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04. 24. 목요일
물뚝심송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비탄에 빠져 버렸다. 바로 세월호 사건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 또한 현재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딸을 가진 부모다. 그리고 그 딸 하나뿐이다.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만약 내 딸이 저 곳에 있다면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다른 모든 사고 기능을 마비시키고 머리 속을 완전히 하얗게 만들 만큼 충격적인 것이었고, 답을 생각하기는커녕 그 질문 만으로도 나는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자 내 아이의 어머니인 한 여성은 울음을 터트렸다. 새벽에 일어나 아이를 깨워 밥을 먹여 학교에 보내 놓을 때까지 참아왔던 울음을 터트리며, 과연 우리가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가 있겠냐고,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다고 털어 놓았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나였다. 사건 초기부터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일이며, 얼마나 많은 어린 목숨이 사라질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해도 좋다. 아무리 무능한 정부라도 설마 이렇게까지 무능할지는 몰랐다고? 그만큼 무능한 정부였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잘나서 알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사회 공공의 장소나 시설 등의 안전성 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군대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다. 터무니없는 사고들과 너무나 무능한 대처로 인해 죽어가는 젊은 병사들을 수도 없이 지켜본 결과, 나에게는 일종의 트라우마일 수도 있고, 집착일 수도 있는 병적인 버릇이 생겼다. 공공의 시설을 이용할 때 마다, 제일 먼저 유사시 퇴로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고, 어떤 사고가 생겼을 때 나는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에 대한 방안을 머리 속에서 그려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 내 눈에 비쳐진 우리 사회의 재난 대비 안전망은 한 마디로 비참한 수준이었지만, 모든 사람은 그런 상황에는 관심도 없이 무탈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오히려 나는 내가 병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을 수도 없이 하면서, 사람들에게 내 걱정을 얘기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곤 했었다. 그러나 그 병적인 우려가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 후의 상황은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다. 모두가 알고 있으며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능한 정부는 아무런 재난 대비 능력이 없었다. 심지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상식적인 대처조차 못하는 수준의 모습을 보여줬다. 시스템의 내실을 다지지 못하고 규모만 성급하게 비대해져 버린, 고도 비만에 걸린 어린아이처럼 아무런 능동적 대처를 하지 못하는 적나라한 모습을 대중의 시선 앞에 노출 시켜 버렸다. 이걸 어디부터 고쳐야 하는 걸까?
비판도 넘쳐나고 대안 제시도 넘쳐난다. 아쉬운 것은 그런 비판과 대안제시가 왜 일이 터지고 난 뒤에야 나오는가 하는 것이다.
사람은 추상능력이 있는 동물이다. 현실의 상황에서 발생가능한 최악의 사고를 상상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특히나 안전관리 책임자들은 이런 상상을 하고 그 상상 속의 최악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런 권한이 위임되어 있지않다. 심지어 그런 안전관리 전담 책임자들의 존재 자체를 비효율로 간주하는 것이 우리 사회이기도 하다.
그런 사회에서 뭔가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위험을 설명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구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미친 사람 취급 받기 딱 좋은 일이다. 아니 그 이전에 짤린다. 그저 주는 월급이나 받고, 하라는 일이나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개인에게 요구되는 덕목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배경에 이윤만을 탐하는 자본이 있다는 얘기도 이제 와서는 공허할 뿐이다. 그런 자본을 감시 견제하라고 국민 모두가 합의하여 권력을 위임한 정부가 앞장서서 자본의 이윤을 지켜주려고 노력하는 마당에 자본 탓은 또 해서 뭐하겠냐는 것이다. 그게 자본의 본질인데 말이다.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안전 불감증? 그건 불감증 같은 것이 아니다. 안전을 포기하면 돈이 생기고, 돈이 생기는 것이 지상 과제라면, 안전을 포기하는 것은 불감증 때문이 아니라 이윤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수행하는 정당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윤 추구라는 지고지순한 목적을 위해 안전을 포기하는 것인데, 그걸 불감증이라고 하면 뭐가 되겠냐는 말이다.
총체적인 문제인 것이 맞다. 그러나 그런 사회 전반에 걸친 총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의 분노는 너무나 미약하기만 하다. 그래서 더욱 슬프다.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라 분노할 때라고 외치는 것 조차 역시 마찬가지로 허무하다.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분노하라고 얘기하면 선동이 된다. 무슨 정치적인 목적이 있냐는 반문이 돌아온다. 지역에서 사회활동을 하던 지자체 의원 후보가 뛰어 내려가 유가족들을 돕고, 그들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역할을 하던 중에 단지 그가 피해자의 친인척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치적인 의도를 의심받고 정치 생명이 끝나고 사회적으로 마녀 사냥의 대상이 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렇다면 이 모든 문제들은 피해를 입은 당사자와 그의 가족들만이 나서서 해결해야 되는거냐는 반문을 할 기력도 없다. 마녀사냥은 막아설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막아 서는 순간 나 또한 화형대에 달리게 될 운명이니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냥 슬퍼하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냥 슬퍼하고 있을 자유도 없다. 맘 편하게 슬퍼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난 그래서 숨쉬기도 힘들다고 하는 것이다. 슬퍼할 때에도 사람들의 허락을 받고 보조를 맞춰 똑같이 슬퍼해야 한다. 거국적인 슬픔의 와중에도 한시 바삐 자신의 역할로 돌아가 다시 일어서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는 이 상황에 슬퍼하지도 않냐는 비난이 쏟아지는 것이 우리 사회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사고 이후에 밝게 뛰어 놀고 있는 다른 학교의 학생들을 보고, 너희들은 슬프지도 않냐면서 너희들이 뛰어 노는 과정을 인증샷을 찍어 SNS에 올리겠다고 협박했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획일성이다. 아니 획일성이라는 말로는 표현하기가 부족하다. 총화일 수도 있고, 단결일 수도 있다. 근면자조협동에 끼어 있는 협동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아주 못된 버릇이 있다. 이런 버릇이 어떻게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걸까?
이런 글을 발견했다.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669245523141224&id=100001673477141&fref=nf
간단히 설명하자면, 미국의 누군가는 유럽에서 아주 흔하게 쓰이던 임신 증후군 치료제, 입덧이나 불면증을 치료하는 약을 미국 시장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혼자 막아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약은 심각한 부작용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어 유럽은 큰 피해를 봤고, 미국은 그 피해를 보지 않게 되었다는 사건에 대한 얘기이며, 그 대가로 해당 공무원은 훈장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똑같이 우리 공무원 중에도 주변의 모두가 다 인허가를 내 주라고 요구하는 어떤 시설에 대한 인허가를 안전하지 않다는 판단으로 끝까지 거부하다가 전보발령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무원이었던 이장덕 씨는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이고, 그렇게 모두가 합심해서 인허가를 내준 씨랜드에서는 화재가 발생하여 18명의 유치원생을 포함한 23명이 숨지는 사고로 터져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들과 다른 판단을 내리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우리 모두가 다 한 마음이어야 한다는 근거 없는 동일체 의식, 이것이 농경사회의 전통인지 총화단결을 외치던 유신의 잔재인지, 군부독재의 후유증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그런 의식이 존재한다.
그런 의식이 슬픔을 참고 애써 웃으며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표출되고, 남들은 다 괜찮다고 하는데 혼자서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환자로 취급하는 분위기로 나타나는 것이며, 지금의 나를 숨 쉬기도 힘들게 만드는 주범인 것이다.
답답하다 못해 호흡이 곤란하다. 실제로 곤란해서 잠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내가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지를 다시 확인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심지어, 그렇게 처절하게 무능한 면모를 보여주던 정부 각 부처조차 자신들의 문제를 감추기 위한 홍보에서는 획일적인 대응을 하기도 한다. 아래는 어제밤에 트위터 상에서 벌어졌던 우리 정부 각 부처의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는 짤방 들이다.
도대체 중기청은 무슨 관계? 하지만 이 트윗은 정부 모든 부처의 공인 계정이 '모두' 했다.
대부분이 아니라 '모두'
이런 아무 효과 없는 행위를 하는 이유,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대해서는 그저 이행만 할 뿐, 이 조치가 효과가 있는 것인지, 부작용은 없는지를 생각하지 말라는 평소의 교육 때문에 벌어진 웃지 못할 사건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다른 소리를 할 수 있다. 그 다른 소리는 허튼 소리일 수도 있고, 틀린 소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다름을 묵살하는 사회에서는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말단 공무원들도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런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우리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거국적인 슬픔 속에서 우리도 이제 그만 슬퍼하고 웃으며 일상으로 복귀하자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그걸 유가족의 슬픔을 무시하는 무례한 행위라고 일제히 비난하는 속에서는 어떤 창발적인 제안도 나올 수가 없다.
심지어 최근 들어서는 '틀림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자'는 목소리가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서 획일적으로 나온다. 심지어 공무원들까지 이 말을 쓴다. 그리고 돌아서서는 획일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다른 소리를 하는 사람을 회식자리에서 왕따를 시킨다. 저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저 말이 왠지 멋있어 보여서 쓰기도 한다. 그리고 나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열심히 비난을 한다.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 남들과 다른 행동이나 발언을 하는 것을 불안해서 못 견디는 사회, 대열에서 이탈하면 곧 죽음인 사회, 이런 사회가 오늘의 비극을 만든 것이며,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비극을 만들어낼 “획일화된 사회의 비극”이라고 얘기한다면 뭐라 하시겠는가?
물론 '우리 모두가 죄인' 이라는 말은 현존하는 실질적인 책임을 가리지 못하게 묻어주는 퇴행적 자기비하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맞다. 이번 사건에 관련된 모든 실질적인 책임자들은 하나하나 밝혀내고 처벌해야 한다. 당연히 그 모든 책임은 행정부의 최고 수장인 대통령이 지는 것이 옳다.
그러나 누가 대통령에게 책임지라고 얘기할 수 있겠는가? 이미 다른 소리 하는 사람들은 대통령의 주변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치단결해서 한 마음 한 뜻으로 촛불 아니라 횃불이라도 들어 대통령을 권좌에서 몰아낼까? 지금 이 순간에도 대통령을 지지하는 획일화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국민의 절반이 넘는 사회다.
뿌리가 깊고 역사가 깊은 문제이다.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것이 바로 내가 숨 쉬기도 힘든 이유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속한 이 사회에서 편하게 숨을 쉬고 살고 싶다. 이런 아주 작은 희망조차 이루지 못한다면, 내가 이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일까?
또 다시 숨이 막혀 온다.
끝.
물뚝심송
트위터 : @murutukus
편집 :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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