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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관람가 / Color, Black & White / 130분
 

 

 


그게 그렇게 모욕적이더라고


기회비용. 나타우트 폰피리야 감독의 <배드 지니어스>는 저 단어에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린 (추티몬 추엥차로엔수키잉) 은 공부도 잘 하고 집안 환경도 세심히 생각해서 오버하지 않고 현실을 사는 수재다. 어느 정도냐면 명문학교로부터 입학제안이 와도 기회비용으로 따져봤을 때 아버지의 금전적 부담이 커지겠다 싶으면 가차없이 거절할 정도다. 결국 좋은 제안을 받고 전학 온 린은 그 곳 학생 그레이스 (에이샤 호수완) 와 친해진다. 어느 날 린은 그레이스가 좋은 성적을 받아 학교에서 원하는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돕고자 시험 정답을 알려주게 된다. 작품은 여기서 린이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솜씨도 꽤 능숙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레이스가 애인인 팟 (티라돈 수파펀핀요) 에게 린의 실력을 알리면서 부정행위는 돈이 오가는 '비지니스' 로 승화된다. 세 사람은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해 필요한 STIC 시험까지 조작할 계획을 세울 정도로 대담해지고, 또다른 수재인 뱅크 (차논 산티네톤쿨) 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가담한다.


<배드 지니어스>는 태국에서 대입 시험 정답 유출과 관련해 발생한 실제 사건을 영화화했다. 작품을 보는 경험은 여러모로 의외다. 태국 작품을 한국 극장에서 보는 경험 자체가 지금도 흔치 않으니 말이다. 거기다 태국영화계는 주로 액션과 공포 장르만 있겠다는 선입견을 깨고 범죄물과 학원물을 신박하게 뒤섞었다는 점에서 또 한 번 의외다. 컨닝 관련 이야기지만 상영시간이 2시간 10분이나 되고, 다른 국가까지 오갈 정도로 거대하게 짜인 스케일까지. 이 의외인 부분들을 영화적 요소로 납득시키고, 보는 사람을 오락적으로 즐기게 만든다는 점에서 작품은 낯설음 대신 자신감과 패기가 있다는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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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성인 관객들에게도 재밌지만, 특히 '10대 관객들이 볼만하겠다' 는 점에서 특별한 존재감을 가진다. 이런 생각이 든 이유는, 한국에서 한국영화가 10대도 즐길만한 문화에 포함된 것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90년대까지 대부분의 한국영화들은 등급심사를 거치면 '청소년 관람불가' 를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 자체가 정학 감이었다. 학교 선생이 상영관에서 학생들이 있는지 단속했으니 말이다.


10대 관객들을 생각한답시고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작품들이 가뭄에 콩 나듯 나왔지만 대부분 주연으로 등장하는 스타에게 모든 걸 기대는 수준이었다. 정말 현실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해도 주로 성인이 된 사람들이 스스로 10대였었던 시기를 미숙했다고 반추하듯 만들어진 경우, 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서 더 잔인할 수 있었던 시기임을 이용해 성인들의 세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정도였다. 결국 독립영화 급 규모로 개봉하거나 청소년들 보라고 만들었는데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는 아이러니한 운명을 맞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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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흔한 10대 관객들을 위한 작품들

(물론 <바람>은 잘 만들었지만 정작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다는 점에서..)


현실을 다뤘다길래 보러 갔더니 우리 이야기라기보다는 그네들 이야기. 혹은 보긴 다 봤는데, 어째 작품을 만든 사람들에게서 훈계를 들은 느낌. '급식들' 운운하며 우습게 보지만 그리 말하는 성인들 중에서도 생각 없는 사람들이 차고 넘쳐 아예 SNS로 인증까지 하는 판인데, 스스로 10대 관객층이라고 가정했을 때 과연 위와 같은 풍토가 만족스러울까 싶다. 그런 점에서 태국이 <배드 지니어스> 같은 스타일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 좀 부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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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같은 애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공부는 잘 못해도 성적은 잘 받고 싶어하거든."


<배드 지니어스> 는 타겟으로 삼은 관객층에게 범죄물로서 매혹될만한 판타지를 제공한다. 그 나잇대라서 일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범죄의 핵심이 되며 그 연령대가 가진 정서와 자주 출입하는 공간, 애용하는 도구를 통해 영화적으로 흥미로운 상황을 만든다. 예컨대 샤프심이 부족해서 겨우 땅에 떨어진 한 개를 찾아 급하게 샤프에 넣는 장면은 꼭 탄창에 총알을 넣는 느낌을 주며, 문제 정답을 적은 지우개를 선생 몰래 친구에게 주려고 신발에 떨궈서 자신의 책걸상 뒤쪽으로 전달하는 등의 장면들을 긴장감 넘치는 음악과 편집, 슬로우 모션을 통해 살 떨리는 엔터테인먼트로 승화시키는 솜씨가 능숙하다는 얘기다. 특히 중반부부터 등장하는 STIC 시험 장면들에서는 긴장감을 절정으로 끌어올리기도 한다. 재밌다.


하지만 이 부정행위들을 마냥 유희적으로만 다루지도 않는다. <배드 지니어스>가 10대 학생들이 주인공이고, 무엇보다 실제 발생했던 사례를 영화화해서가 아닐까 싶다. 작품에는 린과 뱅크의 '학습능력' 에 금전적 가치가 부여되어 거래가 진행된다는 설정이 있다. 이 시절이 시험 성적 높게 맞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없이 유치하게 보이겠지만, 분명 매혹적인 설정이다. 주인공 린이 도입부에서 설명했던 '기회비용' 을 관련지어 한 가지 진지한 질문이 던져지기 때문이다. 만약 노력으로 이룩한 성과를 상환받을 기회가 았다고 쳤을 때, 그 눈에 보이는 이득이 범죄행위로 만들어진 것일지라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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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작품은 등장인물들이 범죄를 저질러도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설정을 가미시킨다. 네 주인공들이 이 정도 규모의 범죄를 진행하는 건 처음이라 은연 중에 미숙함을 드러낸다는 점. 범죄를 저지를수록 안정된 환경과 멀어지는 법인데 그걸 못 깨닫는다는 점에서 영악함보다는 아이들로서의 모습이 먼저 보인다. 린과 뱅크의 경우에는 태생적으로 흙수저이고 편모, 편부 가정이기에, 등골 빠지게 일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효도하려는 마음도 있음을 추가적으로 강조한다. 태생적으로 금수저 인생이며 범죄를 기획하는 그레이스와 팟조차 친구들의 능력을 이용하고 금전적 대가를 지불함으로서 서로서로 좋지 않겠느냐는, 미숙한 논리를 생각한다. 하지만 결과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금전적인 부분때문에 친구 관계는 갑과 을이 되고 의도치 않게 상대방을 상처주는 악역이 생겨난다.


네 주인공들이 가지는 욕망에는 보편성이 있다. 힘들이지 않고 좋은 성적을 맞고 싶어하며, 돈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은 모든 연령대가 꿈꾸는 욕망이다. <배드 지니어스>가 유려한 지점은 네 주인공들이 벌이는 행각을 한심하다고 지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그들 스스로 모욕감을 느끼게끔 연출한다.


팟은 공부를 하지 않고 탱자탱자 놀았던 탓에 친구들이 보는 데서 아버지에게 구박을 받는다. 이후 그는 반성은커녕 돈을 더 들여가며 더욱 부정한 방법을 써먹는데 몰두한다. 린과 뱅크는 거액만 보면 '우수한 두뇌' 를 활용하여 모든 상황을 합리화 시키고는 기꺼이 을이 되기를 자처한다. 죄는 흔히 저지르는 사람이 그 행위가 얼마나 모욕적인지를 모르는 데에서 생긴다. 반성하는 사람도 있고, 끝까지 정신 못 차리는 사람도 있지만 작품은 그걸 한심한 청춘이라 욕하지 않고, 그렇게 말하는 꼰대 어른도 투입하지 않는다. 물질과 눈속임은 커다란 모욕이 될 수 있으며, 이를 느낀 당신은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이 주인공들에게 닥칠 뿐이다. 학생이든 아니든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진중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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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 지니어스>는 범죄물이 주는 쾌락에 충실하면서도 윤리적 지점을 신중하게 고려하는 작품이다. 작품은 궁극적으로 교육과 자아성찰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인간이 가진 적나라한 욕망을 드러내는 류의 범죄물과는 다른 길을 간다. 사람 씁쓸하게 만들고 생각 많이 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뭐랄까. <배드 지니어스> 는 다 보고 나면 건강해진다는 느낌이 든다. 범죄물에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겠지만 정말 그렇다. 그리고 이런 건강함을 주는 것 또한 대중을 생각하고 만든 작품들이 지녀야 할 의무다. 언젠가 모욕에 무감각해질 시기가 찾아올 때를 대비해 스스로에게 질문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인상 깊다.


누가 봐도 좋지만 특히 수능 전후로 해서 10대 관객들이 보면 자존감 회복에 아주 좋다. 그대들을 위한 작품이 여기 있다.




p.s.

 

1) 소제목 '그게 그렇게 모욕적이더라고'는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 에서 백윤식이 한 대사의 일부다. "돈. 원 없이 썼지. 근데 그게 그렇게 모욕적이더라고. 모욕."

 

2) 15일을 기점으로 블록버스터들에 밀려 상영관이 확 줄어들 조짐을 보이고 있다. 개봉한지 2주도 안 됐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홍준호


편집: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