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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4. 11. 금요일

Anonym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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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의 기억]


 






Pr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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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의 기억을 써 내고 마음이 시원했다. 한 때 정말 내 인생 단 하나의 사랑이라 믿었던 사람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내어 주고도 철저히 외면당한 과정을 일부나마 토해 내고 나니 오히려 치유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과조차 받지 못한 경험을 통해 이제는 사랑을 믿지 않겠노라 다짐했지만 사람의 본성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인 듯하다. 부잣집 외동아들의 프로포즈를 거절했고, 지금은 가진 거 하나 없이 얼굴만 잘생긴 8살 연하에게 빠져 또 정신 못 차리고 허둥대는 중이다.

 

이런 저런 과정을 통해 친구를 먹은 김창규에게 연애상담(!)을 하다가 그냥 차라리 내 경험을 글로 써 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이 나이 먹고도 감정이 불같기만 하고 누구를 좋아하기만 하면 어딘가 백치가 되어 버리는 내게도 이 시도가 나쁠 것 같지 않아 한번 토해보려고 한다.


내 마음 어딘가에 자리한 남자들을 하나씩 적어 본다.


밝히지만, 이 이야기는 연애 이야기만은 아니다.


또한 물론 당신은 나를 비판해도 좋다. 어차피 이 글은 나와 함께 했던 그들의 입을 빌어 나오는 것이 아니기에 일방적으로 나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철저히 자기중심적일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내게 조언을 해 주어도 좋다. 당신의 이야기는 당신의 것이니까.



0. 로리타 콤플렉스

1. 안전지대와 멜빵

2. 오봉 배달부

3. 음성사서함과 러브레터, 그리고 스토커

4. 첫눈에 반한다는 것

5. 김짱과 노짱

6. 그에게 가는 막차

7. 첫 담배

8. 애기야

9. 감기

10. 벽

11. 수컷들

12.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13. 쓰리썸과 그리스

14. 고목나무의 다람쥐

15. 일본남자는 별로

16. 첫사랑이 돌아오다

17. 이탈리아 남자란

18. 영혼이 닮았다

19. 11살

20. 놓치고 보니 아까운 남자

21. 여행지의 불길

22. 와우폐인

23. 하늘에 별이 보여?

24. 손호영 닮은꼴

25. 청산리 벽계수

26. 자살금지

27. 그의 친구

28. 첫 프로포즈

29. 12년의 우정

30. 꽃돌이

31. 섹스도 사랑이라면

32. 에이즈의 기억

33. 상상인연

34. 부잣집 외동아들

35. 줘도 못 먹는 남자

36. 애 딸린 남자

37. 친구라며?

38. 진심이 항상 통하는 것은 아닌가 봐

39. 현재진행형

 

 


0. 로리타 콤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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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영화 <연인> 中


 

외국인 친구들이 많다. 그것도 남자들로만. 여기서 친구라 함은 진짜 그냥 친구다. 그쪽에서는 내게 어떠한 감정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사실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그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생각보다 강간 경험을 지닌 한국 여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바로 그 흔한 경험이 나의 남자에 대한 첫경험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된다. 나는 막 생리를 시작했고 걸스카우트 수련회 프로그램에 수영이 끼어 있어 엄마가 챙겨준 탐폰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질 안에 내 손가락이 아닌 이물질이 들어간 것이 그 때가 완전 처음이었구나.

 

이런 식의 여행을 가면 빈번히 발생하는 것이 도난사건. 수련회는 찬란한 역사를 지닌 어느 지방소도시에서 진행되었고, 우리는 유스호스텔 비스무리한 곳에 묵었다. 내가 장(長)으로 책임지고 있던 방에서도 어김 없이 지갑이 분실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 시간이 지나도 범인도 지갑도 찾을 수가 없기에 결국 선생님들을 찾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선생님들 방이 우리보다 한 층 아래에 있다는 것밖에 알지 못했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계단을 내려가 아래 층 로비에 도착했다. 선생님이 없다. 아래 층은 조용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들도 사람인지라 술을 마시러 혹은 밤마실을 가셨던 것은 아닌가 싶긴 하다.

 

로비에서 계속 기다린다. 죽치고 기다린다.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러다 로비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보통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 동그랗고 까만 눈에 둥근 얼굴의 20대 초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다. 벌써 한참 전에 잠시 본 사람이지만 아직까지도 가끔씩 꿈에 나타나는 탓에 어느 정도의 실루엣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더 이상 선생님들을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던 나는 그 남자에게 다가간다.

 

 

“저… 혹시 우리 선생님 방 알아요?”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질문이다. 우리 선생님이 누군지 이 남자가 알 게 뭐람. 하지만 만 10세의 어린 소녀였던 내게는 당연한 질문이기도 했으리라. 남자는 안다 모른다 정확한 대답이 없이 계속 내게 말을 시켰다. 이름이 뭐냐, 어느 학교에서 왔냐, 몇 학년이냐 등등 흔히 호기심 많은 어른들이 아이에게 건넬 수 있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이 오갔다.

 

초등학교 5학년 여자 아이에게도 남성에 대한 호불호는 있다. 꽤 건장하고 귀엽게 생겼던 남자와 이야기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야기는 꽃을 피우고 남자는 복도 끝에 있는 작은 발코니에 가서 이야기를 계속하자고 했다. 그러자고 했다. 땅거미가 지고 밤이 찾아 온 소도시의 야경은 언제나 그렇듯 황량해서 슬프고, 그래서 운치 있었다.

 

남자는 내게 언제까지 그곳에 머무느냐 물었다. 2박3일 일정 중 첫 날이었으므로 모레 집으로 간다고 대답했다. 남자는 갑자기 슬픈 눈을 하며 자기는 내일 아침이면 이 곳을 떠난다고 했다. 남자의 슬픈 눈을 처음 보는 나는 당황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주변엔 초등학생 남자아이 혹은 사촌오빠나 삼촌, 아빠, 할아버지뿐이었으니까. 그들이 내게 그런 감성적인 슬픈 눈을 보여줄 이유가 없었으니까.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남자는 내일이면 이 곳에 없을 것을 생각하니 슬프다는 이야기를 계속 했다. 그리고는 내게 부탁을 들어달라고 했다.

 

 

“나 사실 너한테 부탁이 하나 있어.”

 

“뭔데요?”

 

“꼭 들어준다고 약속하면 이야기해 줄게.”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뭔지 알아야 들어줄 수 있는지 아닌지 대답을 하죠. 뭔데요?”

 

“네가 들어줄 수 있는 거야. 걱정 말고 들어준다고 약속부터 해.”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건지 어떻게 알아요?”

 

“내가 내일 여기를 떠난다는데 내 부탁 하나도 못 들어 줘?”

 

“그러니까 부탁이 뭔지 이야기를 해 보라니까요?”

 

 

남자는 내게 무슨 부탁인지 알려주기를 거부한 채, 꼭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할 것을 강요했다. 전혀 강압적이지는 않았으나 그는 슬픈 눈으로 내일이면 떠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나를 감정적으로 압박해 왔다. 30줄이 넘어선 지금은 이뭐병하며 뺨이라도 한 대 후려치겠지만 그 때의 나는 만 10세에 불과했다.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그가 말한다.

 

 

“그럼 내 방으로 가자. 그럼 부탁이 뭔지 이야기해 줄게. 가서 듣고 들어줄 수 있는지 대답해 봐. 근데 정말로 네가 들어줄 수 있는 거야.”

 

 

갑자기 무서워졌다. 절대로 따라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육식동물을 본능으로 알아보는 초식동물처럼.

 

 

“싫어요. 여기서 말씀하세요. 아니면 저 그냥 제 방에 갈래요.”

 

 

남자는 계속 나를 설득하고자 시도했다. 그런 남자를 그냥 버려두고 내 방으로 올라가면 됐었을 것을 나는 “안녕히 계세요” 한 마디 인사를 제대로 하려고 끝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이래서 조기교육과 인성교육, 그리고 가정교육은 참 중요하다. 남자의 설득과 주절거림은 계속된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진다.

 

 

“그럼 저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그 때였다. 남자는 나를 끌어 안고 내 입에 혀를 밀어 넣으려 했다. 입술을 앙 다물어 보았지만 그의 축축한 혀는 내 입술을 미끄러져 입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 혀를 깨물어 버렸어야 했는데 나는 하지 못했다. 발버둥쳐 보았지만 10살짜리 어린 여자애의 힘으로는 그의 완력을 버틸 수 없었다. 그의 손이 내 팬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잠시 그의 혀가 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던 것도 같다. 사실 어떻게 도망쳤는지 자세히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잠시 그가 느슨해진 순간 나는 정신 없이 발코니 문을 열고 로비를 거쳐 계단을 올라 내 방으로 들어갔다. 떨리는 가슴이 진정될 줄을 몰랐다. 방에 돌아오자 도난 사건은 마무리가 되어 있었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친구들과 수련회의 첫날 밤을 보냈던 것 같다.

 

다만 그 이후에 혹시 임신이 되었으면 어쩌지 하는 마음으로 몇 번씩이나 탐폰을 확인해 보았던 기억은 난다. (한국 성교육의 한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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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키스는 이래서 공식적으로는 훨씬 후이지만, 혀의 오고 감을 키스라 정의한다면 내 첫 키스 경험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나의 처음을 이런 식으로 경험하게 되다니 참 안타깝지만 어차피 시간을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적어도 남자를 따라 갔다거나 남자가 나를 끝까지 밀어붙여 강간을 한 것은 아니니까. 더 심각한 상황을 겪었다면 어쩌면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 이 경험은 내게 어떠한 식으로든 트라우마로 다가왔다. 이것이 어떤 식으로 작용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전체적으로 무던하게 잘 극복한 것이라 생각하고는 있다. 꿈을 꾸다 울며 잠에서 깨고, 남자가 미웠고, 그래서 다른 남자들에게 함부로 대했다. 하지만 실은 단 한 번도 내 삶에 이 경험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그 이후에도 잘 먹고 잘 놀고 중학교에 가서는 남자친구도 사귀고, 공부도 꽤 잘 했다. 망각의 방어기제가 작용했는지는 몰라도 내 머리 속에는 내가 이 일로 인하여 고통 받은 기억이 그리 많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이 에피소드는 그로부터 10년 동안이나 내 비밀의 정원에 갇혀 있었다.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은 사람은 내게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내 첫사랑. 그는 나를 안아주고선 내 잘못이 아니라 했다. 남자가 나쁜 놈이라 했다. 그제서야 무언가 풀려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술을 마셨던 것 같다. 그 앞에서 펑펑 아이처럼 울었던 것도 같다.

 

그 이후로 이 이야기를 일부러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굳이 꽁꽁 숨겨 두려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내어 보여줄수록 10살의 내가 겪은 ‘이상한’ 일은 ‘그저 그런’ 에피소드처럼 내게 다가왔다. 그렇게 조금씩 나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대학 시절, 우연히 들어간 철학 교양 수업은 범상치 않았다. 교수님은 헤어진 사람을 보다 빨리 잊으려거든 매일 그 사람의 사진을 꺼내 보라 했다. 무언가를 피한다는 것 자체가 그 대상을 보다 특별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 어떤 경험이든 스스로에게 충격을 가져다 준 것이라면 이를 일상화시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내게는 1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분명 나는 적어도 이제 더 이상 뭔가 모를 두려움에 떨지는 않는다.

 

말을 한다는 것, 글을 적는다는 것, 나를 보여준다는 것. 이것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아마 지금도 나는 치유 중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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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시리즈의 첫 편으로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에피소드를 적은 것은 성적으로 덜 성숙한 일부 한국 남자들의 변태성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어릴 적에 나 이런 일 겪고 이런 트라우마가 있어요하며 동정을 이끌어 내고자 함도 아님을 밝힌다.

 

그저 나는 김창규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의 이야기를 익명이라는 필명을 방어벽 삼아 당신들과 공유하며 나를 조금 더 잘 이해해 보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는 아마도 남자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지금의 나를 만든 가장 중요한 경험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 김창규가 내가 만난 남자들에 대한 총평 혹은 점수를 매기라 했다. 하지만 이 남자에 대해서는 그다지 할 말이 없다. 다만 아주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체크리스트를 한 번 만들어 보았다. 당신은 당연히 이 리스트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나를 속물이라 욕해도 좋고, 너무 이상적이라며 평생 독신으로 살라며 저주해도 좋다. 가장 좋은 것은 수정 및 보완할 점을 지적해 주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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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 체크리스트를 활용하는 것은 다음 번으로 미루도록 하겠다. 다만 마지막으로 그냥 이 한마디는 하고 싶다. 


네놈 얼굴 기억하고 있으니 이제 다 늙어서 어떤 상판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혹시라도 마주친다면 그 때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다.

 

이 시리즈가 살아남는다면 본격적인 연애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해 보자.








anonymous


편집 : 보리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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