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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봉이사슴 추천4 비추천0

2014. 03. 12. 수요일

독투불패 닭봉이사슴







 







1. 사회를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      


오늘은 저번 회차에 예고한 대로 칭구들 이야기를 해보겠다. 필자는 유학을 와서 입학을 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게다가 보통의 한국 유학생들과 달리 학부 1학년으로 입학하게 되어, 학교에서 거의 10살 가까이 차이나는 칭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정말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파릇파릇한 새내기들과 학교생활을 함께 하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흘러 더 이상 파릇파릇하지 않고 설계 마감에 찌들어 피부는 갑오징어가 되어가고 눈은 흐리멍텅해지며 수업시간엔 온갖 뺑끼만을 찾게 되는 이들을 보며 ‘아 이것들이 이제 어른이 되었구나’ 생각하게 된 바, 그들이 가장 탱탱했을 때, 그 1년의 기억이 잊혀지기 전에 글을 한 편 써 둬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왜 그것을 잊기 싫냐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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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직 성인도 아닌 아이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모로 행운이었다. 일단 개인적으론 그 앳됨, 때묻지 않은 에너지를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고, 필자가 첫 새내기때 느꼈던, 진짜 친구를 만들어가는 그런 느낌을 다시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왠지 어릴 때 만난 친구는 평생친구가 될 거 같고 그렇자나. 난 그 리미트가 20살 때였거든.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의 고등학생들의 생활을 엿보는 느낌이 들었다. 난 그들과 함께 놀고 공부했지만, 지금까지 쌓아 놓은 나만의 방식이 있기 때문에 그들과는 좀 달랐지만, 아이들을 보면 아 프랑스 고딩들은 이러고 사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공부하는 방법, 친구랑 노는 법, 그런 일상적인 것들을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과 공유하게 된 거지. 게다가 그들은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기에, 여전히 청소년이라고 해도 상관없을 나이였기에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해왔나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내 칭구들도 나이를 조금은 먹은 지금은 그때와는 좀 달라진 것 같다. 나이 좀 드신 열분들은 아실 것처럼, 새내기 때의 1년은 정말 많은 것을 배우는 시기고, 자기자신이 좋건 싫건 많이 바뀌게 되는 때이기도 하다. 이제는 그 탱글탱글함이 없어졌고, 다크써클을 장착하기 시작했다. 물론 바뀐 건 외모만은 아니지.



암튼 그래서 오늘은 프랑스 고딩들이 어떤 식으로 교육을 받았을까를 그들의 생활방식을 통해 추리해 보는 시간 되겠다.


그들과 함께 1년을 보내면서 필자가 가장 놀랐던 점, 혹은 놀라지 않았던 점은, 그들이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해 발랄한 것을 제외하면, 그냥 나랑 별 다를 것 없는, 그런 사람, 그니까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나와 내 한국칭구들과 비교해 봤을 때, 별로 다를 게 없는 그런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필자에게 이런 것들이 왜 기이하게 다가왔냐면, 왜 이짜나, 한국에서 선진국 교육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만날 하는 말들, 토론식 교육을 하고 창의력을 기르는 교육을 해서 미국에서는 스티브 잡스가 나오고 스웨덴에선 이케아 같은 기업들을 만들어 내고 그런 거. 


그니까 나는 애들이 토론도 되게 잘하고, 다 말빨도 세고, 미술시간이나 설계시간에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창의적 작품들이 막 쏟아져 나올 것이라 생각했던 거야. 그게 막 나오진 않더라도 한국보다는 더 활발한 토론과 창의적 작품성을 그들에게, 이제 갓 고등학교 졸업한 그들에게 기대했었던 거지. 나는 졸라 선진화된 프랑스식 창조적 교육을 받은 인간이야 하면서 이곳저곳에서 막 난 생각도 못했던 것들이 튀어나올 줄 알았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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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창의력은 개뿔... 필자는 현재 프랑스 국립 건축학교에 재학중이다. 그 중에서도 라빌레뜨라는 파리에 있는 건축학교에 다니고 있어. 한국에서도 전문직은 보통의 직장보다 조금은 다른 공부를 해야 할 수 있듯 여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건축학교는 대학교에 소속되지 않고 개별적으로 운영되지. 


이런 건축학교는, 보통의 전문직을 위한 학교들처럼, 한국에서도 그렇듯, 공부를 좀 하던 애들이 온다. 1편에서 이곳은 성적에 따른 커트라인이 없다고 했고, 실제로 없지만, 그래도 아예 안될 거 같은 성적의 애들은 거의 뽑지 않는다. 그리고 학생을 뽑을 때 불법적으로 면접도 한다. 원래는 1학년 학생을 뽑을 때는 법적으로 면접을 볼 수 없게 되어 있는데, 뒷구멍으로 본다. 


그래서 우리학교에 오는 애들은 그래도 자신의 전공(이과나 문과나 예능이나)에서 꽤나 뛰어난 애들이라는 거다. 집도 다들 좀 사는 애들이고. 한국이나 여기나 많이 다를 거 같지만 실상은 다 비슷비슷하다. 잘 사는 애들이 공부도 더 잘해. 차이점은 얼마나 많은 예외가 있나 정도지. 여긴 그래도 예외적인 애들도 많다는 정도. 하지만 베이스에 깔고 들어가는, 집이 좀 살고, 부모도 고등교육을 받아서 자식 교육도 잘했고, 그래서 어려움없이 하고 싶은 공부 혹은 부모가 시키는 공부 열심히 한 그런 애들이 성적도 좋고 학교도 좋은 데 간다.


근데 그런 애들이, 프랑스의 선진화된 교육을 어렸을 때부터 받았던 애들이, 내가 한국에서 봐온 거랑 별반 다를 거 없는 수준이라니. 그니까 걔네가 우리보다 수학문제를 잘 푼다거나 시험을 잘 본다던가 그런 거 말고. 그런 건 원래 우리나라가 잘하잖는가. 그런 거 말고 진짜 그들이 능력이 발휘될 거라 기대한 토론수업이나, 글쓰기, 미술시간, 그런 창의력을 발휘해야 하는 수업들에서 내가 본 그들이 별로 특출나지 않았다는 거다. 


토론을 하면, 한국이랑 똑같다. 한 열댓 명 앉아있는데 그중에 말하는 애는 두세 명 밖에 안된다. 나머지는 다 꿀 먹은 벙어리. 미술시간에 교수가 특정 주제를 주고 뭘 만들어 오라 그러면 어떻게 짜고 해오는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만들어온다. 뭔가 특이한 걸 하는 애는 몇 명 안돼. 누가 내 작품이나, 아님 토론을 할 때 나의 의견을 비판할 때 있잖아. 우리 그런 거 좀 싫어하고, 맘상하고 막 그러잖아. 난 그게 우리나라만 그런 줄 알았다. 


근데 여기도 그렇더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건 여기도 그런 게 있다는 거다. 토론이 졸라 활성화되고 그렇지 않다. 몇 년의 세대차가 있고, 지구 삼분의 일 정도의 거리에다가 선진화된 교육까지 받은 친구들이 이렇다니. 좀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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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거기더라



그니까 말야. 우린 교육을 선진화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돈만 많이 들고, 애들은 다 똑같애. 개중에 좀 잘하는 애가 있고, 좀 특출난 애가 있고. 나머진 다 똑같다. 이건 한국도 그렇잖나. 그럼 달라지는 게 없는 거 아닌가.


다른 점은 있었다. 바로는 못느꼈다. 한학기가 지날 때쯤 알겠더라고. 아 얘네는 이게 다르구나. 아이들이 생산해내는 결과물은 다른 점을 말해주지 않았다.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말해줬지. 그래서 찾기가 좀 어려웠던 거 같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와 그들의 사이에는, 다른 점이 있었다.


어떤 작품을 만들거나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필자는 기본적으로 프랑스 칭구들과는 좀 다른 결과물을 내놓을 때가 많았다. 당연한 거지. 서로 완전히 다른 문화에서 자랐으니까. 많은 경우에 교수들이 생각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기도 했다. 


그렇게 다른 칭구들과 전혀 다른 결과물을 가져가서 발표를 할 때면, 처음엔, 필자는 적잖이 당황을 했다. 다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있는데 나 혼자 한복을 입고 갓을 쓰고 있는 느낌이었지. 처음엔 그게 불편했다. 내가 잘못한 거 같았지. 근데 그럴 때마다 교수는 물론이고 아이들까지 그 작품을 궁금해 했어. 왜 그런 결과물이 나왔는지를 궁금해 할 뿐 아니라 “이 작품은 이래서 괜찮은 거 같은데 이 부분은 별로다”라고 비평을 해대더라. 


이게 우리가 한 거랑은 다르다, 그래서 잘 모르겠다는 그런 말은 거의 없었다. 아니, 생각은 했겠지만 입 밖으로 내뱉을 말은 아니라고도 생각을 했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런 일이 몇번 있은 후, 주위를 둘러보니 나 말고도 좀 특이한 걸 해오는 애들이 있었다. 당연하지. 그런 애들은 어디에나 있고, 상황상황마다 평소엔 항상 남들과 똑같은 것만 하다가도 좀 이상한 것, 특이한 작품을 해오는 경우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 작품들은 항상 이야기 거리가 되더라고. 99%가 비슷한걸 할 때 다른 것을 하는 1%를 도마 위에 얹어놓고 지들끼리 지지고 볶고 해서 맛있게 먹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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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딱히 특이한 걸 하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그냥 집에서 혼자서 하다 보니 그런 결과물이 나오는 것 뿐이지. 하지만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그게 정답은 아니지만 좋은 대안이긴 하다고. 그리고 어쩔 땐 그 대안이 정답보다도 더 정답이라는 것을. 그들은 그 창의성을 기르는 교육과정, 토론식 교육에서 그런 걸 배운 거다. 우리 모두가 하는 것과 다른 무언가가 있을 땐 그걸 한번 잘 디벼봐야 한다고. 그 과정에서도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고. 


교수들은, 물론 중요한 법칙 같은 것들을 가르치지만, 동시에 항상 이렇게 말한다. “너희도 알다시피 내가 가르치는 것보다 너희 칭구들한테 배우는 게 훨씬 많을 거야. 옆을 항상 둘러보고 거기서 배워”라고.


특이한 결과물들은 항상 나온다. 어떤 사회에서도. 우리나라처럼 일방적이고 억압된 교육을 하는 사회에서도 그런 아이들은 항상 있고, 보통의 아이들도 어떤 때는 그런 것들을 만들어 낸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평가하냐다.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중요한 거지. 창의성을 길러주고 토론을 시키는 교육은, 그런 사람, 그런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건, 그런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교육이다. 


프랑스나 한국이나 가르치는 건 엇비슷하다. 수학시간엔 미적분 같은 것들을 가르치고 역사시간엔 프랑스의 역사나 세계의 역사를 가르치고. 일방적인 교육은 항상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느냐는, 어쩌면, 새로이 만들어 낸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는 거다.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은 개인의 문제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것은 사회의 문제지.


거늬 회장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한 명의 천재가 만 명을 먹여살릴 수도 있다. 100% 동의할 순 없지만, 실제로 세상은 그런 똘끼 있는 놈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로 크게 바뀌기도 하니까. 근데, 그렇게 바뀌는 주체는 결국 세상이지 않나? 그렇게 바뀌는 주체가 그런 똘끼 있는 놈을 밀어내기만 한다면, 뭐가 바뀌겠나. 거늬 회장님이 “바꿔!!!!!”라고 하기 전엔 아무 것도 안 바뀌지. 그니까 우리는 개인을 위한 교육을 할 게 아니라, 사회를 위한 교육을 해야 된다.” 이런 결론이 되겠으. 내가 이곳에서 느낀 바는 그거다.

 

창의력을 기르는 교육은, 개인의 창의성을 기르는 교육이 아니라,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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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니까 부자들이 암만 돈 써서 지 아새끼들 창의력 대장 만들어봤자, 걔네가 사회구성원으로서 살아갈 마음가짐이 아니라 거늬 회장님처럼 될 마음가짐이라면, 진짜 창의력있는 애들은 평생 또하나의 약속이나 만들어야된다. 나 이거 아직 못봤는데. 프랑스에 있으면 이런 게 안 좋아. 설국열차도 아직 못봤어 제길. 영국이랑 북미에서 편집문제로 개봉을 못해서 DVD가 안나와... 다음 방학땐 나오겠지 뭐.



한 발짝만 더 나갈겠다. 어뜨케 할 것인가. 전에도 말했듯이 난 교육전문가도 아니고 뭣도 아니여. 그리고 프랑스에선 고등교육(Etudes superieures)밖에 안 받았다. 고등학교 이전의 교육 내용은, 칭구들이랑 얘기하면서 주워 듣긴 했지만, 그렇게 자세히는 모른다는 것이야. 그냥 내가 겪은 걸로 주저리주저리 하는 거지. 그니까 내가 한 발짝 더 나갔는데, 알고 보니 빽도인 거 같거나 뭐 그러면 열분들이 댓글로건 뭐로건 맘대로 까도 된다 이거야. 실전으로 까지만 않으면 난 괜찮아.


프랑스는 똘레랑스의 나라라는 말 많이 줏어 들어봤을 것이다. Tolerence는 많은 한국사전에서 관용, 이해란 말로 번역을 한다. 이걸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해석하려면 17세기 철학까지 뒤져봐야 하니까 그건 덮어두고, 내가 이해하는 한도에서 풀어보자면, ‘우리가 우리의 사회적 도덕과 규범에 비슷한 범위에 있지 않는 것들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 이해, 그리고 수용이지. 관용이란 뜻은 Tolerence를 동사로 쓸 때, 그니까 Tolerer 로 쓸 때, 일상적 표현으로써 쓰일 때, 예를 들면 삼겹살 1kg 달라 그랬는데 한 50g 정도는 덜 주거나 더 줘도 OK!! 뭐 이 정도 느낌으로 쓰일 때의 뜻이고 사회적 똘레랑스에서는 별로 상관없는 뜻이다. 중요한 건 이해와 수용이지. 


그리고 똘레랑스의 주체는, 그 뜻에 따르면, 개인이 될 수는 없다. 윗집에서 졸라 시끄럽게 굴어서 내가 가서 지랄 한 번 했는데 윗집 인간이 나한테 넌 왜 이렇게 똘레랑스가 없냐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지. 내가 개인으로서 나의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관용으로 봐줄 때 쓰일 수 있는 말은 아니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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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똘레랑스를 왜 꺼내드냐면, 내가 학교를 다니면서 이걸 많이 느꼈기 때문이다. 그들도 인간이다. 아까 말했듯이 우리랑 별 다를 것도 없는 인간이다. 자신의 규범과 다른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리 교육을 받았어도 쉽지 않고, 상당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애초에, 인간에게 똘레랑스가 본능적으로 존재한다면 누군가가 프랑스는 똘레랑스의 국가야 존나 멋지지?라는 표어를 만들지도 않았겠지.


그런데 그들은, 그들은 그만큼의 에너지를 쓴다.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너무나도 달라서 이해할 수 없는 문화와 규범을 이해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쓴다. 그걸 수용까지 할 수 있을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면 그 에너지를 쓰는 과정 자체가 수용이거든. 문화의 수용은, 내가 그걸 수용했다라고 결과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예를 들면, 난 프랑스인이 아니니까 불어로 말하는 게 여전히 익숙지 않다. 특히 발음과 액센트가 중요한 프랑스어로는 내 말을 백프로 이해시키기가 어려울 때가 종종 있지. 하지만 이들은 내말을 꼭 완전히 이해할려고 한다. 칭구들끼리도 그렇고, 교수들도 그렇고. 내가 봤을 땐 그냥 대충 넘어가도 될 거 같은데 꼭 끝까지 알아내고 이해하려고 한다. 내가 불어를 불어처럼 못하는 건데, 내 말을 못 알아들어서 지들이 미안하다고 하면서까지. 모두가 그렇진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이건 친절이나 본성, 그런 것과는 거리가 엄청 먼 거다. 이건 교육받은 행동이다. 그리고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이건 나처럼 외국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지들끼리도 그런 거다. 이것에 관해선 나중에 좀 더 조사해서 글을 하나 쓰겠다. 내가 본 바에 의하면, 프랑스엔 오타쿠와 같은 뉘앙스를 갖는 말이 없다. 오타쿠, geek이란 말을 지네말처럼 쓰긴 하지만, 그 부정정인 뉘앙스는 딱히 없다. 그것도 똘레랑스와 연관이 있다고 본다. 그 얘긴 일단 여기서 멈추자.


이 교육받은 행동이 나올 수 있는 것은 당근 교육을 했다는 것이고, 이 사회철학이 교육에 묻어있다는 것이다. 그니까 창의력 대장을 만드는 게 창의력을 키우는 교육이 아니라, 남을 이해하게 만드는 교육이 창의력 대장이 드러나게 하는 교육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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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력은 이런 게 아니라고!



우리는 프랑스는 똘레랑스의 나라니까 외국인도 공짜로 가르쳐 주고 난민도 잘 받아 주고 그러지. 근데 요즘은 집시들 쫓아내고 그러기도 한다며? 그럼 뭐야 그건, 그것도 똘레랑스야?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그 철학이 사회에서, 교육에서 어떻게 발휘되고 있는가를 봐야한다는 거다. 근데 지금 우리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어디까지 와 있냐 이거야 지금. 나로 예를 들면, 내가 졸라 이기적인 놈이라 그런지 몰라도, 난 그렇게 누군가를 이해할려고 노력한 적은, 연애할 때 빼고는 없는 것 같다. 그런 교육을 받은 적은 더더욱 없는 것 같다.


유치원때부터 창의력을 기르자는 둥 이딴 소리 많이 하잖나 요즘. 그게 선진교육이라며. 느그들도 자식 낳으면 자식이 창의력 대장이었으면 좋겠자나. 근데 그건, 솔찍히 꽤나 많은 부분이 본성에 있는 것인 거, 우리도 알지 않나. 그래서 적성 검사도 하는 거 아냐. 근데 그걸 받아들이는 사회는 100% 교육이라고. 근데 그 교육은 안 하고, 애들한테 “너는 창의력 대장이 되어서 세상을 막 조물딱 거려야 돼.”라고만 말하면, 그 애가 나중에 커서 누굴 어떻게 이해하겠냐고.

 

 

 

2. 여유 그리고 고등고육


이번엔 좀 우울한 이야기를 써 보겠다. 이 이야기는, 그냥 우리 이야기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어느 프랑스 교수와의 대화 때문이었다.


어느날 학교에서 답사를 갔다. 우연히도 그 답사 버스엔 한국인이 4명이나 타 있었다. 한참 답사를 하고 다시 버스를 타러 터벅터벅 돌아오며 한국에 관해 관심이 좀 있는 교수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강의를 좀 해보신 그 교수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근데 한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유학을 많이 와? 그 자리에서, 난 얼어붙은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라 대답할 말도 없고, 한국의 교육상황이 스쳐 지나가며 쪽팔리기도 하고, 좀 그랬다. 그 순간 그 교수도 나의 그런 마음을 얼굴에서 읽었는지 다른 주제로 돌리더라. 그 일이 있고 난 후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유학을 많이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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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드디어 변호인을 봤다. 저번 편에도 썼지만 외국 살면 이런 게 안 좋다. 좋은 한국영화를 제때 볼 방법이 없다. 설국열차도 아직도 못 봤다.

 

필자가 변호인을 보며 인상깊었던 장면이 있다. 류수영이 연기한 어떤 건설회사 사장이, 부림사건을 맡은 송변과의 계약 중단을 선언하며, “내가 유학도 하고 해봐서 나도 민주주의가 뭐고 그런 거 다 아는데 그걸 하려면 우리나라가 돈을 지금보다는 3배는 많이 벌어야 돼. 우리 국민들이 3배는 많이 벌어야 민주주의를 할 여유도 생기고 뭐 그런 거야. 송변은 여기에 좆까를 외치며 박차고 일어나지만, 이 논리는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논리다. 이 논리를 반박하는 건 둘째치고, 좀 더 단순히 생각해 보자. 그 때보다 사람들이 돈을 10배는 더 버는 지금은 그렇다면 왜, 민주주의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을까? 박정희 전두환이 우리에게 돈을 벌어주었다고 착각할 수 있는 세대가 아닌 사람들, 혹은 그 당시에도 돈을 벌지 못했던 사람들은 왜 새누리당을 찍는가?

 

질문에 대한 답은 항상 질문에 있기 마련이다. 그 잘생긴 건설회사 사장이 씨부린 말중에 필자가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은 딱하나, ‘여유’다. 우리에겐 여전히 여유가 없다. 돈은 생겼는데 여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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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어뜨케 발전하는가? 산업혁명시대, 우리에겐 6-70년대 이후로 인간에게는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잉여자본이 생기게 되었다. 이 잉여자본은 당연히 물질적 풍요뿐 아니라 더 많은 잉여 인간들과 잉여 시간도 가져온다. 그리고 아마도 그가 생각했던 민주주의는,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부르주아 혁명은, 그 잉여시간이 넘쳐 흐르는 잉여인간들이 주체가 되어 하는 것일 거다.

 

필자는 거기서 그 잉여잉여한 것들만 뽑아서 생각해 보았다. 이전처럼 흩어져 살지 않고 전국민의 1/4, 1/3, 오늘날은 절반 이상이 거대한 권역을 이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상황에서 그 잉여력은 많은 곳으로 흘러가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그 잉여력의 재투자일 것이다. 설비 투자도 있을 수 있고, 투기도 있을 수 있고, 인간에 대한 투자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인간에 대한 투자가 바로 교육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 건설 잉여가 말한 3배의 수익이 가져다 주는 것은 바로 그 잉여력의 인간에 대한 투자인 교육인 것이다. 그것 말고는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대의에 다가가기 위해 우리자신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전보다 3배 잘산다고 해서 존경하던 임금님이 갑자기 좆같이 보이지는 않는다. 임금님은 임금님이다. 임금을 대통령으로 바꾸는 것은 교육이 할 일이다.

 

그런데 우리에겐 문제가 있다.

 

우리사회는 말그대로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그 결과로 우리사회의 총 잉여력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우리는 이제 굶어죽기는커녕 국민 모두에게 줄 집을 지어놓고 전 세계인의 몇 분의 일에게는 줄 수 있는 자동차와 스마트폰을 생산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물질적 잉여자본은 정말 많이 늘어났다. 보통의 경우 잉여자본이 늘어나면 잉여인간과 그들의 잉여시간이 그것을 뒤따라오며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겐 아직도 그게 없다. 잉여자본은 있는데 잉여시간이 있는 잉여인간은 찾아볼 수가 없다. 국민 100%가 자신의 100%를 쏟아부어서 일을 해야 사회가 돌아갈 거라 생각하는 동원체제적 국가관의 권력은 국민에게 잉여력을 적절히 나눠주지 않았다. 월급은 10배가 올랐지만 잉여시간은 여전히 없는, 아니 오히려 줄어든 사람들이 마구 늘어난 것이다. 게다가 잉여시간의 감소의 단위는 하루 단위로 오지 않고 인생 단위가 되었다. 무슨 뜻이냐면, 그냥 하루 평균 혹은 일 년 평균 근무시간이 이전에 비해 늘어난 것이 아니라, 그 근무를 하기 위한 교육 시간이, 대학 졸업 후 몇 달 혹은 대학 막바지 1-2년에서,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까지 내려와 버린 것이다. 잉여력이 가장 폭발되어야 할 시기인 청소년기 이전의 아이들에게 마저도 여유따윈 사치가 되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이건 확실히 말해서 이상하다. 세상에 10년을 넘게 교육을 받아야 할 수 있는 일 따윈 없다. 그 교육을 받거나 하는 것이 업이 아니고서는. 프랑스 상황을 보자면 적어도 중학교나 고등학교 1학년까지는 그냥 잉여생활이다. 고2쯤부터 대학갈 준비를 하며 사회에 나가 일하는 데 써먹을 것들에 대한 교육을 받는 기간은 대학기간이 전부다. 다 합쳐야 6-7년쯤 되는 거다. 우리의 반 정도 밖에 안 될 거다. 그럼 우리의 나머지 반은 도대체 어디로 쏟아 부어지고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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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에 대한 대답은 다들 아실 테니 여기까지만 하겠다.


문제는 우리가 잉여시간은 없지만 잉여자본은 있다는 것이다. 어쨌건 월급은 몇 배 올랐단 거다. 시간은 없을지언정 돈은 넘처 흘러나는 분들이 수도 없이 양산됐다. 우리도 이제 꽤 잘 사는 나라 중에 하나가 되었다. 물가가 비슷한 몇몇 나라들에 비해 월급은 적은 게 이상하긴 하지만, 뭐 그래도 집 짓고, 비행기 타고, 외국 나가고 이런 것 정도는 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는 거다. 그럼 어뜨케 할 것인가? 뻔하지 뭐. 그 잉여자본으로 잉여시간을 사면 될 것 아닌가? 돈 좀 있으면 외국에서 아이들에게 잉여시간 풍만한 선진교육을 시킬 수 있는데 뭐하러 비효율적인 한국 교육에 매달린다는 것인가. 게다가 그 외국생활이 비싼 것도 아니고, 프랑스 같은 덴 한국에서 드는 돈이랑 엇비슷하게 쓰면 되는데. 조기유학과 유학의 출현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스펙 쌓으러 유학왔다가 그 나라에 좀 적응되면 한국에 들어가기 싫어한다. 그들은 선진국에 살고 싶은 게 아니다. 이야기를 해 보면 대부분 그 이유는 생활의 여유다. 또한, 특히 학부과정에서 보는 꽤 많은 유학생들은 중고등학교때부터 여기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마찬가지다. 부모세대가 그 여유를 찾아 여기까지 보내거나 함께 온 거다. 그런데 이걸 이런 관점으로 봐야 한다. 개인에게 포커스를 맞추면 그 사람이 생활의 여유를 위해 그냥 그 나라로 이주한 것처럼 보이지만, 갱제적인 언어로 말하자면 그 사람은 그 여유를(아마도 부모의) 돈을 주고 산 거다. 돈이 참 좋지 않나?


필자가 유학을 온 이유 중 하나는 부모님의 영향도 있다. 필자의 아버지는 필자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세계로 나가야 한다며 종종 유학을 종용하는 발언을 했고 그런 소리를 수도 없이 들은 본인도 나이가 들면서 그 생각에 점점 동의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기 때문에 세계로 뻗어 나가며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외국에서 그곳의 방식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뭐 그런 스토리를 꽤나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프랑스로든 미국으로든 중국으로든 유학을 가는 많은 한국인들의 머리속에는 아마도 이런 생각이 어느정도는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질문을 던졌던 그 교수가, 그 뿐 아니라 다른 교수들도 궁금해 한 건 이거다. 



너네 나라는 꽤 잘 사는 거로 아는데 고등교육이 없니? 왜 여기까지 와서 고생이니?



필자가 있는 건축학교를 예로 들면 한국인의 유학생 비율은 압도적이다. 일단 학부과정엔 유학생 자체가 거의 없다. 프랑스 관점에서 보는 유학생들은 과거 식민지였던 알제리나 모로코 같은 나라에서 오는, 진짜 고등교육이 부재한 나라의 돈 좀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니까 궁금할 만하지. 한국은 인제 좀 산다고 들었는데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여기까지 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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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거다. 우린 제대로 된 고등교육 시스템이 없다. 그게 있다면, 우리가 해외로 뻗어나가기 위해서 해외에서 배우는 뻘짓은 안해도 된다. 해외로 뻗어나가기 위해서 배워야 할 것들(글로발 시대에 그런게 따로 있다고 생각되지도 않지만)을 그냥 우리 고등교육이 가르치면 된다. 한국에서 건축을 하려면 한국 상황을 알아야 된다. 한국의 땅과 한국의 문화, 한국의 건축을 한국의 대학교에서 가르치면 된다. 그게 없기 때문에 우린 또 그걸 돈 주고 사야 된다. 잉여시간은 없지만 잉여자본이 있다면, 자식을 위해 그런 것을 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메커니즘이다.


시스템의 부재일 뿐일지도 모른다. 이 부분은 깊이 못 들어가겠다. ‘교육’이나 ‘고등교육’이 부재한다곤 말 못하겠다. 한국학생들이 외국나가면 뛰어나다는 소리 많이 듣는 거, 꽤나 사실이다. 근데 필자는 그들이 진짜 머리 좋은 게 종특이라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한국사람들이 교육을 많이 하는 거고, 그 질도 꽤 괜찮다는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교육자가 없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답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른다. 그 시스템을 없앤, 혹은 망친 자들을 찾으면 된다. 그리고 하루빨리 우리의 시스템을 건설해야 한다. 그것이 첫 회에 말했던 고등교육의 무료화, 평준화일 수도 있고, 저번 시간에 말했던 창의력을 기르는 교육, 토론식 교육일 수도 있다. 뭐든 간에 하나하나 바꿔나가야 한다.


근데, 아 울 임금님이 어느 사학재단에 이사장으로 계셨었던가...



다음 방학땐 다른 문제를 한번 다뤄보고 싶다. 울 사회와 별로 관계없는 거 같은데 관계가 졸라 있는 걸로다가. 그럼 여태까지 읽어주셔서 매우 감사. 끝.







닭봉이사슴


편집 :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