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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 총수가 딴지일보를 처음 만들 당시 야후인가 구글 한국 책임자에게 '귀하를 딴지일보 홍보 담당자로 임명한다'는 발령장을 메일로 보냈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난 그가 충분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나도 그 메일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귀하를 인도네시아 특파원으로 임명하니 오직 충성만이 살 길'이라는 이메일을 보내온 적이 있습니다. 그게 1999년이었어요.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흘렀으니 김 총수가 당시 자신이 그 괴랄한 이메일을 날려, 있지도 않은 직책에, 맘대로, 그것도 무상으로 임명해 버린 세계 각국의 오래된 딴지스들을 이젠 기억도 못할 게 틀림없고, 딴지일보 직원들은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겠지요. 게다가 당시 기사들은 2011년 딴지일보 해킹사건으로 모두 다 날아가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난 그 옛날 심정석 박사가 치질 기사를 싣고 본사에 이드니아 콘체른이란 멋진 아이디를 가진 이가 일하던 시기의 사람입니다. 당시의 딴지스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는지, 아니면 아직도 각종 게시판 모퉁이 어딘가에서 조용히 자중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난 어쩌다 보니 딴지일보 주변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누가 기억하든 말든 김 총수가 그 이후 해임한다는 이메일을 보내온 적 없으니 따지고 보면 아직도 딴지일보 인도네시아 특파원인 셈입니다.


대충 이 대목에서 그동안 밀린 20년치 급료와 활동비를 요청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본지 코코아 기자는 인도네시아 조코 위도도 대통령에 대해 써달라고 용감하게 기사요청을 해왔습니다. 지난 11월 초 문재인 대통령이 동남아를 순방하며 그 첫 기착지로 인도네시아를 방문하면서 한국인들에게 그토록 멀기만 하던 인도네시아가 뜬금없이 조명되었던 모양입니다. 동포간담회에도 초청받았지만 딴지일보에서 특파원증을 따로 만들어 준 것이 없어 프레스 테이블엔 가지 못하고 메인 테이블 멀찍이 떨어져 문 대통령 부부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사족이지만 교민들 사이에서 문대통령 다음으로 각광을 받았던 사람은 넘치는 카리스마를 따뜻한 미소로 감싸고 있던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었고 그 자리에 모인 교민들 모두에게 선물로 주어진 절대시계, 대통령 서명이 들어간 그 유명한 손목시계는 오래동안 동포사회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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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시계


조코 위도도 대통령 기사를 준비하던 중 발리 아궁화산이 분화했습니다. 관광객들 발이 묶이면서 언제나처럼 소극적인 대사관의 태도에 불평불만이 터져나오던 중 현지 영사협력관들을 통해 헬프데스크가 가동되면서 국민들을 수라바야로 실어나를 버스가 준비되고 관광객들을 철수시키기 위해 특별 전세기가 날아오는 대반전이 시작되고 있었죠. 코코아 기자가 마음이 바뀌어 아궁화산 취재를 요청하면 어떻게 할까 생각했지만 턱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주인도네시아 대한민국 대사관의 이명호 총영사 일행도 사태파악을 위해 발리로 들어가려고 비행기와 배와 차량을 번갈아 바꿔 타며 거의 정글의 법칙 촬영 수준의 고생을 했고 유명 방송사의 통신원, 특파원들도 현장 접근이 여의치 않았으니 난 대부분의 교민들과 마찬가지로, 방송이나 신문은 물론 현지 단체카톡방이나 밴드들을 통해 관광객들의 아우성과 우리 정부의 조치를 지켜볼 따름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전혀 다른 사건 하나가 자카르타에서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세월호 희생자 학생들의 어머니 두 분이 416연대 간부와 함께 자카르타를 방문한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에 '416 자카르타 촛불행동'이라는 단체가 생긴 것은 2016년말 탄핵정국이 한창이던 때였습니다. 그런 단체의 탄생을 지켜보는 것은 실로 생소한 경험이었습니다. 사실 인도네시아의 동포사회 전체가 정치적으로 보수 일색인 것은 아니지만 대사관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 한인회 조직과 한인상공회의소는 나름대로 성공한 사업가들의 모임이니 보수적이지 않을 리 없고, 그분들을 중심으로 비슷한 상황과 성향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민주평통과 최근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자유총연맹 등 정치색을 숨기지 않는 대표적 정부산하기관 또는 관변단체도 우측으로 매우 치우쳐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정반대 색체를 띤 단체가 자카르타에서 발족했다는 것은 진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큰 기업체를 운영하는 유력한 사업가가 교회를 옮기면 그 회사 직원들은 물론, 협력업체 직원들과 가족들까지 수백 명 단위로 뒤따라 한꺼번에 교회를 옮기는 진풍경이 종종 벌어지고, 전에 있던 교회가 무너지기 직전까지 내몰릴 정도의 극단적인 경제적 생태계가 고착되어버린 현지 동포사회에서 높은 분들의 정치적 성향과 맞서는 듯한 단체가 설립되는 것은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영향력과 힘의 엄혹한 차이가 분명 존재했으므로 힘 있는 사람들에게 잘못 보였다가는 밥줄이 끊길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416 자카르타 촛불행동의 발족은 오래 심사숙고했을 것이 틀림없고, 많은 것을 잃을 각오를 굳힌 결과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단체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사회적 약자인 학생들과 젊은 주부들이 중심축을 이루었습니다.


높은 사람들의 욕 한 마디, 위협 한 번에 벌벌 떨 순진한 사람들이지만 원래 열정적이고 이해관계를 잘 따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욱 큰 용기를 내는 법입니다. 그들 곁으로 경제적 독립군들과 소상공인들도 용기를 내 모여들었습니다. 동포사회의 뜨거운 호응을 얻어 밴드회원 180명을 넘긴 416 자카르타 촛불행동은 올해 11월 초 마침내 한국문화원을 빌려 발기 1주년을 기념하는 정식 발족식을 가졌습니다. 앞서 언급한 문재인 대통령 간담회에서도 눈에 띄는 다양한 피켓과 플랭카드를 만든 정성으로 이들을 찍은 사진들이 당시 청와대 홈페이지에도 가장 많이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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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늘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닙니다. 첫 공식모임의 장소를 제공했던 자카르타 시내의 한 식당은 그 후 한동안 한인사회 높은 분들의 미움을 사 어려움을 겪었다더군요. 동포사회의 기득권 계층이 이들을 곱게 보지 않으리란 건 애당초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정식 발족식을 갖자 한 교민 TV 방송에서는 '목적이 모호한 단체가 발족했다'며 한껏 깎아내리기도 했습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아예 무시하고 뉴스로 취급하지도 않을 일을 그렇게 다룬 것은 분명한 선제공격이었죠.


보수 기득권이 정치적 반대세력의 등장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불쾌함을 표한 것이지만 정작 그렇게 지적한 '모호함'은 오히려 416 측이 '특정 정파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강령을 채택하며 정치색을 빼려고 시도한 것 때문입니다. 그건 물론 논란으로 점철된 정치문제에 발을 담궈 공연히 적을 만들지 않겠다는 순진무구한 시도였겠지만 상대방이 믿어주지 않아 대실패로 끝난 셈입니다. 동포사회의 유일한 TV 매체가 널리 존경받는 어르신의 입을 빌어 내보낸 보도였으니 단체 관계자들은 속이 많이 상했겠지만 그 사건 자체는 416 자카르타 촛불행동이 동포 기득권사회에서 의식하고 주목하고 껄끄러워하는 주요 단체로 등극했다는 반증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의 활동이 더욱 주목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은 그동안 탄핵집회도 하고 '노무현입니다', '공범자들' 같은 영화들을 자체 수입해 상영하는 등 다양한 행사를 용의주도하게 조직해 왔습니다. 그런데 발족식에서 회칙을 통과시키고 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은 마치 옛날 작은 교회의 고등부 회장선거를 보는 듯한 느낌을 들게 했습니다. 그만큼 풋풋하고 미숙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젊고 순진하고 진기한 모임은 대사관이나 동포사회 단위에서 관심과 보호가 필요하다고 보입니다. 이 사람들이 세월호 엄마들을 자카르타로 초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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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순조롭지만은 않았습니다. 교민사회에 간담회 공지를 냈을 때 인도네시아의 최대 한인 온라인 커뮤니티인 인도웹(www.indoweb.org)에서는 한바탕 설전이 벌어졌습니다. 사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온라인에서 벌어질 때마다 그에 대해 자기 소신을 밝히고 원하는 바를 말하면 될 텐데, 언제나 욕설과 비아냥이 길고 지겨운 전주곡처럼 흐르곤 합니다. 세월호를 아직도 정치적으로 사용한다거나 세월호 엄마들이 무슨 전문지식이 있어 안전이나 정의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자카르타까지 오느냐, 죽은 아이들에게 어떤 정치인이 '고맙다'고 했다더라 말꼬리를 잡으면서 논쟁은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사실 그 말이 희생자들에게 죽어줘서 고맙다는 뜻이 아니라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입니다. 많은 이들의 죽음 위에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고 있으니 그들의 희생을 추모하고 결과적으로 감사히 여기게 된다는 사고의 경로는 얼마든지 유추할 수 있는데도 굳이 악다구니를 쓰는 것이죠. 물론 아무말 대잔치는 그렇게 시작하는 법입니다.


간담회의 목적이 진짜 '안전하고 정의로운 사회'면, 안전 관련해서 소방관님들이나 간호사분들 모셔서 응급처치 교육하고, 정의가 목적이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책 읽고 토론회 하고 이게 맞을 거 같에요ㅋㅋㅋ  굳이 세월호 피해자 분들 안불러도 되구요...


피해자 분들을 폄하하는 게 아니구요, 진짜로 안전은 더 잘 교육하실 수 있는 분들 있구요, 정의도 좀 철학적인 주제여서 더 설명, 강의 잘 해주실 수 있는 분 있을 거 같아요. 피해자 분들 소감, 느낀점 듣는 거보다 말이에요...

(출처 - 링크)


난 이런 글을 세월호 희생자 부모님들이 보고 혹시 마음을 다치지나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분들을 자카르타로 초청한 이유는 어떤 대단한 숨겨진 비밀을 고발하려는 것도 아니고 정의와 안전에 대한 전문지식을 전수받으려는 것은 더더욱 아닐 터입니다. 누구도 겪어서는 안 될 참사 속에서 절대 복원될 수도, 보전받을 수도 없는 손실을 입어 지난 3년 반 넘게 죽은 사람처럼, 팔다리가 잘린 사람처럼 참담한 심정으로 세상을 살았던 엄마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그 아픈 마음을 함께 보듬어 주며,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들도 당신들과 함께 함을 보여주려는 것이 가장 큰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다시는 돋아나지 않을 팔다리처럼 치유될 수 없는 아픔과 그것을 함께 나누려는 선의를, 그러나 정치적 계산으로 재단하고 비난하고 비아냥거리는 일이 먼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11월 30일 목요일 밤 자카르타에 도착한 어머니들은, 먼 하늘길을 날아온 여정 끝에서도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발리 아궁화산을 피해 수라바아로 빠져나온 한국 관광객들을 태우기 위해 아시아나 특별 전세기가 날아온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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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 5반 큰 건우 엄마 김미나 어머니, 2학년 4반 경빈 엄마 전인숙 어머니와 416 연대의 안순호 공동대표가 자카르타의 수까르노-하따 국제공항에 11월 30일 밤 도착했습니다. 416 자카르타 촛불연대에서는 왼쪽부터 오선희 공동대표, 이연주님, 이주영 공동대표, 박준영 공동대표가 이분들을 마중했습니다.


해외에서 20년 넘게 구르다 보면 산전수전 다 겪게 되고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게 되는 법입니다. 제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대개 그런 식이란 얘기입니다. 그래서 어떤 자리에 나가거나 누군가 만나는 것이 좀 꺼려진다 하더라도 눈 딱 감고 얼굴에 투명한 가면을 하나 뒤집어 쓰고서 온갖 감언이설로 상대방 기분을 맞추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분들을 만나러 가는 것은 정말 어려웠습니다. 특히 첫 날 간담회가 우리 동네인 북부 자카르타의 끌라빠가딩이었습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데도 기어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터무니 없는 상실을 겪었던 엄마들, 지금도 그 아픔에 매일 밤 자지러질 그 분들의 아픔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으리란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분들을 보는 순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습니다. 낫살이나 먹고서 그런 추태를 보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제가 참석하든 말든 그분들의 간담회는 예정대로 진행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분들 만나 눈물부터 흘린 사람들 분명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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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 북부 자카르타 끌라빠가딩 간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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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남부 자카르타 비벌리(Beverly) 아파트 간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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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 반뜬주 임페리얼 골프장 클럽하우스의 이글룸에서의 마지막 간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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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연대와 416 자카르타 촛불행동이 준비한 세월호 엠블렘과 탁상용 달력


그러다가 마지막 날인 12월 3일 일요일, 아무래도 그분들 일정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최선을 다해 가용한 모든 매체를 통해 홍보했어도 그분들이 사흘 동안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불과 수십 명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제 세월호를 잊기로 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모처럼 금요일을 끼고 찾아온 연휴에 다른 일정들이 겹쳐 있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검은 연기를 뿜어내던 발리 아궁화산과 12월 3일 새벽 인천에서 침몰한 낚시배 선창 1호의 참사소식에만 쏠려 있어서였을까요?


그 어머니들은 먼 길을 힘들여 날아왔는데도 매우 미미한 반응으로 상심한 채 귀국길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최측에서 지레 짐작하고 아예 연락을 내지 않은 건지도 모르지만 만약 대사관에서 바쁜 시간을 쪼개 이분들을 불러 차 한 잔 함께 마실 시간만이라도 할애했다면 얼마나 멋진 장면이 펼쳐졌을까요? 하다 못해 영사를 보낼 형편이 안 되면 꽃다발이나 케익이라도 대사 이름으로 보내주었다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요? 이 세상에 대인배 인증보다 쉬운 일이 없는데 아무도 그렇게 할 겨를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물론 당시 아궁화산과 발리 관광객 소개에 주력하던 대사관을 이 일로 비난할 순 없습니다.


그 마지막 간담회에 제가 간다 한들 크게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예상했던 것처럼 간담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엔 모르긴 몰라도 첫 날 끌라빠가딩 간담회부터 줄곧 세월호 엄마들을 따라다닌 416 자카르타 촛불행동 사람들이 절반은 되는 듯 했습니다.


"어머나! 이쪽으로 오셨네요!"


"아, 우연히 골프 치러 왔다가 보니 여기들 계셔서...."


아무리 뻘쭘해도 그렇지 제가 왜 그렇게 대답했을까요? 교회에서 예배 마치고 시간에 늦을까봐 액셀 힘껏 밟고 달려온 건데 첫 날 집 앞의 끌라빠가딩 간담회를 건너뛰고 집에서 50km 떨어진 먼 곳의 마지막날 간담회에 온 것이 몹시 멋적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간담회에서는 세월호 생존자인 4반, 10반 담임선생님들의 근황, 구조 당시 해경들이 학생들에게 퍼부었다는 욕설, 교감선생님의 자살사건에 대해 우리가 언론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이 유족들이 현장에서 보고 들은 것과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 안전공원을 만들어 기억교실을 복원하겠다며 안산 단원고에서 철거해 간 희생자 학급의 집기들은 안산 모처로 옮겨진 채, 아무런 진전이 없이 오늘까지도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 등,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현장과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세월호가 인양되어 미수습자 수색이 진행되고 세월호 특조위 2기가 꾸려지는 등 분명 진전이 있었지만 갈 길은 아직도 멀어 보이기만 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 반 년이 지났는데도 말입니다.


"가장 힘든 건 계속 기다려야 한다는 거에요. 전 정부 시절엔 싸우기라도 했죠. 하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선 후, 정부에서 다 해주겠다는데  도무지 싸울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정부가 해주길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어야만 한다는 게 너무 힘들어요."


경빈 엄마 전인숙 씨의 마음을 난 충분히 공감합니다. 대통령과 청와대는 바뀌었지만 세상은 아직 대부분 그대로이니까요. 사사건건 세월호 특조위의 발목을 잡고 진상규명을 가로막던 세력들은 국회에도, 정부 각처에도, 국정원에도, 법원에도, 심지어 경찰과 군에 이르기까지 예전과 다름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단지 예전에 으르렁거리며 서슴없이 내밀던 송곳니를 지금은 감추고 있을 뿐이죠. 마치 자긴 으르렁거린 적도 없고 송곳니도 원래부터 없었다는 듯 말입니다. 그것은 예의 대통령 간담회에 참석해 상석 테이블들을 가득 채우고 대통령과 축배를 나누던 동포사회에서 방귀 꽤나 뀐다는 높은 사람들 태반이 문재인이 대통령되면 나라가 망한다며 거품을 물었던 것을 이제 와 애써 감추는 것과 다름 아닙니다.


"아프지 않으셔야 해요."


땅거랑에 사는 저명한 여류 등단시인이 세월호 엄마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그 아픔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상처는 트라우마로 남아 언젠가 육체의 병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월호 유가족과 생존학생들에 대한 치료지원은 신체적 트라우마가 1년간, 정신적 트리우마 5년간입니다. 정신적 트라우마가 결과적으로 불러 올 신체적 이상에 대한 지원은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세월호 유족들 대부분이 이런 지원을 받지 않고 고작 수면제 처방으로 버티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자식을 먼저 보내고 그런 지원을 받아 치료받는 것을 도저히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는 부모들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회적 참사가 벌어졌을 때 피해자 지원은 대체로 야박하고 그 조건은 사뭇 까다로워 보입니다.


"사건의 진상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하겠지만 남은 분들의 삶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유족분들은 사고가 난 후 3년 반이 지난 지금 어떤 삶을 살고 계시나요?"


사흘 동안 거의 똑같은 질문을 받으며 똑같은 대답을 반복했을 두 어머니는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매우 어려워 했습니다. 그분들의 '생계'가 어떤 모습인지는 너무나도 뻔한 것이었는데도 우리가 일부러 모른 척 간과하는 부분인지도 모릅니다.


"너무 힘든 가정들은 직장에 다시 다니지만 대부분 투쟁하고 있고 대출에 의지해 사는 편이에요."


건우 엄마 김미나 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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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초기에 박근혜 정부는 보상금을 흔들면서 시한을 넘기면 그마저 못 받게 될 것이라며 상당수 유족들을 회유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를 기어이 거절한 유족들은 국민들이 모아준 성금을 받아 한동안 생활했고 이제는 대부분 대출을 받아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파괴되고 조각나버린 삶이 어떤 것일지 우린 상상하기 힘듭니다. 그 사고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가장과 주부로서 직장에 다니거나 가사에 힘썼을 텐데 이제 다시는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 돈을 벌지 못한다면 필경 그 대출이라는 것도 갚지 못할 텐데 그것은 세월호 유족들이 더 많은 것들, 말하자면 집이나 부동산, 차량, 유가증권 같은 것들을 순차적으로 상실하면서 남은 세상을 살아가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상실할 것이 더 이상 남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건우 엄마는 세월호 사건이 벌어지던 그날, 자신도 그때 이미 죽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에요. 함께 감시하자는 거에요."


그렇습니다. 정부가 자기 일을 제대로 잘 하는지 함께 감시해야죠.


하지만 그와 함께 모래로 만든 석상처럼 자꾸만 부스러져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세월호 엄마들, 그 유족들을 지탱하고 보호하고,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기 위해서는 함께 감시하는 것 이상의 도움과 지원이 꼭 필요해 보입니다. 그분들의 투쟁이 하루 속히 결실을 맺도록, 그래서 그간 쌓인 모든 한과 의혹이 한 점 모자람 없이 신원되고 소명되도록 확실한 조사활동과 법적 처리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분들이 정치인들, 또는 폭식투쟁으로 대변되는 반대편 양아치들에게 다시는 모욕당하지 않도록 지켜줘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분들이 오늘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그 투쟁이 끝나는 날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그 길을 열어두는 것이겠죠.


셋째 날 간담회는 세월호 노래 <이름을 불러주세요>의 뮤직비디오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리운 이들의 이름을 아껴 불러 봅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시작해 10분도 넘게 계속되는 이 잔잔한 노래는 다들 아시는 바와 같이 세월호 희생자 학생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일반인 희생자 304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주고 있습니다. 그 노래를 들으면 늘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https://youtu.be/got5xW4Sudc


전 세월호가 침몰하던 장면을 호치민에서 보았습니다. 활로를 찾아 인도네시아를 떠나 호치민에 정착할까 생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아직도 뭔가 손 쓸 수 있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 저 안에 아직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을 게 틀림없는데 아무런 조치도 없이 배가 가라앉기만 기다리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거나, 무슨 기술적 문제가 있다 해도,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뭔가 꼭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저 놈들 정말 무능하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후 애도를 표한다면서도 세월호 유족들을 급기야 종북으로 몰아가는 정부가 참 파렴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불려질 때 간담회장에서도 새삼 눈물을 훔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당사자들인 유족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슬픔을 이고서 지난 3년 반이 넘는 시간을 어떻게 살아왔던 걸까요.


두 어머니는 다행히도 활짝 웃으며 자카르타를 떠났다고 416 자카르타 촛불행동이 공지를 남겼습니다. 저분들은 우리가 만나지 못했던 다른 유족들과 함께 내일이면 또 다른 곳에서 세월호를 증언하고 협조를 요청하면서 당분간 투사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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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 @philjkt


편집 :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