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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일간 2만 9000㎞를 항해해 온 러시아 발트함대. 애초의 목적이었던 극동함대와 합류가 물거품이 된 상황에서 그들의 목적은 블라디보스톡으로의 ‘무사귀항’이 되었다. 목적이 단순해져 선택지도 단출해졌을 것 같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난점이 있었다.


첫째, 보급품(연료)의 한계
둘째, 일본해군을 피해 갈 수 있는 항로의 선택


반퐁항에서 추가로 연료를 보급 받았다고 하나 충분치 않은 상황이라 연료낭비를 최소화한 상태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올라가야 했다. (블라디보스톡으로 항로를 잡을 무렵엔 배 안의 목재 가구를 다 끌어내 장작을 만들 정도로 연료상황이 심각했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는’ 일본 해군이 문제였다.


1905년 1월 여순 요새가 함락되고 나서 도고 헤이하치로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극동함대와 발트함대의 합류를 막아낸 일본 해군은 대대적인 정비와 수리와 훈련을 통해 발트함대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도고 헤이하치로의 기함이었던 미카사는 1년 사용할 포탄을 10일 동안의 연습 사격으로 다 소모할 정도로 철저한 준비를 했다. 말 그대로 ‘나라의 운명을 건 일전’이었던 것이다. (6.25 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이 뚫렸다고 가정해 보라)


미카사.jpg

요 놈이 바로 미카사다.


당시 도고 헤이하치로는 물론, 전 세계의 많은 군사 전문가들의 정세 분석은 하나였다.


“발트함대가 블라디보스톡으로 들어가는 순간,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절대 이기지 못한다.”


영국마저도 움찔할 정도의 전력에다가, 표트르 1세 이후 수백 년간 러시아의 가장 막강한 해상 전력으로 군림해 온 발트함대. 수병들의 숙련도는 영국 해군과 비견될 정도였고, 지휘관이었던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자타가 공인하는 러시아 최고의 해군 지휘관이었다. (220일간의 항해 동안 단 한 척의 이탈도 없이 1만 6천 해리를 달려왔다는 것으로도 그의 지휘력은 인정받아 마땅하다. 러시아 해군 내에서의 인망도 대단했는데, 평소 생활이 곤궁한 부하들에게 자신의 월급을 건네 줄 정도라 수병들과 장교들의 존경심도 대단했다)


문제는 220일간의 긴 항해였다. 전함의 경우 큰 피해는 없지만, 그래도 정비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수병들도 문제였다. 220일간의 긴 항해로 심신이 극도로 지쳐있었다. 이 상태로는 전투는 고사하고, 블라디보스톡까지의 항해도 자신할 수 없었다.


이제 이들 앞에 놓인 선택지는 단 하나로,


일본 해군을 피해 블라디보스톡에 입항


하는 것뿐이었다. 문제는 일본 해군이 이를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이 상태에서 일본 해군과 전투를 벌인다면 상당히 ‘불리할 것’이란 건 누가 봐도 자명한 사실이라 발트함대의 블라디보스톡 행에는 ‘일본 해군을 피해서’란 단서가 붙었다.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는 항로는 3개였다


해협.jpg  


제 1 예상항로: 한국과 일본 사이의 대한 해협과 쓰시마 해협
제 2 예상항로: 혼슈와 홋카이도 사이의 쓰가루 해협
제 3 예상항로: 홋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의 소오야 해협


당시 일본 해군에겐 이 3개의 예상항로를 다 틀어막을 전력이 없었다. 3개의 예상항로를 모두 방어하겠다고 함대를 쪼갰다가는 발트함대에 의해 각개격파 당할 확률이 높았다. 일본도 3개 중에 1개를 골라서 모든 전력을 다 투입해 발트함대와 일전을 벌여야 했다. 러시아와 일본의 가위바위보 싸움이라고 해야 할까?


당시 기함인 수브로프에 모인 발트함대의 참모와 주요 지휘관들은 3개의 대안을 놓고 갑론을박했다.


“안전하게 소오야 해협으로 가야 합니다!”


“적의 허를 찌르는 강행돌파가 가장 확률이 높습니다. 큐슈, 시코쿠, 혼슈 연안을 공격하면서 쓰가루 해협을 통과해야 합니다.”


1안과 2안은 애초에 현실성이 떨어졌다. 연료문제와 수병들의 피로를 생각한다면, 처음부터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당시 발트함대 참모들의 의견은 거의 대부분 대한 해협과 쓰시마 해협이었다. 연료 사정과 수병들의 피로를 고려한다면 블라디보스톡으로의 최단거리를 선택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함대 지휘관이었던 로제스트벤스키 제독 역시 이에 동의했다.


하지만 일본 해군도 바보는 아니었다. 일본은 발트함대의 예상 항로를 예측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운 채로 발트함대의 행방을 수소문(?) 하고 있었다. 역시나 ‘석탄’이 문제였다.


발트함대가 연료 확보에 골머리를 앓았던 터라 일본 해군은 석탄보급선을 추적하는데 열을 올렸다. 일본의 추적에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기만책을 사용했다. 함대 일부를 빼내 상선 단속 활동을 벌이며 일본 해군의 신경을 분산시키려 했다. 즉, 미끼를 던진 것이다.



도고 헤이하치로 승부수를 던지다


당시 일본 해군은 발트함대가 소오야 해협 아니면 대한 해협으로 항로를 잡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소오야 해협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발트함대는 가장 안전한 항로로 움직일 것이다.”


모든 참모진들이 소오야 해협으로 의견을 모으던 그 때 홀로 대한 해협-쓰시마 해협을 주장한 이가 있었다. 바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었다.


“220일간 1만6천 해리를 달려온 함대다. 최단거리 항로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아울러 허의 허를 찌른다는 전략상의 술책도 고려해야 한다.”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함대를 진해(아직까지는 대한제국이었다)에 배치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도 러시아 함대는 나타나질 않았다. 도고 헤이하치로는 자신의 판단에 의심을 품었고, 러시아 발트함대가 쓰가루 해협으로 항로를 잡은 것이라 판단한다. 도고 제독은 대본영에 함대 이동 허가를 요청하는데, 대본영은 조금 더 기다려보자는 회신을 했다. 도고가 고민을 하던 이 때, 기적이 일어난다.


“러시아 함대의 석탄 보급선이 상하이에 입항했다.”


일본을 살린 정보였다. 상하이에 석탄 보급선을 보냈다는 건 러시아가 최단 항로로 블라디보스톡에 가겠다는 의미였다. 일본의 운명을 건 ‘전투’는 그렇게 시작됐다.



쓰시마 해전


발트함대는 1905년 5월 17일 반퐁항을 출발하여 대한해협으로 향했다. 해협 근처에 다다랐던 5월 25일, 함대의 속력을 늦추고 무전도 끈 상태에서 천천히 대한 해협으로 진입했다. 때마침 짙은 안개가 끼어서 안개와 어둠을 틈타면 무사히 해협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신은 러시아 편에 섰던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전쟁이나 전투는 ‘사소한’ 실수로 시작되고 끝이 난다.


발견.jpg
오렐호의 불빛을 발견했다.


5월 27일 새벽 2시 45분, 발트함대의 병원선 오렐호가 짙은 안개 속에서 등불을 켠다. 뼈아픈 실책이었다. 이 등불을 일본 해군의 경순양함 시나노마루(信濃丸)가 발견했다. 눈에 불을 켜고 발트함대를 찾던 일본 해군에게 이 작은 등불은 승리로 가는 ‘길잡이’가 돼 주었다.


시나노마루는 이 등불을 끈질기게 따라 붙었고, 새벽 4시에 대규모 러시아 함대가 이동하는 걸 확인한다. 발트함대 확인과 동시에 도고 제독은 전 함대에 출격명령을 내린다. 일본 해군은 조심스럽게 러시아 함대를 추적하다가 해협의 병목지역에 이르자 러시아 함대 앞을 가로 막았다.

 

1905년 5월 27일 오후 1시 55분. 미카사에 전투개시를 알리는 ‘Z기’가 게양됐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그렇게도 자랑하는 T자 전술을 펼친다. 원래 도고는 어뢰정을 중심으로 한 작전을 짰으나, 풍랑이 거세서 소형 어뢰정을 주축으로 한 작전 대신 함대전을 선택했다.


당시 발트함대는 새벽부터 일본 해군의 추적을 감지하고 일본 해군함대와 꼬리잡기를 위한 기동전을 펼치느라 함대 진형이 3열로 바뀐 상태였다. 화력집중이 어려운 상황에서 일본은 러시아 발트함대 앞에서 T자 진형을 짰다.


일본군함.jpg

T자 진형은 정(丁)자 진형으로도 불린다.


발트함대에게는 호기였다. 진형을 짜는 동안에는 제대로 된 포격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진형을 짜는 일본 함대에게 포화를 날릴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발트함대는 사력을 다해 일본 함대에 포격을 날렸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승기는 발트함대에게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발트함대는 몇 가지 치명적인 사실을 간과했다.


첫째, 함대간의 상대속도. 당시 일본 함대의 속도는 14노트였고, 발트함대는 11노트였다. 일본 함대가 더 빨리 선회했기 때문에 포탄에 노출될 시간이 그만큼 적었다.


둘째, 포격의 정확도. 자이로스코프(올바른 방향으로 진행하도록 돕는 네비게이션 장치)가 없었던 시절이라 수상에서의 포격전의 명중탄 적중률이 낮았다. 게다가 발트함대는 220일간 항해를 하느라 제대로 된 훈련은 고사하고 수병들의 건강관리도 힘겨웠던 상황이었다. 반면 일본 해군은 발트함대를 기다리며 1년 포탄을 10일만에 다 쓸 만큼 맹훈련을 했다. 떄문에 일본 함대의 짧은 선회 시간 동안 명중탄을 발사할 확률이 떨어졌다.


셋째, 당시 러시아 발트함대의 3열 진형. 정면에서 선회하는 일본 함대에 충분한 화력을 퍼부을 진형이 아니었다.


도고 제독의 일본 함대는 불과 5분 만에 진형을 다 짰고, 그 이후는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1차로 목표가 된 것은 기함 수브로프였다. 발트 함대의 핵심 지휘관들이 타고 있던 수브로프는 집중포화를 받았고, 발트함대의 수뇌부는 한 방에 다 날아갔다.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가 중상을 입었고, 지휘권을 넘겨받은 네보가토프 제독이 다음날 무조건 항복을 했다) 수브로프를 격침하고 난 이후는 일본의 독점무대였다.


공겨갇ㅇ.jpg


결과는 참혹했다. 총 37척의 발트함대 가운데 전함 6척, 순양함 3척을 포함해 19척이 격침됐고, 주력전함 2척을 포함해 7척이 항복했다.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함정은 순양함 1척과 어뢰정 2척뿐이었다. 나머지 3척의 순양함은 아예 항로를 바꿔 미국령 필리핀의 마닐라 항으로 피신했고, 기타 석탄 보급선과 같은 소소한 지원함들은 상하이로 도망쳤다. 인명 피해도 대단했는데, 전사자만 4,380명에 포로는 6천여 명에 달했다. 심지어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중상자도 꽤 됐었다. 이에 반해 일본 함대는 어뢰정 3척을 잃고, 117명의 전사자가 생긴 정도였다.


30분 만에 끝난 전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5월 28일까지 추격전이 펼쳐졌지만, 최초 5분 동안의 선회, 뒤이은 수브로프에 대한 집중포격에서 쓰시마 해전은 결론이 났다고 볼 수 있다.


“압도적인 승리였다.”


당시 전 세계 군사관계자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전통의 강호 러시아 발트함대를 상대로 신예 일본 함대가 승리했다는 것도 놀라운 점이지만, 더 놀라운 건 ‘압도적 승리’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주목한 건 ‘어째서 발트함대의 절반이 격침 됐나?’라는 대목이다.


전열함 시대부터 해전에서 ‘포격전’으로 배를 격침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넬슨 제독이 그 위명을 떨쳤던 트라팔가 해전에서도 배를 격침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배들이 목조로 만들어졌다는 점과 포탄이 무거운 돌덩어리나 쇳덩어리라는 점 때문에 상부 구조물이 다 날아가도 배는 바다를 표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함장들이 노획해서 포상금을 받는 것에 집중했던 탓도 있지만)


그런데 20세기 최초의 대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러시아 발트함대의 절반을 바다 속에 수장시켰다. 포탄의 힘일까? 근대 해군의 위력일까? 답은 의외로 쉬운 곳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러시아 함정들은 전형적인 텀블홈(tumble home) 구조였다. 바닥이 더 넓고 위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모양인데, 홀수선이 상갑판보다 훨씬 넓었다. 이 때문에 피라미드 구조를 띠었고, 무게중심이 올라가 있다. 이렇다 보니 조금만 흔들리면 부력을 상실하게 일수였고, 침몰이 가속화 됐다. 거기다 러시아 함대는 텀블홈 구조의 위태위태한 상황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기 위해 엄청난 양의 석탄을 과적했고, 홀수선이 2m 가까이 더 깊어졌다. 그 결과 일본 해군의 포탄에 맥없이 침몰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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텀블홈 구조의 수브로프전함 '오렐'


당시 일본은 일반적인 영국식 선체를 사용했다. 그렇다고 해도 당시의 기술력으로 상갑판이 홀수선보다 좁았다. 다시 말해 함선의 차이는 미미했다는 것이다. 러시아 발트함대는 텀블홈 방식의 선체에 과적, 220일간의 긴 항해에 의한 피로, 훈련부족 등이 겹치면서 패배했다.


일본은 쓰시마 해전을 통해 죽음의 문턱에서 기사회생했다. 그들은 쓰시마 해전을 일컫어 ‘동양의 기적’이라고 말하며 자축했다.


당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러시아의 승리를 예상했었다. 레닌조차도 쓰시마 해전을 두고,


“이렇게 무참하게 패배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라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제 러-일전쟁도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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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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