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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첫 수능을 치르고 벌써 두 번, 세 번째 수능을 거쳐 이제 네 번째 수능을 치르는구나. 우습지만 그 기간 동안 내가 가장 많이 머리에 떠올렸던 생각은 엉뚱하게도 너의 고교입시였다.


중3 시절, 담임선생님께서는 너를 과학고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그 의견에 겉으로는 동의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그닥 맘에 들지 않았다. 소수를 위한 교육이 과연 제대로 된 교육일까 의심했었거든.


아니나 다를까, 별다른 지원이나 도움도 받지 못한 너는 과고 입시에 떨어졌다. 그 뒤로도 일관되게 나는 너에게 어떤 종류의 특수한 사교육이나 입시를 위한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게 아마 두 번, 세 번 연속으로 수능에 실패하는 너를 보면서 내가 떠올렸던 아쉬움의 원인인지도 모르겠다. 그 때 내가 신념을 꺾고 전격적인 지원을 했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후회였던 거겠지.




2. 

고교에 진학해서 학교생활에는 잘 적응하면서도, 입시위주의 사교육 시스템이 얼마나 현존하는 고교교육제도를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몸으로 느끼며 고통스러워하는 너에게 진짜로 해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학원 강사들에 의해 학교 시험문제지까지 빼돌려져 일부 학생들에게 공급되는 범죄적인 상황까지 포착될 정도였으니 말을 더 해서 무엇 하겠니.


기초적인 내용은 가르쳐주지도 않은 상황에서 모든 학생이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하고 왔을 것으로 가정을 하고 진행되는 끝없는 문제풀이만으로 구성된 수학시간으로 인해 넌 수학을 근본적으로 거부하기도 했었지(이건 순전히 엄마 탓이다. 네가 나를 닮았더라면 수학을 못할 리가 없었지. 대신 나는 잘 못하는 영어를 곧잘 하더구나. 험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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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상처뿐인 고교시절을 마무리하고 받은 수능성적은 엉망이었고, 너는 자연스럽게 재수, 삼수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난 오히려 홀가분했어. 네가 시스템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한 길을 가면서 어떤 성과를 낼 지 궁금했거든.


과연 너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평균 이하로 떨어져버린 수학실력을 어떻게 해서든지 수능 모의고사 시험 성적 기준으로 최상위 등급까지 몇 개월 만에 끌어올려 버리더구나. 그렇게 만들기 위해 네가 겪었던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도 못하겠다.


난 그런 너의 모습을 보면서 뭔가 안심하며 한 단계 올라설 수 있었다. 대학입시? 수능성적? 그런 거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자신이 원하는 일인데 잘 못하던 것을, 자신의 필요에 의해,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추진해서 최상의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것만 할 줄 알면 다른 아무것도 필요가 없는 법이거든.


너는 그것을 해냈고, 그런 성취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고 자신만의 세계를 살아갈 수 있는 성인이 되었다는 뜻이거든. 이미 내 품안의 자식이 아니라 홀로 설 수 있는 한 명의 성인이 되어 버린 것이고, 그 상태에서 대학 입시를 치러가고 있는 수험생이 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때 이미 너에게 만족했어.


비록 불운이 겹치면서 삼수의 결과에도 만족하지 못해 사수의 길까지 가게 되었지만 내가 전혀 걱정하지 않고 네 스스로 원하는대로 하라고 한 건 이런 너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야. 오히려 네가 스스로 수능을 네 번씩이나 보는 것은 좀 너무하다며, 결과가 어떻든 이번이 끝이라고 먼저 선언을 해버렸지. 진짜 그렇게 할 생각인지 궁금하긴 하다(다섯 번 해도 별 문제는 없는데. 엄마의 등짝 스매싱이 날아오겠구나).





3. 

또 다른 문제도 있었지.


삼수중인 너에게 아빠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하게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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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병세를 숨길까하는 망설임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이미 나에게 너는 다 큰 성인이었고 내가 보호하고 키워야 하는 아이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가족의 일원이자 동료였기 때문이야.


담담하게, 우리 가족은 평상심을 잃지 말고 살아가길 바란다고 이야길 꺼낸 나에게, 오히려 너는, 평상심을 유지하기 가장 힘든 사람이 아빠일 테니, 아빠부터 마음을 단단하게 먹고 살아가자며 내 걱정을 했었지. 건방진 것.


그래, 별거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이고, 누구나 중한 병에 걸릴 수도 있는 법이지. 호들갑 떨 일도 아니고 소란을 피울 일도 아니다.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각자 해야 할 일을 지속해 나가며 버티는 것이 인생이거든. 그래도 가끔씩 와서 걱정스러운 말투로 “아빠, 오늘 컨디션은 어때?” 하고 물어주는 너의 모습에서 나는 깊은 가족애를 느낀다. 그거면 된 거야.




4. 

특이한 일은 하나 더 있었다.


계획대로였다면 지금쯤 너는 수능을 이미 본 상태였어야 하고 결과까지 어지간히 다 나왔을 시점이거든. 그런데 포항에 꽤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면서 수능 자체가 일주일이 연기 되어버리는 일이 터졌다.


수능이 일주일 연기된다는 소식을 전해주는 나에게 ‘헐~’ 한마디로 웃어넘긴 것이 바로 너였다.


나에게는 조금 불편한 일에 불과하지만 누군가는 수능을 볼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되는 상황이라면 연기하는 게 당연하고 감수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라며 꽤 긴 시간 동안 이어져온 긴장의 상태를 풀지 못하고 일주일이나 뒤로 미루는 것을 서슴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며, 과연 내 딸이다 싶기도 했어. 


그래도 신체 리듬이나 컨디션 조절해 놓은 게 흐트러지지 않겠냐고 걱정을 하니까, 그런 일로 영향을 받는 것은 아마추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비웃던 너, 참 건방지고 재수 없다. 누가 내 딸 아니랄까봐.


돌이켜 보면 재수 삼수 생활은 오히려 너에게, 또 우리 가족에게도 더 풍요로웠던 것 같기도 해. 하루 스무 시간씩 강제로 책을 들여다봐야 했던 고교 기숙사 생활에 비하면 학원생활을 최소화 하고 혼자 공부하는 위주로 생활하던 너는 재수 삼수 생활이 훨씬 더 자유롭기도 했었지. 알바도 하고 취미생활도 하고 심지어 매번 수능을 그렇게 망쳐놓고서도 여행까지 다녀오더라.


말 나온 김에 비록 내가 고전 영화 다 보여주고 어려서부터 SF에 판타지 영화들을 섭렵하도록 도와주긴 했지만 무슨 삼수생 사수생이 개봉영화를 안 본 게 없고, 한 때 영화평론 프로그램을 만들던 아빠보다 영화를 더 잘 알아. 그게 수험생의 본분에 맞는 일이니? 영화 좀 작작 봐라, 이것아.


그래, 그렇게 우리 가족은 지난 몇 년 간 잘 살아왔어. 암환자인 아빠에, 일에 치이는 엄마, 사수생 딸이 사는 가족이니 남들이 보기엔 불행으로 점철된 가족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끼리는 나름대로 행복하게 잘 살아온 거 아니겠니.


그리고 이제 우리 가족은, 아니 너는 또 한 단계의 도약을 할 때가 온 것 뿐이야.




5. 

이제 수능이 끝나고 나면 그 결과가 어떻든 간에 너는 인생의 방향을 정하게 될 거다. 그 방향이 옳은지 그른지는 지금 당장은 아무도 알 수가 없어. 네가 절실하게 원하는 대로 가게 되는 좋은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게 인생 전체에 비추어 훌륭한 결과인지 조차 알 수가 없는 거다.


인생은 그래.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 싶어 하지만 그게 언제나 내가 원하던 길이 되지는 않거든. 사람은 심지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존재이니까 말야.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고등학생이나 수험생의 신분을 끝내고 내 스스로 택한 나의 길을 가기 시작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야. 남들이 정해 놓은 길을 벗어나서 이제부터는 나만의 인생을 살아가는 거니까 말이지.


이게 두려워서 수많은 부모들이 그 뒤의 길까지 모두 다 정해주려고 헬리콥터 맘이네 뭐네 하면서 설치기도 하지만 그거 모두 바보짓이다. 너는 너의 길을 가면 되는 거야. 그게 너의 인생이 되는 거지.


나의 세계는 이제 슬슬 내리막길을 가고 있어. 굳이 병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야. 내 나이쯤 되면 이제 슬슬 나의 세계가 막을 내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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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동시에 너에게는 이제 너만의 세계가 열리는 중이야. 이 자연스러운 연결과정, 그 이어짐이 나에게는 정말로 오묘하고 신비롭게 보인다. 내 할아버지의 삶이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그것으로 이어지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이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이어지더니, 이제 나와 네 엄마의 삶이 자연스럽게 너에게로 이어지고 있는 중이라는 얘기지.


정말 신기한 일이야. 나의 세계가 사실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통해 이어져온 세계라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이 지나면 그 세계의 진정한 주인이 내 자신이 되어 버린다는 점. 이게 인생의 묘미인 것 같기도 해.


너에게 주어진 세계를 잘 가꾸며 살아가길 바란다. 오늘 시험 보고 나서 며칠 있으면 또 어디 여행 간다며? 조심해서 재미있게 잘 놀다 오고.




6. 

마무리는 이 얘기로 해줄게. 재발하고 나서 2차 수술 받으러 갈 때, 이번엔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을 먹고 너에게만 했던 얘기 있지? 그 얘기가 오늘 너에게 해 줄 진짜 얘기였어.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너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 그건 바로 너의 행복이다. 너의 행복은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아무도 너에게 가져다주지 않아. 너의 행복은 네가 스스로 싸워 이겨서 빼앗아 와야 한다.


부디 행복하거라. 내 딸아.






2018년, 수능 시험장에 들어갈 딸의 뒷모습을 생각하며

물뚝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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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