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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2. 18. 화요일

onesixth












옛날 옛적에 플라톤이라는 사람이 있었더랬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랬더라.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고 죽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무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이었더랬다. 그럼 다음 시간에 만나요 여러분 안녕~



이렇게 간단하다면 참 좋겠지만, 세상만사 어느 하나 짧게 요약할 수 있는 건 없더라는 게 늘 문제다. 근데 왜 갑자기 플라톤이냐고 물을 수 있겠다.  난데없는 마빡 3연타를 얻어맞은 나는 아! 국가가 아니, 딴지가 나를 부르고 있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버렸다. 원래 아무런 계획이 없었던 터라 이제는 레퍼토리를 만들어내야 할 상황. 도대체 언제 왜 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책장에 <국가>가 꽂혀있더라. 그리고 심슨의 팬인 나는 이렇게 외칠 수 밖에 없었다. Doh!

<국가>에게 받은 첫인상은 아, 이 남자, 왜 서구학문의 근원이라고 부르는지, 이제는 알겠어♥였다. 씨바, 합성에만 필수요소가 있는 게 아니었다. 혹시라도 어떤 분야든 공부에 뜻이 있거나, 혹은 나처럼 두꺼운 책에 페티쉬가 있는 님들이라면 우선 플라톤부터 읽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앞서 소개한 <국부론> 등을 비롯, 어떤 텍스트라도 훨씬 읽기가 쉬워지리라 장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논증방식에 있어서만큼은 플라톤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책이란, 글쎄, 없는 것 같다. 이걸 진작에 알았더라면 그 고생은...

흔히 <국가>로 알려져있지만, 옮긴이가 지적하듯 이 책의 제목은 정체 혹은 정치체제라고 옮기는 편이 더 좋을 듯 싶다. 실제 내용에 있어서도 (소크라테스로 위장한) 플라톤이 당시에 존재했던 정치체제들, 명예지상정체timokratia, 과두정체oligarchia, 민주정체dēmokratia, 참주정체tyrannis 등의 각종 - 정체들을 비판하고, 최선자정체aristokratia(소위 철인정치)를 해야만 하는 이유를 밝히는 데에 목적이 있으니까. 이데아니, 동굴의 비유니 하는, 플라톤하면 으레 떠올리게 되는 철학적인 이야기들도 왜 최선자정체를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다 나오는 디테일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응? 근데 뭔가 이상한 걸 못 느꼈는지. 다른 건 다 둘째치더라도 저 목록에 민주정도 있네? 게다가 플라톤은 저 순서를 최선자정체에서 타락해가는 과정으로 설명해 놓았다. 그러니까 민주정은 참주정보다는 겨우 나은, 어쨌든 졸라 별로인 정치체제인 거다. 그는 아테네인이었고, 아테네하면 민주정의 고향 아니었던가? 글타. 플라톤은 불만만 많은 사회불순세력이었던 것이었다! 농담이 아니라니까. 그럼 플라톤은 왜 그리도 민주정에 불만이 많았던 걸까.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의 부조리한 죽음 때문에?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지만 조금 더 디벼보기로 하자.

BC 427년 플라톤이 태어났던 당시 아테네는 한창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와중이었다. 좀 더 거슬러올라가서 BC 479년(딴지 300의 기원이 되는) 관대한 크세르크세스 1세의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이제 그리스 땅에도 평화와 번영의 시기가 오나 싶었는데 아시다시피 그렇지가 못했다. 바로 이듬해 델로스 동맹을 결성한 아테네가 역관광에 나서면서부터 승리의 두 주축국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사이가 점차로 나빠지더니, BC 459년에 일단 가볍게(?) 몸을 풀고는, BC 432년부터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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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만 봐도 대부분의 전투가 각자의 대의명분을 부르짖는 양편이 만나 어느 쪽이 더 바보짓을 많이 하느냐로 결판이 나듯, 이 전쟁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주정과 그리스인에 의한 그리스를 부르짖는 아테네, 그리고 명예정과 아테네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스파르타, 하지만 명분은 어디까지나 명분일 뿐 두 나라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힘만 믿고 욕심을 채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시를 기록한 투퀴디데스는 이 전쟁을 이렇게 평가한다.


여러 도시의 정파 지도자들은 한쪽에서는 대중의 정치적 평등을, 다른 쪽에서는 건전한 귀족정치를 내세우며 그럴듯한 정치 강령을 표방했다. 그러나 그들은 말로는 공공의 이익에 봉사한다면서도 사실 공공의 이익을 전리품으로 여겼다. 그들은 반대파보다 우위를 차치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하며 극단적인 잔혹 행위를 일삼았으며 정의나 국익을 무시하고 반대파보다 더 잔인하게 보복했다. 그들은 그때그때 자신이 속한 정파를 즐겁게 해주는 것만을 행동 기준으로 삼았으며, 당장의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불법적인 투표로 유죄판결을 내리거나 폭력으로 권력을 탈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 쪽도 종교적 경건함 같은 것은 존중하지 않았고, 수치스러운 행위를 미사여구로 정당화할 수 있는 자들은 명망이 높아졌다.

- 투퀴디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서출판 숲, p.288



힘에 의한 정의. 플리타이아이를 파괴한 스파르타와 멜로스를 파괴한 아테네가 보여주었던 강자의 논리는, BC 415년 아테네의 대대적인 시칠리아 원정으로 극에 다다른다. 그리고? 그걸로 끝. 이 전쟁을 통해 아테네는 명분도 잃고, 판돈도 잃고, 그야말로 모든 것을 화끈하게 한방에 날려버리곤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아테네에게 승리를 거둔 스파르타의 좋은 날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그리스 공동의 숙적 페르시아에게 도움을 구했다는 오명에다, ‘아테네의 깡패짓이 사라지니 이제 저놈이라는 불만이 더해져 또 다른 도시국가들과의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두 나라 모두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와 로마에게 차례로 정복당할 운명이었다.


아무튼 아테네가 항복했던 해인 BC 404년 플라톤은 23살이었다. 아테네의 최전성기를 함께 하며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부상을 입었던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던 해이기도 했다. 시칠리아 원정을 주장하다가 스파르타로 망명해서는 다시금 페르시아로 도망쳤다가 다시금 아테네로 돌아와서 과두정을 기획했던 알키비아데스가 그의 제자였다. 항복 후 스파르타의 협력 아래 세워진 30인 참주의 핵심인물 크리티아스도 그의 제자였다. 패전 1년 만에 다시금 민주정이 회복된 아테네에서 그는 가장 미움받는 두 인물의 스승으로서 시민들의 손가락질을 피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비방을 비롯, 여러 죄명을 뒤집어 쓰고 법정에 오른 소크라테스는 그래, 씨바, 내 이미 살만큼 살았고, 조국 아테네가 희생양의 피를 원한다면 내 기꺼이 목숨을 내어주지, 까짓것이라는 당당한 자세로 독배를 원샷하고 죽음을 맞는다. 글쎄, 좁은 사견으로는 이 정도는 되어야 애국보수라 칭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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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애국보수


소크라테스의 마음이야 어쨌든, 아테네 시민들의 비이성적인 모습에 플라톤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잘나간다고 거만떨더니 콧대가 납작해져서는 반성은커녕 희생양만 찾고 있다니, 힘이 곧 정의라고 할 때는 언제고, 한심하게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분연히 스승 소크라테스의 가면을 쓰고는 바로 이 힘의 논리를 반박하는 것으로 <국가>를 시작한다.


"... (또한) 저희는 선생님께서 트라시마코스의 주장, 즉 올바른 것은 남한테 좋은 것이며 강자의 편익이되, 올바르지 못한 것은 자신을 위한 편익이며 이득이지만, 약자에게 있어서는 편익이 되지 못하는 것이라는 주장과 의견을 같이하시는 것이라고 단언할 것입니다.(따라서) 선생님께서는 저희에게 비단 올바름이 올바르지 못함보다도 더 낫다는 주장만 밝히실 것이 아니라, 그 각각이 그것을 지니고 있는 당사자에게 그 자체로서, 즉 신들이나 남들에게 발각되건 또는 그렇게 되지 않건 간에, 무슨 작용을 하기에, 한쪽은 좋은 것이지만, 다른 한쪽은 나쁜 것인지도 밝혀 주십시오."

"... 비난받고 있는 올바름을 도와 주기를 내가 포기한다는 것은, 아직 숨을 쉬고 있고 말도 할 수 있는 자로서 그걸 구조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믿음이 없는 짓이 아닐까 두렵기 때문일세. 그러니 나로서는 내가 할 수 있는 한에 있어서 올바름을 구원하는 것이 상책일세. 그러니까 바로 이런 경위로 해서, 즉 한 사람이 한 가지 필요 때문에 다른 사람을 맞아들이고, 또 다른 필요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을 맞아들이는 식으로 하는데, 사람들에겐 많은 것이 필요하니까, 많은 사람이 동반자 및 협력자들로서 한 거주지에 모이게 되었고, 이 '생활공동체'에다 우리가 '나라'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네. 어떤 이가 일을 더 잘 해 내게 되는 것은 한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기술에 종사할 때인가, 아니면 한 사람이 한 가지 기술에 종사할 때인가?... 이로 미루어 볼진대, 각각의 것이 더 많이, 더 훌륭하게, 그리고 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성향에 따라' 적기에 하되,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한가로이 대할 때에 있어서이네."

- 플라톤 지음, 박종현 역주, "국가", '2권', 서광사, p.142-149



끊임없는 대화들로 이루어진 책이라 인용 뽑기가 너무 힘들다. 암튼 위의 내용이 <국가>에서 진행되는 논의의 핵심이 된다. “어차피 정의란 있는 놈들이 만드는 거임. 정직하고 착한 사람들은 그냥 힘이 없어서 그런 거고, 나쁜 놈들일수록 오히려 떵떵거리면서 잘만 살아감. 근데 왜 올바르게 살아야 되는데? 소크라테스, 너님은 어케 생각함?”이라는 질문에 “그래,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음. 허나 그건 당장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뿐. 우리 아테네를 한 번 봐. 힘있다고 건방떨다가 좋게 되지 않았음? 제아무리 힘이 있어도 올바르지 못하다면 결국엔 좋게 되는 거임.”이라 플라톤이 답했다고 생각하시면 되겠다. 이는 아테네 뿐만 아니라 진시황을 비롯, 동서고금을 막론한 각종 제국들의 흥망을 통해 증명되어온 게 아닐까 싶다. 다만 때론 그 시간이 너무 길어서 암울할 뿐. 뭐 그래봤자 겨우 몇 세대씩이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올바르다라는 게 뭐냐?라는 질문이 뒤따르는 건 당연한 수순. 플라톤의 생각으로는, 망치가 못을 박는 데 쓰이고 냄비받침이 냄비를 받치는 데 쓰이고 스마트폰이 다른 이와 연락을 주고 받는 데 쓰이는 것처럼, 각자의 역할에 맞게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게 곧 올바름이다. 물론 못을 박거나 뜨거운 냄비를 받치는 데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는 스마트폰을 만들거나 구매하는 목적과는 매우 동떨어진, 즉 올바르지 못한 사용법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물건에는 저마다의 용도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각자의 재능과 성향에 맞는 기술이 있기 마련이다. 이 기술들은 모두 사회적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고, 따라서 저마다의 기술로 저마다의 역할을 다하는 것, 이게 곧 플라톤이 말하는 올바름이다. 농부에게는 농부로서 요구되는 사회적 역할과 그에 따른 기술이 있다. 상인은 상인으로서, 임금 노동자(일부러 넣은 게 아니라 <국가>에는 실제로 이 단어가 등장한다.)는 임금 노동자로서, 예술가나 의사 등 각양각색의 기술을 지닌 사람들 모두 각자의 기술에 걸맞게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한다는 것이다. 유교식으로 말하자면 정명론, 아담 스미스식으로 말하자면 사회적 분업 되겠다. 특히나 아담 스미스의 경우, <국부론>의 기초공사를 <국가>로 했다고 말해도 좋을만큼 논의가 유사하다.

플라톤이 국가를 저마다 사회적으로 유용한 기술을 지닌 개인들이 모인 것으로 파악했다는 점을 일단 기억해두시라. 1) 모든 기술은 사회적 필요로 비롯된 것이고, 2) 기술은 각자의 재능과 성향에 따라 선택되기에, 3) 어떤 기술을 가졌는가에 따른 우열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4) 따라서 모든 기술은 그에 걸맞는 합당한 댓가를 받을 수 있어만 한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레 귀착되기 때문이다. 물론 각 기술에서의 우열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요리사라면, 누군가는 기가 막힌 요리를 만들어내는가 하면, 또 다른 누군가는 그저 그런 요리 밖에는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리고 플라톤은 이러한 기술에 있어서의 우열이 개개인의 능력이나 노력보다는 오히려(사실상 이 또한) 부와 빈곤에 의해 기인하는 결과라고 본다.



"이번에는 이런 것들이 다른 일꾼(장인)들을 타락시켜서는, 그들을 역시 나쁜 일꾼으로 되게끔 하는지 생각해 보게나."

"그것들은 어떤 것들인데요?"

"부와 빈곤일세." 내가 말했네.

"어떻게 말씀입니까?"

"이렇게 해서라네. 자네에겐 도공이 부유해지고서도 자기 기술에 여전히 마음을 쓰려고 할 것으로 생각되는가?"

"결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사람은 이전의 그보다 더 게으르고 무관심해지겠군?"

"훨씬 더 그렇게 될 게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더 못한 도공으로 되지 않겠는가?"

"이 경우 또한 훨씬 더 그렇게 됩니다." 그가 말했네.

"또한 정작 그가 가난으로 인해서 자기의 기술과 관련되는 도구나 그 밖의 것을 마련할 수 없을 경우에는, 제품들을 더욱 볼품없게 만들어 낼 것이며, 또한 자신의 아들들이나 또는 자신이 가르치는 다른 사람들을 한결 못한 장인들로 기를 걸세."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 두 가지, 즉 빈곤과 부로 인해서 기술의 산물들도 더욱 못해지지만, 장인들 자신들도 더욱 못해진다네."

- '4권', p.261



수호자, 즉 정치가도 기술이 필요하기란 마찬가지이다. 사회를 수호하고 올바르게 돌아가게 하려면, 올바름을 추구하고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이게 바로 철인정치(최선자정체) 되겠다. 엘리트주의의 향기가 진하게 풍겨나는 개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흔히 생각되는 엘리트주의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일단 앞서 말했듯 플라톤은 어떤 기술에 있어서 능숙하거나 못할 수 있다고만 말했을 뿐, 어떤 기술이 다른 기술에 비해서 더 낫다거나 못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실제로 <국가>에서는 어떻게 정치가에게 필요한 기술을 갖춘 인재들을 양성할 수 있는지를 상당히 길게 논의하는데, 이게 졸라 빡세다. 플라톤의 본격 정치가 양성 프로그램, 간단하게만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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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성에게 각자 재능과 성향의 차이가 있듯, 여성에게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성별에 따른 자격제한 따윈 불합리하다.

2. 육체단련을 통한 몸과, 시가(학문)공부를 통한 혼, 이 양자간의 조화를 갖춘 인물을 양성토록 한다.

3. 일단 이른 나이에 충분한 예비교육을 한 후, 철학, 수학(산술학), 기하학, 천문학(과학), 변증술(논리학) 등을 고루고루 어떠한 노고도 아끼지 않고(빡세게) 가르친다. 단, 이 교육이 강제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강제적인 배움은 혼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유롭게 배울 때에만 저마다의 재능과 성향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4. 수호자로서 시민들을 아끼고 보호하려는 품성을 갖추어야만 한다. 따라서 군대는 의무이자 첫 번째 시험이 된다.(약 20세)

5. 군대와 관직을 두루 거치며 다양한 경험을 통해 단련받도록 한다. 학문 역시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며, 이 또한 품성과 자질을 판단하는 중요한 시험의 과정이다.(약 30세)

6. 앞선 과정들을 통해 육체와 학문, 실무경험에서 모자람이 없는 자들이 번갈아 가며 통치자로 일하게 한다.(약 50세)

7. 사유재산이 있으면 타락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집이나 곳간 등은 물론, 어떠한 종류의 사치품도 역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8. 대중을 위해 일하는 이들에게는 소유 자체가 경건하지 못한 짓이다. 화폐 등의 사유재산은 물론, 가정이나 동거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공동 식사, 공동 생활을 하게 하고, 처자도 공유하여 함께 책임지고 양육토록 한다.




아까는 빈부격차를 비판하더니, 이제는 기원전 4세기에 남녀평등을 이야기하고 지배계층의 결혼과 가족제, 사유재산 등을 부정하고 집단난교를 옹호하기까지……. 인류사를 통틀어서도 플라톤의 기준에 한두 개나마 만족되는 정치가가 과연 얼마나 될까 싶다. 그야말로 졸라게 공부해서 어떠한 호사도 누리지 않고 오로지 공익을 위해서만 일하면서도 계속해서 공부하지 않으면 플라토닉 엘리트는 꿈도 꿀 수가 없다. 게다가 군복무는 정말이지 치명타.


읽으시느라 고생많으셨다. 적당히 인용으로 때울 수가 없어서 나도 며칠 째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 이제 결론이다.

<국가>에는 적어도 세 가지의 생각해 볼 점이 있다. 본문에선 제대로 언급되지 않았으나 우선은 설득의 기술이다. <국가>에서 플라톤의 주장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방법 산파술을 따라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다.


"나는 이러이러하다고 생각함. 소크라테스 너님도 동의하지?"


"응?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음. 좀 더 설명 부탁."

"그러니까 내 말은 이러이러하다는 거임. 아직도 동의 안 됨?"

"좀 더 생각해 보고. 그러니까 네 말은 이러이러하니까 이러이러하다는 거지?"

"OK"

"그러면 이러이러하다면 이러저러 하겠네?"

"응, 그렇지."

"이러저러하다면 저러저러하다는 것도 동의?"

"응, 듣고 보니 그런 거 같아."


"그러면 자 내 말을 들어봐. 저러저러하다는 건 이런 거야. 쏼라쏼라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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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꼰대질과 설득은 이처럼 미묘한 차이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상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대화를 시작하는 것. 졸라 힘들고 어려운 길이고, 여러모로가 아니라 걍 스스로가 모자라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매우 자주 꼰대질의 유혹에 빠져드는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배우고 싶은 자세이기는 하다.

두 번째. 재능과 성향의 차이라는 논의에서 보이듯, 플라톤은 '사람'과 '사람들'을 혼동하지 않는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게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삼단논법의 기초가 된다. 가령 이런 거.


김연아는 노력해서 성공했다. 김연아는 사람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언뜻 보면 그럴 듯하고, 실제로도 많이 사용되는 논리이다. 하지만 이거 논리적으로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 논증이 성립하려면 '김연아=사람'이 성립해야만 한다. 그런데 김연아는 사람과 등치가 아니다. 응? 무슨 말이냐고? 그러니까 김연아는 사람이지만, 사람은 김연아가 아니라는 말 되겠다. 즉 김연아는 사람들 중의 하나일 뿐이고 '김연아≠사람들'이므로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 좀 더 유식한 말로는 매개념부주연의 오류에 빠져있는 것이다. 뭐 그렇다고 귀납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종류의 명제도 당연히 아니고. 따라서 위의 논리가 참이 되려면 따라서 "어떤 사람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로 고쳐져야만 한다. 마치 부대찌개의 풍성한 야채가 김이 빠지며 허무감만 남기듯 느낌이 사뭇 다르다. 실생활 버전으로는,


1) 엄마 친구 아들은 노력해서 전교 1등이 되었다. 근데 넌?

2) 친구들 여친은 다이어트도 하고 예뻐지려고 노력한다. 근데 넌?

3) 다른 직원들은 노력해서 빼어난 성과를 올리고 있다. 근데 넌?

4) 남들은 노력해서 좋은 대학에 좋은 직장, 좋은 동반자, 좋은 집을 구해선 잘만 살고 있다. 근데 넌?
등등등등등등...


이 논리가 질이 나빠지면 소수자차별이나 유사과학, 파시즘으로 빠지기도 한다. 소위 '자기개발서'가 불편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뻑이야 그냥 그러려니 하더라도, '글쓴이=사람들'로 착각하는 게 대부분이고, 더러는 '독자=非사람 혹은 미성숙한 사람'으로까지 오만을 부리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럴 때 <국가>를 읽거나 논리학을 공부한 너님은 "씨바, 당신의 논리는 매개념 부주연의 오류를 범하고 있어"라고 조리있게 반박할 수 있다. 물론 각종 불이익이 뒤따를 수는 있겠지만.

마지막으로 세 번째. 현재의 민주주의가 어떤 모양인지를 한 번 고민해볼 수 있겠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부정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란 그 구성원들 모두에게 상당한 수준의 양심과 비판력을 요구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필요한 정보들이 개별 구성원들에게 충분히 전달되고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게다가 다수결의 원칙엔 선거에서의 승자 독식과 같은 도저히 묵과하기 어려운 문제가 따른다는 것, 그리고 현재의 '대의제' 민주주의의 경우, 단순히 투표용지만 잔뜩 나누어 주는 걸로 참정권을 보장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닌지, 여러가지 생각해 볼 꺼리들이 있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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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행위는 참정권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황금으로 가득한 각자의 그 금고가 그런 정체(명예지배정체)를 무너뜨리지. 먼저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그걸 소비할 길을 찾는데, 이를 위해 법률을 왜곡하네. 그래서 자신들도 그들의 아내들도 법률을 따르지 않게 되네. 그러니까 자네가 거지들을 볼 수 있는 나라(과두정체)에서는 그곳 어딘가에 도둑들과 소매치기들 그리고 신전 절도범과 이런 류의 온갖 나쁜 짓을 하는 자들이 숨어 있는 것이 분명해. 우리가 나라를 수립하면서 엄숙히 말한 것들에 대한, 즉 월등한 성향을 지니고 있지 않는 한, 그래서 바로 아이일 적부터 훌륭한 놀이를 하며 이와 같은 모든 것에 종사하지 않는 한, 결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한 것에 대한 이 나라(민주정체)의 관대함과 어떤 형태의 좀스러움커녕 전적인 경시는 이 모든 걸 얼마나 당당하게 짓밟아 버리며, 어떤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일들에 종사하다가 정치 활동을 하려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으면서, 그가 대중(군중)에 대해서 호의를 갖고 있다고 말하기만 하면, 이를 얼마나 높이 사는가?"

- '8권', p.523-538



마지막 인용은 각 정체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지만, 정치가 어떻게 타락해가는가로 보셔도 무방하겠다. 무슨 결론이 본문만큼이나 길다. Sorry. 그럼 플라토닉 러브는 여기까지만.







onesixth


편집 :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