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03. 03. 월요일
정치부장 물뚝심송
안철수와 김한길의 합의에 부쳐
도대체 언제쯤 창당이 될 것인지 안개 속에 파묻혀서 김만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있던 안철수의 신당, 새정치연합이 갑작스럽게 그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이 벌어졌다.
어제 일요일, 갑작스레 발표된 뉴스는 사뭇 충격적이었고, 그 결과 향후 정치권의 행보에 있어서 짙게 깔려 있었던 불확실성이 다수 제거되리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바로 안철수와 김한길의 전격적인 통합 합의 발표에 대한 이야기다.
덕분에 야심차게 준비한 “지방선거 유체이탈 전망 시리즈” 기사는 완전 물먹게 되고 써놨던 기사들은 세상에 발표되지도 못하고 묻히게 되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이런 후랑말코 같은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새로운 정당의 탄생
사실 전국 정당을 하나 건설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나의 전국 정당이 만들어지고 활동을 개시하기 위해서 반드시 밟아야 하는 법적 절차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힘든 일이다.
일단 창당 준비위원회를 만들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을 해야 하며, 전국에 최소 다섯 곳 이상의 시/도당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 하나하나의 시/도당은 최소 천 명 이상의 당원 명부를 갖춰야 하며 회계책임자를 포함한 당직자가 선임되어야 하고, 일련의 절차를 거쳤다는 점을 입증할 수 있는 서류를 만들어 선관위에 제출해 등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지역 정당들을 통합하는 중앙당 설립 절차를 밟아 등록을 해야 비로소 하나의 전국 정당이 만들어진다. 그러니 최소한 5,000명 이상의 당원이 있어야 한다. 이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는 사람도 사람이지만 돈도 적지 않게 들어간다. 개혁국민정당 창당 과정과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을 지켜본 입장에서는 그거 다시 하라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 먼저 드는 수준으로 아주 고단한 일이다.
이게 누군가 대중적인 인기를 가진 인물, 예를 들면 안철수 같은 사람이 나서서 원한다고 쉽게 이루어질까? 전국에서 그 일을 추진할 사람들의 경비는 물론, 그 사람들 자체의 인건비는 도대체 누가 지급할까? 당신 같으면 아직 만들어질지도 모르는 정당을 위해 정식으로 환급 받지도 못하는 돈을 적지 않게 낼 용의가 있으신가?
김대중, 김영삼 같은 거물급 정치인 하나 없이, 그저 제대로 된 진성당원제 정당 하나 만들어 보겠다고 나서서 개혁국민정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름대로 번듯한 전국 정당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존중을 받아야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쉽지 않은 일을 스스로 모여 스스로 해냈으니까.
안철수가 지속적으로 예고했던 ‘새정치연합’이라는 정당은 이미 그 창당 작업이 실제로 진행중이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는 이미 새정치연합이라는 정당의 ‘창당준비위원회’가 등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과연 새정치연합이 5개 이상의 지역당을 만들어 내고, 중앙당 창당까지 순조롭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에 대한 의심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상황이다.
거기에 최근 안철수는 기초단체 정당 공천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한 바 있다. 이 문제는 창당과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일이다. 지역당 창당 과정에는 해당 지역에서 출마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들이 사람을 모아 당원으로 등록하고 사무실을 내고 하는 일을 자발적으로 주도적으로 해 줘야 하니까. 그런데 기초단체 정당공천을 하지 않겠다고? 그럼 누가 나서서 지역당, 그러니까 새정치연합이라는 전국 정당의 지역위원회 건설 작업을 한단 말인가. 지역당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중앙당도 등록이 안 된다.
이럴 때, 유일하게 작업의 진도를 나가는 방법은 돈을 뿌리면 된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 안철수에게는 그럴 돈이 있다.
결국 안철수가 기초단체의 정당 공천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이미 결론은 나왔다. 창당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엄청난 돈을 뿌려 창당 작업을 진행하게 될 것이라는 선택지가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숨겨져 있던 선택지가 하나 더 있었다는 사실까지는 생각을 못했다.
코스닥에는 우회상장이라는 기법이 있다. 상장사가 되려면 먼저 기업을 설립하고 그 기업에 최소 몇 년 이상 얼마의 실적을 올려야 하는, 그런 절차가 있다. 그 절차를 뛰어넘는 방법은 기존에 그 조건에 맞게 운영되고 있던 기업을 인수하면 된다. 그렇게 다른 기업을 인수해서 상장시키는 기법을 ‘우회상장’이라고 한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그렇게 인수해서 상장시킨 기업을 쪼개서 팔아먹고 튀는 먹튀들이 많아 우회상장이라는 용어는 왠지 음험한 느낌을 주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안철수는 민주당의 조직을 선택했다. 맨 땅에 헤딩하면서 새로운 정당을 만들기보다는 기존에 존재하는 민주당의 지역 조직을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이게 가장 큰 이유는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안철수는 벤처 기업가 출신답게 자신의 신당을 건설하면서 기업들의 우회상장과 매우 유사한 형식으로 민주당이라는 기존의 정당을 활용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합의의 실무적인 내용을 발표한 최재천 민주당 전략홍보위원장은 이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1. 3월말까지 제3지대(의미심장한 표현이지만 사실은 아무 뜻도 없다.)에 신당 창당 작업을 마친다.
2. 신당이 민주당과 당대당 통합을 거친다.
3. 통합된 신당의 자격으로 6.4 지방선거에 참여한다.
4. 당대당 통합이므로 민주당원들은 탈당 후 신당 입당이라는 절차를 거칠 필요 없이 자동으로 당원자격이 승계된다.
이런 것이다. 지방 선거를 코앞에 두고 한가하게 3월말까지 통합 작업이나 하고 있을 수 있게 된 것은 또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기초단체 정당 공천’ 작업을 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해졌다는 설명도 붙인다. 결국 신당의 창당 작업에 민주당의 힘을 빌려주겠다는 뜻이 된다. 3월 동안 진행될 신당의 창당 작업은 민주당의 지역조직이 앞장서서 해결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아무런 얘기도 없지만 아마도 신당의 명칭은 안철수의 ‘새정치’와 기존의 민주당의 ‘민주’라는 단어를 합친 ‘새정치민주당’ 정도가 되지 않을까?
안철수의 입장
안철수의 입장에서는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어차피 넘었어야 하는 창당 과정이라는 큰 산을 별로 힘도 안 들이고 넘어가게 되었다. 새정치연합이라는 당이 새로 만들어졌다면 그 당은 새누리당, 민주당 뿐 아니라 의석수 차원에서는 진보당, 정의당보다도 못한 5등 정당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합의를 통해 안철수는 일약 전국 제2정당의 핵심인물로 자리잡게 된다.
또한 신당 내에서 문재인과 기타 대권후보들과 어깨를 나란히, 아니 그 중에서도 선두그룹으로 뛰어올라 차기 대권 경쟁에 참여할 수도 있게 되었다. 지방선거 따위야 그저 일정 잡아 전국을 돌며 각 지역의 후보들과 사진이나 좀 찍어주고 지원 유세나 한두 마디씩 해 주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각 지역의 후보들은 감지덕지 하면서 서로 먼저 자신의 지역에 와 달라고 아우성을 치게 된다.
이렇게 해 나가면서 당내 입지만 잘 구축하면 다음 번 총선에서 공천권도 상당히 확보하게 된다. 이 공천권은 거물급 정치인들에게는 무척 중요한 권력의 상징이다. 제5당 당대표의 권력 따위는 제2당의 지분을 보유한 계파의 수장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이로써 안철수의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은 순조롭게 시작하게 된 것이다. 드디어 매번 여론조사에서나 나오던 지지율, 혹은 선호도라는 무형의 자산을 현실적인 정치권력으로 ‘환전’하게 된 것이다. 축하 드린다.
그러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 합의를 두고, 안철수의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입만 열면 마법의 주문처럼 얘기하던 그 ‘새정치’라는 것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하는 질문이다. 구태로 규정하고 싸잡아 비난하던 민주당에 들어가서 할 수 있는 그런 ‘새정치’를 바라고 안철수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항변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안철수는 이 질문에 답변할 의무가 있지만 가능한 답변은 없다. 어쩌면 새정치라는 것은 그저 “자알~ 해야 합니다”라는 박근혜식 어법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점을 안철수의 지지자들은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다수의 지지자들은 아직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면서 정세를 관망하겠다는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나, 성급한 지지자들은 안철수의 합의를 이미 ‘배신’으로 규정하고 항의하기도 한다. 반대로 일부 극렬 지지자들은 안철수가 가는 곳이라면 지옥에라도 따라가려는 자세를 보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지지자들을 업계 전문용어로 안빠라고 부른다.
이 때, 이 합의에 동의하지 못하는 지지자의 비율이 높아진다면, 안철수는 신당 내에서의 입지를 다지는데 실패할 가능성도 많다. 새정치연합에 합류하려던 지역의 정치인 지망생들 중 상당수가 새누리당, 민주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고 밀려났던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과연 안철수를 따라 신당에 합류하게 될 것인가? 이 부분은 아마 완성된 후의 신당의 당원 수가 기존의 민주당 당원 수에 비해 얼마나 상승할 것인가로 확인될 수 있다. 이 폭이 미미하다면 안철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신당 내에서의 입지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또한 진영 내에서 독보적인 지배자로 거의 왕 노릇을 하던 시절과 달리 신당 내에서 벌어질 계파 싸움은 정치 신인 안철수의 입장에서는 다루기 힘들고 골치아픈 과정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가능하다. 민주당 내의 계파 싸움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이를 그저 친노/비노 정도로 나누어 생각하다가는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이미 유탄을 맞고 쓰러질 가능성도 높다.
정리하자면, 안철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산을 넘기보다 민주당이라는 거대한 정당 조직의 힘을 빌어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선회했지만, 그 힘은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향후 안철수가 어떤 수업료를 내고 어떤 성과를 올리게 될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민주당의 입장
겉으로만 봐서는 민주당은 크게 손해 보는 거래를 했다. 의석비율로 비교도 안 되는 소집단인 안철수 집단과 거의 일대일 합당이라고 볼 수 있는 통 큰 거래를 한 것이다. 이 점에서 민주당 지지자들이 아쉬워할 수도 있다.
또한 지난 대선에서의 일로 인해 안철수를 극단적으로 비난하던 집단도 민주당 내부에 존재한다. 이들의 입장도 난처해질 수 있다. 심한 경우(물론 가능성은 낮지만) 민주당을 버리고 나가 독립하는 집단이 나타나게 될지도 모른다. 정의당이 이들의 새로운 선택지가 될 가능성도 있다.
민주당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일차적으로 닥쳐온 지방선거에서의 불확실성의 제거라는 점이다. 어차피 공천도 안 하기로 한 기초단체를 제외하자면 17개의 광역 선거가 남게 되는데, 이 광역단체장 선거의 반 정도는 이미 새누리당이 차지한 것이나 다름 없는 상황이고, 나머지라 해 봐야 박빙의 승부가 예상되는 판에 새정치연합이라는 대중적 선호도가 높은 제3의 집단이 사사건건 후보를 내면서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달려 붙으면 민주당은 전멸하게 된다.
이런 잠재적인 위험성은 이제 근본적으로 제거되었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합의 발표가 있자마자 새누리당의 이익을 대변하는 스피커들은 원색적인 비난을 하고 나선 것일 수도 있다. 민주당에게 잠재적인 위험이 제거되었다면, 그 제거된 위험들은 고스란히 새누리당으로 가기 때문이다.
또 하나, 물밑에서 오가는 얘기로는 민주당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는 소식이다. 민주당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운영하기에 당원들의 당비는 턱없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전국 선거 한 번 치르게 되면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 비록 차후에 국고에서 보조 받는 선거비용이기는 해도 당장 필요한 현찰을 조달할 필요가 있다. 보통 그런 비용은 공천을 원하는 후보들의 특별당비(이 부분은 공천헌금과는 달리 합법적인 부분이다. 물론 불법적인 공천헌금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에 의존하기 마련인데 이번 선거에서는 기초단체 공천권을 포기해야 하는 판이다.
바로 이 부분이 민주당이 기초단체 정당 공천을 하지 말자고 하면서도 끝내 시원하게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안철수 진영에서 먼저 치고 나와 민주당에게 약속이행을 요구하던 상황에서 민주당이 얼마나 답답했을지도 고려해 주기로 하자.
이 때, 상당한 부자인 안철수가 어느 정도 재정 문제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면 민주당으로서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이런 문제도 이번 합의에 상당 부분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무척 높다. 물론 안철수의 입장에서도 선거 비용이라면 몇 개월 동안 ‘빌려 주기만’ 하는 돈이며 회수되는 돈이라 처리하는데 부담도 거의 없다. 그래도 돈 문제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을 오가는 얘기이니 더 이상 언급하지 말자. 하지만 역시 돈이라는 것은 많고 봐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이제 안철수가 민주당, 아니 합당 후의 신당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와 차기 총선, 차기 대선을 노리는 경쟁의 대열에 합류한 셈이니 이 또한 불확실성이 많이 제거되는 성과를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당의 입장에서는 당내에 유력한 대권주자가 많을수록 좋다. 지금 새누리당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차기 주자의 부족이라는 점과 비교해 보면 민주당은 큰 이익을 본 셈이다.
정리하자면, 민주당은 겉보기로는 큰 손해를 보는 계약을 했지만 물밑에서는 나름 손해보지 않을 정도의 이익을 챙긴 그런 거래를 한 셈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정치력이 부족하다고, 허수아비라고 욕을 먹던 김한길은 자신의 정치 인생의 과정에서 가장 큰 계약을 성사시킴으로써 한층 더 성장하는 계기를 만들어 버렸다. 이로써 김한길도 차기 대선 주자 중의 하나로 떠올랐다고 볼 수도 있다. 김한길의 애매한 태도를 비판하던 사람들도 이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지방선거의 전망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참으로 가슴 아프게도, 야심차게 준비한 “지방선거 유체이탈 전망 시리즈”기사는 더 이상 연재할 수 없을 정도로 망해버렸다. 이 점, 이번 합의에 의한 콜래트럴 데미지를 입은 셈이라 욕이라도 한마디 하고 싶지만, 대의를 논하는 입장에서 그런 옹졸한 짓을 할 수는 없으니 참고 넘어가겠다.
에이~ 씨바
도저히 탈출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렸던 민주당은 안철수라는 제다이가 합류함으로써 ‘New Hope’을 발견했다. 17개 광역 중에 전남북, 광주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패배가 예상되던 민주당은 이제 극적인 반전을 꿈꿔도 될 만큼 판을 정비한 셈이다.
아마도 중간층의 유권자들은 이번 합당을 실질적인 ‘야권통합’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 보이지도 않는 노동당, 정의당이나 해산될 지경에 몰린 진보당은 중도 유권자들에게는 존재감이 없다. 그렇게 통합된 야권에서 내보내는 광역단체장 후보들은 과거 부담으로 작용하던 민주당의 낮은 지지율과는 차원이 다른 안철수라는 인기인의 후광으로 세탁된 신당의 프리미엄을 얹고 달리게 된다.
서울의 경우, 박원순 시장은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새정치연합의 장하성 후보가 출마한다면 필패가 예상되던 판에서 그런 불확실성은 아주 말끔하게 제거되었다. 오죽하면 세간의 주목을 받고 모든 기자가 몰렸어야 할 정몽준의 서울시장 출마 선언 현장에 기자가 열댓 명 밖에 없어 파리를 날렸다는 후문이 들려올 정도겠는가.
여권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정몽준을 경선없이 후보로 추대만 해도 해볼 만한 싸움이었던 것이 갑자기 후보들을 총출동시켜 경선이라는 붐업 과정이라도 진행해야 될 만큼 급해졌다. 또 다른 서울시장 카드였던 김황식 전 총리가 급히 귀국하는 사태가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지난 대선과 차기 대선의 두 스타, 문재인과 안철수가 양쪽에서 손을 잡아 들어 올려주는 박원순 현 시장을 당할 수 있을까? 진짜로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급변한 상황이다.
경기에서는 거의 출마를 포기했어야 하는 상황의 김상곤 현 교육감의 출마 가능성까지 높아지며 청와대의 힘으로 차출한 남경필만으로 어찌 해보기 힘든 상황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김진표와 원혜영의 경쟁 속에 김상곤이라는 거물까지 가세하는 야권의 내부 경선 과정은 드라마틱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지도의 상승을 남경필 수준에서 막아낼 수 있을지 궁금하다.
내가 남경필이다
인천의 송영길도 마찬가지다. 가급적 숨겨야 하는 민주당 간판을 떼어버리고 통합된 신당의 간판을 달고 나오게 될 송영길은 예전의 송영길이 아니다. 살금살금 복귀를 꿈꾸던 인천시 재정파탄의 주범 안상수는 출마 자체를 포기할 가능성도 있다.
강원과 충남의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참으로 우스운 것이 사람은 전혀 변한 것이 없는데, 소속된 정당의 이미지가 갑자기 상승하고 인지도가 갑자기 올라가면 거기에 따라 바뀌는 것이 또 선거판이다. 거기에 현직 프리미엄을 얹어 달리는 상황이라면 새누리당 중앙당의 후원을 받지 못하고 점점 퍼져 나가는 박근혜 정권에 대한 반감에 상대해 자신의 인물론만으로 승부를 펼쳐야 하는 새누리당의 광역 단체장 후보들은 매우 피곤해지기 마련이다.
심지어 부산 경남에서도 파란이 일고 있다. 삼자구도뿐 아니라 양자 구도에서도 새누리당이 당연히 우세해야 하는 지역이지만, 너무 방심하던 새누리당은 인물난을 겪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 만약 통합 야권 후보라는 조건을 걸고 출마를 저울질하던 오거돈 전 해수부장관 같은 거물급이 출마해서 통합 신당의 간판으로 달리기 시작하면 새누리당도 안심할 수 만은 없는 상황이다. 덩달아 승산은 거의 없어도 의미가 깊은 대구의 김부겸 후보의 득표율도 마구 상승할 것이다. 광주에서 일위를 달리던 윤장현 후보도 당연히 신당에 참여할 테니, 호남 지역의 신당 지지율은 사상 최고 수준으로 올라가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6.4 전국 동시 지방선거, 판세가 바뀌었다. 새누리당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고 민주당, 아니 새로 만들어질 신당(새정치민주당... 일 걸?)의 입장에서는 과반을 노려볼 만한 기회가 왔다.
아마도 새누리당은 각 광역 단체장 후보군을 재검토하고 기존에 쓰지 않으려 했던 거물급 후보를 새로 띄우고자 밤샘 작업에 돌입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고소한 마음도 1그램 든다. 적의 고통은 나의 기쁨.
문제는 이렇게 순항할 정도로 창당 및 합당 과정이 흥행이 될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잠재적인 불씨들은 아직도 살아 있다. 민주당 내부의 계파간 갈등은 아직 잠들지 않았다. 당의 환경이 급속도로 변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각 계파간의 충돌이 볼썽 사납게 터져나올 가능성도 있다.
이 부분은 그야말로 알아서 할 일이긴 하지만 밥그릇 챙기려다 밥상을 엎어 버리는 행태를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라 걱정을 멈출 길은 없다.
명분과 실리
맞다. 이번 합의는 실리적 차원에서 꽤 큰 성과를 보여줄 수 있는 합의이다. 상당수의 사람들, 그러니까 검은 고양이가 되었든, 하얀 고양이가 되었든, 새누리당만 잡아주면 만족한다는 유권자들은 이번 합의에 대해 마음놓고 축배를 들어도 된다. 기분 좋은 일이다.
그렇기에 거의 모든 야권 언론에서는 이번 합의의 의미를 애써 추켜 올리며 자잘구레한 걱정만을 늘어 놓고 있는 중이다. 합의했으니 합의 정신을 잘 따라서 싸우지 말고 신당 잘 만들고 합당 잘 해서 지방 선거에서 새누리당을 누르고 박근혜 정권의 부당성을 널리 알릴 기회로 만들자~ 뭐 이런 소소한 분석만이 차고 넘친다.
그러나 핵심은 따로 있다.
사라진 것은 안철수의 새정치 뿐만이 아니다. 민주당 역시 명분을 잃고 있다.
이번 합의를 통해 얻은 것은 무엇인가? 지방선거에서의 승리? 불확실성의 제거? 통합 야당의 탄생? 모두 다 실리다. 눈앞에서 얻을 수 있는 실리뿐이다. 과연 통합된 신당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합의문에서 찾아볼 수 있는 통합정당의 정체성에 관한 문장은 두 가지다.
- 신당은 여러 경제주체들이 동반성장하고 상생할 수 있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의 실현이라는 민생중심주의 노선을 견지한다.
- 신당은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한반도 평화를 구축하고 통일을 지향한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가 들어갔지만, ‘여러 경제주체’라는 말로 물타기를 하고 있다. 경제민주화라는 말에 경기를 일으키는 대기업집단의 눈치를 보고 있다. 또 튼튼한 안보라는 말로 빨갱이 논란을 피하고자 하는 소심함도 포함되어 있다.
도대체 신당은 어떤 정당이 될까? 과거 민주당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었던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뭐가 달라질까? 저기 어디에 안철수의 새정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들어 있는가?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다시 보자. 만약 새누리당이 물어 보기를, 과연 신당이 과거의 야당들과 무엇이 다른가하는 질문을 한다면 무슨 답변을 할 수 있을까?
없다. 그냥 또 하나의 민주당일 뿐이다. 합당 소식을 듣는 순간 떠오른 생각이 민주당의 역사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인가 하는 것도 있었지만, 바로 생각이 바뀌었다. 민주당의 역사는 끊어지지 않는다. 저기 어디에도 혁신은 없고 개혁도 없다. 정치권의 부조리를 타파하겠다는 의지도 없고, 새누리당과는 다른 차별성을 강조한 부분도 없다.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그거 박근혜 정권이 선거 때 이미 닳아 없어지도록 써먹은 미사여구다.
그저 눈앞에 닥친 선거에 유리한 포스트를 차지할 수 있다는 옹졸한 기쁨만 보인다.
무엇보다도 더 처참한 것은, 이런 중차대한 합의, 신당의 창당, 기존 정당과의 합당 등의 굵직한 결론을 내리고 언론에 발표하는 과정에서 당원과 유권자의 의사를 반영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안철수야 아직 정당을 만들지도 않은 상태지만 창당준비위원회라도 있지 않은가. 이미 안철수 진영에서도 이번 합의에 대한 불만어린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지자들의 실망과 배신감을 어쩔 것인가? 그거야 잘 달래주면 그만이라고?
민주당은 또 어떤가? 심지어 문재인에게도 발표 직전 오전에야 알려줬다는 소식을 듣자니 민주당 당원들도 참 빙다리 핫바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앉아 있다가 우리 합당하기로 했어요~ 하면 네~ 하면서 달려가는 그런 사람들이란 말인가?
지금 문제 삼고 있는 부분은 바로 절차적 정당성에 관한 얘기다. 미리 안 알려줘서 삐졌다~ 이런 얘기가 아니다.
정당의 의사결정은 전적으로 민주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긴박한 협상에 임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사전에 협상권을 위임받는 절차라도 있어야 한다. 이런 식의 깜짝쇼는 김영삼 시대에 끝났어야 했다. 김영삼의 3당 합당을 놓고 그렇게 욕을 하는 사람들이 이번 합의에 대해 그저 지방선거가 유리해졌으니 만사 오케이~ 를 외친다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의회주의, 절차적 정당성, 그렇게 어렵게 쌓아온 민주적 의사결정구조 같은 것들은 도대체 어디에 가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새누리당을 이길 찬스를 만들어 준 것,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다. 나도 기분 좋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기고 싶지는 않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른 판단을 할 수 있다. 또 지방선거의 승리는 몇몇 당선자들의 이익으로만 끝나지 않고 이 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다시 할 수 있는 동력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매우 중요한 싸움이 될 것이다. 실리는 언제나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런 실리적 판단을 넘어 명분을 찾는 사람들도 있어야 한다. 정당의 의사결정은 민주적이어야 한다면서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도 있어야 한다. 지나치게 실리로만 기울어진 판단과 의사결정은 지나치게 자본만을 생각하는 판단과 의사결정에 비해 무엇이 다른지 알 수가 없다.
즉, 이번 합의는 실리는 찾았지만 명분은 찾기 힘든 그런 합의였다.
소소한 뒷 얘기들
이번 합의를 설명하는 최재천 의원의 입에서 재미있는 얘기가 나온 것이 있다. 새로 만들어질 신당의 문은 열려 있는가 하는 질문에 열려 있지만, 실무적 차원에서 진보당은 배제된다는 얘기를 했다. 당연한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듣는 진보당은 무척이나 불쾌했을 수도 있겠다. 그 와중에 이 합의를 대 환영한다는 진보당 소속 국회의원도 있긴 했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다.
정의당도 문제가 된다. 이번 합의가 상징적인 야권 통합이라면, 국민참여당 계파를 잇고 있는 정의당 내부의 구성원들은 이 통합에 합류하고 싶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도 일그람 든다. 그래서 그런지 정의당은 당 차원에서 이 합의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내부 단속용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만약 구성원의 탈당 문제만 없다면 정의당은 나름대로 이익을 볼 수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통합 신당이 기초단체 후보 공천을 하지 않게 되므로 기초단체 선거에서 정당 순서는 새누리당 다음에 정의당이 오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2번 프리미엄을 먹게 될 수도 있다.
녹색당은 일요일이라 입장 발표를 안 할 줄 알았는데 입장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 성명서의 내용이 내 생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바람에 녹색당에 입당을 해야 하는 건가 하는 고민을 3초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입당은 안 함.
출처 : 녹색당 누리집
기타 안철수와 문재인의 정상적인 지지자들이라면, 이번 합의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을 하고 지켜 보기로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극렬한 지지자들, 문재인을 물어 뜯던 안빠들, 안철수를 간철수라 부르던 문빠들의 입장은 참 난처하겠다 싶은 생각도 든다. 그렇게 욕하던 사람들과 이제 한 식구가 된다. 잘 해보시길 권한다.
한 가지 조언이라면, 세상 일 어찌될지 모르는 법이니 상대 정파의 정치인을 욕하더라도 근거를 가지고 합리적인 비판을 하는 것에서 멈춰야지 부모 죽인 원수 대하듯 쌍욕을 하고 나서지 말아야 한다. 그런 짓은 정치판을 더럽히는 행동이기 이전에 자신이 속한 정파에게 해를 끼치며 무엇보다도 스스로에게 상처를 남기는 일이 된다. 조금씩만 더 젠틀해 지시길 빈다.
그리고 끝으로,
나의 평화로운 일요일을 날려 버리고 더딴지 원고를 못 쓰게 만든 안철수와 김한길 두 분 정치인께 한 말씀만 드리고 싶다. 무좀이나 걸리시라.
그리고 기왕 이렇게 된 바, 청와대로 향하시라.
정치부장 물뚝심송
트위터 : @murutukus
편집 : 보리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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