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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4. 11. 금요일

정우성











[53] 나는 아빠다 : 나는 2012년에 딴지에 <나는 아빠다>를 23회에 걸쳐 연재했다. "나는 아빠다. 어린 딸의 아빠이고, 어린 아들의 아빠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했다. 육아와 자녀교육 이야기였다. 사회구조에 대한 비평은 아니었다. 카메라 앵글은 가족이라는 공간과 그 공간에서 펼쳐지는 관계에 맞춰졌다. 어린 아이들은 우선 부모가 만든 우주 안에서 자란다. 힘들어도 비정한 사회를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회 구조가 아무리 악하고 비참하다 해도, 아이의 하루는 어김 없이 시작된다.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을 때 만큼은 세상을 탓하지 말자, 세상이 나쁘게 변했다 해서 아이를 그 나쁨에 맞출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굳이 사회 시스템을 논하지 않더라도 부모의 결단만으로도 아이의 아침이 달라질 수 있다. 아침은 힘을 잃고 밤이 또 찾아온다. 아이는 전속력으로 자란다. 사회의 구조적 개혁 없이 어떻게 제대로 자녀교육을 하겠느냐는 반론도 있었다. 반론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빠다>는 육아를 구조적 문제로 보지 않고, 내재적 문제로 이야기했다. 아빠로서 아이에 대한 책임을 함부로 덜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연재의 마지막 문장은 "우리는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해서 좀더 인간적인 모습을 한 사회를 물려줄 의무가 있다"였다. 아이에게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선물이 아니다. 그건 인류를 지탱해주는 빛나는 당위다. 부모의 최고 선물은 아이들에게 좋은 사회를 물려주는 것. 때때로 육아는 정치인 셈이다. 그 아이들이 '자립'할 때 어떤 사회가 좋겠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려면 대체 현재의 우리 사회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따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컨대 지금 연재하는 <목돈사회>는 2012년 <나는 아빠다>의 후속편의 의미를 지닌다. 이 연재는 <나는 아빠다>의 마지막 문장에서 언급된 부모의 의무에 관한 글이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가 아이들이 커서 살기 마땅하지 않은 사회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자립하기 몹시 힘든 사회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개인에게 노력과 의지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존재에 대한 대가를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크기의 돈으로 요구한다. 사회가 개인의 자립을 방해한다. 


목돈사회의 문제점을 막연하게나마 다들 느낀다. 하지만 느끼고 있는 것과 인식하는 것은 전혀 다른 국면이다. 느낌이 인식으로 전이하기 위해서는 언어화돼야만 한다. 그래야만 공론이 생긴다. <목돈사회>의 연재 목적은 언어전략에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립이 가능한 사회를 아이들한테 물려주고 싶은 것이다. 나는, 그리고 우리들은 아빠다. 엄마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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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inri Matisse(1869~1954), "Music"


[54] 활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 활력은 "개인의 자립"에서 나온다. 공동체의 자립은 사건이지 활력을 몰고 오지는 못한다. 예컨대 식민지 독립은 감격적인 사건이지만 그것만으로 우리 사회에 활력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이 저마다 자립할 때 활력이 생긴다. 인간은 자립함으로써 인간이 된다. 자립은 정신적인 자유의지에서 비롯된다. 자유는 존재의 근본이다. 자립한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 자기한테 어울리는 일을 선택할 수 있다. 자립한 사람은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말할 수 있다. 목표를 결정하고 그곳을 향해 좌고우면하지 않고 나아간다. 도전을 하며 용기를 낸다. 이것이 활력이다. 자립한 개인이 모여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 개인의 자립이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만들며 경제적으로는 부흥을 부른다. 


[55] 여느 정상적인 나라처럼 : 우리 사회가 여느 정상적인 나라처럼, 개인에게 목돈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포복하는 출산율이 개선될 수 있다. 초혼 연령은 출산율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동인이 된다. 출산율을 높이려면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 하고, 아이를 낳으려면 결혼을 해야 한다(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를 많이 나으려면 가임기간이 길어야 하고, 그러려면 일찍 결혼하는 게 좋다. 결혼을 하려면 둥지가 필요하다. 주거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쨌거나 목돈이 필요하다. 


십중팔구 부모의 도움을 구한다. 아니면 은행을 찾는다. 모든 부모가 여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은행 대출이 쉽지도 않다. 결혼시기는 자꾸 늦어지며 그러다가 열정은 식고 변심을 경험한다. 출산율 저하는 당연한 귀결이다. 여느 정상적인 나라처럼 목돈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환경이 완전히 달라진다. 남자와 여자 모두 직장이 있고 수입이 있다면 그 수입에 맞게 주거지를 정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의 간섭(도움) 없이 청혼하고 승낙하는 것이 가능하다. 결혼 시기는 앞당겨지게 마련이다. 가장 뜨거울 때 결혼할 수 있다. 이것이 자유의지, 곧 자립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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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inri Matisse(1869~1954), "Dance"


여느 정상적인 나라처럼, 사회가 개인에게 목돈을 요구하지 않으면 노인복지를 개선할 수 있다. 자립한 자식에게 목돈을 공급하지 않아도 된다. 전성기 때 벌어들이는 대부분의 수입은 자기 노년을 위해 대비할 수 있다. 자녀의 결혼자금이니 전세자금이니 하는 부담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여느 정상적인 나라처럼, 사회가 개인에게 목돈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증가하는 이혼율도 꺾일 것이다. 이혼 사유의 상당수는 복잡한 가족관계로부터 비롯된다. 자립한 남자와 자립한 여자의 결혼이라면 부모의 간섭은 현격히 적다. 쌍방 간의 금전이 오고가지 않으므로 채권/채무 의식이 생기지 않는다. 쿨하게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가 목돈게임을 그만 둔다면 금전을 둘러싼 갈등이나 투자를 배경으로 한 간섭은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오히려 그로 말미암아 더 건강한 대가족 관계가 만들어지리라 생각한다.


여느 정상적인 나라처럼, 사회가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돈을 존재의 대가로 요구하기를 멈춘다면, 기록적인 자살률도 상당히 내려갈 것이다. 절망을 경험하고 어떠한 빛도 기대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불현듯 자기 생을 끊는다. 인생에 대한 여하한의 환상이 사라지면 죽음은 미련 없이 찾아온다. 인간의 행복은 꼭 돈의 힘에 의해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적은 수입이 인간의 불행을 결정짓지 못한다. 불충분하고 가난한 자립이어도, 자립은 자살의 반대 쪽에 있다. 그러나 돈의 크기를 무시하면 안 된다. 내가 받을 돈의 크기가 아니라 내가 지불해야 할 돈의 크기 말이다. 개인이 어찌 해 볼 도리 없는 목돈의 요구 앞에서 도저히 자립할 수 없다면 희망은 추방되고 절망이 찾아온다. 


[56] 자기 결정을 못 내리는 스티브 잡스 : 지난 번 연재는 청년창업의 현실을 이야기했다. 목돈사회가 핍박하는 현실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창업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창업의 활력이 우리 산업을 전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중소기업이 명실공히 산업의 주력이 돼야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 주체들이 "자립한 개인"일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번뜩이는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라고 왜 없겠는가. 그러나 천재도 자립할 수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생계형 스티브 잡스, 목돈에 닦달 받으면서 자기 결정을 못 내리는 스티브 잡스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작은 기업들은 모든 면에서 대기업에 뒤진다. 자본, 자원, 네트워크, 신용, 권력, 어느 모로 보나 대기업보다 나을 수 없다. 후발주자는 선행기업보다 못하다. 그런데도 작은 기업이 경쟁을 촉발하고 성장해야 하는 까닭은 단순히 통계지표에서 밑줄 긋고 나올 법한 고용기여율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의 활력이 혁신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좋은 일자리가 늘고 산업이 견실해질 거라는 희망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은 기업에 다녀도 개인의 자립이 가능해야 한다. 창업에 실패하더라도 다시 노력하여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임금의 크기와 근로조건만 부각한다. 그렇지 않다. 정확하게는 적은 임금으로도 자립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혹자는 수입이 적으니까 자립할 수 없노라고 함부로 단정한다. 인간을 우습게 보지 말자. 정신적 자유의지를 회복하면 행복은 비교열우위가 아니라 자기 결정에 의해 정해질 수 있다. 그사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복지가 확장되고 강화됐다. 육체적 생존문제는 눈부시게 개선됐다. 


사회가 개인에게 보편적으로 목돈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즉 목돈게임이 중단되면, 개인의 자유의지가 회복될 것이다. 그리고 자립 가능한 사회가 될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대기업에 취직이 안 돼서 중소기업에 가는 것과 자립한 개인의 자유의지에 의해 중소기업에 취직하는 것과는 활력의 크기가 다르다. 더이상 목돈에 몰입하지 않아도 되므로 모든 혁신가들은 도전에 몰입할 수 있다. 물론 낙오자가 있게 마련이다. 개인은 자기 활력을 내는 데 힘쓰고, 사회는 복지 제도를 개선하여 음지가 퍼지지 않도록 하는 데 힘쓰는, 그런 사회를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다.


여느 다른 정상적인 나라처럼, 목돈게임을 이제 그만 멈추자. 수입의 크기를 초월하는 목돈의 위협이 사라지면, 매월 수입으로 생계를 투명하게 설계할 수 있다. 투기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심은 노동생산성을 올릴 것이다. 실패하더라도 다시 재기하여 자립할 수 있다. 자립한 인간은 스스로의 판단으로 자기 결정을 한다.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이 도전하고 용기를 낼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활력이다. 


사람들은 반문한다. 과연 해결책이 있겠는가라고. 첫째 목돈사회의 비정함을 우리가 알고, 둘째 국가의 마중물이 필요하고, 셋째 서두르지 않으면 된다. 해결은 쉽지 않겠으나 불가능하지도 않다. 오히려 목돈사회 자체가 다른 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구나무 서기를 해냈다면 다시 똑바로 서는 것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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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inri Matisse(1869~1954), "Le chambre rouge(Harmonie rouge)"







요약하자면 이렇다 :



1. 인간은 자립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생각해. 어른이 되는 거지.


2. 개인이 저마다 자립할 수 있을 때 사회의 활력이 생긴다고 생각해. 목돈사회가 참 나쁜 것은 개인의 자유를 막고 자립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거야. 사회가 개인의 자립을 방해하는 거지. 자유는 존재의 근본이라고. 가족과 공동체의 자유가 아니라, 먼저 개인의 자유.


3. 우리 사회가 목돈게임을 드디어 멈췄다고 상상하는 거야. 활력을 말할 것도 없이, 출산율, 이혼율, 자살률, 노인복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상당한 효과를 볼 거야. 개인의 욕망에 의한 지출도 줄이는 게 좋겠지만, 내 이야기는 사회가 반강제로 모든 개인에게 보편적으로 요구하는 지출을 없애자는 이야기야. 좀 짐 좀 내려 놓고 살자.


4.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구나무 서기를 해냈다면 다시 똑바로 서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해. 물론 좀 어지럽겠지.










편집부 주


본지에 육아칼럼과 특허에 관한 통찰력있는 기사를 꾸준히 써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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