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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3. 27. 목요일

논설우원 파토







 





이 기사는


호모 사이언티피쿠스 12, 13편 고대의 실험


(상, 하) 편을 읽은 뒤 읽어야 재미가 폭빨합니다.



 

 





오늘은 예고해 드린 대로 그간 두 번에 걸쳐 연재한 소설 <고대의 실험> 에 대해 썰을 좀 풀어 보자.

 

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감각 차단을 통한 주관적 우주의 창조는 근 30년 전인 고등학교 때 떠올렸던 소재다. 그때 만든 이야기는 바닷가에서 우연히 발견된 병 속에 들어있던 편지를 통해 전개되었던 기억인데, 좀 쓰다 보니 소재는 흥미로웠지만 줄거리 자체가 내가 읽어도 재미없어서 집어치웠었다. <고대의 실험>에 소개된 존 릴리의 격리탱크 이야기는 이번에 글을 쓰면서 새로 알게 된 거다.


그렇게 남겨놓고 언젠가 다시 해봐야지 하고 처박아 뒀던 게 어느덧 수십 년이 지난 건데, 이제라도 새로운 줄거리로 엮어 내게 되어서 나름 찝찝한 걸 하나 정리해 버린 상쾌함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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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순수 픽션이지만 그 바탕이 된, 이 세상이 과연 ‘진짜’일까라는 질문은 수천 년간 반복되어 온 해묵은 것이다. 때로는 종교나 신화, 때로는 철학, 현대에 들어서는 자연과학적인 관점으로도 이 의문에 접근하고 있으니 말이다.

 

고대에는 세상이 신이 꾸는 꿈이거나 일종의 환상이라는 개념이 낯선 게 아니었다. 인도 철학, 특히 그 중심이라고 할 아드와이타 베단타에는 ‘마야’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넘은 영원불변한 ‘원리’인 브라만이 스스로를 현상적 세계로 현현시킨 ‘현상계’고, 바로 우리가 살고 죽고 노는 이 세상이 포함된다.

 

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깊이 들어가면 복잡한 개념이지만, 원리인 이 브라만을 의인화해 이름이 살짝 달라진 창조주 ‘브라마’로 삼고, 인도의 대중들은 대략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가 창조한 일종의 환영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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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 철학에서 브라마 신은 네 개의 얼굴과 네 개의 팔을 가진 존재로 묘사된다.(얼굴 하나는 뒤쪽)

원리가 굳이 인격신화 된 것은 그렇다 쳐도 이 얼굴은 먼가 사기꾼스럽다는.

 


이런 생각은 아시아, 동양권에만 있었던 건 아니고, 열분들도 잘 아는 플라톤이 저서 <국가>를 통해 전한 소크라테스의 ‘동굴의 비유’도 이런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에 따르면 이데아, 즉 본질은 동굴 밖에 존재하는 무엇인데 우리는 그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없고 불빛에 일그러진 그림자만 볼 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주 티미하고 불완전한 환영일 뿐이고 진짜배기는 따로 있다는 거다.

 

만약 우리가 사는 우주의 속성이 실로 이런 것이라면 먼가 특수한 방법을 통해 물질적 한계를 벗어나 스스로의 세상에 영향을 미치거나, 심지어 비슷한 것을 재창조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소위 초능력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힘으로 이런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먼 미래에는 과학기술이 우주의 진정한 원리를 풀어내서 이런 영역에 도달할 지도 모른다.

 

대략 이런 것이 이 소설의 밑바닥에 깔린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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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은 이 짦은 픽션을 쓰면서 열분들이 가급적 다양한 형태의 연상과 상상을 하게 되길 바랬다. 많은 분들이 보셨을 현대 SF 의 걸작,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걸작 <인셉션>에는 꿈 속에서 다시 꿈으로, 그리고 그 꿈 속에서 또 꿈 속으로 여러 겹에 걸쳐 들어가는 모습이 등장한다. 그렇게 꿈 안의 꿈 속으로 들어갈 때의 나타나는 특수한 현상은 시간의 팽창 효과다. 현실에서는 한 시간에 불과한 것이 ‘림보’에서는 장장 50년이 된다.

 

이 설정은 어느 정도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가 잠을 잘 때, 아무리 긴 스토리의 꿈이라 한들 길어야 10여분 정도 꾸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렘수면은 전체 수면 시간의 20~25% 정도를 차지하는데 시간으로 따지면 1시간 반에서 2시간에 해당한다. 하지만 렘수면은 여러 번으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설사 구운몽처럼 일평생의 꿈을 꾼다해도 연결된 하나의 꿈을 꿀 수 있는 시간은 렘수면의 한 주기에 해당하는15~20분 정도다.

 

그러니 때에 따라서는 실제로 엄청난 시간 팽창 효과가 생기고, 그 꿈 속에서 또 꿈을 꾸면 같은 효과가 겹으로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꿈의 속성상 그것을 계산해 내기는 쉽지 않다.)

 

그런 전제하에 논리를 전개해 보면 여러 흥미로운 상황들을 상상할 수 있다.

 

일단, 극중 창조자가 어떤 우주를 자기 머리 속에서 만들 수 있다 한들 그 결과 자기 우주에서도 영원불멸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마크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여전히 뼈와 살을 가진 생명체로 자신의 우주에 있는 실험장치 속에 살아서 누워 있다는 뜻일 거다. 그렇다면 그 우주가 만들어진 것은 마크의 기준으로는 수십억 년 전이지만 창조자의 기준에서는 자기 생애 안의 일일 뿐이며, 그가 늙거나 병들어 죽게 되면 마크와 마리의 우주도 증발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런데 창조자가 관에 들어간 것은 내정관이 다시 찾아오기로 한 날보다 이틀 전이었다. 소설 속에는 그 상황이 결국 어떻게 흘러갔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극중에서 마크가 발굴한 실험실은 수천 년 이상 존재한 것처럼 묘사되지만, 그것은 창조자의 꿈 속임을 혼동하지 말자.

 

그럼 그의 우주, 네 개의 태양과 한 개의 행성이 있는 그 세상의 ‘진짜’ 실험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내정관과 그 일당이 정해진 날짜에 결국 돌아오지 못한 무슨 이유가 있었던 걸까. 혹은 창조자와 같은 문명 속에서 살았음에도 그들에게는 관 뚜껑을 열거나 에너지 공급을 중단할 기술과 능력도 없었던 걸까? 별로 그럴듯하지 않다.

 

이렇게 접근하면 논리적인 답은 하나다. 내정관은 ‘아직’ 실험실에 돌아오지 않은 거다. 즉, 수십억 년간 존재해 오면서 박테리아로부터 마크와 마리를 진화시킨 우주,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낳고 리우데자네이로라는 도시가 만들어진 우리 세상의 모든 것이 창조자의 시간 척도에서는 단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인 거다.

 

이 상상은 힌두 신화의 비슈누 이야기와 비슷하다. 종파에 따라 다른 버전들이 있지만, 그 중 하나를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비슈누 신은 브라마가 창조한 세계를 꿈으로 유지시키는 존재다. 소위 현실 세계는 물론 천국이나 지옥조차도 비슈누가 꾸는 꿈 속에 존재하며 그의 아내 락슈미는 비슈누가 계속 꿈을 꾸도록 오른쪽 다리를 주물러 주고 있다.

 

창조주 브라마가 눈을 뜨면 세상은 시작되고 비슈누는 꿈을 꾼다. 브라마가 눈을 감으면 우주는 종말을 맞게 된다. 브라마의 한나절은 43억 2천만 년으로 이 시간 단위를 겁(劫)이라고 한다.

 

신기하게도, 이 시간은 현대 과학이 밝혀낸 태양계의 나이와 거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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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자. 만약 극중에서와 같은 우주창조 행위가 가능한 거라면 마크와 마리의 세상 뿐 아니라 창조자의 세상도 실은 누군가의 꿈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위에 또 꿈이 있을 수 있고, 그 위에도 또 있을 수 있고……. 이것을 가로막는 어떤 논리적인 문제도 없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꿈의 중첩이 가능하다.

 

마크의 경우처럼, 운이 좋은 누군가는 자기가 다른 존재의 꿈 속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윗 단계의 세상, 즉 내가 사는 세상의 꿈을 꾸는 그의 ‘현실’이 또 다른 누군가의 꿈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있을까. 인셉션에서 주인공 코브는 팽이 토템을 돌려 꿈 여부를 알아내지만 팽이가 넘어지는 세상도 궁극적으로는 또 하나의 거대한 꿈일 수 있다. 코브와 그의 친구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과 팽이를 넘어뜨리는 물리 법칙이 속하는 꿈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무한에 가깝게 중첩되는 꿈의 세상을 상정할 수 있으며, 그 모든 꿈이 시작된 단 하나의 실제 세상이 존재하겠지만 그 곳이 어디고 어떤 모습인지는 알 수 없다.

 

이런 논리는 좀 다른 각도로 가지를 칠 수도 있다. 꿈과 컴퓨터 시물레이션은 여러가지 면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영화 <매트릭스> 나 <13층> 처럼 우리가 실은 컴퓨터 시물레이션의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면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함 따져 보자.

 

현재 인류는 A.I 와 가상현실 등 세상을 실제와 비슷하게 시물레이션할 수 있는 많은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다. 아주 넉넉하게 잡아 100년 쯤 후에는 컴퓨터 속의 세계가 오감 전반에 걸쳐 실제와 전혀 구별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자. 그리고 또 그 몇 세기 후에는 초고성능 양자컴퓨터 속의 프로그래밍된 캐릭터들이 각자 자의식을 가질 정도로 A.I 가 발전했다고 가정하자. 실제로 마빈 민스키나 한스 모라벡 등의 인공지능학자들은 이런 일이 늦어도 금세기 내에 일어날 거라고도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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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과 동료는 얼마전 팟캐스트 ‘과학같은 소리하네’ 애청자인 영상 전문가의 초대로 ‘오큘러스 리프트’를 시연할 기회가 있었다. 그 결과 영상 측면에서는 적어도10년 내에 실사 수준의 가상현실 구현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리고 바로 엊그제 페이스북은 오큘러스 VR 사를 2조 2천 6백억 원에 인수했다.

주커버그의 야심이 어디를 향하는지 느껴지는 대목이다.

 

사진은 동료의 실제 시연 장면

 

 

그렇다면, 예컨대 400년 후의 초고속 개인용 컴퓨터 속에서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질적으로 전혀 구별되지 않은 배경 하에 실제 생물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이 마치 ‘심즈’처럼 시물레이션 되고 있을 거다.

 

그때의 지구 인구를 100억이라고 치고, 그들 중 10%만이 이런 컴퓨터를 갖고 있고 그 10%중 단 1%만이 이런 게임을 1년에 한 번만 돌린다고 가정하면 총 천만 개의 25세기판 심즈가 플레이된다. 그것들 중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유사한 형태로 돌아가고 있는 경우를 1%로만 잡아도 10만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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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전혀 구별할 수 없는 배경과 각각 자의식을 가진 심들이 돌아다니는 

우리 비슷한 세상의 시물레이션이 서기 2500년에는 10만개 존재할 수 있단 말씀이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다음 해인 2501년에는 그 해 대로 또 이런 수의 비슷한 시물레이션이 새로 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담 해인 2502년도 상황은 같고, 이런 식으로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과학기술이 계속 유지된다면 3413년, 7882년, 23549년에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꿈 속의 꿈처럼, 이 시물레이션들이 또 시물레이션을 돌릴 수 있고 그 시물레이션의 시물레이션들이 또 시물레이션을 돌릴 수 있고 그 층위는 끝없이 이어진다. 완벽한 현실적 시물레이션이 가능하다는 전제를 두고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아무 논리적 모순도 없다.

 

이렇게 보면 가능한 2014년형 시물레이션의 수는 ‘무한’하다. 그런데, 진짜 2014년의 현실이라는 것은 단 하나 뿐이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지금 사는 이 세상이 바로 그 현실 세계일려면 다음과 같은 확률을 충족시켜야 한다.

 

 

1/무한대

 

 

수학에서 이것은 0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컴퓨터 시물레이션일 확률은 100%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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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후속편에서 네오는 놀랍게도 ‘실제 세상’에서 초능력을 펼쳐 보인다. 이는 그가 기계들과

싸우고 있는 시온과 느부가네살의 세상조차 실은 일종의 시물레이션일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머, 그렇다고 우원과 열분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진짜로 컴퓨터 시물레이션이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건 아니고, 이 문제가 이렇게 간단히 따져 결론낼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다만 그 논리적 가능성 만큼은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가 이걸 배제할 수 있는 어떤 증거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거다.

 

한편으로는, 설사 그런들 뭐가 그리 달라질까? 이 세상의 비밀을 아는 순간 우리가 득도라도 해서 영원한 행복이나 평안, 혹은 엄청난 능력 같은 걸 얻게 된다면 또 모르지만 그게 아니라면 꿈이던 시물레이션이던 때 되면 배고프고 때리면 아프고 밤되면 하고 싶은 건 마찬가지다. 나아가 죽음의 소멸이 두려워지지 않는 것도 아니고, 마리의 종양에서 오는 통증이 갑자기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실은 용어만 다를 뿐 대부분의 종교는 꿈론이나 시물레이션론을 펼쳐 온 거나 다름없다. 앞서 언급한 힌두교나 불교 같은 사상은 말할 것도 없고 유태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소위 아브라함/모세 계통 철학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인 창조주가 무에서 만들어 낸 우주, 원한다면 얼마든지 물리법칙을 무시할 수 있는 신의 무한한 힘, 그 속을 사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주어진 자의식과 선택, 그리고 최후의 심판과 종결로 이어지는 이들 종교의 우주관은 ‘스스로 존재하는 실재로서의 우주’보다는 상위의 존재가 만들어낸 ‘무대’에 가까운 개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주의 본질이 무엇이던 간에 우리는 하루하루의 현실에 그것대로 충실해야 하는 거고, 그 하루하루와 관련된 원칙들은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는 거다. 마크가 모든 것을 안 후에도 리우데자네이로에 가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 머, 그래도 궁금하긴 하다. 우리는 어디까지 알 수 있으며 그 알아낸 것이 진실인지는 어디까지 확인할 수 있을까. 그 궁금증을 채워 나가고 우주의 신기한 모습들을 알아내는 것은 그 자체로 열라 흥미있는 일이다. 예컨대 바로 얼마 전에 우주배경복사에서 빅뱅 직후에 발생한 중력파의 자취가 확인되면서 인플레이션 이론이 검증됐고, 그 결과 불과 며칠 전까지도 가설에 가까웠던 ‘멀티버스’의 개념이 과학적 사실로 굳어지고 있다. 천억 개의 은하계와 그보다 훨씬 넓은 빈 공간을 거느린 광대한 우리 우주같은 다른 우주들이 거의 무한대로 존재한다는 게 멀티버스의 요지다.


이게 또 꿈이나 시물레이션 우주보다 덜 신기할 게 뭐냐.








파토

트위터 : @patoworld


편집 :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