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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3. 07. 금요일

독일특파원 타데우스






 

 



최근 나치시대의 미술품 약탈에 대한 영화 <모뉴맨츠맨>이 개봉하였다고 한다. 비록 아직 영화를 보진 못하였으나 대강의 줄거리를 읽어보니 화려한 캐스팅과 흥미로운 소재의 영화라 생각된다. 


영화에서도 나오겠지만 미술품은 그 인류의 문화적 유산이라 하거나 예술적 가치 어쩌고 저쩌고의 아름다운 스토리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림은 아니 오래된 명화들은 막대한 돈이 오가는 또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다. 그것도 소수의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고상한 취미 혹은 재테크 수단으로써 말이다.

 

뭐가 모이면 파리가 꼬인다고 미술시장의 활성화와 미술품 가격의 상승은 위작과 사기의 알흠다운 스토리를 위한 영양가 많은 토대를 제공하게 된다. 


오늘은 그 위작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 반 메헤렌 (Han van Meege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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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라렌(Laren)에 한 반 메헤렌 이라는 화가가 살고 있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작 화가라는 설도 있고, 나치로부터 네덜란드의 자존심을 지킨 영웅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뭐 아무튼 그런 그의 이야기를 들춰보자.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히틀러의 오른팔 괴링이 수집한 미술품을 압수한 네덜란드 당국은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다 출처가 한스 반 메헤렌으로 밝혀진 작품 다섯 점을 찾아낸다.


다섯 점 모두 17세기 네덜란드의 천재적이고 미스터리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Jan Vermeer van Delft: 1632-1675)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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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 그림이 가장 좋다. 


오늘날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우유를 따르는 하녀>로 유명한 베르메르의 작품들이었다. 베르메르의 일생에 대해서는 오늘날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다만 몇몇 작품(37점)이 현재까지 남아있으며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그는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를 사용하여 마치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처럼 뿌연 느낌의 몽환적 그림을 연출해 내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물론 카메라 옵스큐라는 훨씬 그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지만 원근법의 표현 등 정확한 형태를 위한 것일 뿐 채색을 할 때에는 그 느낌이 전부 없어져 버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현대의 카메라와 비슷한 방식으로 블라블라... 그림 그리는데 사용하는 기구였다. 이해하기 어려우니 그림으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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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방에 이해 똭~ 


1945년 나치의 패배로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여러 나라에서 당연한 수순으로 나치 동조자들을 처벌했다. 네덜란드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그 중에서는 미술품 상인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유대인 혹은 일반인으로부터 빼앗고 강탈한 그림들을 나치에 갖다 바치고 팔아넘겨 부를 축적한 이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시민들은 격분했으며 그들에 대한 비난의 여론이 들끓었다. 


그 중 화가이자 미술품 상인으로 활동하던 한 반 메헤렌이 있었다. 그는 베르메르의 몇몇 작품을 히틀러의 왼팔 괴링에게 팔았고, 이를 통해 많은 돈을 벌어 들인 네덜란드 인이었다. 


그가 괴링에게 판 그림들의 이력을 추적하던 한 조사관은 그가 판매한 베르메르의 그림들은 그림의 이력에 기재된 것과 달리, 이탈리아 귀부인의 개인 컬렉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반 메헤렌을 추궁하기 시작한다. 


그의 입에서는 “그거 다 내가 그린 거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반 메헤렌은 이미 그 이전에도 화가로 활동하던 예술가였지만 당시 그리 크게 주목을 받지는 못했던 그렇고 그런 화가 중 한 명 이었다. 당시의 유행하던 화풍이 아닌 주로 고전적인 스타일의 풍경화나 초상화 작업을 하던 그의 입에서 그가 그동안 괴링에게 판매한 6점의 베르메르 그림이 모두 그의 손을 통해 창작된 자신의 작품이라는 믿기 힘든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조사관 뿐 아니라 많은 전문가들은 그런 반 메헤렌의 주장에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림을 아무리 잘 그린다 하더라도 이미 200년 가량 지난 베르메르의 그림을 전문가의 눈을 속일 정도로 완벽하게 만들어 내는 것은 당시로선 상상하기 쉽지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그가 당시 미술품 수집가, 미술품 전문가 그리고 일반시민 모두를 속이고 살벌했던 나치의 최고 수장에게 그림을 판 대담함은 사람들의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학계의 내로라하는 잘나가는 학자들이 그동안 그의 위작을 진품으로 확인해 준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린 사람은 그 작품들이 위작이라고 주장하고, 학자들은 그 그림들이 진품이라고 주장하는 웃픈 상황이 발생하고 만다.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정부 당국은 반 메헤렌에게 제안을 한다. 


“만약 당신이 베르메르를 완벽하게 그릴 수 있다면 우리 앞에서 직접 보여 주시오. 그럼 당신의 말을 모두 믿겠소.” 


그리하여 반 메헤렌은 전문가들과 감시자들의 눈 앞에서 3개월에 걸쳐 베르메르의 그림을 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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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앞에서 시연 똭~


그런 과정은 언론을 통해 네덜란드 전역에 소개되었고 나치 부역자에서 순식간에 국가적 영웅으로 반 메헤렌의 위상은 바뀌게 된다. 그는 당시 네덜란드 총리에 버금가는 지지도를 얻게 되고 전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유명세를 얻게 된다. 바로 나치로부터 해방과 저항의 상징으로 그는 그렇게 유명해 졌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만 볼 수 있을까?


반 메헤렌은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라렌(Laren)이라는 지방에서 그의 부인(Jo Oerlemans)과 함께 대저택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반 메헤렌은 자신의 그림을 팔아 그런 럭셔리한 대저택의 생활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의 그림은 전문가들로부터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고 그의 생활은 점점 쪼들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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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작업을 하던 소박한 집


그는 작심하고 위작을 만들기로 한다. 그는 이전 세대의 명화들을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그러는 동안 반 메헤렌은 스스로를 베르메르와 렘브란트에 버금가는 천재로 여겼다. 다만 세상이 그리고 시대가 그를 인정해주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작품을 통해 스스로 증명하고 싶어했다. 자신이 천재라는 것과 당시의 소위 말하는 미술 전문가들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쓰레기들 뿐 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가 선택한 방식이 바로 가짜 그림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에게 이 작업은 자신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동시에 미술 전문가들의 비 전문성을 증명하는 완벽한 방식이자 예술 활동 이었다. 


여기서 잠깐 그럼 도대체 위작이란 무엇인가?


내가 집에 앉아서 모나리자를 베껴 그리면 그게 과연 위작이 될까? 이전에도 화가들은 선배의 그림을 또 더 이전 세대의 명화들을 베껴 그리며 자신의 테크닉을 갈고 닦았으며 이러한 그림들을 수집가들에게 판매하기도 구입하기도 하였다. 단순히 베껴 그린 그림이 ‘위작이다’, ‘아니다’의 절대적 판단 기준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문제는 그 그림을 가지고 유명 작가의 작품이라고 속여 그림의 가치보다 더 높은 금전적 이득을 취하는 것이 법적으로 위작이라는 판결을 받는다. 


위작을 만드는 방법에는 작가의 서명을 위조하는 방법, 작가가 미처 완성하지 않은 작품을 가져다가 제삼자가 완성하는 방법, 작가가 직접하지 않고 제자 등이 만든 작품을 작가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방법,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는 방법, 작가가 여러 작품에서 사용한 다양한 기법을 한 작품에 모아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방법, 이미 사망한 작가의 스타일을 위조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든 후 새로 발견되었다고 주장하는 방법, 밑그림을 위조하는 방법 등이 있다. 그 중 반 메헤렌의 방식은 마지막에 나온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을 만든 후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라 우기는 가장 고단수의 방식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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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베르메르 , 우: 반 메헤렌>


이 위작이 범죄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상당히 최근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유럽에 여기저기 수많은 뮤지엄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미술 시장은 급격한 성장을 경험한다. 신생 뮤지엄들은 자신들의 컬렉션에 더 좋은 작품을 넣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고 중세시대 이후 유럽의 명화들은 그 가격이 끝을 모르고 솟구치게 되었다. 당시에 만들어진 수많은 박물관의 새로 취임한 관장들은 서로 앞다투어 그림을 모으는 방식으로 학자적 스타일보다는 사업가적 수완을 통해서 더 큰 성공의 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그러한 물결을 타고 1935년 네덜란드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지만 그닥 변변한 뮤지엄이 없던 로테르담에 보이만 뮤지엄(Museum Bojimans)이 들어서게 된다. 당시 젊은 뮤지엄 관장이던 디르크 하네마(Dirk Hannema)는 야망도 넘치고 사업가적 수완도 뛰어났다. 하지만 신생 뮤지엄이니 만큼 당대 소위 잘나가는 작품들을 거의 소유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당시 네덜란드의 대형 뮤지엄으로서 어디서 방귀 좀 껴 보려면 최소한 네덜란드 바로크 작품들을 소유해야 했다. 

렘브란트, 프란츠 할스, 요하네스 베르메르 같은 작품들 말이다. 주위의 잘나가는 다른 뮤지엄들이 베르메르의 작품을 몇 점씩 가지고 있지만 자신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새로 취임한 하네마 관장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이 시점에 이 틈을 파고 든 한 반 메헤렌은 베르메르의 화풍과 그의 기술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다. 물론 당시에 그가 유일한 위작 화가는 아니었다. 당시의 시장의 분위기에 따라 많은 화가들이 위작을 만들었고 그에 따라오는 금전적 보상과 미술상으로서의 명예 때문에 위작 전문 화가들이 점점 늘어났다고 한다. 게다가 이 위작 활동이라는 것은 (금전적 보상 뿐 아니라 과거의 명화를 그렸던 화가 자체로 살아가는 듯한 기분 때문에)중독성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한 번도 안 할 수는 있지만 한 번만 할 순 없는 그런 것과 같은 이치라 하겠다. 


반 메헤렌은 또 한 명의 완벽한 베르메르가 되는 것에 대하여 전혀 양심의 가책 따위나 거리낌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너무도 즐겼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현재도 그에게서 압수한 그의 미술재료들이 암스테르담의 라익스 뮤지엄(Rijksmuseum)에 보관되어 있다. 이를 살펴보면 그는 실제로 17세기에 생산된 안료를 사용하였고 당시의 기술 그대로 색도 직접 섞어 사용하였다. 그가 사용하던 소품역시 17세기의 그것이었으며 작품에 완벽을 기하기 위한 그의 집념이 대단해 보이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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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반 메헤렌의 도구


그의 작품을 자세히 살펴본 전문가들은 그가 이전에 ‘명화 복원’에 관련된 일을 했을 것이라 추측하는 이들이 많다. 완벽에 가까운 오래된 그림 특유의 ‘물감의 갈라짐’ 혹은 ‘물감의 색 바램’ 현상 등을 재현해낸 결과물은 사전 지식 없이 그냥 눈으로 보고 따라 그린다고 되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에는 천연 안료를 이용함으로 나타날 수 있는 물감의 벗겨짐까지 완벽한 계산에 의해 재현되어 있다.


1937년 그의 작품은 미술사학자인 아브라함 브레디우스(Abraham Bredius)를 만나게 된다. 그는 당시 베르메르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전문가로 이름을 떨치던 이었다.


그는 반 메헤렌의 그림을 보고 이것은 바로 베르메르의 초기 작품 중 하나로 이러한 초기 작품들이 어딘가 더 있을 것이라며 열광했다. 그림의 크기가 일반적 베르메르의 그림보다 큰 점이나 붓질이 전성기에 비해 조금 덜 세심한 점을 들어 베르메르의 초기작임을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사실 반 메헤렌이 처음부터 베르메르의 위작을 노리고 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냥 옛날의 방식으로 명화를 재현해보는데 온 힘을 쏟아부어 알 수 없는 화가의 작품이 될 줄 알았는데, 졸지에 베르메르 최고 전문가인 브레디우스로부터 그의 작품이 베르메르의 진품이라는 도장을 받은 셈이 되어 버렸다.

 

이는 곧바로 반 메헤렌에게 엄청난 자신감과 부를 가져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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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구긴 전문가 브레디우스 옹


이러한 브레디우스의 극찬은 당시 베르메르를 찾아헤매던 보이만 뮤지엄의 하네마 관장에게 확신을 심어주게 되고, 그는 미국인도 나치도 아닌 자신들의 소유로 그림을 남겨두기 위해 54만 굴덴을 지불하고 그림을 사들이게 된다. 


당시 이렇게 큰 돈을 지불하면서도 박물관장이 이 그림에 대한 정확한 진품 감식을 하지 않은 것은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그만큼 베르메르에 대한 브레디우스의 명성이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에도 이미 물감을 채취하여 어느 정도 시험해 볼 수 있었고 혹은 엑스레이 촬영 기술도 가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당시의 전문가들은 그러한 신기술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눈을 믿고 지금까지 자신들이 해왔던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뭐 이러한 학계의 보수적인 성향은 예나 지금이나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여기서 반 메헤렌의 짝퉁을 제대로 만드는 방식을 살펴보자.


그림의 진품 여부를 확인할 때에는 많은 방식이 동원된다. 그림의 이력 추적, 안료와 화판 등의 재료 분석, 문서 등의 자료를 통한 그림의 존재 여부 검증, 화가 특유의 그림을 그리는 붓질의 방식 등을 확인해보는 방법이 있고, 여기서 세세하게 들어가면 최근에는 보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적외선, 자외선 또는 엑스선을 비추는 방법, 분광분석법, 열발광분석법, 성분실험, 방사성 탄소연대측정법과 같은 방법들이 있다. 그러나 어느 방법을 쓰더라도 위작과 진품을 확실하고 쉽게 알기는 어렵다.


다만 당시에는 여러 조건의 한계로 인하여 이런 과학적인 방법보다는 전문가의 직관에 작품의 진위 여부를 맡기고 그의 명성을 믿는 방법도 많았다. (물론 지금도 저러한 주먹구구식 방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보다는 상황이 훨씬 많이 좋아졌다고 믿는다.)


일반적으로 유화는 그림이 마르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겉 부분이 말라서 단단해 보여도 속은 완전히 경화 되지 않아, 그려진지 얼마 되지 않은 그림들은 손톱으로 누를 경우, 일반적으로 손톱 자국이 깊이 남는다. 혹은 솜이나 면봉에 알콜을 묻혀 물감위를 살살 문질러 보았을 때 물감이 묻어 나온다면 이 역시 전혀 오래된 그림이 아니다.


하지만 반 메헤렌 역시 이러한 방법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항한 그의 무기는 베이클라이트였다. 이를 이용해 일반 유화와 다르게 물감을 더 빠르게 경화 시킬 수 있었다.(고등학교 때 순 잠만 잤기 때문에 베이클라이트가 어떤 물질인지 찾아보고 읽어봐도 모른다. 다만 저 성분이 물감을 빨리 굳게 만들어 오래돼 보이도록 만들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그에 그치지 않고 더 빠르게 굳히고 오래된 느낌을 주기 위해서 그는 그림을 다리미나 오븐 또는 드라이기를 이용하여 더 오래되어 보이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런 후 그림을 둥그런 원통에 말아서 바짝 당겨 줘서 자연스럽게 물감이 갈라지도록 만들고 (Craquelure) 오래된 느낌을 더 강화하기 위해 잉크로 물감이 갈라진 틈 사이에 쌓인 먼지를 묘사하는 것까지도 빼 놓지 않았다. 이러한 디테일들이 모이고 쌓여 갓 그린 그림을 200년이 넘어 보이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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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quelure

 

반 메헤렌은 베이클라이트를 이용한 방식 뿐 아니라 베르메르의 채색 방법까지 거의 완벽하게 따라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당시에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물감이 아닌 실제 17세기에 쓰이던 식물 광물 등지에서 얻어낼 수 있는 안료들을 직접 채취하여 사용 하였고 이는 그의 작품의 색감 등을 도저히 눈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만들었다.


그의 집요함은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 


그림을 엑스레이 촬영하게 되면 일반적으로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화가가 그 밑에 그려 놓은 스케치나 채색의 과정 중 일어나는 수정된 부분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러한 수정의 과정을 일반적으로 펜티멘토(Pentimento)라고 부른다.


최근의 엑스레이 촬영을 통해서 알게된 것은 반 메헤렌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수정한 방식마저 베르메르의 방식과 거의 동일하다는 점이다. 이 정도 되면 그림을 베끼기 위한 그의 열정과 연구 등은 정말 그 어떤 화가에게도 뒤지지 않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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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그림에 엑스선을 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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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그 밑의 스케치가 드러난다. 

(그림: 한스 맴링의 빨간 모자를 쓴 남자)


한 반 메헤렌은 무역상인 페트루스 린스트라(Petrus Rienstra)를 중매인으로 자신의 새로운 작품을 시장에 선보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처음으로 반 메헤렌이라는 이름이 서류에 쓰여지는 실수를 저지르게 되고 그것을 근거로 나중에 그가 괴링에게 그림을 판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그렇게 그의 그림은 괴링의 손에까지 들어가게 되고 괴링이 소유한 150여점의 다른 그림과 함께 세상에 나타난다.그리고 반 메헤렌은 1947년 나치에게 그림을 판 혐의로 세간에 알려진다.


재판과 검증의 과정을 거쳐 그는 위작과 위증의 죄로 인한 1년의 실형을 선고 받는다. 감옥에 수감된 후 6주 만에 그는 58세의 나이로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의 그림은 이제 베르메르가 아닌 반 메헤렌의 이름으로 라익스 뮤지엄에 걸려있다. 그리고 역사는 그를 나치에 대항한 저항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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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대표작 엠마우스 에서의 만찬


하지만 실제로 그는 나치의 힘이 만빵으로 차고 넘치던 시절에도 독일인들과 그 어떠한 트러블도 없이 잘 살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그린 가짜 그림을 팔아 당시의 돈으로 300만 굴덴 이상을 벌여 들였다. 현재의 가치로 약 1억 유로(1500억 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거금이다. 그 돈으로 부동산을 사고 럭셔리 라이프를 즐기고 파티를 하며 잘 먹고 잘 살았다.


그에 대해서 인터넷에 떠도는 또 다른 이야기로는 그가 가짜 그림을 팔고 괴링은 그에게 가짜 돈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저런 이야기는 어디가 출처인지 알 길이 없으나 실제로 돈과 관련하여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하나는 괴링이 그에게 165만 굴덴을 당시 영국 화폐로 주었다는 이야기와 대략 200점의 강탈한 미술품들을 돈 대신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어디에도 위조지폐로 인한 반전의 반전 같은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여기저기 떠도는 그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보다 더 아름답게 미화되곤 한다. 하지만 그의 위작에 대한 진실은 나치에 대한 저항의 상징 보다는 학계에 대한 열등감의 폭발로 인한 덕질의 결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보이며 돈에 대한 전설도 결국은 그의 행위를 미화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괴링에게 팔아넘긴 위작들은 그의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훨씬 더 쉽게 위작 구분이 가능했다고 한다. 뮤지엄에 팔아넘길 물건에는 세세한 디테일까지 신경 썼던 그가 괴링에게 준 작품은 17세기에 전혀 사용되지 않았던 파란색(코발트 블루) 물감을 사용하여 눈으로 보기에도 전에 비해 그 수준이 많이 못 미친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카더라~ 통신이긴 하다.)


어쨌든 역사는 쉽게 다시 쓰여지고 각색되고 편집된다.








타데우스

편집 :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