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05. 29. 목요일
쫄깃한기타
한국비정규노동센터(이하 '센터')에서 일한 지도 어느덧 4개월이 넘어갑니다. 그 사이에 제겐 나름 굵직굵직한 일들이 있었지요. 센터에 들어온 지 보름이 채 안 되어 딸이 태어났습니다. 자식을 낳은 기쁨과 기르는 즐거움은 정말 대단하더군요. 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제가 딸바보가 다 되었습니다. 센터 편집부장이란 직함을 달기 전 제 직업은 역사교과서 편집자였습니다. 출판업계의 고질병인 최악의 노동조건, 경직되어 있으면서도 정권의 입김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편집기준, 이러한 환경 속에서 교과서를 만들다 보니 교과서 편집자로서 자존감이 생기기는커녕 한 사람으로서 제대로 된 생활을 해 나가기도 힘들더군요. 3년 차 되던 해 과감하게 사표를 내고 대안적인 삶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다 센터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그렇게 들어온 센터에서 비정규노동 수기 공모전 수상작품집 <쉼표하나>를 비롯하여 센터 격월간지 <비정규노동> 104, 105호를 편집했지요. 나름의 편집기준을 개발하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디자인을 개선하고, 살아있는 글들을 다루는 일은 역사교과서 편집자 시절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신났습니다. 위의 두 경우가 굵직하고도 신나는 것이었다면 지금부터 다룰 이야기는 굵직하고도 분노가 절로 이는 것입니다.
2014년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 34주년이었지요. 그 전날에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분회장 故염호석 님이 절절한 유서를 남긴 채 세상을 등졌고, 서울의료원에 빈소가 마련됐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통상,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 조문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예외는 있었지요. 이번이 그 예외에 속하더군요. 자신의 시신을 찾게 되면 지회의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안치해 달라는 유서 내용과 5월 18일이라는 날짜가 묘하게 화학작용을 하더니만 제 발걸음을 빈소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빈소에 도착하니 공기가 정말 무거웠습니다.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그 무거움 속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상한 기류 또한 느껴지더군요. 저는 당시 故 염호석 님의 부고 소식과 유서 내용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착잡한 마음에 조문객들과 함께 술잔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고인의 생부에 대한 소문을 좀 들었을 뿐, 성격상 정확히 확인된 사실이 아닌 것들에 귀 기울이는 걸 꺼리는 터라 잠자코 있었지요. 다만 고인의 생부가 노조원들과 갈등 관계에 있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습니다. 추측 가능한 정황은 있었지만 '에이, 설마 그러겠어'하고 소주만 입에 털어 넣었지요. 경찰에 연행된 뒤에야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그 정황은 사실이었습니다. 유족 대표라는 고인의 생부가 고인의 유지를 받들지 않고 고향인 부산에서 장례를 치르겠다고 노조 조합원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겁니다. 이유요?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라 추정만 할 뿐입니다만, 삼성 측에서 생부에게 억 단위의 돈을 건네며 노조장이 아닌 가족장을 치르게 해 달라고 했답니다. 그 추악한 광경을 목격한 분도 있었습니다.
단순한 조문객이었던 저는 다른 조문객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장례식장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조합원들이 고인의 생부 앞에서 모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눈물을 쏟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영문을 몰랐습니다. 볼멘소리를 해 대던 생부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더군요. '뭐가 어떻게 진행되려고 그러나...' 싶던 저는 길가로 나갔다가 다시 장례식장 건물로 들어오는 길에 수백의 전경들이 노조원들을 밀치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장례식장에 전경이라니요. 순간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구쳐 올랐습니다. 이것저것 잴 것도 없이 뛰어갔습니다. 처음엔 막연한 증오가 앞섰지만 이내 예전 기억들이 떠오르더군요.
10년 전 비정규직 관련 집회였던가. 일선에서 전경과 대치한 상황이었습니다. 마주섰던 전경에게 외쳤지요. 왜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느냐고. 그러자 그 전경은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며 말하더군요. 자기도 시위대에게 맞아서 아프다고요. 순간 전경들과 맞서는 목적의식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온몸의 힘이 다 풀려 버렸습니다. 그 길로 대오를 나와 버렸지요. 그 후로 집회에 나가면 절대 일선에 서지 않았습니다. 늘 뒤에서 관망만 했지요. 그런데 10년 만에, 그것도 졸지에 일선에 서게 된 겁니다. 조합원도 아니었던 제가 일선에 서게 된 건, 당시 장례식장에 사람 수가 적었다는 걸 반증하는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전경 1개 중대는 때려눕힐 기세로 달려들었던 전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웅크려 밀기만 했습니다. 절대 폭력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면서요. 그때까지도 전경들이 들이닥친 이유를 몰랐던 저는 "이유가 뭐냐!", "폭력 행사 말고 일단 말로 하자!"고 목이 쉬도록 외쳤습니다. 진압 목적에 관한 경고방송은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중대장에게 얘기 좀 하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봤지만, 들려오는 말은 "하나, 둘, 셋, 밀어!"였습니다. 나름 힘이 좋은 편이지만 3개 중대의 병력이 밀고 들어오는 걸 막을 수가 없더군요. 저도 모르는 새 전경들에게 둘러싸여 연행되고 있었습니다.
금방 나올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경찰이 진압 이유를 제대로 밝히지 않았고 제가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1차 조사가 끝난 후 강남경찰서로 연행된 15명을 모두 유치장에 입감시킬 거라더군요. 조사를 더 해야 한다면서요. 1차 조사는 저희를 잡아 온 경찰들 따로, 연행된 분들 따로 진행되었습니다. 대질 조사는 없었습니다. 황당하더군요. 사실 관계를 조사하려면 대질을 하는 게 상식인데 말이죠.
강남경찰서와 안의 유치장, 정말 낡았더군요. 적어도 30년은 됐을 법한 곳입니다. 2평 남짓한 공간에 연행된 15명이 나뉘어 7명, 8명씩 갇혔습니다. 남성 노동자들, 그것도 밀고 버티느라 땀 뻘뻘 흘린 사람들이 모이니 냄새, 죽입니다. 체험 삶의 현장이 따로 없었지요. 유치장에도 종교행사가 다 있더군요. 연행된 다음 날 교회 아주머니들이 빵을 잔뜩 가져 왔습니다. 측은한 눈빛으로 우리를 훑어보며 맛있게 드시랍니다. 아! 동물원 우리 안에 갇힌 동물들에게도 그런 눈빛은 안 보낼 겁니다. 그런데 이번엔 난데없이 성경 구절을 읊고 노래를 부릅니다. 내용은 하나 같이 '회개하라!'. 졸지에 끌려온 유치장에서 회개까지 해야 하다니. 우리의 공권력은 참으로 자비롭습니다. 옆방에는 공중파 뉴스에서도 꽤 떠들썩하게 다뤘던 강남 성형외과 6인조 강도단이 잡혀 와 갇히더군요. 잡혀 와서도 뭐 그리 떠들어 대던지. 성형외과엔 현금이 많을 줄 알고 털었답니다.
갑갑한 유치장 생활 속 이벤트는 이벤트일 뿐. 억울하게 잡혀 온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동지들과 저에게 빼앗긴 일상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지기 시작합니다. 서로를 위로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자식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투쟁이 정당하고 정의롭기에 최선을 다해 삼성 권력에 맞서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2차 조사가 끝난 뒤 연행된 15명 중 12명이 석방됐습니다. 3명이 남았지요. 그 중 한 명이 저였습니다. 연행되었던 사람들 중 대학생 1명을 포함하여 노조원이 아니었던 저는 '불손한 외부세력'이라는 이유로 표적이 된 겁니다. 원래는 15명 모두 석방될 상황이었는데, 검찰에서 늦은 시간에 강남경찰서에 연락을 해서는 저를 포함한 2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할 예정이니 더 정확한 정보를 제시하라고 한 모양입니다. 세월호 참사 때도 공권력 집단의 상황 파악 능력이 일천하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만,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유치장에 있는 제게 경찰관들이 물어 옵니다. 혹시 쌍용차 어디 지부장이신가요? 삼성전자 서비스센터 직원이셨지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들 있는지. 조사 받을 때 다 얘기했잖소. 한국비정규노동센터 편집부장이라고! 제 이력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공권력에 의해 조작되고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구속영장이 청구됐답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성질이 머리끝까지 나더군요. 당당하니, 당당할 수밖에 없으니 그놈의 구속영장 하나도 무서울 거 없었습니다. 그런데 구속영장 내용, 가관입니다. 그 중 구속 사유만 따져 보겠습니다.
피의자 ○○○는 前 삼성전자 서비스 직원이었던 자로 現 비정규노동센타 회원인 자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저는 전직 역사교과서 편집자였고, 현직 '한국비정규노동센터 편집부장'입니다. 사실 관계조차 엉망으로 왜곡되어 있습니다. 경찰 조서에 다 밝힌 바 있는데 말입니다. 견(犬)찰이라고도 불리는 검찰 무리들의 소망이 반영된 것이죠. 어떻게든 얽어매서 구속시키고 싶은.)
피의자는 금속노조 노조원이 아니어서 상 피의자들과 어떠한 이해관계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범행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연대'의 가치를 폄훼하고 싶은 검·경의 지질한 인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지요. 진압 목적도 제대로 밝히지 않은 채 밀고 들어오는 전경을 막는 행위가 '범행'에 해당하는지, 오히려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야말로 '범행'이 아닌지 되묻고 싶은 부분입니다.)
채증자료 상 혐의사실이 명백함에도 반성하지 아니하고
(영장실질심사에서 판사가 제게 보여 준 채증 사진들은 제가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단순히 전경의 진입을 저지하다가 잡혀갔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 채증 사진들은 경찰서에서 조사받을 당시엔 제게 보여주지도 않았던 것들이었습니다. 급조한 티가 역력하지요.)
경찰관들의 정당한 공무집행을 방해하기 위하여 경찰관을 막은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일관되게 주장하며 조사태도 또한 극히 불량한 자입니다.
(예삿말, 높임말이 뒤섞인 근본 없는 청구서 양식이 일단 눈에 띄네요. 불량합니다. 진압 이유도 제대로 밝히지 않은 채 들이닥친 전경을 막은 행위, 정당하다고 이야기했지요. 정당하니까요. 저를 담당한 경찰관과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비교적 짧은 시간에 조사를 마쳤는데, 좀 더 잡아넣기 수월하도록 빡빡하게 굴지 않았던 게 못마땅했나 봅니다. 조사 태도가 불량했다니요.)
피의자는 자신을 검거하려던 서울지방경찰청 ○○기동대 박○○ 순경을 밀쳐 왼쪽 무릎 십자 인대 부상을 입히는 등 죄질 또한 매우 불량합니다.
(전경을 밀어서 넘어뜨린 적도 없거니와 저를 연행해간 경찰관과는 조금의 마찰도 없었습니다. 어째서 단 한 번의 대질도 없이 경찰관의 증언만 증거 삼아 구속영장을 청구할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피의자의 조사태도 및 현장에서의 태도를 종합하면 피의자는 방임(불구속) 시 또 다른 집회현장에 참가하여 재범의 우려가 높아 피의자 구속하고자 합니다.
(뭐 하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없으면서 검찰은 제 멋대로 이러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속된 말로 똥줄 탄다고 하지요. 딱 그 꼴입니다.)
덕분에 영장실질심사라는 걸 하러 수갑 차고 포승줄에도 묶인 채 법원에 가게 되었지요. 기분 더럽게 하는 데 수갑과 포승줄만 한 게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당당하기에 고개 처 들고, 가슴 펴고 다니겐 되더군요. 과거 민주화 투쟁을 하던 인사들이 카메라 렌즈에 묶인 손 들어 보이며 웃던 기분이 그런 거였나 싶기도 하고요. 저희를 법원으로 데리고 온 강남서 경찰들이 공안검사가 왔다고 호들갑을 떨어 댑니다. 보통 영장실질심사에는 판사와 변호인만 참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공안 사건인 경우는 공안검사가 온답니다. 그만큼 시간도 오래 걸리더군요. 졸지에 저는 공안사범이 된 것이죠.
황당하면서도 웃긴 건 법원까지 온 검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겁니다. 제 변호인들(금속노조 법률원 소속 변호사들)과 저만 이야기를 하고 검사는 제출한 보고서로 갈음한답니다. 묻고 싶더군요. 젊고 멀쩡한 검사가 어쩌다 검찰 내부에서도 충견 중의 충견으로 일컬어지는 공안통으로 가셨는지. 법원까지 와 놓고서는 마치 본인이 피의자인거 마냥 책상만 응시하고 앉아 있는지. 심사 마지막에 판사가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라더군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신고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장례식장이었고, 민감한 사안이기에 유족 측과 노조 측이 대동한 자리에서 신중한 논의가 진행되어야 했고, 그 사실을 일반 노조원들과 조문객들에게 정확히 밝혀야 했고, 그래도 안 된다면 이후 전경들을 데리고 와 진압작전을 펴는 게 순서임에도 불구하고 슬픔에 잠겨있는 이들을 다짜고짜 진압한 경찰들의 행위야 말로 아주 불손하고 무례하다고.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바보처럼 고개 떨구고 있는 검사를 보니 더요. 본인도 환장했겠지요. 이 말도 안 되는 사안을 가지고 법원까지 와서 한바탕 쇼를 해야 하니.
다시 유치장으로 돌아와 심사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오후 10시까지는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11시가 넘어도 결과가 나오지 않자 억울하게 구속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11시 반쯤 되었을까, 심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끝까지 잡혀 있던 3명 중 절 포함한 2명은 석방되었으나 1명은 구속영장이 청구되고 말았습니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라두식 수석부지회장님이셨지요. 순수하고 열정적인 마음으로 힘겹게 투쟁해 오시던 그 형님을 끝끝내 개만도 못한 검찰이 물고 늘어지더군요. 두고 나와야 하는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생전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지요. 나온 뒤 위영일 지회장님과 김선영 영등포분회장님께도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단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져 왔습니다.
이런저런 글들과 증언을 통해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공권력의 속성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는 것과 깨닫는 건 천양지차지요. 이번 경험으로 공권력의 속성에 대해 깨달았습니다. 노조를 무력화시키려는 삼성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우나, 무소불위의 삼성에 맞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조원들에게는 최소한의 예의도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고인의 유지를 받들고자 고인의 생부 앞에서 무릎 꿇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노조원들. 그런 그들에게 입장을 바꾼 생부의 신고만으로 순찰차가 아닌 전경 3개 중대를 보낸 민중의 썩은 지팡이 경찰. 진압 목적과 경고방송을 제대로 듣지도 못한 노조원들을 강제 진압한 뒤 '장례식 방해'와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한 견(犬)찰. 거대권력에게는 너무도 온순하지만, 힘없는 서민들에게는 너무도 과감한 그들. 그들의 진면목을 이번 경험으로 절절히 알게 되었습니다. 얼간이 같은 공권력의 엄포에 순간적으로 쫄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순간일 뿐이죠. 복잡한 일에 얽히기 귀찮아서 남의 일에 간섭하기 싫어하는 저부터 전의가 불타오릅니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조원들이야 더 말해 무엇 할까요. 노조는 죽어도 안 된다던 어느 꼰대의 유지, 우리 동지들이 사뿐히 즈려 밟아 주실 겁니다.
쫄깃한기타
편집 :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