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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시선]동병상련

2017-11-30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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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바람이 차가워졌다. 지난해 겨울, 친구에게 전화를 받았다. 몹시 추운 날 도서관에 가는 길이었다. 얼마 전 부고장을 문자로 보냈던 녀석이다. 전화오기 몇 달 전엔 직장에서 작업 중 사고로 손가락이 부러졌다. 최저임금으로 신고하고 십년 넘게 일한 직장을 그만두었다. 핀을 박고 치료를 했는데 신경이 좀 상한 것 같았다. 손가락이 잘 안 움진인다고 했다.


변호산지 노무산지 그런 일을 해주는 브로커가 있었다. 브로커에게 150만원을 주고 장애등급을 받았다. 병문안을 가서 음료수 대신이라고 만 원짜리 몇 장을 주고 왔었다. 애 둘을 어찌 키우나 걱정이 됐다. 친구 놈의 표정은 누가 누굴 걱정하냐는 듯 했다. 하긴 나도 올 들어서야 십년 만에 처음으로 연소득 2천을 넘긴다. 그 간에도 생활을 위해 일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4대보험이 없고 국세청의 기록에 잡히지 않는 일들이었다.


가끔은 힘든 일을 하고 적게 버는 삶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고행 같기도 하다는 생각도 했다. 대다수의 남들처럼 생활을 위해 돈을 벌기는 하지만 돈 벌이에만 매몰되지는 않았다는 근거 없는 우월감을 느껴보려고도 했다. 그러다 몇 번은 몸이 한동안 일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도 했었다. 돌아보면 현실은 초라하지만 처참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직업을 갖게 되면서 직업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변해간다. 때로는 너무 많이 변해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삶에 자부심을 갖기도 한다. 논에 심어진 대로 줄 지어져 자라는 벼 같다. 주는 대로 먹고 열심히 자라고 때가 되면 탈곡기에 탈탈 털리고 씨나락 한 줌 남기는 삶이다. 다른 이들의 삶이 이와 같다면 막상 자신의 삶은 물 위를 떠돌며 정착하지 못하는 개구리밥에 불과한 것 같기도 했다.


가볍기 그지없는 한 줌의 자유는 이기심이 아닐까 의심했다. 직업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그것에 자긍심을 갖고, 소명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들 덕분에 사회가 유지된다. 깎이고 패여 사회를 구성하는 부품 역할에 충실한 이들이 한편 가엽다가도 고맙고 미안해졌다. 여전히 소속감을 느끼는 사회조직은 없지만 약소한 자유는 시스템에 기생한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먹이를 재촉하는 제비 새끼만큼 돈을 필요로 한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일을 구분해야하는 것처럼 꼭 필요한 것과 갖고 싶은 것의 구분법을 배워갔다. 때로는 충동적이었다. 덕분에 가끔은 작은 선물을 줄 수도 있었다. 어느 날부터 경제관념이 조금 생긴 아내는 노후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걱정을 할 정도로 여유가 생긴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유시민 전장관도 노후대책마련을 위해 글을 쓰고 방송출연을 한다는 말을 했다. 그가 하는 행동의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겠지만 노후대책에 대한 생각을 갖게 했다. 사는 동안 살다가 죽는 날이 오면 죽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스스로에 대해서는 사생관이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가족에게 강요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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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7월에서야 최저임금과 몇 백원 차이나지 않지만 4대보험이 지급되는 공장에 취업했다. 연말 국세청에 연소득이 9백 몇 십 만원 잡혔다. 요건이 충족되었으니 안산세무서에서 근로 장려금을 신청하라는 우편물이 날아왔다. 스스로 택한 인생이기는 하다만 정작 힘겨울 때가 지나고 조금 여유가 생기니 이런 일이 생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축적을 많이 하지 못한 것이 썩 자랑은 아니다.


수입과 지출이 제도권 안에 포함되는 하위계층에게 지급되는 격려금인 듯 했다. 굶어 죽은 여성작가와 송파구 세 모녀, 퇴거명령을 듣고 시신 치울 사람들에게 국밥 값을 남기고 죽은 남자가 생각났다. 그들은 제도권 바깥에서 살았었다. 비집고 들어올 힘도 없었던 사람들을 가여워하는 건 위선일까. 그들보다는 그래도 처지가 낫다는 안도감일까.


전화를 걸어온 친구는 제도권 안에서 살고 있었다. 기초수급을 받는다고 했다. 언제부터 기초수급을 받았는지는 모른다. 최저임금으로 급여를 신고했던 시절부터일 수도 있고 장애진단을 받고 나서일 수도 있다. 그것도 나름대로 등급이 있다. 자력으로 남들처럼 살아가는 게 힘겨워 도움을 받아야한다는 건 부끄러울 수도 있다. 그나마 다행이구나 하는 투로 말을 받았다.


침수피해를 입은, 자가주택을 가진 수급자에게 추가 생활비 대신 주택수리비가 나온단다. 지난 여름장마에 물이 샜었나 보다. 친구만 가끔 만날 뿐 피차 집에 방문한 적은 없다. 어쩌면 서로가 편한 거리 이상을 침범하지 않아서 유지되는 관계일 수도 있다. 수리비는 650만원이 책정되었다. 공사는 싱크대 교체, 도배, 욕실 문짝 교체를 LH 하청업체에서 견적을 냈다. 648만원이 나왔다.


견적이 적합한 금액인지 물어온다. 적합하지 않다고 확신하고 제 나름의 검증을 받기위해 문의를 한 거다. “글쎄, 최고급 자재를 쓰고 공사기간이 좀 걸린다면 그 정도 나올 수도 있지 싶다.” 20평 조금 넘는 공동주택이다. 자재는 하품, 공사기간은 하루, 인부는 두 명, 그 정도 공사면 그냥 민간설비업자에게 하면 삼백이면 될 것 같다는 판단을 말해줬다. 넉넉하게 싱크대 백 만원, 도배 백 만원, 문짝 교체 50만원, 사장 몫 50이면 크게 박하지도 않고, 눈탱이를 맞는 것도 아닌 적절한 가격이라는 판단이었다.


공사는 날림이었단다. 이야기를 전하는 목소리에 모멸감과 분노가 느껴졌다. 감정은 상호적이다. 나는 행복한 사람들의 감정에도 영향을 받지만 아파하는 사람들의 감정에 더 마음이 쓰인다. 이야기를 들었다. 감정을 걷어내고 중복되는 부분을 귓가로 흘린다.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가구를 치워 놓은 집에 노인 두 명이 와서 하루 엉성하게 작업을 하고 갔다. 시청에 민원을 넣어야 할 정도로 성의가 없었단다. 담당 공무원이 나와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이 시공 현장의 허접함을 보고 나온 것인지, 일거리가 생긴 것에 대한 반응인지 알 수가 없다. 친구는 전자로 해석한 듯 했다.


공은 다시 LH공사로 넘어갔다. 담당과장은 하청업체 노인들을 다시 보내 AS를 시켰다. 글은 축약되었지만 과정은 길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정부의 복지 정책에 감사하지 못하는 수급자에 대한 미묘한 억누름이 있었다. 거기에 반발한 듯 싶었다. 수급자가 아니라 수급권자라고, 사회적으로는 약자지만 이러면 안 되는 거라고 항변하고 있었다. 약자에게도 포기하고 숙이고 살던 자존감이 튀어나오는 순간이 있다.


말을 들어주고 현상을 설명해줄 뿐 실질적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긴 시간 상황이 변할 때마다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할 때도 있고 그 이상을 바랄 때도 있었다.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졌다. 세금으로 집행하는 복지예산이 그런 식으로 누수된다는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옳다. 예산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독거 노인들은 그저 감사하기만 할 것이다.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못하고 반복되기만 한다. 동의를 얻기 위해 맞는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영 대답이 걷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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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은 혹독하다. 웬만큼 처절하지 않고서는 시선을 받지 못한다. 힘 있는 사람들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지만 우린 아니다. 네가 이 문제를 사회 공론화시키기를 원한다면, 앞으로 꽤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가령 음성적으로 수입을 얻는 행동을 포착해서 수급권이 박탈될 수도 있고, 네 주변사람들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


대상가구가 4만 가구가 넘는다니 대충 2500억의 예산인데 절반 정도가 누수된다고 하면 그것을 뜯어먹고 상납 받는 사람들의 끈끈한 관계를 네가 이겨낼 거라고 보지 않는다. 운이 좋은 경우에도 당사자가 처참하게 망가지고 부서져서야 겨우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기도 한다. 그나마도 특정한 악당을 규정할 수 있을 경우다. 누수된 금액은 수 많은 관련자들 상호간의 명절 선물과 우의를 다지는 식사비와 음주 후 귀가하는 말단공무원에게 찔러주는 대리비로 소진되었을 거다. 시정을 홍보하는 지방지 기자에게 촌지로 지불되었을 수도 있다. 다수에게 관례로 굳어져서 잘못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을 지적하는 일은 역풍을 맞는다.


그제서야 속마음이 나온다. 그렇게까지 일을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 돈에 맞는 정당한 서비스만 받으면 된다. 본능적으로 사심을 감추고 공익을 내세웠다. 타인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약자의 저항은 더 쉽게 꺾인다는 걸 본능적으로 안다. 혼자서는 조금 억울해도 나설 용기를 내지 못한한다. 하긴 혼자 해결할 수 있으면 이미 강자의 반열에 들었다.


황유미 씨의 아버지와 조은화 양의 어머니 이야기를 길게 해주었다. 네가 원하는 건 적고, 정당하지만 그 정도 각오를 해야 얻어 낼 수 있는 것 같다. 이른바 선수라는 사람들이 도움을 받고 싶다면 그에 상응하는 걸 주어야 한다. 돈이야 당연히 안 되니 명예를 주어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그 사람들이 움직일만한 무게가 나오지 않는다.


네 몫을 찾고 싶다면 네가 움직여야한다. 시청 앞에서 공무원들 출근시간에 피켓팅을 하던지, 복지과에 찾아가 날마다 민원을 넣던지, 그 과정에서 부당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너를 상대하는 모습이 나올 때에나 선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움직인다. 반쯤은 가망 없음을 이야기하고 포기를 돌려서 종용했다. 어린 시절 읽은 이솝의 종달새우화는 두고두고 떠올리게 된다.


돌려 말한 권유보다 정당성을 인정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쩌면 정당하게 분노를 표출할 곳이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다. 시청 홈페이지에 민원을 올리고 담당자에게 전화를 넣었다. 악성민원을 응대하는 매뉴얼대로 담당자 돌리기를 하고 시간을 지연시켰다. 자신의 정당성을 지지해주는 현장을 보전하기 위해 그동안 친척집에 있었다. 친척이라지만 남의 집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병든 닭처럼 수업 중에 잠을 잔다고 담임에게 전화가 왔다.


분노와 고집을 꺾고 다시 체제에 순응하는데 한 달 반이 걸렸다. 모멸감에 분노하던 눈빛은 다시 체념으로 꺾였다. 문제제기가 전혀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고 위로하고 자식을 이유로 약해지는 건 그렇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토닥였다. 아직 잔불처럼 남아있는 분노가 방향을 틀었다. 너는 나한테 왜 잘하냐. 생략된 뒷말이 있었을 것 같다.


가끔은 말로 내뱉는 순간에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평소에 생각해 보지 않던 질문에 대한 답들은 더더욱 그런 경향을 보인다. 그냥 남 같지 않아서 그런다는 대답에 그제사 조금 남은 분노를 내려놓고 성긴 웃음을 지었다.


행여 나의 삶이 조금이나마 여유로워 보였다면 보통의 범주보다 물질적 만족의 기대치가 낮아서다. 너보다 낫다는 어줍지 않은 우월감에서 기인하지 않았다. 그렇게 받아들여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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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


편집 :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