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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류계()란 말이 있다. 요즘은 연예계를 지칭할 때도 곧잘 사용되는 말인데, 이전에는 몸을 파는 여성들을 말할 때 사용되던 말이다. 화류계란 말의 어원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 제일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게, 바로 여성의 성기(性器)다.


도미시마 다케오(富島健夫)가 쓴 <여인추억>이란 소설을 기억하는가? 90년대 학번을 가진 이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상략)...센쯔루는 일어서서 마사오를 향해 양다리를 벌리듯 하고 손으로 거들었다. 숱이 적고 보들보들한 음모 속의 분홍색 주름이 펼쳐졌다. 선홍색이었다. 왼쪽에 작은 원추형의 돌기가 있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자그마하고 색도 엷었다. 전등빛을 받아 빛나는 건 넘쳐흐르는 투명한 액체임이 틀림없다. 마사오는 이미 친구에게서 여자가 욕정이 생기면 액체가 솟아난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하략).”

- <여인추억> 1권 중 발췌


일본 ‘야설’에서 여자의 성기는 곧잘 ‘꽃’에 비유됐다. 아니, 이건 시공을 초월해 야설에서 정석과도 같은 표현이다. 이 꽃에서 시작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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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아니다.


1589년 임진왜란 직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豊臣秀吉) 교토의 야나기초(柳町)에 ‘유곽(遊郭)’을 만들게 된다. 일본 최초의 국가 공인 집창촌이다. 공창제의 시작이다.


야나기초에 있던 유곽이 얼마 뒤 시마바라(島原)로 옮겨진다. 이때부터 화류계란 말이 등장한다. 왜? 시마바라에는 버드나무와 꽃이 만발해 있었기 때문이다. 매춘 여성들이 꽃이 아니라, 꽃에 둘러싸여 있는 시마바라에 유곽이 있었기에 화류계가 됐다.




요시와라의 등장


일본의 3대 유곽지. 그러니까 오사카의 신초(新町), 교토의 시마바라(島原), 에도의 요시와라(吉原).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요시와라다. 일본 성산업의 시초이자, '성매매의 성지(聖地)'라고 불리는 요시와라.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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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와라를 만든 이는 쇼지 진에몬(圧司甚右衛門 : 쇼지 진나이가 훗날 진에몬으로 개명)이었다. 일찍이 야나기초에서 매춘업소를 차린 쇼지 진나이는 매춘계의 스티브 잡스같은 존재였다. 한국으로 치자면, 경백이법을 만든 ‘이경백’과 같은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한국 풀살롱의 대부이자, 룸살롱의 황제인 이경백은 삐끼로 시작해 몇 년 만에 북창동을 장악하고, 전국적으로 북창동식 열풍을 일으켰다. 5년 만에 3,600억 원의 매출을 올린 그의 모습은 말 그대로 경영의 혁신이다. 이경백은 고객들의 ‘숨겨둔 욕망’을 끄집어내는 것에 모든 걸 걸었다. 지금은 일상이 된 ‘매직 미러 초이스’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혁명’이었다. 구속되지만 않았다면, 그는 대한민국 룸살롱의 신화가 될 수 있었다. 영업이 끝난 뒤 남산 도서관으로 달려가 마케팅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새로운 경영기법을 배우고, 이를 실전에 응용했다)


진에몬은 당시 폭발적으로 늘어난 ‘남성’들 덕분에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에도 도처에 유곽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발생하는 게 아닌가? 문제는 ‘공급’이었다. 유곽이 우후죽순으로 생기자, 상품이 되는 ‘여성’들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분쟁이 생긴 거다.


“치에는 우리 애다!”


“무슨 소리야? 너희하고 계약은 지난주에 끝났고, 오늘부터 우리 업소에서 일하기로 약정했어!”


“한 번 해보겠다는 거야?”


잘나가는 에이스들을 두고 업소들끼리 경쟁이 붙게 된 거다. 이를 보다 못한 진에몬이 혁명적인 제안을 내놓게 된다.


“유곽 거리를 만들자! 모든 유곽이 한 곳에 모이면, 그 자체로 명물이 되고 손님들이 늘어날 거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단골도 생기고, 여자 관리도 쉬워질 거다. 덤으로 정부에서도 좋아할 거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유곽을 단속하기 보다는 한 곳에 모아놓으면 단속도 쉽고, 일반 주택지에는 유곽이 생기지 않을 테니 정부로서도 나쁘지 않을 거다.”


이리하여 진에몬은 상주문을 올리게 됐고, 에도 정부는 1617년 3월 진에몬의 제안을 허가하게 된다. 이때 에도 막부가 내놓은 땅이 바로 갈대가 우거진 습지대였다. 이 때문에 원래는 갈대밭이란 뜻의 요시와라(葭原)란 이름이 붙었으나, 8년 뒤인 1626년 좋은 운을 받으라고 요시와라(吉原)라고 이름을 고쳤다.


문제는 당시 에도시대는 폭발적으로 발전해 나가던 신흥도시였다는 대목이다. 에도 시가지가 확장되고, 요시와라가 성업을 하면서 어느 순간 요시와라가 에도 시내 한복판에 위치하게 된 거였다(오늘날 강남이 60년대 수박밭이었던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되자 에도 막부는 요시와라를 에도 외곽으로 이전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이때가 1656년 10월이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이 명령이 채 집행되기도 전에 그 유명한 메이레키 대화재(明暦の大火)가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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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7년 3월 2일에 시작된 불은 3월 4일까지 이어졌고, 그 결과 에도의 70%가 불타고, 사망자만 10만 명이 넘었다. 당연히 요시와라도 모두 불탔다. 결국 요시와라는 아사쿠사로 옮겨 새로 영업을 시작하게 된다. 이곳이 바로 ‘신(新) 요시와라’다.


(에도시절 요시와라는 크고작은 24번의 화재를 겪어야 했다. 그때마다 요시와라는 굳건히 자리를 지켜냈다)




에도에 남자가 몰린 이유 1


요시와라의 등장은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 관계가 있다. 일본 전국시대를 끝낸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는 ‘에도’라는 신도시 프로젝트를 구상한다. 왜 하필 에도였을까? 여러 가지 설이 나돌고 있지만,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국시대 무장들의 공통된 꿈인 교토 입성을 위한 발판.


전국시대 무장들은 교토 입성이 일생의 꿈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 발판이 되는 ‘성’을 만들고, 이를 발전시켰다. 대표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만든 오사카가 있다. 교토에 입성해 천황의 인정을 받아 권력자로 올라선 다음 자신의 성에서 천하를 다스린다는 개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를 그 발판으로 결정했다.


둘째, 교토와의 거리.


천하를 얻기 위해서는 교토에 입성해야 하지만, 다스리기 위해서는 교토와 거리를 둬야 한다. 가까이 있으면, 천황이 정치에 개입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예전 가마쿠라(鎌倉)막부도 교토와는 거리를 뒀었다.


셋째, 아직도 불안한 천하통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추종하던 세력들과의 일전. 세키가하라 전투와 이어지는 오사카 전투(여름, 겨울 전투)로 천하는 도쿠가와 가문이 차지했지만, 그래도 서쪽 지역에서는 불온한 느낌이 있었다(메이지 유신 전후로 튀어나온 서남웅번들이 도쿠가와 막부와 싸웠던 걸 생각하면 맞는 말이다). 그 결과 서쪽에서 멀리 떨어진 에도가 방어에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런 정치적인 이유가 에도를 신도시로 결정한 계기가 됐다. 그러나 정치적 이유만으로 신도시를 만들 수는 없었다. 도시 자체가 들어설만한 입지요건이 갖춰지지 않았다면, 도시는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에도는 저평가 우량주의 대표주자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를 간파한 투자자였다.


이 당시 에도는 말 갈대와 억새가 무성한 황무지였다.


(지금의 도쿄 지명에 갈대와 억새, 습지와 연관된 지명이 남아 있다. 앞에 언급한 요시와라, 도쿄의 ‘아다치구’, ‘가야바초’, ‘센다가야’ 등등은 억새와 관련된 지명이다. 이밖에도 억새와 갈대와 관계된 지명은 곳곳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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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에도가 도쿠가와 막부의 수도로 낙점 받은 이유를 정리해 보자.


첫째, 수로의 요충지.


도쿄만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거다. 해상 수송이 가능했기에 물자의 이동이 유리했다. 수로와 해상운송이 가능했던 도쿄는 에도 시대 쌀의 집결지가 됐다.


둘째, 식량생산의 요지.


당시만 하더라도 에도는 습지로 둘러싸인 버려진 땅이었다. 후지산 화산재가 퇴적해 만들어진 무사시노대지(武藏野台地)와 바다 쪽에 접한 저지대습지인 도쿄저지(東京低地)는 농사를 짓기에도, 도시를 짓기에도 무리가 따랐다.


고지대의 경우에는 물이 없고, 저지대의 경우에는 습지대라 이동이 어렵다. 도쿠가와는 고지대는 하천 개수를 통해 물을 공급했고, 저지대는 매립을 했다. 그리고 도시를 올리고, 농토를 만들었다. 화산재가 퇴적해 만들어진 이 땅이 최고의 농토로 거듭날 거라 믿었던 거다.


셋째, 억새의 유용성.


지금의 기준으로 억새는 잡초의 다른 말이겠지만, 이 당시 억새는 주요자원이었다. 특히나 건축자재로서의 억새는 지금의 시멘트보다 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 당시 초가집 지붕은 억새풀을 엮어서 만들었다. 초가집 하면 볏짚을 올릴 거라 생각하겠지만, 이 당시에 볏짚은 가난한 이들이나 쓰던 지붕재료였다.


때문에 억새는 지방 다이묘들에게 올리는 주요 상납품 중에 하나였다. 억새는 건축자재로도 쓸 수 있었고, 가축의 사료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MB가 4대강 사업을 하면서, 하천 자갈을 퍼 올려 공사비를 충당하겠다는 ‘사기’를 쳤지만, 에도의 억새는 사기가 아니었다. 억새를 잘라 건축자재로 활용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에도의 신도시 개발계획은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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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이극락조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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