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02. 24. 월요일
김재홍 + 정운현
지난기사 [박정희소백과사전]좌익의 흔적 + 친위대 하나회 <2> [공지]딴지 Books 1탄 '박정희소백과사전' 전격발행
딴지가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E-Book (App) 프로젝트의 시작인 '박정희소백과 사전'이 쥐도 새도 모르게 앱스토어에 발행 되었음을 독자제위덜께 알려드리는 바임다. 게다가 한시 특가 $2.99에 구독할 수 있다는 기가막힌 소식까지...
창작자의 욕망을 100% 해소함과 동시에, 개성과 재미를 듬뿍 때려넣은 딴지 E-Book 프로젝트에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김재홍 윤필용은 박정희와 인연이 각별한 사람입니다. 육사 8기로 박정희 장군을 부관으로 모셨고,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실장을 지낸 군부 내 최측근이예요. 군부 내에서 누구도 윤필용에 대해서 도전하거나 비판할 수 없었어요. 쿠데타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박정희 최측근의 위상을 가지고 활동을 했고, 수경사령관 하면서 군부 내 중요한 인사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했어요. 그런데 유신에 대해서 많은 비판이 있다는 것을 들은 것 같아요. 그것을 직접 비판하기는 어려우니까 이후락 중정부장, 서울신문 사장 등 박정희 측근 권력자들이 술 마시는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겁니다.
‘각하도 노쇠해 지시는데, 그대로 가다가는 야당에게 정권이 넘어갈 수도 있다. 우리 내부에서 후계자를 정해서 대비해야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어요. 이후락에게 ‘형님이 해도 되지 않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도 하고요. 좌우지간 그 얘기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이 됐는데 보고자 중 하나가 전두환입니다.
전두환은 그 때 준장으로 경호실 차장보인데, 직속상관이며 실세인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정보보고를 합니다. 일종의 밀고랄 수도 있어요. 전두환은 윤필용 수경사령관 아래서 30경비단장 등 여러 주요 보직을 했었거든요. 윤필용이 군내 비밀사조직인 하나회를 후원 관리하는 대부였고 전두환은 하나회의 보스였으니까 직계였는데 자신의 대부같은 윤필용을 박종규에게 일러바친 겁니다.
고자질은 탈모의 원인이...(전두환)
박종규는 전두환을 박정희에게 데리고 가서 그대로 보고하게 해요. 자신이 직접 보고하면 윤필용을 시기하고 견제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전두환이 직접 보고하게 하는 거지요. 처음 박정희는 그 얘기를 듣고는 “알았어. 거 쓸데 없는 소리들 하지 말고 일이나 잘해.”라는 반응이었어요. 나중에 신범식 서울신문 사장에게 전두환이 한 것과 똑같은 얘기를 듣습니다. 박정희는 청와대에 돌아와 진노하면서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진상 파악을 지시합니다.
누구도 감히 박정희의 분신인 윤필용에 대해 비판하거나 할 수 없었는데, 윤필용 손 좀 보라는 명령이 내려갑니다. 군 내에서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군인이기 때문에 중앙정보부에서 손을 댈 수도 없거든요. 그래서 보안사령부에 명령이 갔는데 당시 보안사령관은 윤필용의 육사 8기 동기인 강창성 소장이었어요. 강창성 소장은 육사 8기 1차 대령 진급자 7~8명 중 한 명입니다. 5.16 쿠데타 때 가담하지 않았고 정치군인을 반대한 유능한 군인입니다.
강창성 소장은 윤필용 수경사령관이 비록 동기지만 조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최고권력자 박정희와의 거리로 봐서 자기는 윤필용과 상대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박정희가 불러서 정보보고서를 주면서 이런 얘기 아느냐고 묻자 금시초문이라고 답변합니다. 보안사가 이런 것도 제대로 정보수집하지 못하느냐, 엄정히 수사해서 보고하라고 박정희가 지시를 해요.
부대로 돌아가자마자 조사대상자인 윤필용 소장에게 퇴근 전에 들르라고 전화를 합니다. 그때만 해도 강창성이 윤필용에게 ‘들르라’고 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 “퇴근 길에 내 방에 와서 차 한잔 하자”고 하는 정도였지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요. ‘각하를 뵙고 왔는데 정보보고서가 있으니 읽어보라’고 줘요. 윤필용이 보고서를 읽고선 항변합니다. 그 자리에서 강 소장은 ‘각하와 윤 장군 일인데 내가 어떻게 끼어들 수 있느냐, 직접 만나뵙고 용서를 빌라’고 이야기 합니다. 거기에 대해 윤필용이 선뜻 동의하지 않고 강 소장이 알아서 해결해달라는 태도로 말을 합니다.
강 장군은 나중에 민주당 국회의원이 됩니다. 나하고 잘 알고 그래서 여러가지 비화를 들려주고 그랬는데, “다음 날 아침 일찍 청와대에 가서 박정희 각하께 ‘윤 소장을 만나 진실이 뭐냐고 물어봤습니다. 술자리에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 것인데 오해가 있었다고 합니다. 각하께서 불러서 야단치시고 용서해 주시지요’ 그래요. 그 자리에서 박정희의 반응은 ‘이 사람 지금 무슨 소리하고 있어. 철저하게 조사해서 보고하고 엄정하게 처리해’”였습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식사를 강 소장과 대통령 가족이 함께 했는데 육영수 여사가 ‘아니 윤 장군이 우리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우리한테는 지만이(박지만) 다음으로 윤 장군인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권력에 도전한다고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그걸 듣고 강 장군도 중재가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등골이 오싹하고 소름이 끼쳤다’고 제게 이야기해줬습니다.
정운현 자기 또래나 부하들을 모아놓고 연설한 것도 아니고 술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각하도 나이 드시는데 노쇠하시는 것 아니오? 우리가 서서히 준비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게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믿고 아끼며 부관을 하던 사람이고, 자기들 나름대로는 기득권 보호이자 박정희에 대한 충성이자 충정의 표현인거죠. 예부터 왕은 금상(今上)이라고 합니다. 금상에 있을 때 후계를 논하는 것은 역린이에요. 다 대역죄지요.
김재홍 박정희를 왕으로 생각하는 거죠. 박정희에 대한 후계 혹은 2인자 이야기는 금지어였어요. 박정희를 오랫동안 모셔왔고 최측근으로 신임을 얻어온 윤필용 수경사령관. 당시 수경사령관 자리는 하나회 장교를 육성하는 책임을 맡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윤필용 본인은 단기 육사 8기지만 하나회 11기 출신들이 대개 수경사 근무를 많이 했어요. 그런 최측근을 ‘후계자’ 한 마디를 했다고 날려버린 겁니다.
용인술과 관련한 이야기만 더 하자면 강창성 보안사령관은 보안사령부로 돌아와서 수사진을 꾸려 조사를 하기 시작합니다. 윤필용 소장에게 직위해제 및 대기를 지시하고 조사를 합니다. 청와대에서 돌아올 때 이미 박정희 대통령이 직위해제 명령서를 줬다고 해요. 강 소장은 윤필용에게 직접 전화로 통보합니다. ‘내가 하는 것은 각하의 명령이네. 자네 지금부터 수경사령관 직위 해제이고, 자택에서 대기하는데 외부에 이야기하지 말게’ 자기들의 통제하에 발표할 때까지 발설을 막은 겁니다. 사령관이 갑자기 자택으로 가니까 참모장이 통제를 해야하는데, 참모장은 사령관의 수족 역할을 하지 않았겠어요? 그 때 참모장은 육사 11기 하나회의 중심 인물 중 하나였던 손영길 준장. 손영길은 하나회의 모체인 오성회가 칠성회로 확대될 때 멤버로 들어갑니다.
고개를 떨군 윤필용 (가운데)
수경사 참모장이던 손영길 준장도 조사를 하다보니 11기, 12기, 13기, 육본에서 군 주요 인사를 쥐고 흔들던 사람들이 죄다 하나회야. 윤필용의 발언을 조사해야 하는데 윤필용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사람들을 보니까 하나회란 말이죠. 육사 11기부터 13기까지 여기에 연루되어 있어요. 나중에 보안사령부 일일보고회의 때 수사간부가 ‘지하비밀결사처럼 뭉쳐서 윤 장군의 인사전횡, 권력남용이 하나회와 얽혀있다’고 보고를 합니다. 강 소장은 하나회에 대해 조사를 지시했고 결과를 보니까 하나회가 군 내 수도권 부대에 잠재해 있는 거에요. 그 때 처음으로 하나회가 노출됩니다.
하나회 조직을 박정희에게 보고하려하자 ‘두고 가라’는 말로 얘기가 끝났습니다. 이미 하나회 조사 과정에서도 보고가 들어갔는데, 하나회의 후원세력인 영남 군벌이 박정희에게 ‘보안사령관이 하나회를 수사한다면서 영남 출신 장교들 씨를 말리겠습니다’라고 직보를 했다고 해요. 이미 박정희는 하나회를 알고 있었고, 강 장군이 나중에 ‘군 내 비밀 사조직은 불가하니 하나회 척결'을 주창하자 ‘다른 고위 장성들이 영남 출신 장교들 씨가 마르겠다고 그래’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 말을 인용해서 말하자 강 장군이 안 되겠다 싶어 하나회에 대한 처벌을 포기하게 됩니다. 하나회가 영남 출신이니까 건드릴 수 없다고 알아서 판단하는 거지요. 참고로 강창성은 경기도 포천 출신입니다.
강창성은 며칠 뒤에 전방 군단장으로 쫓겨났고요. 그 이후에도 하나회의 보복이라는 후환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1980년 전두환이 군 고위장성 출신 선배들을 초청해 간담회를 갖는 자리에서도 더 이상 군이 정치에 개입하지 말고 민간 정치인들에게 넘겨야 한다고 발언해서 더 화근이 됐습니다. 며칠 후 잡혀가 고초를 겪었고 구속돼 삼청교육대까지 갔다 왔지요.
김형욱은 군부 내 박정희의 분신이라 일컬어지는 윤필용이 하루 아침에 몰락하는 것을 보고 중앙정보부장이던 자신의 처지도 염려하게 되고요. 몰래 미국으로 가서 반 박정희 활동을 합니다.
정운현 김형욱 이야기는 제가 좀 덧붙이겠습니다. 윤필용 사건 이후 73년 4월 15일, 김형욱이 비서실장을 데리고 대만으로 갑니다. 미국으로 바로가면 눈치 챌까봐 그런 것 같습니다. 대만에서 뉴욕으로 갑니다. 그 후에 박정희가 도망친 것을 알아챘죠. 김형욱이 6년 간 중앙정보부장을 했기에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단 말입니다. 유정회도 안 시켜주니까 좋은 일로 간 것이 아니라고 판단을 했죠. 유정회는 유신정우회의 줄임말로 유신 헌법 하에서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회의원입니다. 전체 의원의 1/3을 차지합니다. 일단 이것도 말이 안 되는데, 김형욱은 그 유정회에 들지 못한 겁니다. 중앙정보부장 끝나고 71년에 국회에 들어갔다가 유신 쿠데타로 해산 당하고 다시 국회에 들어가지 못한거죠. 박정희도 이런 김형욱이 내심 걱정됩니다.
김재홍 김형욱은 육사 8기로 5.16쿠데타 초기부터 김종필과 함께 움직인 정군파의 핵심이고요, 박정희 정권에서 6년간 중앙정보부장을 할 때 수많은 정치공작과 간첩단 조작사건들이 벌어집니다. 이북출신 반공주의자로 박정희를 비롯한 쿠데타 세력에 대북 강경론과 반공노선을 불어넣는 중심 역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권좌에서 밀려나 박정희 정권 아래서 암살당했기 때문에 피해자로 분류할 수는 있겠지요.
5.16 핵심 멤버. 김종필(좌), 김형욱(우)
정운현 박정희는 김형욱의 군 선배인 정일권, 김종필 이런 사람을 보내 귀국을 설득했어요. 김형욱은 박정희가 여러 번 사람들을 내치는 모습을 봤기에 귀국하지 않습니다. 가면 죽거나 혼날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그러고는 77년 6월에 뉴욕타임즈와 기자회견을 하면서 박 정권 내부의 비리를 다 폭로해버려요. 그 이듬해 '코리아게이트'가 불거지니까 미국 하원에서 김형욱을 증인으로 부릅니다. 김형욱도 하고싶은 말이 많아서 박 정권의 비리에 대해 다 말합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일본에 잠깐 나와서 <김형욱 회고록>을 출간합니다. 김형욱이 얘기한 것을 미국에 있던 박사월이라는 필자가 저술했는데, 박사월은 김대중 총재가 창당한 평민당 국회의원을 지낸 김경재 씨였습니다. 김경재 전 의원은 DJ 계열에 있다가 최근에 박근혜 후보 특보로 갔죠. <김형욱 회고록>이 나오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막으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어요. 그러자 정권 내에 김형욱이 어떤 사고를 칠 지 모른다는 우려가 생긴 것이죠. 김형욱과 인연이 있는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 윤일균 씨가 김형욱을 파리로 유인해 냅니다. 파리에서부터 김형욱의 행적은 불분명해집니다. 윤일균과 김형욱은 중정에서 같이 일을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는 신뢰를 했습니다. 김종필이나 정일권은 완전 정치인이니까 서로 알기만 하고 인간적인 관계는 없었지만, 윤일균은 한솥밥을 먹은 식구니까 신뢰를 했겠고, 윤일균의 요청에 의해서 파리까지 가요. 김형욱이 파리에 도착한 게 79년 10월 1일입니다. 같은 달 10.26이 발생하죠.
김형욱 회고록 / 김형욱, 박사월(김경재) 지음
김형욱이 그 이후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대해서 알려지지 않습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김형욱의 납치/사망설에 대해 매체에서 공식적으로 다룬 것은 1999년입니다.
미국에서 활동했던 재미언론인 문명자 씨가 있습니다. 2008년에 작고하셨지요. 제가 이 분을 만나보기도 했고, 기사로 쓰기도 했는데요. 이 분이 1999년에 <박정희와 김대중>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참고로 문명자 씨는 김대중 납치사건을 국내에 처음 보도한 사람입니다. 당시 MBC에서 워싱턴 통신원을 했을텐데, 김대중 납치사건이 국내에 보도되지 않던 때입니다. 문명자 씨 얘기가 처음부터 김대중 납치사건을 꼭지로 하면 보도가 안 될 것 같아서,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끼워넣었다고 합니다. 문명자 씨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친해서 청와대에 가서 밥도 같이 먹고 했는데, 이 일로 인해서 국내 입국이 금지돼서 미국으로 망명하고 반 박정희 활동을 하게 됩니다.
문명자 씨가 증언한 바에 의하면 하루는 퇴임한 정일권 전 총리를 만났는데 정 총리가 ‘박정희 그 사람 무서운 사람이다’, ‘김형욱을 서울에 잡아와서 근교에 있는 폐차장 압착기로 죽였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 때부터 언론에서 김형욱 행방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이 책이 나오고 제가 보도한 이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팀이 취재한 결과 일본 유력 언론지 간부의 증언을 받아냈는데 ‘김형욱은 제네바에서 살해당한 뒤 파리로 옮겨져서 한국으로 운반됐다’ 이게 두 번째 나온 김형욱 납치 암살설이고요.
2005년 4월 시사저널에서 세 번째로 이런 증언을 냈습니다. 중앙정보부 특수공작원 출신으로 김형욱 사건에 가담했다는 사람의 증언을 빌어 ‘김형욱을 파리 시내에서 납치해서 마취시킨 후 외각으로 끌고가 양계장 분쇄기에 집어넣어 닭모이로 처리했다’ 이게 세 번째 증언입니다.
얼마 후 2005년 9월 국정원과거사위원회에서 김형욱 납치설을 조사했습니다. 이 때 국정원과거사위원회 자체 조사결과에 의하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로 프랑스에 있던 중앙정보부 요원들과 이들이 고용한 제3국인에 의해 납치 살해되서 파리 근교에 버려졌다.’ 이게 네 번째 증언입니다.
파리에서 사라졌다.
2008년 신동아 4월호에서 사건 당시 외사경찰이던 윤 모씨의 증언에 의하면 ‘김형욱은 김포공항을 통해 압송된 후 김재규의 지시로 폐차장에서 최후를 맞았다는 증언을 들었다’가 다섯 번째 증언입니다. 문명자 씨의 증언과 비슷하죠.
마지막으로 2009년 6월 <김형욱 회고록>을 쓴 김경재 전 의원이 ‘김형욱은 위장 간첩에 의해 납치돼 파리 근교의 양계장에서 피살됐다’가 여섯 번째 증언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용어가 몇 개 있습니다. ‘양계장’, ‘폐차장’, ‘파리’ 혹은 ‘국내’입니다. 파리에서는 양계장에서 처치됐다, 죽이고 유기했다는 이야기가 있고요. 국내에서는 죽여서 들여왔다, 산 채로 들어와 폐차장에서 처리됐다는 이야기가 있고요. 제가 따로 들은 증언으로는 ‘청와대 지하실에서 박정희 혹은 그 세력이 김형욱 머리에 총을 쐈다고 한다’는 게 있습니다.
이 모든 게 증언 뿐이고 물증이 하나도 없지만 당시 중정에서 유인해서 마취하거나 처치에 가담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취재원이던 일본 유력지의 간부라든지 외사경찰 윤 모씨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조금씩 증언이 달라서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박정희나 그 하수인에 의해 살해됐고 유기된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즉 김형욱이 파리에 있는 빠찡코에 갔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김재홍 가장 오래 중앙정보부장을 했고, 박정희의 최측근 권력자이자 5.16 핵심세력인 김형욱이 박정희 정권에서 의문사 당한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어떤 과정으로 어떻게 죽임을 당했느냐는 알 수 없지만요. 특히 중앙정보부 조직이 지령을 받아 작업을 한 것은 맞을 것 같지만 당시 중정부장은 김재규인데, 김재규 부장이 얼마나 관여했고 명령을 내렸는지는 규명해야 할 문제인 것 같고요. 중앙정보부는 거대한 집단이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의 체제 폭력을 휘두른 통치도구였습니다. 온갖 짓을 다 했기 때문에 김형욱 중정부장 때 저지른 일이 무엇이냐, 김재규 중정부장 때 저지른 일은 또 무엇이냐 하는 것을 정리해봐야 할 것입니다.
실제가 아님. 코엔형제의 Fargo의 한장면임.
가령 김재규는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10.26을 거사했다고 하면서 나쁜 일을 한 일이 없다고 주장했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김형욱이 납치돼 암살된 79년 10월이면 김재규가 유신체제와 박정희 독재권력이 타락해서 그대로 가서는 곤란하다라고 생각을 했을 때이고요. 여러 가지 그의 법정 진술과 정황으로 미루어 이미 박정희를 제거하기로 결심한 뒤의 일이기 때문에 김형욱을 그렇게 암살하라고 지령을 내렸을 지 모르겠네요. 어쨌든 박정희의 용인술 중에서 마지막 순서로 얘기할 사람이 지금 말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입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김재홍 김재규는 경북 구미 태생으로 박정희와 동향 출신이고 나이는 9살이나 어리지만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 동기생입니다. 5.16 쿠데타 때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집권 후 핵심보직에 중용됐어요. 육군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 등을 한 거죠.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을 같이 한 사람은 김재규가 유일합니다. 박정희는 권력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질 않습니다. 나눠주면서 상호 견제하게 만들고 권력 투쟁하도록 하는 게 그의 용인술인데 김재규는 유일하게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장관을 시킬만큼 중용했지요. 그런 김재규가 박정희를 쐈을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고요.
용인술로만 이야기한다면 그렇게 중용한 김재규가 ‘유신 체제는 이대로 안 된다. 민주 헌정을 말살한 것이다. 미국이 민주회복을 요구하고 있고, 국민들의 저항도 커지고 있다’ 이렇게 박정희에게 진언하지만 거절하고요. 두번째는 박정희의 자녀 문제에 대해 중앙정보부에서 내사를 해 보고를 한 게 문제가 됐어요.
1979년 10월 부산 마산에 민중 시위가 터지자 박정희는 강경한 진압을 주문하고 중앙정보부에도 강경대책을 지시합니다. 청와대 경호실장이던 차지철도 부마 시민저항의 배후에 불순세력이 있다고 하지요. 그러나 김재규는 부마시위 현장에 가서 살펴본 뒤 돌아와 '시민들이 시위대에 빵과 음료수를 날라다 주고 성원하는 것을 보았다'면서 '이것은 불순세력이 개입한 것이 아니다'고 주장합니다.
왼쪽 오른쪽 가리지 않고 가카와 함께한 차지철
상호 견제하게 하는 박정희의 용인술은 경호실장 차지철로 하여금 김재규를 견제·비판하고, 중앙정보부가 야당 정치공작도 제대로 못하고 시국 대처도 유약하다며 공격하고 비판하게 합니다. 둘이 싸우게 만든 것이죠. 김재규 법정 진술을 보면 '그렇다고 해서 차지철 경호실장을 상대로 권력 게임을 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유신 체제와 각하의 문제이지 다른 마음이 없었다'고 이야기를 해요.
박정희의 용인술이라고 하는 것은 변덕과 의심과 진노를 발동하고 거기에 기반해 체제폭력의 도구였던 중앙정보부가 나와서 폭행·고문하고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고요. 자기가 만든 틀을 벗어나면 언제든지 화를 내고 진노함으로써 중앙정보부가 기강을 잡게 하는 그런 용인술이었고, 두 번째는 부하 권력자로 하여금 상호 경쟁하고 갈등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거기에서 장기를 두는 용인술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운현 박정희 때 2인자라고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1 다음 2가 아니라 뚝 떨어진, 한 5, 6등과 비슷한 2인자가 김종필, 정일권 정도가 있지 나머지는 2인자 반열에 들만한 인물이 없죠.
김재홍 그 당시 권력자라고 한다면 중앙정보부장과 청와대 비서실장과 경호실장 정도인데.
정운현 그 사람들은 권력자이지 후계자로 거론될 2인자는 아니었다는 거죠. 김종필은 5.16 주체에다가, 박정희 최측근이고 여러 조건으로 볼 때 박정희가 갑자기 없어진다면 후계자 감으로 거명될 만한 2인자고. 또 하나는 군 내부의 신망이나 연배를 감안한다면 정일권이란 말이죠. 드물게 총리도 하고 공화당 의장도 하고 국회의장도 했어요. 유일하게 정일권만 그래요.
정일권은 봉천군관학교 5기로 박정희보다 선배인데다가, 정일권 역시 두뇌가 명석하고 공부를 잘 한 사람이에요. 박정희가 부러워할 만한 군 선배가 정일권으로 보여요. 게다가 튀거나 패거리를 짓거나 야욕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박정희는 얼굴마담으로 세우기 좋고 믿을만한 군 선배로써 밑에 데리고 있기 편했던 거예요. 말도 잘 듣고. 그래서 국회의장, 당 의장, 총리의 자리에 쓰죠. 윤필용 같이 자기 졸개라고 생각하면서도 언젠가 클 수 있다고 생각된 사람은 가차없이 끊어버리는 것이 박정희 용인술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뼛속까지 2인자.
김재홍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켜서 독재자가 되고 대통령이 되기 이전까지의 행적은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문제는 공인이 된 뒤, 권력자가 된 뒤, 국가원수가 된 뒤에 국가 권력을 이용해 술과 여자를 탐닉한 것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사생활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중앙정보부라는 국가기관의 의전과에 채홍사를 둬서 소문이 다 났고요. 그 권력을 이용해 연예계와 요정에서 여성을 데려다가 청와대 근처의 이른바 ‘안가(安家)’에서 술자리를 가졌는데요. 엄연히 말해 이것은 개인의 사생활이 아닙니다. ‘국가 최고 권력자의 사생활’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10.26 사건의 4대 원인 중의 하나로 보는 것이죠. 박정희의 사생활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10.26 사건 군사재판에서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던 박선호 예비역 대령 덕분입니다. 김재규는 해방 후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에서 교사를 잠깐 했는데, 박선호는 그 때 제자였어요. 박선호가 법정에서 여러 번 얘기하기를, “채홍사라는 역할이 가정을 꾸린 가장이자 자식을 둔 아버지로써 할 일이 못 돼서 여러 번 사표를 냈다. 사의를 표했다. 그런데 부장님께서 ‘자네가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하겠는가!’ 강권해서 해왔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10.26 사건에 대해 생각해 볼 때 현직 중정부장이 직계부하들과 함께 직속상관 대통령을 총으로 살해한 이유가 ‘민주헌정 회복’이라든가 ‘유신체제가 너무 반민주하다’라든가 이것도 큰 이유가 됐겠죠. 당시 국민적 저항이 크니까.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단 말이에요.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자리는 유신 체제의 중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마음이 바뀌었느냐, 즉 박정희 다음 2인자로서의 위상인데 같이 권력을 누리다가 언제 마음을 바꿨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그 부분이 군사법정에서 변론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을 변호인단이 했어요. 21명의 변호인단 중 특히 강신옥, 안동일 변호사 같은 분들이 문제의식을 느낀 겁니다. ‘이것은 정치체제 민주헌정의 문제 뿐 아니라 인간적인 뭐가 있는 것 아니냐’, ‘그것으로 변론을 하는 게 옳겠다, 그게 효과적이겠다.’는 판단을 했어요. 그리고 재판이 열리기 전 변호사 접견에서 강신옥 변호사가 박선호를 쿡 찔러서 얘기를 유도해 낸 겁니다. ‘당신의 동향 선배이고, 은인이고, 중용해 준 사람인데, 유신에 대한 문제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지 않느냐, 다른 이유가 있지 않느냐?’며...
법정에서 검찰관이 먼저 사실 심문을 하고, 변호인이 변호인 심문을 하고, 나중에 재판관이 정리해서 인정 심문을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검찰관이 묻습니다. ‘박선호가 여자 둘을 데리고 온 것이 6시 반 쯤이니까 궁정동 비밀 요정의 술자리 행사가 열리기 전에 어디 갔다 왔느냐.’ 처음에는 얘기를 안 하죠. 이후 변호인 심문에서 ‘그 때 여자 데리러 어느 호텔에 갔죠?’ 박선호는 ‘서울에 있는 호텔입니다’라고 답해요. 그러자 변호인이 ‘프라자 호텔 가서 여자 한 사람 데려왔죠? 그 이후 내자 호텔에서 다른 여자 데려왔죠?’ 라고 묻기 시작하면서 10.26 사건 당일의 행적이 밝혀지기 시작한 것인데, 박선호가 그 얘기를 하려 하니까 김재규가 ‘그 얘기는 하지 마!’라며 말립니다.
김재규는 끝까지 박정희에게 ‘각하’라는 호칭을 붙였고 박정희의 사생활이나 인간적인 명예에 대해서는 굉장히 보호를 했습니다. 유신 체제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비판하고 문제제기를 했지만 사생활은 일체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직계부하 박선호가 얘기하려는 것을 제지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 일이 있은 뒤에 강신옥 변호사가 피의자 접견 장소에 가서 집중적으로 면담하고 기록을 합니다. 법정에서는 김재규가 말려서 못했지만 접견장소에서는 실토를 해요. 변호사들의 피의자 면담록 노트가 있어요. 노트가 전부 공개되지는 않았고, 모든 사람의 실명이 기록되지도 않았습니다. 그 노트 복사본을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강 변호사께서 글씨를 남이 읽어보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히 악필이더라고요.
정운현 실명이 더러 공개되어 있지 않습니까?
김재홍 정확하게 실명이 알려진 사람은 20명 정도고요. 대부분은 성이나 영어 머리글자 정도만 나왔습니다. 중요한 대목은 재판 과정에서 알려졌는데, 채홍사 얘기가 나오면서 비밀 재판으로 진행됩니다. 유신 체제에 대한 깊은 비판에 들어가자 국가 안보 사항이라고 비공개로 진행한 것이 있고, 여자 문제는 권력의 치부이고 부끄러운 문제다 싶어서 비밀로 해요.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은 대통령의 채홍사라는 위치가 불명예스럽게 느껴질 것입니다.
정운현 이름 앞에 채홍사 세 글자가 붙었다는 것은 엄청난 불명예죠. 본인이 원한 일은 아니었지만.
김재홍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전속부관, 수행부관으로 박흥주 현역 대령이 있었습니다. 육사 18기의 선두주자였어요. 유망하고 청렴한 장교를 데려다가 수행부관 삼았습니다. 현역 군인이기 때문에 자신이 모시는 상관인 중앙정보부장이 시키는 대로 한 거예요. 거부하지 않고. 그런 사람을 대통령 시해범의 하나로 간주해서1심에서 처형해 버립니다. 현역 군인이기 때문에 3심까지 가지도 않았어요. 김재규에게도 1980년 5월 20일 대법 확정 판결이 나고 24일 사형을 집행 합니다. 그 때는 광주항쟁이 진행 중이었어요. 그 문제가 광주항쟁의 구호로 등장할까봐, 또 미국에서 간섭할까봐 그런 거죠. ‘김재규는 정치범이고 양심범이다’라고 엠네스티 같은 곳에서 나서면 그를 함부로 할 수 없거든요. 그 때 전광석화처럼 처형하지 않았으면 처형을 못 했을 겁니다. 박정희의 후예이자 친위대인 하나회가 내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일종의 보복적인 사형 조치라고 봅니다. 보복적인 처형이 아니었으면 죽일 이유가 없는 것이죠. 김재규 뿐 아니라 박흥주 대령까지도. 군이라는 상명하복 관계에서 명령에 따른 것뿐인데 그렇습니다.
정운현 저는 하나 생각나는 게 있는데요. 박흥주인지 박선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재판 끝나고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두 딸이 ‘우리 아빠 살려주세요.’라고 적힌 손 팻말을 들고 우는 사진이 있었는데요. 문득 그 장면이 스쳐 지나갑니다.
박흥주 대령의 두 딸
김재홍 박정희가 살해 된 날 밤에 박흥주 대령은 집으로 돌아가서 두 딸과 부인과 함께 있어요. 합수부는 다음 날 박흥주를 체포, 연행해 가요. 저도 당시에 기자였는데, 다른 기자들이 박흥주 대령이 사는 집을 스케치해서 알려온 모습이 서울의 산동네인 성동구 행당동에서 어렵게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만약 박흥주 대령이 ‘하나회’ 소속이면 떵떵거리는 부자가 되고, 잘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박흥주는 18기의 선두주자이고 우수 장교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회에 가담하지 않았고, ‘군인이 국가와 국민에게 복종하는 것 말고 사조직에 복종하는 것은 반국가적이다’라고 생각했어요.
정운현 훌륭한 군인이네요.
김재홍 그렇죠. 반(反)하나회 입장에 섰던 분들이 많았어요. 사실 그 쪽이 다수죠. 박흥주는 반대 입장에 섰던 장교인데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 동기생들도 다 애석하게 생각했고요. 나중에 그가 사는 집이 공개되니까 다들 안타까워하며 청렴한 군인이었다고 평가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다음회에 계속...
김재홍 + 정운현
정리 : 전자책나무
편집 : 너클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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