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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6. 20. 금요일

물뚝심송















정부는 전교조에게 관계법에 따라 “해직자를 노조원에 포함시키지 않도록 하는 규약개정”을 명령했고, 전교조는 이를 거부한 탓에 “법외노조”가 되고 말았다. 이 명령의 적법성 여부를 따지는 재판에서 법원은 정부의 명령이 법적으로 타당하다는 판결을 내리고 말았다.


이 과정만 놓고 본다면, 법원을 비난하기는 힘들어진다. 법원은 법을 만드는 기관이 아니며, 따라서 법의 내용에 있어 민감한 부분을 심판하라고 요구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냥 있는 법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부의 명령을 거부한 전교조가 잘못인가? 전략적으로는 실수일지 몰라도 최소한 명분상으로는 전교조의 잘못도 아니다. 전체 6만이 넘는 조합원을 거느린 노조에서 노조의 자격을 상실하게 될 것이니, 알아서 규약을 개정하라는 명령을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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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그 명령의 내용이 함께 싸워온 동료들에게 해직을 이유로 조합원 자격을 주지 않는 것으로 규약을 변경하라는 내용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오히려 이 명령을 받아들였다면, 전교조는 명분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전교조는 이 결정을 위해 전체 투표를 시행했고, 압도적인 과반수가 법적인 지위를 잃고 풍찬노숙의 길을 가더라도 그런 규약 개정은 하지 말자는 쪽을 선택했었다. 이 결정은 칭찬 받아야 할 결정이지 비난 받아야 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잘못된 명령을 내린 정부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답이 나온다. 정부가 교원 노조를 싫어하고 탄압하고 있는 것은 맞다. 이점은 분명히 원칙적인 비판이 가능한 부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지금 탈법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단히 교활한 수순이긴 했지만 정부는 분명히 관계법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적법한 명령을 내렸고, 그 명령이 지켜지지 않자 제재를 가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만약 정부가 이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반대측에서는 전교조가 분명히 탈법한 규약을 가지고 있는데 정부가 왜 방관하고 있느냐면서 정부의 업무태만을 비판했을 것이기도 하다.


정부를 비판하려고 한다면 딱 이 선에서 해야 한다.



“정부는 왜 노조를 탄압하는가?”



물론 아주 원칙적이고 약간은 공허한 비판에 그치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가 잘못되어 조합원 6만의 규모를 자랑하는 최대 규모의 교원노조, 엄청난 투쟁의 역사를 간직한 그 전교조가 법의 테두리 바깥으로 쫓겨나게 되었는가? 이 전교조가 어떤 희생을 치르면서 합법적인 지위를 얻어내게 되었는지 그 역사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피눈물이 날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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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교조가 정말 어떤 희생 속에서 만들어진 전교조인데…



그 이유는 바로 정부가 그런 기괴한 명령을 내리게 된 근거가 되는 기괴한 “관계법”의 존재다. 노태우 때 만들어졌고, 그 뒤로 아무도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는 그 조항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우리의 법체계가 문제다. 그 법체계를 그대로 내버려 둔 국회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국회에도 변명이 있다. 다수당의 지위를 빼앗긴 지 오래인 야당이 어떻게 그런 조항을 개정할 수 있겠는가 하는 반론이다.


그럼 뭐 결국 아무도 책임을 못 진다는 말인가?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말인가?

 

 

 

 

우리 사회의 문제 해결능력


핵심은 이것이다. 뭔가 결론이 나온 다음에 시끄럽게 싸우기만 하는 우리 사회의 습성, 시스템의 강화를 통해 사전에 문제의 발생을 최소화시키는 노력이나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권력을 이용해 탄압하거나 투쟁을 통해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에 주력하는 전투적 습성이 문제의 핵심이다. 전형적인 양비론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게 핵심이라는 사실은 양보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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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싸우고 보는 거다



권력은 권력대로 이해 관계자의 동의를 구하는 타협을 하기 보다는 손쉬운 통제와 강압, 나아가서 탄압에만 익숙해져 있다. 그 권력에 반대하는 진영에서도 운동권에서 시작된 그런 투쟁의 전통이 노동단체에 퍼져 나가고, 시민사회진영에까지도 퍼져 나가 아직도 권력과 타협을 하게 되면 변절의 의혹을 받게 되고, 순수성의 의심을 받게 되며, 강경한 투쟁만이 선한 일이라는 시대착오적 인식들이 관행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애기다.


물론 그게 시대착오적이 아닐 수도 있다. 저 무지하기 짝이 없는 박근혜 정권을 상대로 어떤 타협이 가능하겠냐는 주장, 아직은 법치의 테두리 안에서 타협과 공존을 얘기하기에는 시기상조이며, 우리 사회는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주장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식민지 피지배계층에서나 가짐직한 자기 비하적 역사관을 가진 꼴통급 인사를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하는 모습을 보며, 이 정권은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 집단이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서 미래를 바라보며 대화와 타협을 우선하자는 주장을 도로 집어넣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그래도 장기적으로 보자면 변화해야 한다. 이 주장을 접을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생각하자는 것이다. 대화를 통한 우리 사회의 문제 해결능력은 처참한 수준이다. 서로간에 제대로 된 정보만 교환되어도 다 풀릴 만한 문제를 가지고도 무작정 힘 싸움으로 결판을 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권력은 언제나 독재를 하고, 저항하는 자들은 언제나 투쟁만 하는 시대를 무려 삼십 년이 넘게, 아니 삼십 년이 뭐야, 해방 이후 지금까지 반세기가 넘게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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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필요해♬



이제는 제발 좀 그런 관행을 버리고 좀더 교활하고 효율적인 방안을 찾는 것이 어떻겠냐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강성 세력이 모여 투쟁만 하는 것에서 벗어나,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홍보에 주력하고, 그렇게 획득한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국회를 압박해서 관련 법 조항을 먼저 정비하고자 하는 노력이 지속되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식으로 다양한 문제제기가 국회내의 야당을 통해 표출되기 시작하면 제아무리 독재적 정권과 다수 여당이라 하더라도 타협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살벌했던 시기에 전교조가 합법화 될 수 있었던 배경도 이런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전교조의 법외노조화를 걱정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직도 합법화 되지 못한 전교조를 보며 고통스러워했어야 하니까 말이다.


나아가 한 건 한 건 사안별로 나눠 투쟁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걱정하기보다는 그런 사안들을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하나씩 해결해 나가고자 하는 조용하지만 교활한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해결 능력이 너무 낮아서 이 모든 고통이 발생한다면,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개별 사안의 성취보다는 포괄적인 문제해결 능력을 상승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뒤지고 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한 문제 해결 방식은 결국 여론에 의지하게 된다. 여론을 움직이는 것은 언론과 미디어다. 그런 상황 탓에, 저들이 이렇게 무자비하게 메이저 언론을 장악한 상태에서 무슨 대화와 타협이 가능하겠냐고 반론하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자. 저들이 법이고 나발이고 다 무시하고 사람들을 잡아다가 개 패듯이 패고, 영장도 없이 며칠씩 감금해서 고문하고, 시위 군중에게 직격으로 최루탄을 쏴서 사람 죽이고 하던 시절은 언제부터인가 끝나 버렸다. 저들 역시 더 이상 이런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87년을 기점으로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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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여론을 움직이기 위해 언론을 장악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손배소를 걸어 돈으로 압박을 하고, 법조항의 허점을 이용해서 교활하게 소송을 거는 스타일로 전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우리보다 앞서서 변하고 있는 중이다.


전교조의 역사만 보더라도 그렇다. 전교조에 가입만 해도 해고를 시켜 학교에서 쫓아내던 시절과 달리, 법 조항을 샅샅이 뒤져 허점을 발견하고, 그 구멍을 교활하게 이용해서 법적 지위를 박탈하는 식으로, 즉 무술경관을 내세워 두들겨 패던 시절에서 데블스 애드버킷을 활용해서 법정 싸움을 벌이는 식으로 전환한지 오래인 것이다


이에 맞서기 위해 “우리 동지 모두 모여 어깨를 나란히~ “ 노래를 부르며 투쟁의 대오를 세워 승리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아니 그 이전에 2014년 현재 그런 투쟁의 대오를 세울 수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


불확실하고 믿기 힘들겠지만, 분명히 여론은 우리의 편이다. 심지어 전교조에 대한 여론이 극단적으로 악화되어 “전교조 후보는 절대 안 된다”라는 주장이 횡행을 하는 선거 판에서도 전국 17개 광역 중 13곳에서 진보계열 교육감이 당선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여론, 민심의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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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속에서 그들을 설득해 내고, 왜 전교조가 합법 조직이어야 하는지 설명하고, 관련 법 조항 중 악법들이 왜 폐기되어야 하는지를 이해시킨 뒤, 그 힘으로 야당 의원들을 압박해서 지속적으로 노조법 개정안을 제출하는 것이 그리 불가능한 일일까?


운동권의 용어를 버리고, 붉은 머리띠와 조끼를 입고 죽창을 드는 투쟁 방식을 버리고, 뉴미디어를 활용해서 우리가 혁신학교를 어떻게 만들어 내고 있는지, 죽어가는 공교육을 살리기 위해, 학생들을 입시지옥에서 조금이라도 구해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그렇게 불가능한 일일까.


심지어 OECD 나 ILO등의 국제기구의 여론까지도 우리편이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한국 정부의 몰지각한 법 적용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으며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국회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게 되면, 결국 타협은 벌어진다. 노조법은 개정될 것이고 전교조의 법적 지위는 회복될 수 있으며, 교육의 질이 개선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물론 대화와 타협으로 해야 할 일이 있고, 투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어느 한 쪽만 가지고는 절대 안 된다. 저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무력 탄압으로 할 일이 있고, 법과 여론을 이용해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양 쪽 모두에서 밀리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이기고 싶다


승리하는 싸움을 하고 싶은 것이다. 명목의 승리, 주사파들이 잘하는 승리적 해석에 의한 정신 승리 말고 실질적으로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는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싸움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아니, 그 승리라는 말 자체가 어느 한 쪽이 유리해지는 결과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승리는 이 사회가 한 걸음이라도 더 진보하는 것,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는 것,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는 것, 심지어 우리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던 사람들까지도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니었던가?

 

 

그 대전제 앞에 관습적인 운동권 용어, 투쟁적인 습관 등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권력에 적폐가 있다면, 우리에게도 있다. 운동권 내부에 어떤 꼰대들이 횡행하고 있는지, 그 꼰대들이 어떤 꼰대스러운 짓을 하고 있는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그런 것 좀 이제 걷어내야 할 시점이 다가왔다.


합리적으로 싸우고 합리적으로 이기고 싶다. 제 아무리 밀리고 있어도, 이미 우리에게는 그런 제대로 된 승리를 할 만한 역량들이 차곡 차곡 쌓여가고 있는 중이다. 이걸 부정할 수 있는가?


세월은 흘러가고 산천은 안다.


우리도 이제 변할 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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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쪼록 전교조가 법외 노조라는 한계에 부딪혀서도 굴복하지 말고 자신들의 갈 길을 계속 가 주길 기원한다. 나아가 동료 교사들과 전 국민의 성원을 불러 일으켜 우리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기반을 만들어 가는 교육이라는 중차대한 책임을 완수해 나가는 전교조의 모습을 보게 되길 기원한다.


끝.







물뚝심송

트위터 : @murutukus


편집 : 꾸물,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