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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5. 19. 월요일

메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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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백년의 짝사랑 - 당신을 사랑합니다. 1982년 삼성그룹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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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까지의 삼성을 기록한 '재벌 25시', 이 책을 볼 당시에는 그저 무협지같은 느낌이었으나 읽어볼수록 이병철처럼 대차게 세상에 진출해서 성공한 사람이 되면 인생 상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후로는 크면서 이래저래 세상을 알아가고 내 머리 속을 업데이트를 하기 위해 가끔 책을 들여다보고 할 때마다 조금씩 생각도 바뀌고 공감되는 부분도 달라지고, 그랬지. 


여러 번 심경 변화를 겪어서 그런지 이번 시리즈의 글을 쓸 때, 그냥 책 내용만 주저리 씨부리다 끝낼 계획은 아니야.


<1>은 요약

<2>는 그쪽 편에서의 공감

<3>은 반대 편에서의 비판


뭐 이렇게 가려고 생각해두고 있어.


해서 오늘은 <2>에서 사업가 입장(예전에도 사업을 해본 적 있고 현재도 농장 운영 중)에서 1982년까지의 삼성에 공감하던 부분을 말해보고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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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의 대구이고 국수도 팔고 이것저것 파는 '상회'로 시작을 했어. 1970년대에 태어난 녀석들에겐 '상회'란 것이 어떤 의미인지 꽤 쉬울거야. 작은 상점을 말하기도 하고 지금의 '상사'개념처럼 어느 정도 규모의 도매 및 잡화 물류, 유통을 쥐고 있는 기업을 말하는거야. 그러니까 삼성은 대구 지역의 꽤 잘 나가는 국수 도매점이자 생활 소비재의 유통을 하는 기업이었던 거지. (물론, 그 이전에 정미소 사업으로 돈도 좀 만지고, 일제강점기 상황에서 토지구획정리 등의 여파에 이리저리 휘둘린 적도 있긴 해.)


삼성의 창업주는 돈이 원래 꽤 있던 집안의 아들로서 찌질하게 살아본 기억은 그다지 없대. 학력을 보다시피 뭘 꾸준하게 하는, 성실한 타입도 아니며 누가 시키는대로 고분고분하게 살아가는 타입도 아니어서 정미소 사업이 대박 좀 났을 땐 땅장사에 기생놀이에 탐구정신도 발휘했던, 그 시대의 대표 한량이었던거지. 부러운 인생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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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향하는 삶이 그런 한량인데, 난 좀 소박해서 하루에 노래 한 가락, 글 한 편, 그림 한 점 쯤 보고 감탄하며 커피 두어 잔 마시는 생활 정도면 감사할 줄 아는 수준이야. 남들이 보기엔 안빈낙도로 보일 수도 있어.


아무튼 한량이면서 부자집 자제인 이병철이 적당히 세상보는 눈도 기를 겸 서울도 가보고 동경도 가보고, 뭐 그러나 고향와서 정미소로 돈좀 불려보다 살짝 망가지기도 하고 땅놀이의 맛에 길들여져 가다가 삼성상회를 만든 거지.


근데 그에게도 실패의 시간은 꽤 깊고 썼어. 20대에 정미소를 날릴 뻔하며 박살난 적이 있었지. 생각보다 순탄했던 시작은 아니었는데, 아마도 개인이 국제 정세에 어두울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인데다가 그의 20대 쯤엔 막 세계공황이 작렬하여 그 여파가 퍼지는 시기였으니깐. 이 내용에 대한 것은 이 블로그(링크)를 참고하면 재미난 일화들이 많아. 삼성, 현대, LG의 창업주 젊은 시절과 주목할 만한 점들을 기록해둔 포스트가 있거든.


여튼 이병철씨가 박살난 원인은 어두운 정보+사업초보자의 흔한 실패 사유인 입체적인 시각 결여였어. 최신식 기계로 무장한 최고의 정미소로 인근의 쌀을 최대한 많이 땡겨 갈아서 판다'라는 게 전략이었는데 정작 작황과 판매가의 변동 상황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는 점이지. 수요공급 관찰을 놓친 사업가의 말로는 보통 그렇게 퍼져서 망해버리는 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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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난 건 포기하지 않고 실패원인을 빠르게 파악하고 다시 1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 정상궤도를 잡았다는 점이야. 역시 이후의 행보가 그저 운이거나 돈빨의 힘은 아닌 거야. 빠른 분석을 통한 대응력이 이병철씨 능력의 본질이 된 거니깐. 실패를 딛고 빠르게 일어설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차이는 커. 물론 재기를 뒷받침을 해줄 재력을 가진 놈이 한참 드물기는 하지만.


이후 운수와 곡물도매업으로 진출해서 정미소를 기초로 사업을 확장하는 시기가 온 거야. 그런데 아주 빠르고 급속한 성장 탓에 또 쓴맛을 보지. 은행 돈 빌려 투기하시다가 일본정부의 정책기조인 공황기 긴축재정의 장벽에 부딪히신 거지. 여신을 줄이고 거품을 제거한다는 정책에. 


당연히 탈탈 털리고 교만하면 망한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고 해. 그런 시기에 얻은 교훈을 정리해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발견했다 더라.




첫째, 사업은 시대의 움직임을 정확히 통찰해야 한다. (공황기를 바라보지 못한 자책)


둘째, 무모한 과욕을 버리고 자기 능력과 한계를 냉철히 판단해야 한다. (과욕과 오판의 자성)


셋째, 우연한 행운을 바라는 투기는 절대로 피해야 한다. (돈놓고 돈먹기의 본질 파악)


넷째, 직관력의 연마를 중시하는 한편 제2, 제3의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 (이건 영원히 그의 인생에서 부족한 요소인데..대비한다고 막아지면 천재인거고)


다섯째, 대세가 기울어 이미 실패라는 판단이 서면 깨끗이 미련을 버리고 차선의 길을 택해야 한다.(이게 이병철씨의 가장 큰 미덕이자 장점)


출처 - 정혁준의 기업가 정신을 찾아서



또한 비스마르크 시대의 명장 몰트케 원수의 명언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대. 




“나는 항상 청년의 실패를 흥미롭게 지켜본다. 

청년의 실패야말로 그 자신의 성공 척도다. 

그는 실패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리고 어떻게 거기에 대처했는가. 

낙담했는가. 물러섰는가. 

아니면 더욱 용기를 북돋아 전진했는가, 

이것으로 그의 생애는 결정되는 것이다.”


출처 - 정혁준의 기업가 정신을 찾아서



그래서인지 이후로는 몰빵사업을 지양했고 분석하고 계획하며 철저하게 입체적인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을 하고 어쩌고 블라블라...


그런데 내가 삼성의 입장에서 공감하는 부분은 정작 이런게 아니야.


삼성은 왜 대한민국 부조리의 요람이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것이야.


일단 내가, 대한민국의 후진국이던 시절과 가장 가까이 있는 나라들 중 하나인 필리핀에서 살아가며 사업이란 걸 하기때문이기도 하고 어렸을 때부터 한국의 지방 소도시에서 지방 유지들과 권력의 유착을 가까이서 지켜본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에 저 질문에 더 공감을 하는 거 같아. 왜 돈을 가진 사람들이 각종 권력, 폭력, 언폭, 법폭을 가까이 두려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 편이라고 생각하거든.


일단 한국이 1945년 해방을 선물 받은 이후, 한동안 미군의 군정시대를 건너 초기 건국기까지의 시간은 진정한 폭력의 시대였고 그 폭력의 시대에 돈만 가지고서 온전히 살아남기는 힘들었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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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독립운동한 분들은 그러지 않았을 테지만, 친일 좀 한 녀석들 센타치고 다닌 힘 깨나 쓰는 양아치부터 각종 단체 이름으로 돈뜯고 다니던 초창기 정부도 없던 시대의 해결책이란 결국 둘 중 하나.


① 미군에 기대거나


② 폭력을 고용하거나


각종 이권들은 매일매일 무작위로 터지던 시기지. 적산가옥에 일본인이 두고 간 공장시설 강제점거에 증명하지 못할 거래계약서를 동원한 인수작업 등등이 펼쳐지던 시대. 그게 좀 길게 갔다면 좋았을텐데...


어이쿠야, 6.25까지 맞아버리는 통에 리셋이 되어버린 거지. 다시 혼란기가 오게 되고...누가 더 큰 빽을 동원해 무주공산을 먹느냐의 OK목장의 혈투가 매일매일 암중에 벌어진거지.


거기서 삼성은 이미 해방이전 곡물사업과 상회를 통해 모인 자본에 힘입어 다른 얼뜨기형 기업들보단 출발이 빨랐고 일본과의 수교 이전부터 일본 쪽의 정보라인을 가동해서 어떤 사업이 가장 접근이 용이하고 수익모델이 안정적인지 파악을 끝낸 상태인 관계로 1등의 자리를 향해 질주하게 된다고.


당연히 폭력에 기댈 수준을 넘어섰고 미군정의 유효기간도 지났고 이승만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전 국토의 돈될 꺼리를 털어대는 권력자를을 적절히 키워먹이는 것은 이때부터 이루어진 삼성의 비법이자 자구책이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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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너무 크게 보는 사람들이 삼성의 힘이 이미 3공화국때 완성되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은데 사업강제 통폐합을 해치우던 5공 초기까지, 삼성의 '장악'사업은 완성되지 못해서 아직 '장악'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던 시대였어.


자, 자꾸 글이 주구장창 길어지는데 일단 새로운 사실은 거론하지 않고 원래 하고자하던 삼성 1982년까지 상태를 공감하며 삼성 쪽에서 1982년까지 벌어진 국민의 지탄을 받는 것들만 추려서 이야기 할께.


일단 최초로 욕 먹은 건 5.16 당시 남들 줘터질 때 혼자 타이밍 좋게 튀어서 일본에 있던 이야기야. 이건 욕 먹기 시작한 일화인 동시에 이병철이란 인물의 그릇이 얼마나 대단했나를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해.


쿠테타를 통해 손에 피를 바른(뭐, 직접바른 바 없지만) 대표자를 앞에 두고 감히 설득을 강하게 했다는 점이지.



-누구나 1등을 하고 싶어하고 못해서 안하는 거지 양보해서 될 게 아닌 게 재계서열임


-1등부터 10등 잡아가두면 앞으로 누가 1등하려고 할 거임?


-너 누구랑 경제발전 할래 쪼다야



로 정의되는 화법에 마사오씨는 점심 때 먹은 10원짜릴 우동국물이 울컥 나올 뻔하며 설득 당하지. 그래서 기업체의 정경유착이란 죄를 돈으로 떼우게 해주는 아이디어가 시작되어 '공기업 만들어 바치기 프로젝트'를 돌려.


중요한 건 설득의 타이밍인데, 초기 고아분기에 일본에 머물며 힘좀 빼다 와서 아마도 설득이 먹혔지 싶어. 빈손 쥐고 총 앞세워 쿠테타를 한 사람들은 시간이 조금 지나면 '성과'라는 것에 눈길이 가기 마련이거든. 그 '성과'를 수확할 방법을 코치한 이병철씨가 마사오씨의 경제학 독선생이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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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좋은 관계가!



한비(한국비료)사건으로 회자되는 2차 삼성 수난기로 이 관계는 마감되지만... 아, 한비이야기 생각하니 이 글 하나로 퉁쳐지지가 않겠네.


여기까지 상편하자. 하편에 한비 이야기하며 박통말과 전통초기를 지나며 삼성의 '대한민국 내 꺼하기 프로젝트'가 출범에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을 한 번 이야기해볼까 해. 









메이비


편집 :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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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게, 즐겁게, 흐뭇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