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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4. 11. 금요일

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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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다니다보면 가끔 이런 질문하고 맞딱드린다.



그래도 과학이 전부는 아니에요.

세상엔 과학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게 있어요.

 

 

머 당연한 소리다. 과학 뿐 아니라 뭔들 ‘전부’겠냐.


하지만 이런 원론적인 점을 제하고 본다면 이 질문에는 대개 일종의 감정적인 선입견이 깔려 있다. 결국 이 우주에는 ‘무미건조’한 인간의 과학으로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있다는 건데, 그 대표적인 예들은 늘 사람들이 신성하거나 숭고하다고 여기는 종교나 신, 혹은 사랑이나 미움 같은 감정으로 귀결된다.


우원이 지적할 수 밖에 없는 건 이런 이야기를 자신있게 하는 사람들이 과학에 대한 기초상식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는 거다. 아는 게 전혀 없는 상태로 뭔가에 대해 신념을 갖는 건 그저 자기가 바라는 바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긍정하든 부정하든 일단 정보가 있어야 합리적인 논의가 가능하다.

 

일단 그런 점을 전제해 두고 함 생각해 보자. 과연 종교는 과학과 분리된 세계고 과학의 영역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걸까. 이 두 세계관을 아예 분리하는 게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대가 있었는데, 서구적 다원주의 혹은 개인관점 존중의 시각으로 받아들여졌고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허나 우원은 그런 속편한 관점에 좀 동의하기 어렵다. 만약 종교에서 말하는 개념들, 간단한 예로 천국이나 지옥 혹은 어떤 형태의 내세든지 존재한다면, 그게 ‘존재’하는 한 과학적 관찰과 검증의 대상이 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단지 그걸 위한 과학적 방법론의 구체적인 부분이 지금의 과학과는 달라질 뿐이다.

 

우원 생각에 이런 과/교분리적 관점은 서양의 오랜 기독교 전통이 가진 관성으로 생겨나고 유지되는 것 같다. 이 주제를 다룬 책이나 다큐멘터리 등을 보면 지적인 학자들이 과학의 합리성과 기독교적 믿음 사이에서 개인적인 고민에 빠진 모습들이 보이는데, 그 고민은 실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영향받고 자란 전통에의 ‘미련’ 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서양 기독교 문화를 바탕에 공유하지 않는 우원으로서는 그런 모습이 때로 과장되고 낯설게 보인다.

 

내세는 주관적이고도 모호하면서도 비물질적 세계라 과학이 접근하지 못할 거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런 말과 함께 묘사되는 내세는 되려 열라 물질적인 것처럼 보인다. 전통적인 천국이나 극락, 지옥의 모습은 비물질적인 면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다. 그 곳의 주민들이 누린다는 지복이나 영원한 불행은 결국 맛있는 음식과 건강한 육체와 아름다운 자연, 혹은 불구덩이 속에서 몸이 절단되고 썩는 고통에서 오는 등 하나같이 물질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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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요즘은 천국이 이렇게 묘사되기도 한다. 밑에 구름이 깔려 있고

건물 외벽에 금딱지가 붙어있을 뿐, 이런 두바이스런 곳의 어디가

비물질적이고 영적이라는 건지 우원은 심히 혼란스럽다.

 


그리고 주관적이고 모호하기로는 내세 아니라 여기 이승도 못지 않다. 현대물리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20세기 들어 등장한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 우리가 사는 우주를 얼마나 바꿔 놨는지 알 거다. 이 이론들을 들여다 보면 볼수록 이 어이없는 곳이 우리의 현실 세상이란 말인가, 혀를 차게 된다.


비록 이론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이것들은 100년이 넘도록 검증에 검증을 반복하면서 물리학의 흔들림없는 원리로 이미 굳어져 있다. 다시 말해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단지 숫자놀음이 아닌 ‘사실’이고, 그것들이 규정하는 이 괴상망측한 우주도 상상이 아닌 ‘진실’이다.

 

이렇듯 아무리 괴이한 세계관과 연결된다 한들, 그렇기에 과학으로는 접근할 수 없다는 건 착각일 뿐이다. 단지 그걸 위한 접근법이나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할 뿐이다. 아인슈타인이 한 일이 바로 그렇게 발상을 바꿔 접근해서 패러다임을 변화시킨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무한하고 완벽한 존재인 신만은 예외로 삼고 싶어한다. 사실 우리가 뭉뚱그려 쓰는 신이라는 단어에는 다양한 성격을 가진 많은 존재들이 포함된다. 예컨대 오랜 기간 진화한 지적 생명체는 신적 특성과 능력을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지난 시간의 시물레이션 우주가 존재한다면 그걸 돌리는 프로그래머는 그 우주에서는 절대자나 다름 없다. 그런 관점에서 우원은 ‘일종의’ 신이 존재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그는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과학적 탐구의 대상에서 예외인 걸까?

 

글쎄다. 사실을 말하자면 오히려 종교 내부에서 신은 늘상 논리적인 탐구의 대상이었다. 교과서에 이름도 등장하고 카톨릭에서 성인으로 추종된 토마스 아퀴나스를 예로 들면, 그의 작업 중 제일 유명한 게 바로 <신학대전>에 등장하는 다섯가지의 신 존재 증명이다. 이 지면에서 이걸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원인의 원인으로 소급해 들어가면 제 1원인은 신이라는 식의 논증은 한번씩 들어보셨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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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논리적 접근은 비록 과학 자체는 아니더라도, 합리적으로 신의 존재를 논증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무조건적 믿음보다는 과학에 훨씬 더 가깝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신의 유무를 판별하거나 그 성질을 탐구해 나갈 과학적 도구를 갖고 있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또, 사람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도 사랑 같은 감정이야말로 순수한 것으로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랑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에 혐오감과 적대감을 드러낸 경우도 있다. 일례로 미국 위스콘신 주 상원의원이었던 윌리엄 프록스마이어는 미국 국립과학재단에서 사랑에 대한 심리학 연구 지원을 결정했을 때 반대하면서 “나는 그 해답을 알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여기에 대한 찬반은 미국 내에서 큰 논란이 됐었다. 1975년의 일이니 그리 옛날도 아니다.

 

하지만 이후에 사랑 관련된 많은 과학적 접근이 있었고, 다른 모든 감정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뇌의 전기화학적 작용과 진화 과정에서의 유전자의 활동에 깊이 영향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 노레피네프린, 페닐에틸아민, 세로토닌, 엔돌핀, 옥시토신, 바소프레신 같은 어려운 이름의 다양한 호르몬들이 우리가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리는 이 복잡미묘한 감정의 여러 영역들을 나눠 관장한다는 점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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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이 주제와 관련해서 우원이 과천과학관에서국내 최초의 사이언스 버라이어티 <당신이 사랑할 때>를 만들었다. 담주말인 4월 18일 금, 19일 토 저녁이다. 사회는 손미나 아나운서, 해설은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그리고 음악은 <궁>, <아일랜드> 등 드라마로 유명한 ‘두번째 달’이 맡는 고퀄 음악/강의/버라이어티쇼다. 안내와 예매는 여기로 가서, 문화/행사 안에 있다.



이런 점들을 보면, 적어도 일부 사람들은 과학을 통해 인간과 생명, 사물의 원리가 밝혀지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우주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별 그려진 장막이 아니라던가, 달에 토끼가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고 세상이 그만큼 삭막해 졌을까?

 

아주 최근에 우주 극초기의 급팽창과 관련된 인플레이션 이론이 검증돼서, 그 주창자인 앨런 구스와 안드레이 린데의 노벨 물리학상이 확실시되고 있다. 근데 이 검증의 결과 중 하나가 바로 가설로만 존재했던 ‘멀티버스’의 현실화다. 다시 말해 빅뱅 직후 우리 우주만 만들어진 게 아니라 우리와는 물리법칙이 전혀 다를 수도 있는, 아마도 10의 500승 개 이상의 우주가 한꺼번에 만들어졌을 거라는 말이다.

 

과학의 발전을 통해 알게 된 이런 우주의 놀랍고 신비한 모습들이 과연 세상을 삭막하고도 기계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나? 앞에서도 말했듯 과학이 ‘무미건조’하다고 여기는 분들이 많은데 그건 정말 과학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진화의 법칙에 대한 이해는 생명을 덜 신비하게 하기는커녕 우리가 대충 느끼는 것보다 훨씬 놀라운 존재로 격상시킨다. 100여년 전에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원자와 그 내부의 미시 세계로 들어가면 우리 몸은 물론,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의 대부분이 실은 허공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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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원자의 구조와 태양계의 비교.

금의 원자핵을 태양만한 크기로 키우면 가장 멀리 있는 전자는 명왕성의 두배 거리에 있게 된다.

그 사이는 78개의 나머지 전자가 띄엄띄엄 널려 있는 빈 허공이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이 헛소리가 아니다.

 

 

이렇듯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성역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과학의 발달과 그 이해는 우리의 상상력과 통찰을 이전보다 더 고급스럽고도 우아하게 키워주고 있다.

 

 

 

하지만 대상의 한계와 관련된 문제 말고, 과학이 모든 구체적인 질문들의 답을 모조리 낼 수 있느냐는 건 또 좀 다른 문제다. 과학이 확실한 결론을 내기가 현실적으로 곤란한 영역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질문의 특성상 과학적 수단으로 접근은 가능하지만 검증은 곤란해 보이는 분야다.

 

그 대표적인 게 초끈 이론이다. 이넘은 상상을 초월하는 극미의 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이론 자체에 상당 부분 검증 불가능성을 떠안고 있다. 우주 만물과 에너지의 근원이라는 11차원의 초끈이 실존한다 한들 쿼크보다도 1억배나 작은 10-35승 m 의 플랑크 길이 - 공간이 의미를 상실하는 길이 - 이기 때문에 어떤 현미경으로도 관찰할 수 없다. 만약 입자가속기를 동원해 찾아내려 한다면 태양계 크기만한 걸 만들어야 된다. 

 

초끈 이론은 수학적으로 무척 아름답고 완벽하기 때문에 “틀릴 수가 없다”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운 이론이라도 이렇게 관찰로 검증할 수 없다면 과학이라기보다는 예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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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초끈에서부터 우주 전체의 크기까지를 실감나게 느끼고 싶으면 이 링크로 가라. 

아래 바를 마우스나 화살표키로 움직이면 된다. 

 

 

또 우주의 시작, 생명의 탄생 같은 사건들이 있다. 세밀한 이론을 세울 수 있고 빅뱅 후 10의 37승분의 1초 같은 극초기까지도 확인해 볼 수 있지만 그야말로 시작의 순간, 혹은 ‘왜’ 우주가 시작이 되었는지를 물리적 증거와 함께 검증하기는 열라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구상에서 생명의 탄생 같은 것도 신빙성이 높은 이론을 세울 수는 있지만, 설사 타임머신을 타고 수십억 년 전 과거로 돌아간다 한들 생명이 처음 탄생하는 지점을 포착하지 못하는 한 이론으로 끝나야 할 가능성이 높다.

 

미래 예측의 한계도 있다. 양자역학과 복잡계 이론 등이 미래 예측의 가능성에 대해 확실한 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물론 미래에 대해서도 과학적인 접근은 가능하고 상당히 의미있는 확률을 계산해 낼 수 있지만, 아시모프의 소설 <파운데이션>에 등장하는 정도의 구체적인 사건들까지 예견해 내는 것은, 우리 우주가 그렇게 생겨먹지 않은 관계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들은 앞서 이야기한 종교나 사랑 등과 달리,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새로 등장한 문제들이다. 원자라는 개념을 처음 내놓은 고대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따위는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진리의 대양 앞에서 조개껍질을 갖고 논다던 뉴튼도 어이없도록 작고도 큰 우주의 성질 자체가 이해를 막는 장벽이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과학의 미래에 대해선 두 가지 시각이 있다. 하나는 이렇게 여러 한계와 장벽이 있는 것 같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모든 문제를 어떻게든 극복해 낼 거라는 경험적 낙관주의다. 그 대표적인 예로 당대의 유명 과학자들이 자신있게 내세웠던, 멀리 떨어진 항성의 구성 성분은 결코 알 수 없을 거라는 주장 - 스펙트럼 분석으로 해결 - 과 공기보다 무거운 것은 오래 날 수 없다는 주장 - 비행기로 해결 - 등이 자주 회자된다. 이렇게 간다면 신에서 초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답을 결국은 찾아내고 말 거다.

 

하지만 과학기술이 무한히 발달해 무엇이든 가능케 할 거라는 주장은 너무 경험적인 관점이라는 비판도 있다. 이런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지난 2백여 년간의 과학기술 폭발기는 인류 역사에서 극히 예외적인 상황이고, 앞으로 긴 정체기가 올 거라고도 한다. 이들은 그 근거로 티비, 컴퓨터, 스마트폰 등 다양한 기술이 개발되고 인간이 달에 가기도 했지만, 순수 과학에서 인간의 인식을 뒤집어 놓을 정도의 큰 발견들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왓슨과 크릭의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 이후로는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어느 쪽이 옳을까? 심정적으로는 전자를 옹호하지만 실제로는 언젠가 벽에 부딪힐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거다. 혹은 우리 인간 자신이 뇌용량이나 수명 등 분명한 한계를 가진 만큼 그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는 지식이나 통찰은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만약 충분히 긴 시간이 주어진다면 거기에 맞춰 진화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어리석음과 이기심으로 금세기 내에 허망하게 멸종할 수도 있다.

 

그래도, 결국 희망은 과학에 있다. 인류가 무지몽매함과 편견, 집착에서 해방되고 이 허접한 상태를 벗어나 현명하고 성숙한 존재가 될 희망 말이다. 그 날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먼 후손에게 전해 줄 수 있는 유산이란 게 지금의 우리보다 나은 존재가 되는 희망 말고 뭐 그리 있겠냐.







파토

트위터 : @patoworld


편집 :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