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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6. 26. 목요일

벨테브레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이 밝혀지는 바람에 '자진'사퇴하며 박근혜(김기춘) 정부 2기 내각 구성은 급물살을 타게 될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김기춘) 정부는 제자의 논문에 이름을 빌려주신 따뜻한 성품의 교육문화수석비서관과 술자리에서 맥주병으로 기레기를 응징하는 호연지기를 보여준 민정수석비서관을 비롯한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하였고, 문창극을 제외한 새 장관 후보자들에 대한 인사청문요청안도 국회에 제출하여 나머지 인원들은 어떻게든 살려보겠다는 고집으리를 보여주었다.

 

그들과 함께 할 인사청문회가 월드컵 못지않게 기대되는 가운데, 특히 이병기 국가정보원장 후보자에 대해서는 지난날 '북풍'사건 및 '차떼기'사건의 연루자라는 점에서 많은 논란이 예상되고 있다.

 

다들 알다시피 국정원은 지난 대선 개입 의혹에서 자유롭지 않은데다가 이번 정부에서도 간첩 조작 사건 등 흑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훌륭한 원장이 와서 조직의 체질을 싹 뜯어고치지 않으면... 해체를 당할지도 모른다그러면 수많은 사이트에서 암약하고 있는 요원들의 생계는 물론, 국정원 7급 공무원을 꿈꾸며 열공중인 수험생의 진로는 한마디로 좋게 되는 것이다. 하여 필자는 댓글알바들의 청년실업을 걱정하는 잉여력 돋는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새 국정원장 후보자 이병기에 대해 살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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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디벼볼 인물 되시겠다. 이병기.


사실 필자는 이병기가 국정원장에 내정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쎄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라는 인상은 있었지만 그보다는 '주일대사'라는 현직의 무게가 주는 압박감이랄까? 주일대사 재직 중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발탁된 사례는 딱 한 번 있었는데 바로 이 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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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다. 그는 7.4 남북공동성명을 주도하며 통일대박의 분위기를 불러 일으켰다가 석 달 뒤 10월 유신을 일으키며 "페이크다 이놈들아!"가 무엇인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었고, 마지막에는 자기가 대사로 재직하던 일본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일으켜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개판 5분전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역대 정보부장 중에 김종필, 김재규, 전두환 말고는 그 존재감을 당해낼 이가 없으리라.


이후락과 이병기는 '주일대사 출신 정보기관장'이라는 공통분모 외에도 여러 정권에서 활동했다는 점(이후락은 이승만-장면-박정희, 이병기는 노태우-김영삼-박근혜)과 청와대 비서실에서 오래 근무했다는 점(이후락은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510개월, 이병기는 노태우 대통령 의전비서관-의전수석으로 5), 재벌가와 사돈을 맺었다는 점(이후락은 SK, 한화 등이병기는 LIG) 등에서 유사한 코드를 지니고 있다. 아버지 박통 시절에 대한 향수를 국정 운영의 모토로 삼는 박근혜(김기춘) 입장에서는 그런 유사점들도 국정원장 발탁의 플러스 요소가 되지 않았을까?


문제는 이병기가 담당해 왔던 일본과의 외교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거다남북관계와 한일관계가 경색, 교착국면에 빠진 사이 북한과 일본이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 벌써 여러 차례 정부 차원의 접촉을 가져온 북한과 일본은 529일 스톡홀름에서 일본인 납치 피해자 문제 재조사와 대북 제재 해제를 골자로 하는 국장급 회담 결과를 발표하는 등 의미 있는 성과를 도출해 냈으며 이후로도 지속적인 회담을 추진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아베 총리 재임 기간 중에 북-일 국교 정상화와 북-일 정상회담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북-일 밀월의 결과 고립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김정은은 미국인 3명과 한국인 선교사 김정욱 씨를 잇달아 억류하며 배짱을 튕기고 있고, 아베 정부 또한 과거사 문제 따위 별거 아니라는 태도로 고노 담화를 검증하겠다거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하겠다는 등 막나가고 있는 것이다.(이 판국에 일본 식민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며 위안부 문제는 사과를 받을 필요 없다는 총리가 출현할 뻔 했으니 일본에서 하악거릴 수밖에...) 국정원장 내정 발표 직후 아베가 이병기를 불러 면담한 것도 이와 관련된 내용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인사청문요청서 중 "駐日대사 재임 중에는 급격히 냉각된 한일관계 안정화에 주력하여 일본 정부가 무라야마 담화(식민지배 사과)와 고노 담화(위안부 강제동원 사과)를 계승한다는 입장을 발표하도록 유도하고, 위안부 문제 논의를 위한 한일간 국장급 협의를 개최하는 등 새로운 협력시대를 열기 위해 본연의 역할 수행에 진력하였음" 운운하는 대목은 문창극을 한류스타로 묘사하는 것만큼이나 신뢰하기 어렵고 박근혜(김기춘)도 이병기를 얼른 일본에 돌려보내든지 하루 속히 주일대사를 임명해서 좋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처해야 할 것이다. 안전행정부/해양수산부 장관이 동시에 바뀌고 어수선한 틈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고, 국방부 장관이 국가안보실장이랑 투잡을 뛰면서 후임 인사청문회 늦어지는 사이에 총기 난사 사고가 일어난 걸 생각하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다.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와서, 1947612일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이병기 후보자는 경복고(이거 중요하다, 주목해 두자.)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거쳐 1974년 외무고시(8)에 합격한다. 외시 동기 중에 이름 높은 사람으로는 이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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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의 선봉이었던 새누리당 김종훈 의원이 있다별로 친한 것 같지는 않다. 일단 넘어가기로 하고,

 

197411월 외무부 북미국 북미2과에 입부한 이병기는 197557일 육군 현역병으로 입대하였으나, 불과 7개월 만인 1975124일 가사사정으로 인해 이등병으로 전역한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외무부 영사교민국 여권2과로 발령받아 복직하게 된다.

 

다소 의아한 것은, 외무고시 출신 현직 외교관이 '질병'도 아니고 '가사사정'으로 조기 전역했다는 부분. 2대 독자라 6개월 방위복무 후 소집해제되었다고 해명하고는 있으나 구체적인 병역 이행 사항은 좀 더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후 외무부 북미2과와 주 제네바 대표부, 주 케냐 대사관 근무를 마친 이병기는 외무부를 떠나 19819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정무장관실, 그 뒤 잠시 체육부를 거쳐 19825월부터 19837월까지는 내무부, 그 다음부터 19852월까지는 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일하게 된다. 철새처럼 이 부처 저 부처를 전전했던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무2장관과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거쳐 올림픽 조직위원장을 역임하셨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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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리 이 분의 밑에서만 보좌관으로 일해 왔던 것.

 

이렇다 할 연고도 없던 이병기가 노태우의 밑에서 일하게 된 건 당시 제네바 대표부 시절 상사로 모셨던 노신영 외무부 장관의 추천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이병기는 노태우가 대통령에서 물러날 때까지 장장 116개월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심복이 된다.


노태우가 민정당 대표가 되며 당으로 옮겨 6. 29 선언의 실무를 맡았던 그는 노태우 정부에서 5년 내내 청와대 의전비서관 및 의전수석비서관을 맡으며 '문고리 권력'이 되었다당시 청와대 의전수석은 대통령 면담 일정을 잡을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지녔기 때문. 약관 40대 초반이었던 이병기는 이러한 권력과 노태우의 신임을 바탕으로 '북방정책' 수립이나 3당합당 과정에 참여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한편 이 과정에서 이병기는 새로이 여권에 합류한 경복고 동문 김덕룡, 이원종, 김현철 등 YS 측근들과 인간적인 신뢰를 쌓으며 노태우가 YS 대세론을 받아들이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본인의 권력을 활용하여 노태우에게서 반 YS 인사를 차단한 반면, YS 인사들과의 면담을 대거 주선했던 것.(경향신문 1997324일자 '비록 문민권력 탄생막후(11) - 경선서 대선까지' 참조)

 

그리하여 김영삼 정권 수립 이후에도 이병기는 관운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친정인 외무부에서 외교안보연구원의 연구위원을 맡았다가 199412월 안기부장 2특보로 정보기관에 입성하게 된 것이었다이후 이병기는 199612월부터 19983월까지 안기부 2차장을 역임하며 황장엽 망명 사건을 처리하는 등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199715대 대선을 앞두고 안기부는 여러 건의 '북풍' 공작을 진행했으나 그들의 간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상이 의심스러운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말았다. 이병기는 안기부 2차장에서 물러나기가 무섭게 출국금지에 밤샘조사를 받는 등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되었다.

 

핵심은 안기부 2차장 휘하에 있던 203(해외조사실)이 벌인 북풍 공작과 관련된 것들, 예컨대 15대 대선을 앞두고 자칭 재미교포 사업가라는 듣보 윤홍준이 뜬금없이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이 김대중 후보에게 자금을 제공했다는 주장을 했는데사실 이건 이병기 2차장 산하 203실의 공작이었던 것이다. 다만 이병기는 이대성 203실장으로부터 윤홍준의 단독 기자회견으로 보고받았을 뿐 직접 관여한 것은 아니라는 이유로 사법처리를 피할 수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모양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변명을 곧이곧대로 들어준다 해도 명색이 안기부 2차장으로서 부하 직원들한테 허위 보고를 받았다는 굴욕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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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소위 '이대성 파일'이라 불리던 대북 첩보 활동 보고서의 상당수가 0-0(권영해 안기부장)은 물론 2-0(이병기 2차장)에게도 올라갔다는 점, 안기부 2차장에서 퇴임하던 이병기가 이대성에게 "직원들이 구속되는데 퇴직 후에라도 무슨 재주로? 힘써 주겠으니 관련 서류를 가져오라"고 지시하여 위 보고서 등 다수의 안기부 내부문건을 가져갔던 점(이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사무실에 이 문건을 보관하던 이병기는 8일 뒤 안기부에 반환하였고, 검찰 또한 문건 유출에 대한 혐의점을 찾지는 못했다. 그러나 위기에 몰린 이대성이 파일을 터뜨렸던 것처럼이병기 또한 문건들을 근거로 알리바이를 만들거나 딜을 시도했을 개연성은 없지 않은 것 같다.), 무엇보다 30~40대 초반에 권력 핵심부를 직접 체험하며 권력의 생리에 민감해 있었을 이병기가 상관인 부장과 부하 직원들이 선거에 개입하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건 문창극이 김대중을 존경해 왔다는 것만큼이나 믿기 어렵다는 점 등에 비추어봤을 때 법적 책임은 몰라도 정치적 책임에서 자유롭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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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가능성은, 커터칼로 할복을 기도하며 억울함을 토로했던 권영해 부장이나, 초원복집에서 기춘 옹과 식샤를 함께 했던 박일룡 1차장과 달리 이병기가 이회창 당선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 한겨레 1998321일자 "흑금성 '박일룡씨도 핵심 책임자'"에 따르면 당시 공작들은 지휘계통을 벗어난 비공식라인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하며 이병기는 지휘선상에 있으면서도 이 공작에는 소극적으로 대처했다고 한다.


당시 대선은 이회창, 김대중 말고도 피닉제가 출마하며 여권 지지자들을 일대 고민에 빠뜨린 상황이었고, 선거 막판에는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는 구호까지 등장하며 피닉제는 이회창보다 외려 DJ 쪽에 가까워지는 분위기였다. 피닉제의 경복고 1년 선배인 이병기로서는 굳이 이회창 당선에 목을 맬 필요가 없었을지 모른다. 아니, 그보다는 권영해나 박일룡 등 이회창 지지자 입장에서 이병기를 불신했을지도 모르는 일. 그러지 않고서야 해외/대북관련 공작들을 담당 차장을 제끼고 부장이나 국내담당 차장이 처리를 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궁예가 아닌 이상 이 모든 건 가설에 불과하지만, 무능이든, 딜이든, 뜨뜻미지근한 처신이었든 이병기는 북풍을 이겨내고 살아남을 수 있었고,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일본 게이오대학교의 방문교수로 와신상담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지인을 통해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소개받으며, 세 번째 권력 만들기에 도전한다. 200112월부터 한나라당 총재특보 및 대통령 후보 특별보좌역을 역임하며 16대 대선에 뛰어든 것. 그러나 이회창은 패배했고 이병기에게도 잊지 못할 흑역사가 하나 더 생겨났으니 바로 '차떼기 셔틀' 사건이다

 

이회창 vs 노무현의 대결로 압축된 2002년 대선에서, 민주당 경선부터 물을 먹은 피닉제는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민주당을 탈당하려던 참이었다. 그 무렵 피닉제의 고교 선배인 이병기는 피닉제에게 "민주당을 탈당하면 한나라당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는가 하면, 피닉제의 공보특보였던 김윤수에게도 이인제의 한나라당 입당을 권유한다. 그러나 피닉제는 당적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기 위해 한나라당은 10년 뒤에 입당하기로 하고 우선 자민련으로 간다.

 

당시 한나라당 선거대책본부장이던 김영일과 이병기는 정치자금을 피닉제에게 제공하여 이회창 지지 유세를 유도하기로 하고, 이병기가 역삼동 모 호텔 지하 주차장에서 김윤수에게 "당에서 준비한 돈인데 피닉제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한나라당이 기업들로부터 차떼기로 모금한 피 같은 대선자금 중 현금 5억 원을 25천만 원씩 2개의 박스에 담아 박스 떼기로 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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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김윤수가 배달 사고를 쳤다. 김윤수는 25천만 원짜리 한 박스를 꿀꺽해서 자신의 대출금을 상환하며 뒷날 어느 훌륭한 대통령이 보여주셨던 반띵정신을 몸소 실천하고 말았던 것.

 

여기까지는 법원에서 인정한 팩트. 김윤수는 횡령혐의로 1심에서 징역 1, 2심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았고, 이병기는 정치자금에관한법률위반 혐의로 약식 기소되어 벌금 1천만 원에 처해졌다.


문제는 남은 25천만 원인데, 이에 대하여 1심에서는 김윤수가 피닉제 집에 방문하여 피닉제 와이프에게 "이병기 선배님이 고문님이 돌아다니시면서 필요할 때 쓰시라고 보내왔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전달하고, 피닉제는 와이프에게 이를 건네받아 25천만 원을 받았다는 검찰 수사 결과를 그대로 인정하여 피닉제에게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그런데 2심에서는 김윤수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피닉제에게 무죄가 선고되었고,(판결요지 : http://www.lawtimes.co.kr/lawpnnn/pnnpr/PnnprContent.aspx?kind=1&serial=2326) 대법원에서도 그대로 확정했는데 이를 종합해 보면 결국 피닉제는 돈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고, 결국 이병기는 5억 원을 주었지만 25천만 원은 김윤수가 인마이포켓, 남은 25천만 원은 어디 갔는지 행방이 묘연한 황당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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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갔지?


개인적으로 피닉제를 좋아하지도 않고 LP가스통과 석유통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농성을 벌이며 결백을 주장하던 모습도 아름답진 않았지만 명색이 대권을 꿈꾸던 잠룡 피닉제가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이회창 돈을 낼름 받아먹었으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김윤수가 5억을 전부 먹튀했을 가능성인데(피닉제에게 무죄를 선고한 서울고법 형사5부는 그렇게 보는 것 같다. 그러나 김윤수에 대한 재판은 다른 재판부에서 진행되었다는...!) 당시 엄정한 수사로 이름을 떨치던 안대희 부장의 대검 중수부가 그런 얕은 뻥에 넘어갔을지도 의문이다그렇다면 두 가지 가능성이 남는데 피닉제 와이프가 피닉제에게 모르는 척을 했거나, 처음부터 김윤수에게 25천만 원만 주었을 가능성. 한나라당과 김영일 사무총장이 5억 원을 지출한 것이 틀림없다면 25천만 원은 어디로 샜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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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절대로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이병기는 안기부 2차장에서 퇴임하던 19983월 당시 재산이 73803만 원에 불과했는데 이듬해 5월 대출 한 푼 받지 않고 분양가 109500만 원 상당의 타워팰리스 아파트를 분양받았다고 한다. 25697만 원쯤 비는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이다 가난한 필자는 아파트를 분양 받아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분양이야 그때 받았다 하더라도 잔금은 입주할 때 지급하는 거 아닌가? 참고로 타워팰리스 입주는 200210월부터 시작했다 카더라. 왠지 시기가 비슷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기분 탓이다

필진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총수를 닮아 음모론에 심취한 것 같은 스스로의 모습을 깊이 반성하면서, 뭔가 억울할 것 같은 이병기를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겠다. 하나는 인사청문회 과정에 관계자들을 다 불러 서바이벌 배틀을 뜨는 거다. 김영일, 김윤수, 피닉제 부부 그리고 수사를 총괄한 안대희까지. 시간이 이빠이 걸리더라도 대질심문을 해서 진상을 확실히 규명해 보자.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진상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져야만 이병기도 홀가분하게 국정원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재심을 청구하는 것이다. 이병기는 벌금 1천만 원을 부과한 약식명령에 반발하며 정식재판을 청구했다가 취하해서 위 판결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위 사건의 공소시효는 이미 지난 지 오래라 안대희가 돌아와도 다시 수사할 수는 없다.

 

그러나 피닉제에 대한 정치자금에관한법률위반 사건이 무죄로 확정된 이상 이병기가 김윤수에게 5억 원을 준 행위에도 정치자금에관한법률을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김윤수에 대한 2심에서도 정치자금에관한법률위반 부분은 무죄가 인정되었다.) 당시 정치자금에관한법률에는 미수범 처벌 규정도 없었으므로, 이병기는 무죄. 그러므로 억울하게 벌금 1천만 원을 낸 이병기는 피닉제에 대한 무죄판결을 근거 삼아 재심을 청구하면 된다. 이를 통해 이병기는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니는 차떼기 연루 전과(이것도 억울할 것이다. 차떼기를 한 건 딴 넘들이고 이병기는 어디까지나 차떼기로 모은 돈을 전달하는 셔틀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나마도 보다시피 잘 되지 않았다.)에서 벗어나고, 국민들은 허공에 뜬 25천만 원의 행방을 찾아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다고 이미 형사판결이 확정된 이인제나 김윤수가 새삼 처벌 받을 것도 아니니 실로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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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자.

 


1. 어쩐지 이후락의 스멜이 난다.
 
2. 안기부 2차장이었던 이병기가 북풍공작을 몰랐다면 무능한 것이고, 알았다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3. 이병기는 김윤수에게 5억을 주었다는데, 김윤수는 25천을 먹튀했고, 피닉제는 받은 바 없다고 한다. 과연 25천은 어디에?
 

4. 주일대사가 어떻게 일을 했길래 한일관계는 이 모양이고 북일관계는 저 모양인가.

 


1997년의 북풍 공작은 부장과 1차장을 구속시키는 것은 물론 안기부를 국정원으로 바꿔버릴 정도의 큰 후폭풍을 몰고 왔고, 2002년의 차떼기 사건 역시 한나라당을 천막으로 내몰 정도로 엄청난 파급효과가 있었다. 검찰 수사 및 법원 판결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이병기는 실패로 끝난 두 번의 공작 중 한 번은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고 한 번은 박스셔틀이라는 높지 않은 난이도의 미션조차 클리어하지 못한 것이다. 도덕성은 둘째치고 이쯤되면 정보기관장으로서의 업무수행능력이 의심스러운 상황. 그렇다고 외교관으로서의 역량도 출중한 것 같지는 않으니, 그가 가장 훌륭한 능력을 보여주었던 '청와대 비서실'에 보내는 건 어떨까 조심스레 추천해 본다.^^  우선 인사청문회를 통해 우리의 의구심이 해소될 수 있을지 지켜보도록 하자.







벨테브레


편집 :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