. 중세시대, 구체적으로 십자군 원정 직후 유럽은 성모 마리아에 대한 열풍이 불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역수입 된 것이 성모 마리아다. 본래 서유럽 지역에서 마리아에 대한 영향력은 미미했다. 그러나 동방에서는 수많은 여신들이 있었고, 마리아에 대한 숭배가 서유럽의 그것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십자군 원정을 온 수많은 기사들은 마리아 숭배를 하게 됐고, 이런 마리아 숭배사상은 이들의 귀향과 더불어 유럽으로 전파됐다.


마리아 숭배 사상이 전파되면서 여성들은 ‘여성(女性)’이라는 성적 정체성을 버리고 ‘무성(無性)’이 되는 것이 고결한 여인이 되는 것으로 인정받게 된다. 즉, 여성의 몸에서 섹스를 배제시키려 애썼다는 거다. 그 결과 여성은 성적으로 거세된 존재가 돼야 했다.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시절의 여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부부간의 섹스는 ‘번식’을 위한 최소한의 행위로 그쳐야 했다. 그 이상을 요구해서는 안 됐다. 그럼 남자들의 욕망은? 이건 다른 곳에서 해결하면 됐다. 19세기 유럽 사교계는 고급 창녀들에 의해 유행이 좌우됐다. 남성들은 꿀벌처럼 창녀들에게 달려들었고, 고급 창녀들은 여왕벌처럼 남자들을 거느리며 사교행사에 등장했다. 살롱 문화의 등장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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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출판물의 확산


19세기 유럽은 출판물의 전성시대였다. 신문, 잡지, 출판의 황금기였다고 해야 할까? 넘쳐나는 돈, 신세계와 새로운 지식에 대한 타는 목마름, 문화 활동으로서의 출판... 우리가 고전으로 배우는 <제인에어>와 같은 작품들은 이 시기에 등장했다. 사람들은 읽고, 또 읽고, 읽었다. 그리고 이런 사회 분위기를 기반으로 고급 창녀들이 이를 ‘돈 벌이’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꽃뱀”


이라고 보면 이해가 빠를 거다. 고급 창녀들이 사회 명사들과 관계를 맺은 뒤 이를 가지고 책을 집필한다. 그리고 이걸 가지고 사회 명사들을 협박한다. 돈을 받으면 책은 파기하고, 받지 못하면 출판해서 돈을 번다. 오늘날의 몰카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고급 창녀들에게 또다른 수익원이 등장했다.


이런 고급 창녀와 함께 사회 전반적으로 매춘부들의 숫자는 폭증했다. 도시로 젊은 남성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결혼을 미룬 상태. 어쨌든 ‘여자’는 필요했다.


국가는 매춘을 필요악으로 규정했고, 매춘을 ‘관리’하는 것으로 정책판단을 내렸다. 뒤에 후술하겠지만, 19~20세기 근대화를 이뤄낸 많은 국가들의 ‘매춘관리’는 시대와 공간을 떠나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윤락업소, 소위 말하는 집창촌의 등장, 윤락업소에 종사하는 매춘부의 출신과 유입 경로, 이후의 관리, 경찰의 단속, 국가의 통제, 성병에 대한 관리와 국가의 개입까지 근대화를 이룬 국가들의 행보는 놀랍도록 유사했다.


“매춘은 필요악이다. 없앨 수 없다면, 이를 관리해야 한다.”


“성병이 국가 전반에 미치는 영향. 특히나 군사력에 끼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매춘부를 국가가 관리하지 않는다면, 국가 주권의 핵심인 군사력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사회의 안정과 국가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 매춘부 관리에 국가가 나서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춘부와 같은 반 기독교적인 존재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관리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매춘의 국가관리 필요성에 대해서는 근대화를 이룬 모든 국가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많은 ‘남자’들이 도시로 몰려오는 걸 경험한 세대는 없었다. 군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근대 이전의 전쟁에서 십만 단위의 군대가 모인 적은 드물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이후 10만 단위의 병력은 애들 장난이었다. 각 주둔지의 휴가, 외출병들의 숫자만 꼽아 봐도 만 단위가 훌쩍 넘어섰다.


국가가 통제하지 않으면, 매독을 비롯한 각종 성병이 온 유럽을 집어 삼킬 것이란 두려움이 널리 퍼졌다.


물론, 죄책감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그 죄책감의 근저에 깔린 건 인간의 양심이 아니었다. 바로 기독교도로서의 신앙이었다.


‘전염병 예방법’을 반대했고, 폐지를 청원했던 이들이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이 바로 ‘기독교 국가로서의 품위’였다. 기독교 국가가 매춘을 법률로 통제한다는 건 비도덕적이란 주장이었다. 실제로 이 논리는 많은 영국인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여기에 당시 싹을 틔우던 여성해방운동이 결합되면서 전염병 예방법은 폐지의 절차를 밟게 된다.


그런데, 이런 기독교 전통도 없고, 여성 인권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나라가 매춘을 관리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한 발 더 나아가 그 나라의 식민지에서의 매춘은 어떤 식으로 조직되고 관리 됐을까? 다음회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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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이극락조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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