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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7. 14. 화요일

산하









<긴급출동 SOS 24>를 한창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제보가 왔다. 자기 아파트 1층에 사는 할머니가 같이 사는 할아버지에게 맞고 산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법적으로는 노인도 아니었지만 할머니는 일흔을 훨씬 넘긴 분이었다. 띠동갑을 넘어선 기묘한 동거였는데 아무튼 이 할아버지는 소문난 양아치로 할머니 피를 빨아먹고 살면서 돈을 안주면 그렇게 두들겨 팬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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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PD가 나가서 취재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팀장이 불렀다.


“너 빨리 ○○으로 튀어가라.”


이유인즉슨 조연출이 그 할아버지를 폭행했다고 고발을 당했고, 지금 경찰서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세상에.


문제의 조연출은 사례직 AD로 온 지 얼마 안 된 친구였다. 미국 유학파였고 집안도 엄청나게 좋아서 주유소 하나가 자기 것이라고 했지만 유별나게 방송 일이 하고픈 청년이었다. 덩치는 컸지만 의외로 순진했고 이른바 사회의 바닥을 전혀 듣도 보도 못했던 귀공자였다고나 할까. 문제는 이 청년이 1차 취재를 위해 할머니랑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할머니가 “집에 가서 얘기할까?”해서 들어간 뒤에 발생했다.


녀석은 집안에 들어간다는 생각에 들떠 별 경계를 하지 않았지만 문제는 집안에서 양아치 할아버지가 벼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방송사에 제보가 들어가 취재를 나왔다는 정보가 그 집에 들어가 있었고, 양아치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시켜 녀석을 집안으로 끌어들인 후 문을 잠가 버렸다. 두들겨 맞는다는 것이 사실이었음에도 할머니는 철저하게 남자 편이었다. 맞은 뒤엔 저 나쁜 놈 하면서 동네 사람한테 하소연을 하지만 그 뒤엔 또 ‘그래도 내 남자’하며 달라붙는 양가감정의 전형이었다고나 할까.


양아치 노인은 다짜고짜 조연출을 때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연출 얘기로는 인정사정없이 때리면서 자꾸 “억울해? 너도 쳐 봐!” 소리를 반복했다고 한다. 그 정신 없는 와중에서도 녀석은 '야, 이거 한 대라도 노인을 때리면 큰일 나겠다 하다못해 건드려도 바로 드러눕겠다' 하는 마음이 퍼뜩 들더라고 했다. 그래서 녀석은 그야말로 샌드백이 돼서 맞았다. 180cm 100kg의 거구가 어깨만큼도 안 오는 바짝 마른 노인에게 말이다. 입술이 터지고 눈이 붓도록.


때리는 걸로 안됐던지 노인은 부엌으로 향했다. 칼을 꺼내려는 의도로 보였다고 했다. 자칫하면 정말 죽겠다 싶었던 녀석은 필사적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현관을 열고 뛰어 나왔는데 양아치 노인이 추격에 나섰다. 그런데 양아치 노인이 그만 모래 바닥에 미끄러지면서 팔뚝이 주욱 찢기고 말았다. 노인은 악을 썼고 조연출은 엉거주춤 서 있다가 어영부영 경찰서까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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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뷰티풀 선데이>의 한 장면)


노인은 조연출이 자신을 폭행했다며 자신이 그를 피하다가 넘어져서 상처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땅을 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됐느냐며 호소하는데 그럴 듯 했다. 하지만 팔의 상처 외에 두들겨 맞은 얼굴은 이쪽인데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아예 울부짖는다.


“저 녀석이 자해를 하더라고요. 아주 인정사정없이 제 주먹으로 제 얼굴을 치더라고요. 살다 살다 그런 모습 처음 봤습니다. 할머니도 봤지요?”


그러면서 할머니한테 동의를 구하니 아주 살갑게 맞장구를 친다.


“너무 놀랐시유. 지가 지를 패는데.”


조연출은 허파가 뒤집혀서 나더러 울먹울먹 아니라고 하고 양아치 노인은 기세가 등등.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가해와 피해가 애매한 상황이었다. 아니, 우리 쪽이 불리했다. 100kg거구의 청년이 깡마른 노인에게 속수무책으로 맞았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더군다나 저쪽은 증인이 있는데... 잘해봐야 쌍방폭행이고 자칫하면 방송 프로그램 AD가 폭행죄로 처벌을 받을 참이 됐다. 하지만 다행히 형사들이 그 노인을 알아볼 만큼 노인의 문제 행동이 관내에서 유명했기에 형사들이 노인을 어르고 달래서 큰일 없이 무마될 수 있었다.


가끔 그 경찰서를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 노인이 경찰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세상에 이렇게 억울할 데가 어디 있느냐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도, 멋모르던 여경이 할아버지를 달래며 독살스런 눈빛으로 우리 조연출을 쏘아 보던 모습도, “내가 저런 덩치를 어떻게 때려요?” 울먹이던 양아치 노인과 “할아버지 정말 너무하세요.” 하면서 죽는 소리를 내던 조연출까지.


앞의 얘기를 다 잊고 우연히 경찰서에 들렀고 이 상황을 목격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럼 어떻게들 생각할까. 장담하는데 열이면 일곱 명은 다짜고짜 우리 조연출한테,


“거짓말하지 마 시키야.”


라고 말할 가능성이 크다. 일단 구도 상 가해와 피해의 구도가 명확한 것이다. 젊은 덩치와 깡마른 노인. 비쥬얼만 봐도 이쪽은 입가에 피가 나도 눈에 멍든 정도지만 저쪽은 팔뚝이 찢겨 피가 철철 흐르는 상황. 실감나게 자해(?)장면을 증언하는 양아치 노인과 그 나이든 애인. 아마 내가 상황을 봤어도 젊은이 쪽에 의심의 화살을 던졌을 것이다. ‘상식’선에서 말이다. 하지만 상식은 종종 그렇게 우리를 배신한다.


이 사건 이후 나는 아무리 절절한 피해자의 말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사근사근 들어주는 체 했지만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경계심을 상비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상식이 배신당하지 않을 만큼의 근거를 요구했고 또 찾으려고 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상식이란 근거라는 뼈대 없이는 연체동물에 불과한 것이었으니까.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는 기실 명확하지 않았고 심지어 뒤바뀌는 경우도 흔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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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먹기 전에 한 번 의심해보자

(영화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의 한 장면)


피해자의 일방적인 증언만으로 가해자를 매도하는 건 그야말로 사과 베어 먹는 거보다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사과가 독사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항상 해야 한다. 약자를 돕는 정의의 사자가 되는 것은 일단 신나는 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뒤통수를 가장 심하게 때리는 단어 중 으뜸이 정의라는 것도 염두에서 지우면 안 된다. 정의란 그렇게 쉽게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잇단 '데이트폭력' 고발에 대한 생각 역시 비슷하다. 아마 이런 글을 쓰는 자체가 2차 가해라고 눈 부릅뜨는 분도 계시겠지만 나는 고발자들을 존중하며 그들을 저 노인에 빗댄 것도 아님을 분명히 밝혀 둔다. 하지만 저 양아치 노인과는 생판 다른 인간들로서 전혀 거짓말 따위와는 거리가 먼, 진실만 얘기한다고 믿을 수도 없다. 최소한 쌍방 말은 들어보고 확정된 팩트로 징벌을 하든 규탄을 하든 해야 할 것이다.


정의의 사자는 쉽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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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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