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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4. 25. 금요일 

논설우원 파토














벌써 10년이 넘은 일입니다. 딴지 지면으로 떠들썩했으니 오랜 독자라면 다들 기억하시겠지만 이경운군 사건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영국에 유학 준비차 갔던 한국 국적의 스페인 교민 이경운군이 사망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해 만 18세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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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 살았지만 경운군과 가족은 모두 대한민국 국적이었습니다. 



영국에 체류하던 제가 그 일을 알게 된 것은 사건이 벌어진 지 이미 3년 가까이 흐른 후였습니다. 경운이라는 청년이 버스에 치여 사망했다고 하는데 의문이 많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의문을 풀기 위해 생업을 전폐하고 영국에 불법체류하고 있다는 게 대략의 스토리였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덧붙여 교민사회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돌았죠.



"선진국인 영국 정부에서 단순 교통사고라고 하면 믿어야지 왜 저러냐."


"집착과 과대망상에 빠져 교민사회를 시끄럽게 한다."


나아가,

 

"아들을 사고로 잃은 아비가 이성을 잃고 미쳐 한인타운을 돌아다닌다."


는 말까지 나돌고 있었습니다. 


제 귀에는 이 두 가지 관점이 둘 다 들어왔는데 그에 대한 공감의 입장은 소수였고, 불편함과 귀찮음의 입장은 다수였습니다. 대체적으로 교민 사회는 물론 주영대사관쪽도 후자의 관점에서 쑥덕거리고 있는 분위기였죠. 그래서 저도 비극을 겪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불쌍한 한국 사람이 있구나, 하는 정도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1년쯤 지난 어느날, 경운군 아버님을 가까이에서 돕고 있던 유학생과 교회 전도사님이 제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 왔습니다. '본국'에서 온 딴지일보 기자님이 경운군 아버님을 꼭 한번 만나 달라는 거였습니다. 도와주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만나서 이야기라도 들어 달라는 겁니다.


솔직히 부담스럽기도 했습니다. 단원고 학생들보다 고작 한 살 많은 젊은 청년이 타지에서 비명횡사한 무겁고 어두운 사건입니다. 게다가 그 아버지는 정신이 온전하지도 않다고 합니다. 제 자신도 고작 30대 초반의 나이였고, 생활도 어렵고 시간도 없는 유학생 신분이었습니다. 다만 국내에 딴지일보 지면을 갖고 있던 것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대체 뭘 할 수 있고 무슨 성과를 낼 수 있을까요. 영국 정부를 상대로 몇년이나 지난 사건을 재수사하도록 만든다? 관련된 의문들을 풀어내고 혹시 있을지 모를 범죄자와 동조자들을 감옥으로 보낸다? 그런 게 과연 가능하겠냐는 겁니다. 그런 의문을 가진 채 저는 런던 중심가의 한 맥주집으로 그를 만나러 나갔습니다.


하지만 제가 만난 그는 정신에 아무 이상도 없었습니다. 떠도는 소문 때문에 일종의 광인을 연상하기도 했지만, 그저 생때같은 자식이 갑자기 죽고 그 상처와 한을 주체하지 못하는 아버지일 뿐이었던 거죠. 그는 산더미 같은 자료를 가지고 나왔고, 제 앞에서 장장 다섯 시간 동안 사건을 설명하며 그간 쌓인 격한 감정을 토로했습니다. 


당시 50대 초반이던 그는 긴 세월 동안 타지에서 홀로 버티면서 머리가 모두 세고 이가 다 빠지는 등 건강도 말이 아니었어요. 각종 의문과 관련된 부분도 부분이지만, 제 눈에 가장 크게 밟힌 것은 자식의 죽음을 납득하지 못한 채 영국 땅을 떠나지 못하는 그의 한과 고통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직접 본 이상, 도움이 되든 아니든 이제 뭐라도 할 수 밖에 없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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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고 총명했던 경운군의 생전 모습.

이런 아들이 외지에서 비명횡사하는 것 자체로

부모의 마음이 바닥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속으로 한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뭘 하든, 진실이 뭐든 상관없이 철저히 아들을 잃은 아버지인 이 분의 입장에서 하리라. 그의 주장이 때로 감정적이고 비약적이더라도 말없이 듣고, 다른 이들이 그랬듯 합리성을 가장한 냉정함으로 상처를 드리지는 않으리라. 그런 공감과 감성적 섬세함을 갖지 않으면 그를 돕는다는 건 결국 위선일 뿐이다. 왜.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사건은 제기된 의혹을 제대로 밝혀낼 수 없을 가능성이 무척 컸습니다. 힘도 영향력도 별로 없는 제가 아니라 어떤 대단한 사람이 붙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하지만 누군가 그의 편에 서서 최대한 노력함으로써 그가 자신에 대한 무력감과 아들에 대한 미안함, 세상에 대한 한스러움을 조금이라도 벗도록 돕는 것은 진상을 밝히는 일 자체만큼 중요했습니다. 원없이 노력해 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특히 이런 일에서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어 리서치를 하는 과정에서 많은 상황들이 드러나더군요. 영국경찰이 사망 사건에 대해 이상한 태도를 보인 것이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일단 교통사고가 났다는 지점부터 잘못돼 있었고 그외에 서류상의 많은 문제가 발견됐습니다.  정말 숨겨진 진실이 있는 건지 아니면 외국인 죽음에 대한 단순한 무성의인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뭔가 잘못돼 있었어요. 외국이던 어디던, 어떤 부모가 자식이 버스에 치어 죽은 곳이라면서 엉뚱한 곳에 데리고 가고 서류도 엉망으로 작성하는 경찰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두 번째는 주영대사관의 태도였습니다. 그 즈음에 외교부 및 해외 공관의 복지부동과 무사안일이 여러 각도로 지적된 바 있었는데, 주영 공관도 예외가 아니어서 전형적인 한국식 무성의와 형식적인 일처리로 일관하고 때로는 유가족과 교민을 상대로 모욕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를 보인 흔적들마저 드러났습니다. 자기들 관할에서 이런 일이 커지면 외교적인 책임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고 자칫 외교관 경력에 오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국민의 목숨보다 일이 시끄러워지는 게 훨씬 큰 문제였을 것입니다.


교민들 증언과 각종 자료들을 보며 이게 과연 한 나라를 대표하는 공관이 맞는지, 해외에서 이런 비극적인 일을 당했을 때 우리 국민은 어디에 가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슬픔과 분노가 치솟아 오르는 건, 요즘 우리가 느끼듯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이경운군 사건에 간여하게 되었죠. 이후 2년여간 본지에 많은 기사를 썼고, 독자들에게 외교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댓글을 남겨달라고 호소했고, 모금 운동을 해 수입이 전무한 상태에서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경운군 아버님에게 전달했습니다. 허나 사실 저는 그저 떠들어 대는 것과 아버님 말씀을 들어 드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그 대부분의 일은 딴지 독자들께서 해 주신 겁니다. 그렇게 결국은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대한민국 국과수가 영국에 와서 6년간이나 냉동되어 있던 경운군 시신을 재부검하게 됐습니다. 


칼에 찔리거나 맞아서 사망한 게 아닌한, 이 부검으로 뭔가 새로운 게 나올 가능성이 그리 높지는 않았죠. 하지만 반복되는 무능과 무성의, 나아가 짜증과 홀대 속에서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경운 아버님, 그리고 그 광경을 제 기사를 통해 지켜보고 있던 국민들께 대한민국 정부의 이런 성의와 노력은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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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사를 쓰고 공론화했지만 이경운군 사건의 규명을 

위해 많은 분들이 나서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허나 당시 경운군 아버님의의심과 한을 풀기 위해 

필요한 일은 저같은 개인보다는 

대한민국 정부가 성의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지요. 

그것이야말로 그가 오랜 세월 불편하게 

한국 국적을 유지하면서까지 

나라에 대해 가졌던 애정을 뒤늦게라도 확인하며 

그간 받은 상처를 보듬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국과수의 부검 이후에도 인간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몇 가지 상황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를 취재하러 온 모 공중파 방송국 PD의 행태. 그녀는 부검을 통해 칼자국이나 총상 같은 게 드러나야만 방송할 가치가 있다고 여긴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자 화를 버럭 내며 경운 아버님께 인사도 하지 않고 팀을 끌고 귀국해 버리더군요. 그녀에게 이 사건은 단지 취재거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거죠. 


두번째는 교민 사회의 반응. 역시 칼이나 총으로 인한 살인으로 드러나지 않자 그들은 저와 경운군 아버님을 불러 일종의 청문회를 벌였습니다. 그 중 일부의 태도는 '거 봐라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해서' 에 가까웠습니다. 나아가 저를 법정에 세운 마냥 '이제부터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시오'라고 주문하는 사람도 있었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분노를 누르고 그 '어른' 들에게 설명했습니다. 당시에도 글에서 여러차례 언급했듯이, 객관적 진실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또 우리나라 국과수가 부검을 했기 때문에 많은 의혹과 의문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차량에 의한 사망으로는 확정이 된 거란 점을. 다시 말해 그때까지는 의문사에 가까웠던 것이 비로소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고, 그 결정적인 계기가 국과수 부검이었던 것이죠. 그럼에도 쓸데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사람이 아닌 사건만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비뚤어진 시선으로. 


하지만 일이 여기까지 오자 경운군 아버님의 한도 조금씩 사그러들었습니다. 얼굴은 밝아졌고 건강도 나아졌죠. 아들이 살아 돌아왔거나 관련된 범죄 행위가 확인돼 처벌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들의 죽음에 대해 규명하기 위한 주변의 공감과 노력, 그리고 마침내 국가가 성의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영국 내 인도 등 소수 민족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인권단체 일을 돕게 되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도왔듯 자신도 다른 고통받는 이들을 도와야 겠다는 마음의 발로였겠죠.


물론 죽은 사람이 있기에 해피엔딩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경운군 아버님과 가족을 위시해 관련된 사람들이 살아갈 희망을 얻었다는 점에서 6년을 끈 이 일은 마냥 패배만은 아니었습니다. 인간 세상에는 벼라별 비극이 일어납니다. 그 중에는 시간과 공간, 환경의 제약들 때문에 완벽하게 원인과 과정, 결과가 정리되지 않는 일들도 다반사죠. 그런 일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내적으로 패배하지 않는 겁니다. 


허나, 내적으로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많은 외적인 노력이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


…제가 왜 이 해묵은, 마음 아픈 이야기를 길게 꺼냈는지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세월호 사고를 통해 드러난 인간에 대한 공감의 문제를 제 옛 경험을 통해 말하기 위함입니다.


경운군 사건을 포함해, 이런 상황에서 부모가 바라는 것은 모든 상황의 한점 의혹 없는 재구성은 아닙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완벽할 수는 없다는 걸 누구나 압니다. 다만 미심쩍은 구석들이 생겼을 때 거기에 대한 성의있는 설명,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서 국가 등 내 편이라고 믿은 쪽의 진심어린 도움을 바랄 뿐이죠. 그런 부분이 납득이 되어야 스스로 죽은 자식을 보내 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자식에게 미안해서라도 가만 있을 수 없는 게, 미개함과는 무관한, 부모 맘입니다.


경운군 사건과 관련돼 제가 목도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을 살피는 공감력과 섬세함의 결여였습니다. 경운군 아버님은 '일반인'이 아니라 하루 아침에 18세의 장남을 잃은 부모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심정을 섬세하게 공감하지 못한 상태로 사건에 '일'로만 접근한다면 설사 좋은 의도를 갖고 있다 한들 '절차'나 '형식' 따위에 가로막힐 뿐 실제로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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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인씨가 사비를 들여 가져 온 다이빙벨은 '안전'상의

이유로 허가와 불허를 반복하는 상황이 연출됐습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계속 반전이 거듭됐는데

지금 이 순간에는 투입된다는 소식이 들어와 있습니다.

누가 봐도 아이들을 구해낼 가능성이 일말이라도 있는 것이

이 다이빙벨 아니었던가요.

…그러는 사이에 열흘이 지났습니다.  



여기에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당시에 확인한 공관과 교민들의 행동 패턴은 지금 세월호 사건에 비해 규모만 작았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언어도 문화도 다른 외국에서 현지 경찰의 발표는 비상식적이고 미심쩍은 와중에, 우리 공관은 당장 유가족에 필요한 사소한 것들도 잘 도와주지 않고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고, 며칠도 못가 노골적으로 귀찮은 티를 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경운군 아버님이 예민하게 반응하면 찍어 누르려 하고, 일부 교민들과 함께 괜한 의심과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미친 사람처럼 몰아갔더군요. 제가 그를 만나기 전에 말도 통하지 않는 광인일 거라고 착각했던 이유죠.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에 충분히 공감했다면 결코 상황이 이렇게 되진 않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게 주로 해외 공관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해외에 주재하면서 정부의 직접적인 관리에서 분리돼 있다보니 책임감도 옅어지고 감각도 무뎌지고, 또 외무고시 치고 들어온 일부 영사들의 자질 부족과 조용히 세월 보내면서 한단계씩 위로 올라가려는 공무원 특유의 심리. 이런 게 해외라는 특수성에 의해 증폭된 거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고 있으면 단지 그런 게 아닙니다. 해외가 아닌 본국의 문제가 더 심각했으면 심각했지 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점은 제가 기억하는 이 나라는 적어도 이런 지경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90년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는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지만 당시의 구조 상황이나 분위기, 국민적 정서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그때도 매뉴얼이 없기는 마찬가지였고 구조도 주먹구구식이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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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차이는 뭘까요. 바로 '스피릿'의 실종입니다. 그때는 정부에서부터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어떻게든 매몰된 사람들을 빨리 구해야 한다는 열정이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릎쓰고 영웅적으로 뛰어들었고, 실제로 실낱같은 희망을 좇아 10여 일이나 지나서까지 생존자들을 구해냈죠. 죽은 사람은 훨씬 더 많았지만, 적어도 그 지옥 구덩이에서 구해낸 사람들이 소수나마 존재했던 겁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사고 직후 탈출한 사람들 이후, 배가 천천히 가라앉는 가운데 구조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앞으로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전망은 어두워 보입니다. 하지만 그점보다 더욱 공분을 사는 것은 결과와 상관없이 어떻게든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한 명이라도 구조하기 위한 당국의 적극적인 노력과 열정이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연히도 저는 불과 몇주 전 전 바다에서 보물을 캐는 분을 만나 몇시간 동안 서해 바다의 특성에 대해 전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서해 바다, 정말 어려운 곳이더군요. 그 분에 따르면 수천억원 가치에 이를지 모를 보물의 위치를 알면서도 그 어려움 때문에 몇년 째 인양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돈이고 이건 인명입니다. 그것도 수백명의 어린 학생들입니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뛰어들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구조하지 않고 죽게 내버려 두려는 거 아니냐는 음모론도 돌지만, 저는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국가적인 대응 매뉴얼이나 각종 기술, 장비, 시스템이 왜 갖춰져 있지 않았는지의 근본적인 문제는 남지만, 이런 심각한 재앙을 두고 어떻게 사고를 낸 청해진 해운이 계약한 민간업체가 진두지휘를 하는 것인지도 납득하기 어렵지만(민영화의 극단적인 폐해는 아닐런지요), 나아가 과연 순수한 무능이 이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 의심도 들지만, 기본적으로는 실제로 일이 어려워서 못하고 있을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괜찮은 겁니까.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믿음직한 책임자가, 높은 사람이 나와서 상황을 통합하고 정리하고 지휘해야 하는 거죠. 가족과 국민을 상대로 구체적으로 일이 왜 어려운지, 구조 대원들이 덩달아 목숨을 잃을 위험이 커서 쉽게 움직일 수 없고, 그래서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고, 언제 이렇게 시도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했는데 이러이러해서 제대로 안되고 있다, 죄송하다. 언제 다시 어떻게 시도하려 한다, 한편 실종자 가족들을 위해 이런저런 것을 마련하고 있고 장례비는 급한 대로 정부가 지원하고 기타 등등. 하루에 몇번씩 그 책임자가 공식적으로 기자회견도 하고 질의 응답도 하고 건의도 받고, 현장 사진도 보여주고. 된다면 시행하고 안되는 이유가 있다면 왜 그런지 사람들이 납득하게 설명하고.


아이들을 구하지 못하는 와중에 적어도 이런 것들이라도 돼야 하는 겁니다. 정말 일이 어렵고 능력이 모자라 해낼 수 없는 거라면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충분한 공감력이라도 보여야 하는 거죠. 그래야 가족들이나 국민들이 정부를, 같은 비극을 마주한 상태에서 능력은 부족하더라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우리 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야 가족들의 한, 덩달아 국민들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고요. 


그런데 지금 정부는 이것도 못할 만큼 무감각하고 무성의합니다. 와중에 스스로 보수라고 주장하는 인사들은 종북이니 선동꾼 운운하는 말까지 내뱉어요. 상처에 소금를 뿌려도 유분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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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어제는 성난 가족들이 해수부 장관과 해경청장을

가운데 앉혀놓고 질문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진작에, 보다 좋은 그림으로 이뤄졌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분들은 다만 상황을 책임자의 입을 통해 듣고 

이해하고 싶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불신이 너무 커져 있습니다.



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건 위기는 물론 일상의 삶을 위한 기본틀과 합의마저도 잡혀 있지 않은 후진한 사회인 와중에, 그런 속에서 어떻게든 사람들 사이를 엮어가던 커뮤니티 의식마저 붕괴했기 때문입니다. 못살면 못사는대로 예전에는 그마나 있었던 사회적 공감력이 2014년의 대한민국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부자되세요'라는 광고 문구가 대유행한 한때의 세태가 증명하듯, 지난 몇년간 위정자들부터 시작해 돈과 지위 등만 강조하는 정신병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인간대 인간의 공감력과 섬세함은 이 사회에서 부정되고 지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빈 틈을 냉소와 비정함, 보신주의, 무책임, 개인주의를 가장한 이기심이 채워 갔죠.


생각해 보면 신뢰나 기대, 희생, 의미 같은 것은 어느 정도는 현실이 아닌 이상이고 일상보다는 드라마입니다. 개인의 안위와 영달만을 생각해서는 이런 이상과 드라마는 사라지고 물욕과 구체적인 '현실 감각'만 남습니다. 일례로 문제의 선장은 죄책감이나 수치심보다는 감옥에 갈지언정 어떻게든 살아남았다는 것에 되려 안도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런 류의 현실 감각은 동물적인 생존 욕구와 거의 같은 것입니다. 문명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에게 유리한 문명적 요소만을 차용할 뿐이며, 평소에는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아도 선택의 상황에 놓이면 죄책감조차 없이 자신의 이익만을 좇게 되죠.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소시오패쓰라고 부릅니다.


세월호 사건을 통해 단지 선장이나 승무원 뿐 아니라 정부와 언론은 물론 일베 등 일부 국민들 속에서도 공감력이 사라진 자들의 소시오패쓰적 행태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회는 결코 개인적 욕망추구의 총체가 아니고, 절대 그런 방향으로 가서는 안됩니다. 자본주의의 극단인 미국에도 그 사회를 지탱하는 강력한 정신적 가치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의 욕망은 거대하지만, 적어도 우리에 비해서는 정화된 형태입니다.


작년 벙커의 역사 강의에서 '문명은 개인적 공감력이 조직화되고 제도화된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부족처럼 작은 규모의 사회에서는 사적인 관계 속의 호감만으로도 공존이 가능합니다. 허나 현대국가처럼 큰 곳에서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조직화, 제도화 돼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법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가라앉는 배에서 사람을 구하는 매뉴얼의 제작과 탈출 절차의 수행력 같은 것에서부터, 그런 게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고난을 당한 실종자, 가족,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국민들을 향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까지가 실은 전부 공감력의 조직화 및 제도화와 깊이 관련돼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공감력이 바탕이 된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거기서 합리성도 나옵니다. 이것의 틀이 잡혀 있으면 일부 공감력이 부족한 개인들도 사회가 품어 안고 갈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 이 순간 우리 5천만 국민 각자는 거대한 공감력을 발휘하고 있을 겁니다. 문제의 선장도 만약 자기 사건이 아니었다면 티비를 보며 마음 아파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왜 그게 사건과 직접 관련된 상황에서는 발현되지 않았을까요. 왜  국민들의 대표이자 리더인 정부, 국회, 언론 등을 통해서 실현되지 않고 있을까요. 


그건 그들 개개인이 우연히 모두 양심조차 없는 악마들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인간 각자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마음들이 장려되어 발현될 수 있는 정신적, 제도적 구조들이 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정자들부터 나서서 그런 것들을 개인적 부나 이익 추구의 방해물처럼 여기고 파괴해 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알량한 지위, 경력, 수입 같은 것들이 자식같은 아이들 수백명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나아가 그걸 감추지조차 않는 세상이 되고 만 거죠.


그 상태가 이제 이 사고의 경험을 통해서 개인의 일상 속에까지 노골적으로 침투해 들어올까봐 두렵습니다. 그런 경우 이 나라는 지역간, 계급간, 이념간이 아닌 5천만 개개인으로 나뉘어진 분열을 겪게 될 것이고, 그 결과는 문명의 붕괴와 야만으로의 회귀입니다. 아니,  이미 우리 사회는 지금 야만으로 돌아가는 이 길에 절반쯤은 들어서 있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정부, 국회, 언론 등 이 사회의 '리더'들께 바랍니다. 대단한 희생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물 속에 뛰어들라는 소리가 아니에요. 당신들이 녹을 먹으며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눈치만 보지 말고 가족과 국민의 마음을 끌어안고! 할 수 있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라는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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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그렇게 어려운가요. 그럼 그 자리에 있지 말아야지요.


저 거대한 무덤 속에서 지금도 하나둘씩 죽어가는 아이들, 자식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눈물만 흘리는 가족들, 그리고 이 어처구니 없는 비극을 바라만 봐야 하는 국민들을 위해, 나아가서는 이 사회가 절망 속에서 붕괴되지 않도록 그 마음을  대국적이고도 섬세하게 붙잡으라는 뜻입니다. 능력이 부족하고 준비가 돼 있지 못해 아이들을 구하지 못한다면 같이 땅을 치고 눈물이라도 흘려야 하는 거고요. 


만 보 양보해 당신들의 썩은 두뇌와 식은 가슴으로는 그게 무리라면 와중에 기념사진 찍고 미개함 운운하는, 자신을 포함한 모두에게 피해와 상처가 되는 뻘짓만이라도 제발 멈추라는 겁니다. 


지금 북한 핵실험이 문제가 아닙니다. 국민들 가슴에 이미 핵폭탄이 떨어져 있어요. 어른들의 못남으로 저 가엾은 아이들을 죽게 한 것도 모자라 그 죽음을 철저히 비참하고도 헛된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비극을 되돌릴 방법은 없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보는 송영선의 주장과 달리 이 일은 비참한 불행 외에 아무것도 아니고, 어떤 경우에도 해피엔딩은 없으며, 세월이 지나도 개인과 사회는 이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절대절명의 비극 속에서도 인간 정신에 대한 믿음의 싹은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문명 사회인 겁니다.


…정녕 이렇듯 모두 함께 추한 패배자가 돼야만 하겠습니까.









 파토

트위터 : @patoworld


편집 :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