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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6. 23. 월요일

카인









시베리안 허스키라는 밴드가 있다.


난 이 밴드의 팬이 아니다. 외려 잘 모르는 편이다. 그래도 홍대 언더그라운드 락에서 꽤 오래 이름을 알려온 밴드기에, 당연히 들어본 적이 있었고 그래서 기억도 하고 있다.


시베리안 허스키.jpg 


원체 한국 힙합은 자기들끼리 노는 문화가 강하다. 다른 장르와의 교류도 별로 없고, 심리적으로도 멀다. 홍대 바닥이나 강남 클럽이라는, 공간적으로는 같은 곳을 사용하지만 차원이나 위상이 다른 존재 같이 평행선처럼 지나친다. 우리는 우리, 그들은 그들.


그래서 시베리안 허스키는 내게 그저 '그런 밴드가 있다던데' 정도의 무게였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다른 밴드에 비해 이들에게는 두 가지 좋은 기억이 있다.


2007년 여름쯤이었을 거다. 난 군인이었고, 계급은 이병이었으며, 이제 막 100일 위로 휴가를 나온 참이었다. 때맞춰 미국 국적인 누나의 두 딸이 지들 엄마를 따라 처음 한국에 놀러왔다. 당연히 막내 삼촌인 나도 그들을 처음 본다. 매우 어색한 친지 관계였다.


그래도 그 삼촌이란 작자는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에서 뭐 좀 얻어먹으려고 빌빌거리다가 군대를 간 녀석이다. 난 내가 놀던 바닥을 좀 자랑하고, 그걸로 한국계인 그들에게 한국에서의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삼촌 노릇도 좀 해보고 싶었고.


토요일로 기억한다. 큰 녀석은 성인 문턱까지 와있었기에 어린 둘째는 놔두고 녀석만 홍대로 데려갔다. 첫 코스는 6시쯤 시작하는 친구 크루의 공연이었다. 전체적으론 공연이 괜찮았지만, 몇몇이 아마추어 티를 벗지 못했기에 약간 지루한 감도 있었다. 조카의 안색을 살피자 그저 그런 평이한 반응이다. 이국의 인디 음악 공연을 보는 흥미 같은 건 딱히 보이지 않았다. 조바심이 생겼다.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주변에 전화를 좀 돌리자, 놀이터에서 곧 사이퍼(cypher)를 열 거라는 동생들의 정보를 얻었다. 붐박스 하나 틀어놓고 이 사람 저 사람이 프리스타일 랩을 서로 하며 즐기는 거리의 파티. 이거면 면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크루의 동생들이야 이런 사이퍼 모임을 문화 운동처럼 지속적으로 하는 놈들이니 프리스타일을 매우 잘하는 녀석들이고, 그 주변에 모여드는 사람들도 주로 유쾌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건 거리 문화의 생생한 현장 아닌가. 조카가 매우 신기해하며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지나가던 미국과 캐나다의 관광객들까지 사이퍼를 구경하러 와 조카는 그들에게 통역도 해주면서 즐거운 한 시간을 보냈다. 난 불만족스러웠다. 두 시간 짜리 평범한 공연과 한 시간 좀 넘는 사이퍼만으로는 내 체면이 딱히 확고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날의 사이퍼는 잘 하는 사람과 재밌는 사람이 평소보다는 적어서 생각보다는 일찍 파하게 되었다.


나는 그날 운이 매우 좋았다. 사이퍼가 끝나갈 때쯤, 한 밴드가 연습실에서 연습하다 말고 필을 받아, 악기와 장비를 들고 놀이터에 와서, 요즘은 버스킹이라고 부르는, 즉석 거리 공연을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시베리안 허스키였다.


거리공연.jpg 


매우 자연스러운 바톤 터치였다. 둔탁한 비트 위에 잘 하는 사람이고 못 하는 사람이고 모여서 즉흥 랩을 하며 즐기던 사이퍼의 흥겨움이 시들해지자마자 나타난 밴드는 청량하고 힘 있는 사운드를 놀이터 위에 강림시켰다. 조카는 신이 났고 난 나도 모르게 목에 힘을 줬다. 공연-사이퍼-버스킹으로 이어지는 풀코스로, 내가 사랑하는, 인디 음악의 자유스러운 향을 조카에게 제대로 보여줄 수 있었으니. 그래, 삼촌은 이런 바닥에서 놀았단다.


경력 오랜 밴드답게 시베리안 허스키의 버스킹은 한 시간이 지나도 끝날 줄을 몰랐다. 10시가 되었고 아직은 미성년인 조카를 택시에 태워 집으로 보내고 난 사이퍼를 끝낸 동생들과 술을 마시러 갔다. 단골 술집으로 향하는 우리 뒤로 시베리안 허스키의 연주와 노래는 여전히 울려퍼졌다. 내 발걸음은 매우 가볍고 즐거웠다.


시간이 꽤 지난 후의 난, 전역을 했고 음악은 관뒀고 딴지에 입사해 열심히 일하다가 퇴사를 했다. 게으른 글쟁이의 삶을 즐겁게 살다가 어떤 여자를 만났다. 재밌게 같이 놀았고, 애인 사이가 되었다.


그녀가 단골로 가는 술집이 홍대 놀이터 근처 골목 안에 있었다. 술집의 상호명은 '핑크문'이었다. 분위기는 내가 익숙한 형태는 아니었다. 흑인 음악보다는 락과 포크가 지배하는 공기였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 안 어색한 척 앉아있었다. 한 구석에는 드럼 세트도 놓여있었다. 홍대에서 흑인 음악이 아닌 장르를 하시는 분들은 이런 분위기에서 노시는 건가 싶었다.


핑크문.jpg


맞았다. 그 가게에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조촐한 파티였다. 일종의 지역 공동체 모임 성격도 살짝 엿보이는, 정말 조촐하고 편안한 분위기의 파티였고 참석자의 반은 뮤지션이었다. 그들이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다가 잠깐 나와서 몇 곡 부르고 다시 들어가는 식이었다. 왁자지껄하고 신나는 분위기에 익숙한 나는 아주 약간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옆에 있는 여자친구의 체면도 세워줘야 하니 착한 남자친구의 연기를 하며 착실히 앉아 분위기를 즐겼다.


거기서 그녀를 만났다. 여자친구는 이곳, 핑크문에서 친해진 지인이라며 한 여성을 소개시켜줬다.


시베리안 허스키의 보컬, 유수연 씨였다. 단박에 몇 년 전, 즐거웠던 어느 토요일의 기억이 났다. 그때 그 밴드, 그 유명하고 오래된 밴드의 보컬이시라니.


유수연.jpg 


난 너무 반가웠다. 약간 장황하게 말을 꺼냈고 유수연 씨는 큰 경계를 보이지 않고 차분히 내 이야기를 들어줬다. 약 6년이 지난 그 날, 난 본의 아니게 내 체면을 세워주고 내 조카를 즐겁게 해주신 데 대한 고마움을 말씀드렸다. 유수연 씨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녀는 앞에 있는 사람을 매우 편하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다소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 즐겁기는 하지만 이질감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던 나는 여자친구-유수연 씨와의 3자 대화에서 안정을 찾았다. 그 분은 딱히 알지 못할, 나 혼자만의 두 번째 고마움이 생겨났다.


그 날 시베리안 허스키 혹은 유수연 씨의 공연이 있었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그때부터 나는 핑크문의 분위기를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얼마 후에 배도 부르고 졸음이 오기 시작한 여자친구가 집에 가기 위해 나왔을 때, 유수연 씨는 언니 이제 가는 거냐며 가게 밖까지 나와 짧은 수다로 배웅을 해주었다.


이게 작년의 일이다. 그리고, 내게는 그녀와의 마지막 조우였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어제, 시베리안 허스키의 보컬 유수연 씨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부고.png 


그 날의 조카는 이제 성인이 되었고, 그 날의 여자친구와는 헤어진 지 꽤 되었으며, 유수연 씨는 이제 없기에, 두 번째 고마움은 전해드릴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어느 이등병이 휴가 나와 조카와 함께 들었던 그 목소리도 이제는 현장에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팬도 아니고, 그녀와 그녀가 소속된 밴드의 음악을 잘 아는 것도 아니며, 지인이라는 위치도 걸맞지 않는 내가 그녀의 죽음 앞에 이야기할 것은, 그녀의 우울증도, 그녀의 음악도, 그녀의 경력도, 그녀의 외모도 아닌 이 두 번의 조우에서 느낀 고마움이다. 음악 이전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 우선인 법이니, 두 번 스쳐간 것이지만 충분히 좋은 추억을 남겨준 그녀의 마지막 길에, 이 추억을 초라한 글로 남겨 조문 삼아 봉헌한다.


유수연 씨에게 명복을. 이제는 편히 쉬시길.


근조.jpg







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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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