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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펜더) 결산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이 2017년도 결산 기사를 요구했다. 분야는 알아서 고르라는 꼬리표와 함께, 솔직히 귀찮다. 한참 기자생활 이런결산 기사수도 없이 썼다. 문득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2017년도 인생을 결산 테니 기사로 낼래?”

 

반쯤 농담이었다(예전 미디어몹 시절에 편집부 기자들끼리 이런 짓을 했던 기억이 난다). 편집장은 농담을 진담처럼 받아들였다. 결국 쓰게 됐다.

 

나에 대한 결산이지만, 그래도기사이니 나름 구색은 갖춰서 써보겠다. 2017 펜더의 10 뉴스』 정도로... 가볍게 봐주기 바란다(이런 개인적 글이 지면에 올라갈 있다는 ... 신기하기도, 부끄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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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행권 청산

 

 

“풍요는 예술의 어머니다.”

 

- 볼테르

 

 

15? 아마, 정도인 같다. 본격적으로 몰리기 시작했던 정확히 10년이다. 2015년도에는 목까지 차고 들어왔고, 작업에 치이다 아웃 판정을 받았다.

 

정신과 의사가 노가다를 뛰어보는 좋겠다는처방 내렸고, 결과 1 정도 쓰는 일을 했다(해양 쓰레기 수거부터 밭농사까지 했었다). 확실히 노동일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깨닫게 됐다. 어느 정도 호전이 되고 나서 본격적인 탕감 모드에 들어갔다. 내가 만져보지도, 써보지도 않았던 수많은 카드빚과 사채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2015년도에 카드빚을 털었다.

 

2016년도에 잠시 고르기를 했고, 2017년도에 은행권 빚을 털었다. 3금융권, 2금융권, 1금융권까지... 위험한 순서대로 빚을 털었다.

 

나름 또래들의 벌이에 맞춰서 벌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돈들은 사라졌다. 사이 압류만 3 당했던 같다(2017 10 달에 마지막 압류가 들어왔고, 역시도 풀었다).

 

이제 금융권에 남은 빚은 없다. 친한 지인 명이 내게 이런 말을 건넸다.

 

네가 억울하다는 말을 승화시킨다면, 정말 좋은 작품이 나올 거다.”

 

지난 10년간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오던 말이 바로억울하다는 단어였다. 다행인 이제 소리가 많이 잦아들었다는 거다.

 

2017 10월에 마지막 빚을 털었다. 이자의 압박도, 독촉전화 노이로제도, 술과 없이는 없었던 불면의 날도 이제는 이야기가 됐다.

 

(은행이 간사한 일시불로 자동차를 구매하던 카드 한도가 연체 번에 한도 10만원이 됐다. 교통카드인가? 아예 0원이면 몰라도... 카드빚을 털고 나서 남은 카드를 잘라버렸다. 마지막 은행 빚을 털고, 나가려는데 카드 영업이 들어왔다. 앞으로의 대출을 위해서, 신용등급을 올리기 위해서, 포인트 혜택을 위해서 카드를 써야 한다며 카드 발급을 권유하는데 단박에 거절했다. 하긴, 카드 있을 때도 내가 거의 없었다. 패밀리 카드가 문제였지...)

 

빚에 허덕이던 시절 가장 부러워했던 인물이 볼테르였다. 그의 문장과 지식이 부러웠던 아니라 그의 금전감각과 투자안목, 작가이기 이전에 명의 생활인으로 보여준 탁월한 경영능력은 작가의 귀감이다(볼테르는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20 영주에 들어갔다).

 


“나는 너무나 많은 지식인들이 빈곤과 정열 속에 고통 받는 것을 지켜봤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의 숫자를 세지 않았다.”

 

- 볼테르

 

 

내가 지식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빈곤앞에서 자판을 두들기던 순간 그의 말이 얼마나 내리 찍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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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모든 끝냈다. 그럼에도 아직도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놓고 다닌다. 지금도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면 두렵다. 독촉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깊이 아로새긴 세월이다. 아마, 평생 핸드폰을 무음으로 들고 다닐 같다.

 

(지인들에게 갚아야 빚이 남았지만, 양해를 구했고 이건 아마 2018년도로 넘어갈 같다)

 

 

2. 일주일에이틀일하기

 

20세기 경제학계의 슈퍼스타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930 발표한 『우리 후손의 경제적 가능성』이란 글에서 향후 100년간 인류의 소득수준은 4~8 정도 높아지고, 주당 15시간만 일하더라도 살아가는데 충분할 것이란 예측을 했다.

 

소득 수준이 8 개선된다는 예측을 연평균으로 나누면 2.1% 경제성장률이 된다. 이는 지난 80년간 선진국들의 경제 성장률과 얼추 맞아 떨어진다. 문제는 노동 시간인데, 지금 우리나라, 아니 세계에서 주당 15시간을 일하면서 자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고백하건데, 주당 15시간 노동을 실천해 보겠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다만, 이런 생각은 했었다.

 

들어오는 일만 받자.”

 

대필이나 기획일은 하지 않는다.”

 

2015 심하게 앓고 다음부터 아웃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 구석에 도사리고 있었다. 2017년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가장 무서운 병은근면이다. 일하지 않으면 불안함을 느낀다.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불안함을 넘어 죄책감을 느낀다.

 

역시 마찬가지다. 때리거나 일을 하지 않으면 마음 한구석에서 조바심이란 치고 올라왔고, 조바심은 초조함으로, 초조함은 죄책감으로 변질됐다.

 

특히나 나같이빚의 압박 여러 가지숫자들이 직접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상황이라면, 이런 죄책감은 깊어진다. 지난 10년간의 삶을 돌이켜 보면 지옥이 따로 없었다. 삶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1 내내 고민했고, 예전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아닌 전전긍긍했다.

 

결국 일을하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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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는 자영업의 다른 말이다. 일을 쉬면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안을 극복하지 않으면, 다른 불안이 엄습할 거란 뻔했다.

 

2017 내내 군데 고정 연재 처를 제외하고는 고정된 일이 없었다. 가끔 들어오는 강연이나 외고 일을 제외하고는 일을 받지 않았다. 아니, 능동적으로 일을 찾아 나서지 않았다. 대필도 없었고, 논문도 없었으며, 기획일도 없었다.

 

계산을 해보니 1주일에 하루나 이틀? 달로 따지면 많으면 5~7 정도 일한 같다.

 

얼굴이 편해졌다. 마음은 편해졌고, 이제야 숨통이 틔이는 같았다. 정처 없이 떠돌았다. 불안과 죄책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망가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문제는벌이였다. 11 달에 1 수익을 계산해 봤다.

 

조금 의외였다. 우리나라 1인당 국민총소득보다 높았다. 평균은 없는 것이지만, 어쨌든 글을 써서 생계는 유지했다.

 

불안과 죄책감을 지울 없었지만, 굶어 죽지 않는다는 다시 확인했다.

 

 

3. 공부

 

고백하건데, 근본 없는 글쟁이다. 글을 써서 먹고 산다는 신기할 정도다. 마지막으로 글공부를 했던 더듬어 올라가면 2000년이 거다. 수업도 하루 만에 쫓겨났다(당시 강사가 선배였는데, 이미 데뷔한 놈이 수업에 들어오면, 주변 학생들에게 위화감을 있다고 나오지 말란 소리를 들었다).

 

16 만에 글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문장수업』이란 문장공부수업을 들었다. 사람이 늙지 않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것이공부 말을 확인할 있었다.

 

개인적으로 글을 쓰고 나면, 퇴고를 하지 않는다. 지금도 이게 잘못된 일이란 알고 있다. 그러나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언제나 누군가에게 쫓기는 기분, 어딘가에서 찾아와 돈을 놓으라고 목을 조일 같은 불안감이 있다. 편이라도 많이 쓰고, 빨리 써야 한다는 강박이 발목을 붙잡고 있다.

 

수업의 내용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으나, 예전 대학시절 본격적으로 글을 쓰겠다고 덤비던 시절의 되돌아 있게 해줬다. 템포 천천히, 숙고 글을 다듬으려고 노력하게 됐다(물론, 그런 글은 된다).

 

수업을 들으며 의식적으로 속도를 줄여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되지는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노력이 헛되지 않다는 알고 있기에 계속해 노력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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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웹소설

 

누군가의 꼬드김 덕분에 웹소설이란 써봤다. 애초 목적은 소설을 쓰는 문장 어디까지 있는가를 확인하는 거였다(거기에 이야기가 재미있는지, 나아가 돈을 있는지 등등). 예전 무협지 쓰던 시절과 달리 순문에 가깝게 글을 써봤다.

 

문장에 대한 평가는 좋았다. 그러나 문제는 구성과 내용이었다. 웹소설 문법과 달리 대하소설 형태의 구성이었고, 내용은 요즘 유행하는 이세계 전이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평가를 얻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문장이 통한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었다.

 

 

5. 두브로브니크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에 2 가까이 체류했다. 최초 두브로브니크란 말을 들었을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마틴 !’이었다. ‘꽃보다 누나덕분에 우리나라에서 유명해졌다고 하지만, 내게는왕좌의 게임밖에 없었다.

 

아는 편집자가,

 

두브로브니크에 5 동안 있었는데, 5일도 길어 없어. 3일이면 거야.”

 

라고 말했지만, 여행일정을 내가 것도 아니고 놀러 것도 아니었다(지금까지 번이나 해외를 나갔지만, 내가 자진해서 적은 없고, 내가 내고 적도 없다. 내가 봐도 신기하다. 2018 목표는 내가 가고픈 곳을 찾아 떠나는 거다).

 

두브로브니크 성벽 투어도 했고, 남들 가는 곳에도 설렁설렁 걸어 다녔지만 내가 정작 보고픈 왕좌의 게임촬영지였다. 결론부터 말하지만, 없다.

 

관광지답게 물가는 비쌌고, 왕좌의 게임 촬영지라고 자랑은 했지만 없었다.

 

기억 속에 가장 인상 깊었던 현지 가이드였다.

 

대학생이었던 그는 여름 알바를 위해 두브로브니크에 내려온 같았다. 그는 내게 로마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역사와 성벽의 구조에 대해 설명했다.

 

짧은 영어로 대화를 이어나갔는데, 그쪽도 나름 역사에 대한 상식이 있었고 역시도 기본적인 역사 상식이 있어서인지 이야기는 재미있게 흘러갔다. 게다가 대학생의 사회인식은수준이 높았다.

 

그가 분노했던 유고 연방으로부터 독립했을 당시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공격이었다. 세계 문화유산이라 있는 곳을 로켓포로 공격했던 거다. 지금 전망대가 위치한 곳에 로켓 포대를 설치하고 공격을 했다는 거다. 두브로브니크는 포위된 6개월 정도 항전 했었다고 한다.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도시 이곳저곳에 그때의 상흔이 남아 있었다. 총탄 자국을 비롯해 전쟁의 흔적들을 쉽게 찾아볼 있었다(찾아보려고 애써야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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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두브로브니크와 크로아티아의 역사에 대해 한참을 설명하던 그였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크로아티아의 미래에 대해 암울한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은 여름이라 관광객이 넘쳐나지만, 겨울이 되면 이쪽 사람들은 놓고 앉아 있다고 한다.

 

내놓을 만한 산업이 없다는 거다. 오로지 관광업 하나에 매달려 있기에 관광객이 오지 않으면 나라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거다. 한국의 경우는 스마트폰을 찍어내지 않냐고 말하며, 부러워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대학생다운 문제의식과 역사의식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가 유독 생각이 많은 인물이었을까?

 

 

6. 독립유공자 후손

 

아버지와 친척들을 이런 생각을 적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없이 친일파에 가까운 존재가 아닐까?”

 

소위 말하는세상 돌아가는 알고, 시류에 거스르지 않는 사는 존재들이 바로 우리 어른들이다. 개인의 행복보다, 주변의 시선에 신경 쓰고, ‘체면이라는 것에 목숨을 거는 존재들이다.

 

 

“가족이란 누가 보지만 않는다면 어딘가로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

 

- 기타노 다케시

 

내게 있어친척이란 존재, 집안이란 존재는 그런 존재였다(지금도 그렇다). 당장 한몸 건사하기 바쁜데도,

 

혼자 거냐? 조상도, 제사도 없고, 뿌리도 모른 거냐?”

 

라고 타박하는 아버지에게,

 

, 근본 없는 놈인데요.”

 

라고 말했다. 지금 아버지와는 냉전중이다. 내가 우선 행복해야 다음이 눈에 들어오는 아닐까? 언제나 친척과 문중을 말하며 가족을 소홀히 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해불가다.

 

실제로 거창한 신념이나, 사상도 아니고 그저 남들 눈에좋게보이면 그만인 삶이다. 나이 전형적인 한국인의 삶을 살고 있다고 보는 맞다.

 

조상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할머니가 욕심을 조금만 내려 놓았다면, 아니면 처신을 조금만 잘했다면 자식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싸우지는 않았을텐데...”

 

라고 번이나 푸념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친가는 그냥망했다’.

 

조상들의 훌륭한 행적들을 말하는 어렸을 때부터 들었지만,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나름 역사를 공부했기에 우리 족보와 문중 문집을 더듬어 봤는데, 보다가 덮었다. 팠다가는 봐서는 같아서 겁이 났다. 우리 집이 양반집안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없이 건너온 보면서 나름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했다. 친일파는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독립운동을 것도 아니다. 그렇다.

 

...집안에 대해선 아예 외면하고 살았는데, 얼마 어머니로부터 편지 장을 건네받았다.

 

『국가보훈처』

 

우리 집안과는 전혀 상관이 없을 같은 정부 부처로부터 서류가 날아왔다. 우리 어머니가 독립유공자의 외손녀였다. 머리를 맞은 느낌이었다.

 

알고 보니 어머니의 외할아버지는 3.1 독립운동 당시 경남 함안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고(사전에 조직을 만들고, 태극기를 찍어내고, 사람들을 모으고...), 일본군과 맞서 싸워 투석전을 벌였다고 한다(그때 명이 죽었다고 한다). 결과 2년간 옥살이를 했던 분이였다. 출소한 뒤로 시름시름 앓다가 2 만에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어머니(내게는 외할머니였던) 말을 들어보자면, 외할아버지는 의기가 너무 넘쳐서 순사들과 싸우다 돌아갔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집안은 몰락했고, 어머니는 고작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다(어머니의 어머니, 외할머니도 고생 끝에 찢어지게 가난한 우리 외할아버지를 만나게 됐다). 졸업하자마자 바로 공장에 들어가 여공생활을 하다 사흘 만에 결혼이 결정 지금의 아버지와 살게 됐다고 한다.

 

어머니의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록들을 끈질기게 조사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어머니에게 기록들을 정리해 들려드렸다. 어머니는 거의 60 만에 처음으로 외할아버지의 행적을 아들로부터 전해 듣게 됐다. 눈시울을 적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쁨의 눈물이랄까? 보지도 못한 외할아버지이지만, 분이 올바른 일을 했다는 . 자신의 굴곡진 인생의원인 하나가 나쁜 이유가 아니라 선한 이유로 인해 시작됐다는 알고 뭔가 후련하다는 표정이었다.

 

국가 보훈처에서 날아온 서류의 내용은 어머니에게 생활지원금을 준다는 거였다. 재산 정도에 따라 수도 있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적어낼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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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대신 서류를 정리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친일을 하시지.”

 

친일파로 살아서 치부를 했다면, 땅이라도 물려받았을지 누가 알겠는가? 구질구질하게 줄지도 줄지도 모를 돈을 받기 위해 이리저리 서류를 확인하는 내가 우습게 보였다.

 

어머니의 굴곡진 삶을 알고 있는 나였기에 어머니의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 대신 다른 일을 선택했다면, 어머니가 유복하게, 편안하게, 건강 걱정 없이 살았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 그걸 말로만 들었는데, 어머니의 삶을 더듬어 보니 말은진리였다.

 

지금 소원은 만원이 됐든 국가 보훈처에서 어머니에게 생활기금을 보냈으면 하는 거다. 돈의 액수는 중요치 않다. 외할아버지의 행적을 들은 뒤에 그제야 자기 인생을 납득한 고개를 끄덕이는 어머니를 보면서, 그래도 외할아버지의 흔적을 받아볼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7.

 

2017년에도 권의 책을 냈다.

 

제일 기뻤던 청소년 철학 시리즈의 1권을 냈던 거다. 2 다른 출판사에서 기획하다 30권이 넘어가는 제법 시리즈였기에 주저주저 하다 결국 기획이 무산됐다.

 

그걸 다른 출판사에서 냈다. 햇수로는 3년이 넘어가는 프로젝트였기에 1권을 받아들었을 때의 감흥은 남달랐다. 나름 인정도 받아 모처에서 청소년 선정 도서가 됐다. 덕분에 2 이후의 출판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는 중이다. 1권은 부담 없이 썼지만, 2권을 때는 부담감 덕분에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썼다. 그래도 보람을 느낄 있는 순간이었다. 이걸 앞으로 10년간 해야 하는데... 10 뒤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5권이 나왔다. 이제 끝이다. 시원섭섭하다. 처음 때는 무척 가벼운 마음이었으나, 어찌어찌 하다 보니 1945년까지 가게 됐다. 당분간 이런 글은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별로 없는 같은데, 4권정도 책을 출간했고, 내년도 출간 2권의 책을 탈고해 넘겼다. 다들 초판 이상은 나가는 같아서 안도했다.

 

글빚을 털었다. 2008년부터 시작된 지옥이 끝난 순간이다. 돈에 몰려서 계약서를 남발했는데, 이제 시절에 썼던 계약서는 정리했다. 인생에서 10년이 통째로 사라진 느낌이었다. 10년간 어떻게 하고 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빚에 허덕이며 되는 글은 썼던 기억밖에 없다. 이제 그때의 기억은 봉인해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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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팟캐스트

 

9월부터 캐스트를 준비했다. 하필이면, 시작할 무렵 팟빵에 관한 이러저러한 말들이 많았다. 처음엔 팟빵에서 준비하다가 순전히 문제로 녹음을 중단했다.

 

뒤로 동영상을 만들게 됐다. 지금 1 녹음이 끝났고, 편집도 막바지다. 플랫폼이 어디가 될지는 모르지만, 아마 12 말이나 내년 초에 나갈 같다. 대본 쓰는 지겹지만, 만들어 보니 재미는 있다. 같이 하는 사람도 자신이 원하는 포맷이라며 대본 빨리 쓰라고 채근이다.

 

그렇게 동영상을 앉힐 준비를 하는데, 군데 캐스트 업체로부터 연락이 왔다. 시험 삼아 군데는 게스트로 출연했다.

 

몰랐던 사실인데, 팟캐스트로 돈을 번다는 난망한 일이란 알게 됐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30위권 안쪽의 사람들은 돈을 벌지만, 순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스튜디오 비용이라도 건지면 다행인 상황이었다.

 

은근히 주변에서 팟캐스트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게스트나 코너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만 벌써 개째다. 그들이 그걸 하는 이유를 물어봤다.

 

재밌잖아. 보고 이거 거면, 버텨. 그냥 내가 즐기려 하는 거지. 그러다 수익이 나면 좋고... 수익이라고 기대 . 담뱃값 건지고, 스튜디오 비용 건지고, 달에 회식할 돈만 건지면 성공이지.”

 

2 역사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이의 변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 중이다.

 

 

9. 관태기

 

2016년에는 그래도 사람을 봤지만, 2017년에는 거의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만나야 몇몇 사람만, 연락이 몇몇 사람하고만 겨우 인사만 나눴다. 설이나 추석 전화를 돌리는 그만 지도 거의 6년이 넘어가는 같다.

 

돈을 벌려면 사람과 만나야 한다.”

 

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지만, 사람들을 만나는 불편했다. 내가 지금 어떻게 사는지 설명하는 난망했고, 지방으로 내려온 뒤로는 서울로 올라가는 번거로웠다. 결정적으로 귀찮았다.

 

결국 만나야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관계를 끊고 지내게 됐다. 2017 사람들은(일적인 관계를 제외하고) 나와 친한 사람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2017 동안 3 이상 만남을 가진 사람이 10명이 되지 않는다. 관계 포함으로 말이다)

 

물리적인 만남 대신 SNS 소통을 이어나갈 수도 있겠지만, SNS 아예 하지 않기에 거의 단절된 삶을 살았다고 있다.

 

SNS 하지 않는 이유도 단순하다. ‘귀찮기때문이다. 굳이 행복한 , 있는 하면서 자괴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남들의 행복한 , 있는 척을 보면서 괴로워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복을 엿보는 순간 행복은 도망간다.’

 

말을 믿고 있다. 비즈니스 모델로의 SNS, 프리랜서로서 최소한의 홍보수단 등등 많은 충고를 들었지만, 아직까지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런 보면서아직 배가 불렀다라고 말하는데(맞는 말인 같다), 당분간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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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은 주민등록번호로는 아예 하지 못한다. 초창기에 어쩔 없이 페이스북을 시작했는데, 년간 방치해놨더니 대만의 누군가가 해킹해서 성인광고를 뿌리기 시작했고, 결과 지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성인광고를 날렸다. 페이스북에다가 사정설명을 하려니 수많은 절차를 거쳐야 했고, 된다는 보장도 없기에 그냥 계정을 폭파시켜버렸다)

 

사람들과 만나는 자제(?) 뒤로 가지 변화가 생겼다. 상당히 편해졌다. 쉽게 말해,

 

'남의 눈치', '남의 기준' 빠져나갔고, 그대로의 보여주게 됐다. 가식이나 허세 같은 없었다. 그냥, 이렇게 생겨먹었고, 이렇게 것이다. 물론, 친척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혼자 사는 세상이냐? 어떻게 좋은 일만 하면서 사냐?”

 

천둥벌거숭이처럼 혼자 떠돌다 죽을래?”

 

대답은 단순명료했다.

 

 

...최소한의 상식, 인류애를 기반으로 배려, 사회공동체가 말하는최저한도의 규칙 지킨다면, 세상 사는데 무리는 없을 같다

 

사람이 느끼는 스트레스의 90% 이상은 인간관계에서 시작된다. 어떻게 보면, 스트레스의 원인 자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작업을 것일지도 모른다. 덕분에 좋은 점도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 내게 소중한 사람에게 집중할 있었고, 그들과의 관계를 보다 깊이 있게 즐길 있었다.

 

연락처를 인맥으로 생각하는 관계... , 틀린 말은 아니다. 영업도 돌아봤고, 활발하게 사회생활도 해봤는데, 확실히 사람을 많이 알면 어떻게든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인맥이 친구가 되는 아니다.

 

자발적 포기...

 

덕분에 많은 부분, 발목을 잡던 족쇄에서 벗어날 있었다. 아마, 당분간 이렇게 같다.

 

 

10.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 미팅

 

2017년에 내게 가장 많은 연락을 명이 택시 운전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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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2 많은 분은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선배이다. 신세도 많이 졌고, 술도 많이 마셨다. 영업으로 잔뼈를 다졌다가, 뜻한 (?) 있어 기획부동산 쪽으로 움직여 돈도 만졌던 이다. 그러다가 4 크게 무너졌고, 초까지 아등바등 버티다 결국 부동산 일을 접었다.

 

가진 날렸다.

 

형님의 아버님이 개인택시운전사다. 형이 택시를 물려받았다. 그게 4월의 일이다.

 

사는 쉬워. 살려니까 힘들지. OO, 그냥 살래.”

 

살려니까 힘들다. 묵직한 울림이다. 한때 많은 사모님들 모시고, 산으로 들로 팔러 돌아다니던 형님이, 이제 모든 내려놓았다.

 

살려는 생각 내려놓고, 남들에게 보여주는 모습 포기하고 그냥생각을 했다.

 

형은 많은 내려놓았다. 그러나 가지 내려놓지 못하는 있었다. 바로혼밥이다. 얼떨결에 택시에 뛰어든 거라 아는 기사도 별로 없고, 몇몇 아는 기사들도 알고 보면 아버지와 관계가 있는 상황이라 얼굴 맞대는 껄끄러웠다는 거다.

 

결과 혼자 편의점 김밥을 먹던가, 바나나 같은 걸로 간단히 때웠다. 그러다가 내게 연락이 왔다.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 연락이 온다.

 

시간 되면 같이 먹자.”

 

커피나 하자.”

 

하루 종일 안에서 지내야 하기에 사람과 말도 섞고 싶었고, 먹을 때만은 그래도 사람 온기를 느끼며 지내고 싶다는 거다.

 

택시 기사가 기사식당을 가야지! 원래 기사식당이 맛있지 않아? 합정 작업실에 망원으로 넘어가 맨날 기사식당 가서 먹었어!”

 

여기 기사 식당 맛없어. 동네 맛집이 나아!”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충대와 카이스트 사이의 주택가이다. 대학가 근처이다 보니 가격은 편이고, 입맛도 대충어린이 입맛 맞춰 놨다. 가성비로 따지면 대전에서 최고를 달린다고 해야 할까?

 

지난 4월부터 형은 점심시간이 되면, 이쪽으로 차를 몰고 온다.

 

먹자.”

 

1주일에 2 정도는 형과 같이 점심을 하고, 1~2번은 저녁 나가 커피를 마신다(편의점 커피를 들고 5~10 정도 주위를 걷는다). 어차피 기사도 사람인지라 가끔 몸을 움직여줘야 하고, 화장실도 가야 한다. 형은 여길 기착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때문에 서울에 올라갈 때면, 아쉽다는 언제 돌아 오냐고 도착일을 물어보고, 시간이 맞으면 택시를 끌고 대전역으로 나와 준다.

 

언제부터인가, 형이 밥을 사면 커피는 내가 사고, 내가 밥을 사면 형이 커피를 샀다. 암묵적인 . 그렇게 얼마가 지나자 점심시간은 비워두게 됐다.

 

택시 기사의 애환도 들어보고, 정치판 이야기도 듣게 되고, 대전 기사가 서울 교통방송을 듣는 이유도 들었다.

 

어쨌든 형과 나는 8개월 가까이 작가와 택시기사가 아니라 생활인으로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눴다. 어쩌면 둘은 서로에게 창문이 줬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며 2017년을 보냈다. 아마 별다른 일이 없다면, 2018년도 그렇게 보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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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 보니 2017년은 다른 없이 무난하게 보낸 같다. 딱히 욕심도 부리지 않았고, 욕망에 불타 스스로를 내몰지도 않았다. 그저 흐르듯 시간에 몸을 맡겼다. 다만, 흐름에억지 없었다는 특이하다면 특이할 거다.

 

스스로에게 윽박지르지 않았고, 하기 싫은 되도록 했고, 최대한 시간을 가지려 애썼다. 평안 방해하는 인간관계는 의도적으로 끊었으나, 사회적으로 해야 의무나 계약은 완수하겠다고 결심했고, 결심대로 결과가 나왔다.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의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기준이었다. 내가 행복한가, 내가 힘들지 않을까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결과 2017년의 나태했다.

 

남들이 본다면 무척 나태한 삶이었을 거다. 그런데 10년간의 뒤돌아 봤을 올해처럼 행복한 해는 없었다.

 

아마, 내년은 이렇게 살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쉬다보니 하고 싶은 생겨났다. 그걸 하기 위해서 다시 움직여야 같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의 결론이 스쳐지나갔는데, 인생을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바로 대입할 수는 없을 거다. 다만, 이런 나조차도 한해 이렇게 살기 위해 많은 용기를 내야 했다는 말하고 싶다. 결국 두려움과 불안을 넘어서는 용기가 없으면, 새로운 인생은 살기 힘들다.

 

두려움 너머에 진짜 공포가 있을지, 아니면 평온한 일상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걸 선택하는 역시 본인이다. 선택에 따른 책임을 고스란히 감내할 용기.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아니. 일상의 틀을 깨고 싶다면 우선 용기부터 찾아야 거다.

 

그게 한해 내가 깨달은 가지다.

 


 

 

한번에 보는 딴지 2017 결산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