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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편집부에서 연락이 왔다. 편집부 원고추심 담당 인지니어스 기자였다. 지난 주말에 방영된 SBS<김어준의 블랙하우스>에 대한 비평을 목요일까지 쓸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시민인 나는 일단 프로그램을 봤는지 안 봤는지부터 묻는 게 순서 아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금요일까지 보내도 되겠냐고 공손하게 답했다. 딴지일보 원고료는 생각보다 후하기 때문이다.


‘까더라도 우리가 까는 것이 제 맛‘이라며 총수와 그의 프로그램을 까보라는 글을 청탁받고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려하니 불현 듯 기시감이 스치운다. 이 느낌, 그거다. 군대에서 써내라는 소원수리. 사실이지만 사실이 아니어야 하는 일이 사실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만드는 행정적 꼼수. 적으란다고 거기에 진짜 다 적으면 나중에 죽는다. 어쩌면, 이것은 편집부의 계략일지 모른다. 총수의 지상파 입성 이후 이어질 딴지의 언론재벌화를 대비해 진실한 사람만 남기려는 ’진딴‘ 필진 선별작업 일수도 있다. 혹은, 종신 총수 1인 독재 체제를 전복하려는 그룹 내 어떤 세력의 총알받이가 된지도 모를 일이다.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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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찝찝하지만 한번 사는 인생 딴지와 총수의 졸라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다. 수틀려서 고료가 끊긴 다해도, 씨바. 



형이 왜 거기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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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면. 블루하우스(청와대)를 패러디한 흑와대 기지회견장에 라면을 두 개 반 정도 먹고 일어난 얼굴을 하고 총수가 걸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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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의, 강대국의 남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 이제 그만할 때가 됐다. 나의 생각, 나의 시각, 나의 가치로 세계를 바라보고 본질을 이야기 하겠다”


팟캐스트였다면 “몰라 씨발! 여기가 공중파면 뭐 어쩌라고. 내 맘대로 할 거야.” 라고 간단히 끝낼 말을 최대한 점잖게 그리고 길게 뽑던 총수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한마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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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주말 밤, SBS는 <그것이 알고싶다>의 방영시간에 한 파일럿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제목은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첫 주 부터 故 유병언 전 세모 그룹 회장의 장남 유대균 인터뷰, 박근혜 5촌 살인사건의 새로운 제보, 다스 실소유주 관련 이명박 추적기 등 뜨겁고 굵직한 내용들이 다뤄졌다.


사실 이 내용들은 대부분 총수가 진행했던 팟캐스트에서 수차례 다루어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전에 접한 시청자에게 그리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주목할 점은 그 내용이 팟캐스트 스트리밍이 아닌 지상의 전파를 타고 나갔다는 것이다. 알고 있던 내용이다 하더라도, 총수가 지상파 채널에서 ‘씨바’와 ‘졸라’를 간신히 참아가며 신나게 가카를 터는 화면은 감히 상상해본 적이 없었기에 무척이나 생경한 풍경이었다. 


김어준의 지상파 입성은 뽕나무밭이 바다가 된 것에 비견할만한 사건이다. 그 곳은 불과 몇 달 전까지, 권력에 공손하지 못한 이들에게 피폭지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직언과 간언을 하다 쫒겨난 이들이 제자리를 찾아오지 못한 이때에 김어준의 지상파 TV의 데뷔는 여러 의미가 있다.



SBS의 베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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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은 시청자 반응을 보기 위한 파일럿 프로그램을 보통 명절 연휴에 내보낸다. 그런데 쌩뚱맞은 11월에, 그것도 간판 교양프로그램 자리에 새 프로그램을 방영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SBS에게 김어준이라는 콘텐츠는 매우 전략적인 선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이 새 정권의 환경에 적응하려는 방송사의 제스처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건 ‘김어준 콘텐츠’가 시청률 즉, 돈이 되기 때문이고, 그것을 내보내도 당분간 어디서 전화 받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민간상업방송 SBS의 과감한 배팅은 김어준표 시사 콘텐츠가 현재 매우 가치있는 상품임을 증명한다.



지상파 스럽지도, 팟캐스트 스럽지도 않은


총 2회의 파일럿에서 7개의 코너를 선보였다. 지상파 방송에서 다뤄진 적이 없는 혹은 다뤄질 수 없었던 주제와 접근들이 시도되었기에 그 자체로 신선했다. 정형화된 답변을 차단하며 집요하게 밀고 들어가는 <김어준의 파파이스>식 인터뷰도 발군이었다. 유대균의  인터뷰는 묻혀버린 세월호의 의문을 단숨에 이슈로 끌어오게 했으며 관료들의 보수적 문화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강경화 장관의 속내를 들춰내어 외교부 조직혁신계획을 얼렁뚱땅 공론화 시켜 버렸다. 트럼프의 마음속을 꼬집어내는 외교통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 박근혜5촌살인사건의 두바이팀, 그리고 다스와 이명박 관계추적 스토리 등 김어준이 늘어놓는 따끈따끈한 재료들은 모두 이전 팟캐스트 시절부터 일구어온 자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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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



팟캐스트의 요소들이 지상파 방송에 성공적으로 이식될 수 있었던 데에는 방송의 연출적 기술도 중요했다. 아이템 나열에 치중된 팟캐스트의 투박한 구성을 걷어내고 위트있는 자막과 적절한 CG등 예능적 문법이 가미되었다. 무겁고 지루해지기 쉬운 주제들을 맥을 간결하게 짚으며 경쾌하게 넘어간다. SBS가 그동안 공들여 육성해온 스브스뉴스, 비디오머그, 숏터뷰 등의 웹콘텐츠에서 갈고닦은 짧고 임팩트있는 연출 노하우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두 매체의 상호보완적 절묘한 만남은 지상파스럽지도 팟캐스트스럽지도 않은 전혀 새로운 형식의 시사예능프로그램이 탄생할 가능성을 보여줬다.



총수, 이건 아니잖아요


사실 이 찝찝한 소원수리는 이정도로 마무리하려고 했다. 이만하면 원청업체에 대한 하청업자의 충성증명과 독자에 대한 필진의 역할을 얼추 하고 적절하게 빠질 수 있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김어준의 블랙하우스>가 꽤 괜찮은 출발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어 몇 개가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린다.


SBS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프로그램 기획의도를 보자.


과거, 재야의 '음모론자'를 '양지의 영역'으로 끌어내, 

김어준 특유의 합리적 의심과 '그알'식의 탐사보도의 콜라보레이션을 선사한다.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재야의 음모론자 - 김어준, 양지의 영역 - 지상파 SBS 라는 단어들의 함의다. 이 기획의도에는 지상파 방송사의 미묘한 우월의식이 흐르고 있다. 이 기획의도는 김어준이 제기해온 이슈들을 사건의 원인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 음모론으로 폄하했고. 팟캐스트등의 새로운 미디어 플래폼을 ‘재야’라고 평가절하 하면서 지상파인 자신들이 공신력과 영향력을 가진 ‘양지의영역’이라 참칭하고 있다. 

그동안 김어준이 제기한 주장들의 합리성과 팟캐스트 등 새로운 뉴스유통수단의 영향력은 따로 논증할 필요없이 SBS 스스로가 증명하고 있다. 김어준이 근거 없는 음모론에 의존해왔다면 <나는 꼼수다>,<김어준의 파파이스> 등의 콘텐츠들이 장기간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을 것이며 그래서 그것을 나르는 팟캐스트의 영향력이 별 볼일 없었다면 SBS가 그를 MC로 기용할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양지의 영역. 묻고 싶다. SBS는 공신력과 영향력 있는 방송사로서 지난 9년동안 권력에게 마땅한 질문을 성실히 해온 언론의 양지였는가에 대하여 말이다. 그래서 정말 재야에 묻힌 보석을 양지로 끄집어내었다고 생색낼 자격이 있는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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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수는 어쩌다 나라를 구했나


지난 25일 한겨레TV ‘김어준의 파파이스’ 마지막회 공개녹화가 진행됐다. 2014년 3월 시작돼 3년 6개월의 164회의 대장정을 마무리 짓는 순간이었다. 녹화장 한쪽에 플랜카드가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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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작가 도희석 / 손혜원 의원 페이스북



한 민주당 의원이 문구를 직접 짓고 그 의원의 팬클럽에서 만들어 걸어놓은 메시지였다.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 유우성 인터뷰부터 세월호 참사, 최순실의 농단, 박근혜의 탄핵 그리고 문재인의 당선. 그 흐름에 오롯이 서있었던 파파이스와 김어준은 분명 한국 현대사에 중요한 존재로 남을 것이다.


그런 그의 집요하고 줄기찬 의심과 질문들이 나라를 구했다고 할 수 있을까. 동의할 수도 있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전에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자. 김어준이 악의 무리로부터 나라를 구하려는 구국의 결단으로 <나는 꼼수다>를 하고 <파파이스>를 이어왔을까? 


그는 탁월한 기획자다. 동시에 대단히 편파적인 언론인이다. 하지만 합리적이고 공정함을 추구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편파적인 주장을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대중에게 전달하는데에 매우 능한 저널리스트다. 그는 그저 그에게 거슬리는 것들을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질문하고 잡고 늘어져왔다. 누가 뭐라해도 말이다. 잡아 죽인대도.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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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지난 9년 동안 권력과 그 공범자들이 김어준과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일터에서 내쫓는 통에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몇 명 남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나는 꼼수다>에 열광하고 <파파이스>에 분개했던 것은 김어준의 탁월함도 있었지만 난세가 만든 영광이기도 하다. 지적할 것을 지적하고 해야할말을 하는 곳이 거기밖에 없었으니까. 우리는 최고의 인적 물적 인프라를 갖춘 공영방송을 두 개나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팟캐스트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https://youtu.be/daMubLd7Eas

MBCKBS 파업 돌아오라 마봉춘 고봉순 광화문 문화제 중 세월호 예은 아빠 유경근 씨



일찍이 잘 갖춰진 법과 제도가 YTN뉴스의 노종면을, PD수첩의 최승호를, 뉴스데스크의 이용마를 일터에서 지켜줄 수 있었다면, 그들이 없는 9년을 막을 수 있었다면 지금의 김어준은 없었을지 모른다. 강연장에서 청년들에게 “야 쫄지마 씨바!”를 외치는 쾌남아재로 살았을지도.



총수의 공중파 입성을 별로 축하하지 않는다


사실 끝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김어준 총수는 지상파에 어울리지 않는다. 녹화 중에는 졸라도 못하고 씨바도 못하고 졸라씨바는 더더욱 못할 테니까. 그는 항상 자기만의 필드를 개척해왔다. 최초의 인터넷신문 <딴지일보>부터 대한민국 팟캐스트 기원 <나는 꼼수다>까지 그의 타고난 감각과 기획력은 기성의 뉴스유통방식에 신선한 자극을 줬다. SBS <블랙하우스>는 잘되겠지만 오래 안갈 것이다. 지상파에서 그간 부족했던 대중 인지도와 신뢰도를 어느 정도 채우고 그는 또 새로운 길을 개척하러 나설 것이다. 그렇게 될 것이다. ‘김어준표 콘텐츠’의 종착이 지상파 입성이라면 너무 시시하다.





근육병아리

편집 : 딴지일보 인지니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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