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03. 05. 수요일
루저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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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그리고 보상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노동 착취 사회’로 정의내렸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에 의하면 생산수단에 노동을 투입하여 상품이 나올 때, 그 상품에는 새로운 가치 즉, 잉여가치가 창출되는데 이것이 자본가의 부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 ‘능력대로 일하고 일한만큼 가져가는 사회’는 사회주의일 수밖에 없었다. 자본가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주의에서 노동력으로 창출된 새로운 잉여가치는 결국 노동자에게 귀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동가치설이 과연 현 시대에서 옳은 이론인지 아닌 지는 여기서 논할 계제는 아니다. 다만, 마르크스주의자든, 자유주의자든 ‘능력대로 일하고 일한만큼 가져가는 사회’가 어느 정도 정의로운 사회라는 것은 이견이 없는 듯 하다. 현재의 사회를 두고, 그것이 구현되었느냐 하는 관점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정형화된 육체 노동은 근력과 숙련도에 따라 시간당 생산량이 차이가 난다. 가령, 모래 퍼 나르는 일을 숙련된 데모도가 할 경우 일일 5톤을 나른다고 할 때, 초짜는 3톤에서 4톤이라고 가정해 보자. 이때 초짜의 노동생산성은 숙련공의 60%에 불과하다. 때문에 임금에 있어서 그 정도의 격차는 정당화 될 수 있다.
능력에 기초하여 성과를 올리며, 그에 비례하여 보상을 얻는다는 원리는 이러한 상품 생산의 산업적 성격에서 유추되는 측면이 크다. 때문에 임금 격차는 이 원리로 합리화된다.
그러나 정형화된 단순 노동은 숙련도가 금방 올라간다. 경력 1년차와 10년차와의 간극은 그리 크지 않다. 작업 시간 내의 태만이 크지 않다면 작업자 간의 노동생산성은 평균에 수렴될 것이다. 더구나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단순노동은 기계화, 자동화로 대체된다. 10명이 삽질할 것을 포클레인 한 방이면 끝난다. 그렇게 되면 10년 동안 쌓아놓은 숙련도와 기술력은 무용지물이 된다.
자명해 보이는 능력 비례주의는 어쩌면 도달할 수 없는 관념적, 허구적 이상일 뿐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명문대 출신이 비명문대 출신보다 대기업에 입사할 기회가 넓은 것은 당연한 것으로 치부된다. 그건 학창 시절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얘기하자면, 그건 말이 안 된다.
원리적으로 기업은 노동자가 만들어낸 이윤을 보상할 뿐이지, 노동자 개인의 과거 노력에 대해 보상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최대한 선의로 해석하자면, 대기업의 명문대 선호는 학창시절에 많이 노력한 만큼 인내심과 능력이 좀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은 일종의 ‘베팅’이다. 그러나 그런 베팅이 항상 성공한다고 볼 수는 없다. 설문조사 결과 기업 인사 담당자들의 60% 이상은 학벌과 업무 능력이 항상 비례한 것은 아니라는 응답을 한다. 회사에 입사한 신입사원 중 누가 더 노력을 많이 하고, 능력을 잘 발휘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서류전형에서 떨어진 누군가가 더 잘할 수도 있다.
시험을 잘 치르는 것과, 능력을 잘 발휘하는 것은 별개의 영역이다. 또 어떤 분야, 어떤 사람들과 배치되느냐에 따라 노동생산성의 차이가 많이 생긴다. 그렇다고 해도, 일일이 매일 직무 평가를 정확히 갈라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 생산성을 떨어트릴 것이다. 분야에 따라 평가가 애매한 것도 많다.
내가 머리를 쥐어짜며 이 글을 쓰는 노력과, 근육의 힘을 쥐어짜며 노가다를 뛰는 사람의 노력의 질적 차이는 본질적으로 구분할 수도 없다. 같은 글을 쓰더라도, 나는 이 짧은 글을 쓰는 데 꼬박 이틀 삼일을 보내지만, 딴지 공식 글 생성기 물뚝심송은 후다다닥 2~3시간 만에 거뜬하게 글을 뽑아내기도 한다. 그렇다고 내가 쓴 글의 질이 그보다 더 나은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할 기준은 없다.(사실은 내가 더 잘 쓴다고 생각한다.) 만일 노력과 글의 질에 비례해서 원고료를 줘야 한다면, 지금도 얼마 남지 않은 너부리 편집장의 모발은 1주일 내에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능력대로 일하고 일한만큼 가져가는 사회가 능력 없고, 노력하지 않는 놈이 더 많이 가져가는 사회보다는 정의로운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자. 현재의 빈부격차와 경쟁구조 속에서 능력주의가 면도날로 정확히 갈라서 구현된다면, 루저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금메달만이 영광을 누리는 구조라면, 의자 뺏기 놀이처럼 루저의 탄생은 이미 구조 자체에 내재해 있다. 완벽한 보상체계가 구축되어 있다고 한들 금메달의 주인공만 바뀔 뿐이지, 사회 전체적 행복도와 만족도는 지금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때문에 ‘과정으로서의 공정’에만 매달리는 것은 사회의 본질적 변화는 전혀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수익을 많이 내거나, 이윤을 많이 창출하는 능력이 남보다 뛰어난 경우에는 합당한 능력 보상 체계가 있어야 되지 않느냐는 반문이 가능하다.
그러나 많은 이윤을 창출한다고 해서, 그것이 능력과 노력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수백프로 이자를 뽑아내는 사채업자가 가장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가 될 것이며, 베스트셀러지만 황당 궤변만을 늘어놓는 자기계발서의 저자들은 역대급 문호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처럼 노력과 능력에 따른 보상 체계를 정밀하게 갖춘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비효율적이며,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성과주의의 함정
야근과 격무로 회사에 충성을 다 바치면서도 제대로 평가도 못 받는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보면, 사내 정치에 밝고 능력보다는 아부와 연줄로 승진하는 놈의 승승장구가 너무 억울할 일이다. 또 쌍팔년도 시절 연공서열로 임금과 승진이 이루어졌던 관행은 무능한 상관을 배출하는 비합리적인 제도로 보였다.
IMF 위기 이후 직급 변경, 팀제 도입, 연공서열 파괴 등 실적과 성과주의를 바탕으로 연봉제가 확산되었다. 이것이 기업 문화를 어떻게 바꿨는지는 내가 직접 체험을 하지 않아 잘은 모르겠다. 그러나 언론에서 이러한 기업 문화의 변화를 매우 긍정적으로 보도한 것은 기억이 난다. 아마도 연주 없고, 박봉과 격무에 시달리는 사원의 입장에선 더 환영할 만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과와 실적주의는 서로를 갉아 먹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목표로 두는 실적은 항상 평균 이상의 수준이 되는 것이 보통이고, 그 평균의 수준은 구성원이 뺑이 칠수록 점점 상향 조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러닝머신의 속도를 점점 높여가는 상황과 흡사하다. 아무리 빠르게 뛰어도 그 속도만큼 러닝머신의 벨트가 돌아가면 제자리 뛰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개인의 역할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한 일은 과대평가하고, 남의 일은 과소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심리다. 내가 엄청나게 중요한 일을 하고 남들로부터 능력을 인정받는다고 가정해 보자. 내가 없으면 회사가 잘 안 돌아갈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별 지장 없다. 관료제는 여타의 병폐에도 불구하고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이다. 규모가 크면 클수록 우리는 그 시스템의 부족이 되어간다. 부속은 없어지면 새로 갈아 끼우면 그만이다.
세기의 천재들, 인류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위대한 과학자, 예술가 들이 만약 없었다면 어땠을까? 뉴튼이 없었다면, 아인슈타인이 없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이 없었다고 그런 과학적 발견이 없었으리란 법도 없고,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류는 불행을 느낄 수가 없다. 알지 못한 것을 욕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마 2차대전 당시 희생된 수천만 명 중에 살아 있었다면 과학과 예술 분야 등에서 탁월한 성과를 낼 만한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람들이 없어서 불편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인물들도 따지고 보면, 순전한 개인 역량의 결과라고 볼 수도 없다. 가령 마르크스, 히틀러 등도 그 시대 분위기와 사상적 조류, 그리고 당시의 시민들의 염원을 반영한 이론과 정치를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다. 19세기 유럽을 휩쓴 사회주의라는 시대적 분위기 없이 마르크스 이론이 탄생했을 리는 없다. 사회주의자들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능, 대공황 속의 열패감과 분노를 누군가에게 분출해야할 독일인,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국가주의가 스모그처럼 번지지 않았다면 나치즘과 파시즘이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역사적 사건은 특정 인물의 의도적 행위와 변덕스러운 일련의 우연적 사건과 우여곡절의 사회적 분위기의 결합으로 나온 것이지, 어느 영웅의 신적 계획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들은 보통, 능력있는 엘리트들이 기업과 조직, 사회를 이끌어가며, 보통 사람들에 비해 많은 기여를 한 만큼 보상도 그에 준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런 보상이 얼마나 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근거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보상에 대한 결정은 대개 그걸 받을 만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 스스로 결정한다. 그렇게 해서 결정된 보상이 보통 사람의 열 배가 되든, 백 배가 되든 본질적으로 자의적인 것일 뿐이지만, ‘능력주의’라는 막연한 이데올로기 속에 정당화된다.
직원들을 해고하는 각종 구조조정을 통해서든, 적절한 투자를 통해서든, 어떻게 해서 회사에 100억 원의 이익을 남긴 CEO는 그 기여만큼 10억 원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생긴 사회적 손실은 계산하지 않는다. 반대로 100억 원의 손해를 끼쳤다고 한들 10억 원을 되물어줄 것도 아니다. 또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회사와 사회의 자산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기업의 기술 유출이 뉴스에 뜰 때마다 그 가치는 수천억 원에서 심지어 수조 원으로 부풀려진다. 그러나 해당 기술을 개발한 직원이 회사에 그 보상을 요구하면 회사의 자원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 의미를 폄하하기 일쑤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경영가의 경영 능력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상상해 보자. 과연 현재 능력있다고 평가되는 엘리트들이 대폭 감소한다면, 사회는 정체 혹은 퇴보가 될까?
일제 시대 때, 당시의 지식 풍토에서 지식인들은 사회주의 이념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다. 20세기 들어 가장 파괴적인 전쟁 중의 하나였던 한국 전쟁 시 남한에서는 그런 지식인들 대부분 몰살을 당했거나 북한으로 입북, 혹은 납북되었다. 살아남은 어떤 이는 남한에서 정신이 똑바로 박힌 놈은 대부분 다 죽었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그 폐허 위에서 불과 20년 만에 남한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급성장하며 사회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했다.
유럽 역사상 가장 파괴적이고 끔찍했던 2차 세계 대전에서 유럽에서의 사망자는 3,600만 명에 달한다. 이것은 자연사로 죽은 이들이 포함되지 않는 숫자다. 특히 식자층이 몰살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유대인은 절멸될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마셜플랜을 계기로 전례없는 수준으로 발전했고, 어찌됐든 유대인은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성공 비결은 없다
자수성가의 대명사로 꼽히는 빌게이츠를 생각해 보자.(이하 로버트 프랭크, [경쟁의 종말] 요약 발췌) 그는 시애틀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립학교에 다녔고, 열세 살 때인 68년도부터 컴퓨터 프로그램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가 다녔던 고등학교에는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컴퓨터 동아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워싱턴 대학교의 컴퓨터실에 쉽게 출입할 수 있었다.
게이츠는 고등학교 동창 폴 앨런과 함께 70년 중반에 소프트웨어 회사를 설립했는데, 기막힌 우연의 연속이 오늘날의 MS를 탄생시켰다. IBM이 PC 운영체제를 그에게 자문했다. 처음엔 그는 거절하고 CP/M 이라는 PC 운영시스템을 개발한 게리 킬달을 추천했다. 그런데 킬달의 부인이 기밀유지협약을 거부하면서 협상은 결렬되어, 다시 IBM은 빌게이츠를 찾았다. 이때 빌게이츠는 QDOS를 개발한 패터슨에게 그것을 팔 수 있겠냐고 제안했고, 단돈 5만 달러에 구매를 허락받았다. 그것을 수정하여 MS-DOS를 만들게 된 것이다. 더 재밌는 것은 당시 IBM은 PC의 전망을 어둡게 보고 운영시스템의 소유권을 빌게이츠에게 넘겼다.
이런 일련의 행운의 결과에 대해서 빌게이츠는 흔쾌히 동의한다. “대학교 입학 전에 나와 비슷한 배경을 지닌 10대들이 몇 명이나 될까?, 50명은 될까? 그 정도면 엄청나게 많지. 나는 어렸을 때 다른 아이들보다 소프트웨어 개발에 훨씬 많이 노출되었고, 행운도 많이 따랐다.”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면, 빌게이츠는 미국에서부터 태어난 것부터가 행운의 시작이었다. 미국은 군사적 필요에 의해서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컴퓨터와 인터넷 등을 개발해냈고, 그것의 언어는 모두 영어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곳은 당시 지구 상에 미국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산업적 배경과 여러 우연적 계기 등은 도외시 한 채, 자기계발서 약장수들은 잽싸게 성공한 이들에 빌붙어 빌게이츠의 성품, 노력 등을 성공비결로 포장하여 누구나 빌게이츠처럼 노력하면 대박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팔아먹는다.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 비결은 과연 특별한 무엇이 있는가? 사기꾼이 아니라면 ‘모른다’를 정답으로 제출해야 한다. 성공한 비결로 내세우는 덕목들은 알고 보면 모두 제논에 물대기 식의 갖다 붙이기다.
어떤 결정을 미루었을 때, 결과가 괜찮았다면 ‘신중함’이 되고, 그 반대의 결과면 ‘우유부단함’으로 격하된다. 대규모 투자가 성공하면 ‘과감한 투자’로 칭송받고, 실패하면 ‘무모한 투자’로 비난한다. 업종 변경을 빨리해서 성공하면 ‘시대 흐름에 잘 읽는 노련함’으로 격상되고, 실패하면 ‘조급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직업을 바꾸어서 성공하면,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도전정신’이 되지만, 실패하면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가 될 뿐이다. 죄다 결과에 꿰맞춘 공허한 낱말의 향연일 뿐 다른 게 없다.
케이블 방송국 tvN에서 각각의 분야에서 성공한 명사들이 멘토로 나와, 젊은이들에게 강의하는 ‘특강쇼’는 대체로 자기가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얘기하면서 위와 같은 기만적 언술로 스스로와 청중들을 속인다.
가령 김구라 같은 경우를 보자. 그는 자기의 긴 무명시절을 회고하며 데뷔 동기인 홍록기와 자신을 비교한다. 같은 동기였지만 틴틴파이브로 당시 엄청 잘나가던 홍록기와 ‘포졸1’같은 엑스트라 역만 배정받은 자신이 그렇게 차이가 났던 것은 이제와 돌이켜 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예능국장이 자신의 차를 빼올 수 있는 사람을 구할 때 운전도 못하면서도 자신이 하겠다고 나서는 등 홍록기는 매사에 적극적인 자세로 임했지만, 자신은 볼품없는 배역에 불만만 가득 차 있을 뿐 긍정적인 자세로 지내지 못했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오늘날 늦게 뜬 이유에 대해선 설득력있게 얘기할 만한 건 없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팝송, 영어 등과 일련의 상식 등을 들고 있지만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말투다.
홍록기는 그렇게 적극적이었는데 왜 그 인기도가 지속되지 못했을까? 김구라-황봉알의 시사대담이 인터넷에 반향을 일으켰을 때 이명박 정권 시절이 도래했었다면 그는 공중파에 진출할 수 있었을까?
그가 뒤늦게 인기를 끈 것은 독설도 수용될 수 있는 방송 환경의 변화, 그의 천부적 입담이 재능을 피울 수 있는 토크쇼의 컨셉 등 여러 가지 시기적인 운과 인적 행운을 빼놓고서는 설명이 안 된다.
인간은 평등하다
인간 개개인이 다 하찮다는 의미로 지금까지 일련의 예를 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찮아 질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없다는 차원에서 얘기를 한 것이다. 지금 능력있는 자들이 위치한 자리에서 보면, 그 아래에 놓여있는 자들은 능력이 그것뿐이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또 그런 대접을 받는 본인들도 스스로 그렇게 판단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능하다고 치부되던 사람이 그런 위치에 놓여있었을 때 어떤 능력을 발휘할지는 알 수 없다.
사회적 지위와 능력이 발휘되는 공간 속에서는 대체 불가능한 자리는 없는 것이다. 지금은 루저의 입장이지만, 적절한 조건과 환경 그리고 우연이 결합된다면 현재보다 더 나은 노력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을 누구나 갖고 있는 것으로 가정해야 한다.
때문에 세상에는 나보다 더 대접받아야 할 사람도, 루저의 취급을 받아야 할 사람도 없다.
작가 김영하의 에세이집 [포스트잇]에 소개된 쥐를 이용한 실험 얘기가 있다. 다소 길지만 발췌해 본다.
“여섯 마리의 쥐를 이용한 실험. 우선 집을 설계한다. 두 개의 방을 만들고 하나의 방에는 여섯 마리의 쥐를 집어넣고 다른 방에는 먹이를 놓는다. 그리고 두 방 사이를 수중 터널로 연결한다. 쥐는 수영을 싫어한다. 잠수는 더더군다나 싫어한다. 그렇지만 안 먹으면 죽으니까 누군가는, 에이 죽기 아니면 살기다. 여기서 굶어 죽느니 저 수중 터널이라도 한번 들어가보자고 생각해야 한다. 수중 터널을 통과한 쥐는 먹이를 발견하고 기쁨의 탄성을 질렀을 것이다. 콜럼버스가 따로 없는 것이다. 만세, 만세, 대모험 만세.
그런데 우리 콜럼버스는 자신이 발견한 그 먹이를 그곳에서는 먹을 수 없다는 비극에 직면하고 만다. 애당초 설계가 그렇게 되어 있다. 너무 좁아서 도저히 올라 앉을 수 없는 그 좁은 신대륙을 버리고 우리의 콜럼버스는 자신이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간다. 먹이를 입에 꽉 문 채로 다시 수중 터널 속을 헤엄쳐 원래 있던 방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그 모험의 쥐가 물고 온 먹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과연 그것을 냠냠쩝쩝 먹을 수 있었을까? 아쉽게도 그 위대한 진리품의 주인은 따로 있다. 모험심은 부족하지만 싸움에는 자신있는 조폭 쥐가 콜럼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내놔! 우리의 모험가는 조폭이 먹다남은 거나 주워먹는 신세가 된다.
어쨌든 그 첫 번째 쥐의 모험으로 수중 터널 저 너머에 먹이가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여섯 마리의 쥐는 앞다투어 수중 터널로 뛰어들까? 아니다. 결과는 이렇다. 두 마리는 계속(이제는 중노동이 되어버린)모험의 세계로 떠난다. 다른 두 마리는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가 가져온 것을 낼름 빼앗아 먹는다. 그럼 나머지 두 마리는? 모험심도 없고 그렇다고 먹이를 빼앗아 먹을 만큼 힘이 세지도 않은 그들은 생을 포기하고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잠만 잔다.
실험을 더 전개해 보자. 우선 남의 노동을 착취해온 마피아 쥐 두 마리를 분리한다. 두 개의 실험실에서 각각 차출된 마피아 쥐 네 마리를 합쳐 여섯 마리로 새로운 그룹을 만든다. 그리고는 이들을 하나의 실험실에 몰아넣는다. 동일한 작업을 성실한 샐러리맨 쥐와 노숙자 쥐에게도 실시한다. 그러니까 A 실험실에는 왕년에 한가락씩 했던 마피아 쥐 여섯 마리, B 실험실에는 열심히 일하던 범생 쥐 여섯 마리, C 실험실에는 인생을 포기한 노숙자 쥐 여섯 마리.
먼저 마피아 쥐들이 모인 A실험실을 보자. 실험 시작 채 몇 분도 안 돼서 정확하게 세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열심히 자맥질을 하여 먹이를 가져와 바치는 샐러리맨 쥐 두 마리와 그걸 갈취하는 마피아 쥐 두마리, 그리고 생을 포기한 노숙자 쥐 두 마리로.
다른 실험실도 비슷하다. 생을 포기한 노숙자 쥐 여섯 마리를 몰아넣은 실험실이 흥미롭다. C 실험실의 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 왕초 노릇 시작한 두 마리의 쥐와 갑자기 성실해져서 먹이를 구하러 가는 쥐 두 마리, 그 와중에도 의연하게 노숙자의 본분을 지키는 쥐 두 마리로 삽시간에 분리돼 버렸다.
이걸로 끝이냐고? 아니다. 막 드라마틱한 인생유전을 경험한 쥐들에게는 불행히도 해부가 기다리고 있다. 실험자들은 이 쥐들의 뇌를 갈라보았다. 마피아 쥐들의 경우, 어느 부위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여하튼 뇌의 특정부위가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다고 한다. 실험자는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반면 가장 건강한 뇌 상태를 보인 쥐들은 먹이를 물어와 왕초에게 바친 꼬붕 쥐들이었다고 한다. 쉴새없이 수중 터널을 왕복하느라 자신도 모르게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일까? 여하튼 결과는 그렇다. 실험자는 마피아 쥐들이 일반 쥐들에 비해 격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부하들이 도전해 올까봐, 그리하여 자신이 그 지위로 떨어질까봐 밤낮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태연한 태도 아래엔 격심한 불안이 똬리를 틀고 있다고.”
이 우화같은 실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음미하게 만든다.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능력있는 자와 뼈빠지게 일만 하는 자, 무능하고 의욕이 없는 자 등 실험실 쥐에서 표현된 인간상은 우리가 고착화된 성격과 능력으로 치부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상대에 따라 그 모습은 언제든 변화한다.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다. 이것은 언제나 조건과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걸 함축한다.
저 실험에서 쥐들의 아둔함을 발견하는 것은 쉽다. 서로 돌아가며 평등하게 ‘먹이 모험’을 하였다면 격심한 스트레스로 비대해진 뇌를 가질 일도, 뼈빠지게 일할 일도, 굶어죽을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격심한 빈부격차 속에 생활고에 일가족이 자살하고, 12시간 이상의 중노동과 학습이 일상화되고, 그런 노력이 권장되는 한국 사회에서 실험실 쥐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을 수 있을까?
얼마 전 오마바는 취임사에서 미국 독립선언서를 상기시키며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자명한 진리를 다시금 천명하였다. 그의 연설은 극심한 빈부격차를 경험하는 오늘날의 미국에서 선언적 문구 이상의 무게가 느껴진다. 우리는 과연 저 선언의 내용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고 있는가?
to be continued.........
루저C
편집 : 꾸물, 보리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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