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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CL6tWv_7FM


여기, 게임이 있다. 2017 10 홀연히 등장한 , 최근까지 트위치, 유튜브 개인 게임방송들과 애청자들 사이에서 돌풍을 일으킨 게임. <Getting over it with Bennett Foddy>.


게임의 어느 장면을 보든 간에,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라면이상한 게임'이라는 느낌을 받게 것이다. 실제 게임의 진행 내용이나 특징을 알게 수록 더더욱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게임이 시작하면 상반신 나체의 대머리 남자 하나가 항아리에 들어간 채로 망치를 하나 들고 있다. 마우스의 움직임에 따라 남자의 망치 끝이 따라 움직인다. 다른 조작은 없다. 게이머는 망치로 벽을 찍고 올라 서든, 점프를 하든 해서 도저히 불가능할 것만 같은 장애물들을 타고 넘어야 한다.


끝을 없는 어딘가로 이동하는 게 게임의 전부다그러다가 망치질을 잘못 하거나, 손이 조금이라도 미끄러지면 하염없이 추락하며 처음으로 돌아간다. 중간 단계에서 저장하거나, 3번의 기회를 주지도 않는다. 게임이 되면, 어지간한 사람들은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관심 자체가 생기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이 이상한 게임이, 어째서인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국내외 유명 게임방송인들이 이상한 게임을 하며 목적도 없는 빡침에 절규하는 과정을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찾아본다. 동시접속자 200만을 돌파한 배틀그라운드도, 최근 월드 챔피언쉽 대회를 마친 리그오브레전드도 제치고, 적어도 올해 11 초는 짧게나마 이상한 게임이 가장 트렌디한 시대였다고 기록할 있다.


사실 다수의 중장년 세대에겐 개인 게임방송, 요즘 말로 게임 스트리머나 게임 유튜버들이 게임하는 모습을 시청하는 문화 자체가 낯선 일이다. 나도 그게 낯선 사람 한 명이었다. 게임이라는 거의 안 할 뿐더러 남이 하는 걸 보는 재미 포인트를 별로 공감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은, 뭔가가 있다. 아래 영상을 보면 뭔가' 어느정도는 공감할  있다.


https://youtu.be/AJTpR7aDbAI

(욕과 비명이 난무하니 공공장소에서는 조심해서 보시길)


그것은 바로 좌절이다.


초기 무한도전에서 소와 줄다리기를 하고, 포크레인에 맞서 삽질을 하는 가운데 너무나도 당연히 처참한 패배를 맞는 과정. 나영석PD 예능에서, 가능할 것도 같지만 사실은 실패의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미션 게임에 도전해서 결국 먹거리와 잠자리를 모두 빼앗기는 과정.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서 실컷 좌절의 구렁텅이 속에서 쓰라린 패배감의 쌍 싸대기를 맞는 과정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 재미가 검증된 컨텐츠 형태다. 마찬가지로 유명 스트리머들이 몇 시간에서 심지어 몇 십 시간을 매달려 겨우겨우 올라선 절벽 끝자락에서, 한순간 실수로 다시 원점에 복귀하는 순간의 절규는 참을 없는 웃음을 선사한다.


그리고 좌절감은, 게임을 만든이가 아주 정교하게 설계한 기획의도이기도 하다. 위의 게임 트레일러 영상의 말미에, 제작자는 대놓고 말한다.


I created this game for a certain kind of person

to hurt them.


나는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위해 게임을 만들었다.

그들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서.


이런 사악한 의도를 지닌 제작자의 배경을 보면, 게임에 대해 일말의 수긍이 가기 시작한다. 'Bennett Foddy'. 이미 게임의 제목 자체에 본인의 이름을 걸고 만들어낸 괴짜. 그는 여러 직업을 지니고 있지만 대중들에게는 개인 게임개발자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혼자서만 게임을 만들고, 게임은 하나같이 기괴하다. 어쩌면 글을 읽는 분들 몇명은 이런 게임들 한 둘 정도는 적이 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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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만 봐서는 80년대 게임 같지만, 실제로는 2000년대 게임들이다. 의도적으로 저급하게 만든 그래픽. 키보드 몇개로 이뤄지는 단순한 조작. 가운데 쓸데없이 퀄리티가 높은 물리엔진. 극악의 난이도. 별다른 목적도 없는 게임 진행.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선사하는 쓰라린 좌절감과 그로 인한 집착. 그에 대한 제작자의 깨알같은 비아냥. 'Bennett Foddy'라는 사람이 만든 게임들의 공통점이다. 그리고 모든 특징은, 그의 최신작이자 그나마 그래픽 퀄리티가 압도적으로 가장 좋은 (그래봤자 요즘 유행하는 게임에 비하면 휑하기에 이를 없는) Getting over it with Bennett Foddy, 국내 통칭항아리 게임' 고스란히 계승된다.


하지만 그렇게 불쾌하고 저급하기만 하다면 사람이 이렇게 인기를 얻을 없었을 게다. 분명 그에겐 어떤 팬덤이 형성돼 있고, 게임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경외심을 일으키는 측면이 있다. 기술적으로 보자면 그가 만든 게임들의 물리엔진이 그렇다. 허접한 물리엔진이나, 게임 제작툴에서 기본으로 제공하는 물리엔진은 게임을 하는 이로 하여금 순식간에 지루함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의 게임은 아주 미묘한 조작으로도 차이를 만들어내는 절묘한 밸런스의 물리력이 존재한다. 내용적으로 그가 게임 중에 툭툭 내뱉는 비아냥의 한마디들은, 그저 악의만으로 분노를 유발하는 악담과는 사뭇 다르다. 동네 양아치 보다는 우디 앨런의 냉소에 조금 가까운 독특한 위트가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딴 쓰레기 게임!!'이라며 마우스 키보드를 내팽개친 직후에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강렬한 흡인력이 있다.


개인 게임개발자라는 직업 이외에 그가 지닌 타이틀을 보면, 이게 그럴싸 해진다. 그는 생명윤리학 박사학위 소지자이며, 옥스포드와 프린스턴에서 윤리학을 연구했다. 게임을 개발하는 것과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배경. 가운데 좌절/위트/중독성을 이끌어내는 게임들. 그가 가장 최근에,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상처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게임의 폭발적 인기.


그냥 어떤 정신 나간 한량이 대충 만든 게임이 우연히 얻은 순간적 인기라고 치부하고 잊어버리기엔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마치, 그가 만든 게임에게 욕지거리를 내뱉고 그냥 뒤돌아설 수는 없는 처럼 말이다. 그런 석연찮음을 못 이긴 , 다시 이상한 항아리 게임을 조금 씹고 뜯고 맛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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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중간 중간 어떤 특정 상황이 벌어지면 제작자가 직접 녹음한 나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목소리는 트레일러 영상의 바로 목소리다. 의외로 나긋한 음색과 영국 특유의 악센트가, 게임의 그래픽과는 전혀 안어울리는 잔잔한 재즈음악에 얹어진 채로 자막과 함께 흘러나온다.


예를 들어, 앞서 올린 두 번째 영상의 처음에 나오는 오렌지는, 게임의 중요 시점에 망치의 오작동을 유발하기 위해 설치된 덫이다. 아주 정교한 컨트롤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망치가 오렌지에 걸려 미끄러지기 쉽고, 그렇게 미끄러지면 다시 게임의 처음 장소로 돌아온다. 오렌지가 등장할 게임 제작자는 이런 나레이션을 남긴다.


An orange is sweet juicy fruit, locked inside a bitter peel.

오렌지는 씁쓸한 껍질 속에 달콤한 과즙을 담고 있는 과일이죠.


That’s not how I feel about a challenge.

그건 도전이란 것에 대한 저의 느낌과는 다릅니다.


I only want the bitterness.

저는 오직 씁쓸함만을 원하죠.


Its coffee, its grapefruit, its licorice.

안의 커피, 자몽, 감초를 말입니다.


나레이션이 나오는 순간, 오렌지에 걸려 몇시간의 노력이 무산된 게임의 시작지점(태초마을이라고도 불린다) 돌아오게 게이머라면, 그저 악의적인 놀림으로만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자체를 뜯어보면, 악의성은 둘째 치고라도, 아주 좋은 문장이다. ( 번역은 그렇지 못할지라도) 간결하고 쉬우면서도 명료하다. 노래 가사 같기도 하고, 소설이나 영화의 대사 같기도 하다. 말이 흘러나오는 맥락과 결합되면 문장의 힘이 더해진다.


때때로 제작자는, 명언을 인용하기도 한다.


“The pain I feel now is the happiness I had before. That's the deal.”

- C.S Lewis


지금 내가 느끼는 고통은, 이전의 내가 가졌던 행복이다. 그게 조건인 거야.

- C.S 루이스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인 C.S 루이스의 명언은, 게이머가 높은 절벽에서 추락을 맞이할 흘러나온다. 인용문의 단어 하나, 의미 하나가 바로 순간 극심한 좌절을 맛보고 있는 게이머의 모든 상황과 너무나도 맞아떨어진다. 게이머가 고도의 집중력으로 작은 마우스를 움직여 높다란 절벽에 올랐을 느낄 행복감의 크기는, 정확히 바로 절벽에서 떨어졌을 느낄 좌절감의 크기와 비례한다. 쉽게 올라갔다면 행복감도, 그로 인한 좌절감도 작을테지만, 절벽까지 밤을 꼬박 5시간이 걸렸다면 행복감도 후의 좌절감도 모두 엄청나게 불어날 테니.


게이머가 이런 나레이션의 의미를 별로 신경쓰지 않고 넘어갈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냥 의미없는 소리들일 뿐이다. 하지만, 돈을 주고 이런 목적도 없는 게임을 사서, 웃짱 남정네가 망치를 휘두르며, 분명 오랜 시간 플레이를 수록 실패의 좌절이 커져갈 것임을 확신하면서도 계속해서 망치를 휘두르는 게이머라면, 그런 무신경한 사람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게이머는, 분명 게임에 뭔가를 투영하는 것이고, 뭔가는 단순히 시간이 남아돌거나 지금 일이 없어서 오는 무료함이 아닐 것이다.


지금 무의미해 보이는 망치를 휘두르는 , 속에서 교차되는 행복감과 좌절감을 느껴내는 , 좌절의 순간에 모든 걸 내팽개치고 싶은 마음과 마음을 억누르는 또 다른 마음 사이의 갈등을 이어가는 . 순간 순간을 누구보다도 첨예하게 쌓아올려야 하는 게이머에게 들려오는 말은, 분명 모든 것의의미' 정제된 언어로써 다시금 곱씹게 한다. 어느 , 게이머와 제작자는 함께 절벽을 오르는 것이다.


게임 제작자는, 대머리 반나체 남자의 이름을디오게네스'라고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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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게네스는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 그림의 가운데에 널부러진 남정네다. 고대 그리스의 괴짜 철학자이자, 플라톤의 앙숙. 그의 명성은 비록 플라톤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의 철학은 현대까지 이어지는 어떤이단아'적인 줄기와 이어진다. 광장 한가운데에서 자위를 하며 배고픔도 이렇게 간단히 해결되길 바란다든가, 알렉산드로스 3세의 면전에서 햇빛 가리지 말고 꺼지라는 배짱을 부리는 기행들. 플라톤의 추상적인 관념을 물고늘어지는 집요함. 그리스인 조르바, 레논, 김기덕과 같은 캐릭터의 큰 형님 되겠다. 그의 삶은 동양철학으로 치면 도가적이고, 근현대 서양철학으로 치면 실존주의적이다. 그리고 그런 철학은, 고도화된 자본주의의 한가운데에서 우경화의 면면을 바라보며 힘겨운 하루하루를 쌓아올리는 바로 시대 사람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바로 디오게네스가, 항아리에 쳐박힌 망치를 휘두르는 남자의 이름이다. 게이머는, 모든 게 무슨 의미이며 어떤 목적을 지니고 어떤 마지막을 향하는 지도 모르는 , 디오게네스의 무거운 몸을 끌어올린다.


생각이 여기에 다다를 , Bennett Foddy 남긴 모든 말들을 곱씹어보면, 뭐라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는 나눌 있는 유대감이 생긴다.


https://youtu.be/4Sp3VRbXQME

(스포주의: 게임의 엔딩이 나오는 영상이므로, 실제로 게임을 플레이할 사람들은 보지 않으시길 권장)


여기까지 들어가면, 게임은 단순히 게이머를 빡치게 하는 악의적인 게임에 머무르지 않는다. 게임의 인기는 그저 시청자들의 가학적인 취향만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다.


매출이 아닌 사용자를 기준으로 하면, 대부분의 최신 인기 게임들은 평등을 추구한다. 레벨에 따른 능력치 향상도 추가 아이템도 없는 오버워치, 쌩초보도 똑같은 처지에서 플레이할 있는 배틀그라운드. 시대의 게이머들 대다수를 구성하는 젊은이들은, 시간과 노력과 연습으로 평등하게 보상을 받을 있는 게임에 손을 뻗는다. 반대로 돈으로 시간과 노력과 연습을 대체할 있는 게임에 몸서리를 친다. 그들이 이제 발을 디뎌야 하는 사회가 너무나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아니 전에, 이미 학교를 다니고 성적을 받을 부터, 돈으로 시간과 노력을 사는 이들의 틈바구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메달려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와중에, 숨을 돌리기 위한 게임 속에서까지 수백 수천만 원을 우습게 쓰는 사람들에게 좌절을 느끼는 즐길 사람은 없으니까.


그러다 그들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이 거지같은 게임을 만난다. 아직 정식 출시도 되지 않아 제법 돈을 줘야만 다른 게임들과 패키지로 있는 게임을 직접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느정도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는 스트리머들이, ‘이게 뭐길래 난리야?’라는 마음으로 플레이 해보는 이상한 게임. 막상 시작하면 누구나 압도적인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운 좌절을 맛봐야만 하는 게임. 어떤 날고 기는 스트리머도, 최소 몇 시간은 내내 절규를 하고 심지어 눈물까지 보이게 만드는 게임.


어쩌면 게임 속의 디오게네스는 게임을 하는 게이머이자 이를 지켜보는 시청자다. 무슨 부귀 영화를 누리겠다고 맘대로 되는 하나도 없는 하루 하루를 힘껏 살아가고, 대가의 절반은 한 순간 끔찍한 좌절을 남기는데도, 그렇게 꾸역꾸역 끝도 모를 절벽을 오르는 우리들. 어쩌면 Bennett Foddy 자신일지도 모른다. 게임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의 힘으로 하나하나 디자인을 하고 코드를 치고 엎고 다시 시작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외로운 게임 개발자.


아니, 사실은 모두 틀렸다. 애초부터 게이머와 함께 절벽을 오르는 Bennett Foddy 이미 나레이션을 남겼고 내용은 정답이다. 우리는 디오게네스도 망치도 아니다. 우리는 망치로 절벽을 오르는 의지’, 자체다. 스트리머의 좌절에 웃기만 하는 게 아니라, 성공에 함께 희열을 느끼는 시청자들도 게이머와 게임 제작자와 함께한다. 그들이 모두를 함께하는 것은 의지 자체 때문이다. 무려 윤리학연구 사람의 고민과 사색이 낳은 어떤 결과가, 서로 무관한 듯한 모두를 이어준다. 이단아적인 B 문화에 대한 철학과 현대 소비 컨텐츠들의 의미, 허무함을 이겨낼 인간적인 가치의 결론은 하나의 게임으로 빚어져 모두를 공감하는 고대 그리스의 디오게네스부터 21세기의 수많은 사람들을 함께하게 한다.


아재가 애였을 시절에 사람들은 게임을전자오락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게임은, 특히 기괴한 항아리 게임은 단순한오락거리 아니다. 마치 글이 그랬고, 음악이 그랬고, 만화가, 영화가, TV쇼가 그러했듯, 시대의 대중이 공감하는 숨결이다. 그러므로 시점의 다수 대중에게 사랑받는 게임은, 분명 시대 대중들의 삶을 담아낸다.


게임은 말라비틀어진 나무 한 그루 옆에 디오게네스가 모습을 드러내며 시작한다. 게임의 어디에도, 나무를 넘어야하고, 모든 장애물을 타고 올라야 한다는 안내는 없다. 나무를 일단 넘어야만 게임은 성립한다. 그걸 넘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 오직 게이머 스스로의 몫이다. 게임의 모든 동기는 게이머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고, 모든 보상은 게이머 스스로가 부여한 의미에서만 기인한다.


하지만 게임은 분명 재미있다. 하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그건 아마도, 기원전부터 21세기까지 우리네 삶이 원래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거지같고 이상하기 짝이 없는 하루하루에서, 의미와 행복과 재미를 만들어나가는 우리의 말이다.


그런 우리 모두에게, 거지같고 이상한 게임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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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심애비

트위터: @miiruu


편집: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