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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7. 03. 목요일

군사부장 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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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은 임시 각의(국무회의)에서 타국이 공격을 받았을 때 자위대가 반격할 수 있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하기 위해 헌법해석을 변경하는 각의결정을 했다. 아베가 평화헌법에 대한 수정에 대해서 강력한 의지를 보여줬기에(그의 외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문의 숙원사업'이었다.) '시기'의 문제였지 방법의 문제는 없었다고 본다. 물론, 지금 일본 국내에서도 찬반의 목소리가 갈리고 있으나 아베의 그 동안의 행보를 본다면, MB 뺨칠 정도의 '추진력'을 보여 줄 것이란 예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군국화, 전쟁을 준비하는 일본 등등 날선 제목의 기사들이 횡행하는 이때 나까지 끼어들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의 헌법해석에 대한 코멘트를 더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들이 말하는 그 '보통국가'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해보려고 한다. 도대체 <평화헌법>은 무엇이고, <전수방위>는 어떤 것이기에 아베가 입에 거품을 물고 이를 뜯어고치려 하는 것일까? 아울러 일본 매체(주로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에 등장하는 그 <보통국가>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일본우익은 그렇게 목을 매다는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해 볼까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 4편을 연결해 쉽게 풀어써 보겠다.


<침묵의 함대>, <정치 9단>, <패트레이버 극장판 2>, <반딧불의 묘> 이 작품들이 이 기사와 함께 할 작품들이다.(이 작품들을 통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안 봐도 무방하다. 최대한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언급하는 것뿐이다.)

 

 

1. 태초에 원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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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과 스탈린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트루먼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떨어뜨리고 며칠이 지난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과 함께,


육, 해, 공군의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겠다.


라는 선언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그들의 각오를 다지듯 1947년 제정 발표된 평화헌법의 제9조는 다음과 같다.


일본은 전쟁을 부인하며, 

국제 평화를 성실히 추구하고,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과 국제 분쟁의 해결 수단으로써 

무력 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

 

이때까지의 일본은 말 그대로 '보통이 아닌 국가'였다.(당시 맥아더는 일본을 농업국가로 만들어 더 이상 미국에 덤비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고, 그런 계획의 발로가 바로 평화헌법이었다.)

 

이런 맥아더의 생각은 1950년 6월 25일에 있었던 한국전쟁 덕분에 산산조각이 났다. 6.25 발발에 대한 일본의 입장은 당시 수상이었던 요시다 시게루의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겠는데, 6.25발발 소식을 접하자마자 요시가 시게루는 단말마와 같은 외침을 남겼다.


일본은 이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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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는 말이었다. 6.25 전쟁은 일본에게 축복이며 선물이었다. 한국전쟁은 오늘날의 일본을 만들어 주었고, 덤으로 현대사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여러 가지 '똥'들을 우리나라와 주변국에 건네줬다. 당시 일본이 얻은 '선물'을 정리해 보면, 크게 세 덩어리로 나뉠 수 있는데 한 가지씩, 간략하게 살펴보자.

 

첫째, 경제부흥이다. 


2차대전 패전 직후 일본 경제는 1920년대 수준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모든 물자가 부족했고, 전력난으로 모든 공장은 가동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요시다 시게루 수상은 미군정청에 읍소, 1946년에서야 겨우 중유 수입을 허가받을 정도였다. 맥아더의 생각대로 일본은 농업국가로 돌아갈 상황이었으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이 모든 '위기'가 백지화 됐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일본 정부는 <특수 조달청>을 마련했고, <일본 경제인 연합체> 내에 <방위생 출산 위원회>를 설치, 미군이 요구하는 군수품의 생산을 적극 독려했고, 그 결과 1952년 6월이 되면 군수품 생산에 약 400여 개 공장이 참여하게 된다.(1953년이 되면 이 업체 수는 860여 개로 증가한다.) 이 기간 미군에게 제공하는 군사물품의 금액만 25억 달러였다.(1950년 화폐가치로 말이다!) 6.25 전쟁 기간 동안 일본이 얻었던 경제효과는 100억 달러에 이르렀다.(20세기 말 화폐가치로 1000억 불.) 이 액수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유럽부흥계획, 우리에게는 마셜플랜으로 더 잘 알려진 전후 유럽경제 회복을 위한 미국의 지원금액과 비교해 보면 이해가 빠를 텐데, 당시 미국은 1947년부터 4년간 유럽 전역에 130억 달러를 뿌렸다. 그런데 일본은 단 3년 만에 100억 달러를(그것도 단일국가가!) 벌어들인 것이다. 1990년대 초 일본의 버블이 꺼졌을 때 일본의 중늙은이들이 '한국동란이 한 번 더 일어났으면...'하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둘째, 샌프란시스코 조약(대일강화조약)의 서명이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미국과 서방세계는 공산주의의 위협을 몸으로 체감하게 되었고, 일본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이후 일본은 대 소련 방어선의 최전선이 된다. 일본의 지정학적 위치를 보면 알겠지만, 소련의 태평양 진출을 막아서는 '뚜껑'의 모습이다. 나카소네의 불침항모론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는 상당히 중요한데, 조약 서명 전까지 일본은 '정치적으로' 2차 대전 패전 후 연합국의 점령지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 조약 서명 이후 공식적으로 독립국의 지위를 얻게 됐다. 문제는 이 조약 덕분에 우리의 '독도'가 아리송한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모든 식민지를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조약에 서명됐는데, 문제는 한국의 독립과 영토에 관련된 조항에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를 포기한다.


란 대목이다. 1947년에 작성된 초안에는 분명 '독도'도 포함돼 있었는데, 1949년 개정판에서 독도가 일본의 영토 항목으로 이동했고, 1951년 6월 개정판에서는 일본의 영토에 대한 항목이 아예 삭제하게 되면서 독도가 아리송하게 됐다는 것이다.(당시 우리 정부도 독도를 문장에 추가하려 했지만, 미국이 쌩까버렸다.)

 

셋째, 자위대의 창설이다. 


이 부분이 오늘의 메인디쉬다. 1950년 7월 8일 맥아더는 일본 정부에 공식적인 요청을 하게 된다.

 

50일 안에 7만 5,000명의 경찰 예비대를 창설해 주기 바란다.

 

'자위대' 구성의 시작이었다. 북한의 침공으로 다급해진 맥아더는 주일미군을 한반도로 돌려야 했고, 그 공백을 메꿀 '병력'이 필요했다.(일본도 방위해야 할 게 아닌가?) 오히려 일본이 눈치 봐가며 청해야 할 일을 미국이 먼저 요구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부랴부랴 경찰 예비대를 구성하게 된다. 8월 10일이 되면 일본은 보병 4개 사단으로 구성된 경찰 예비대를 조직했고, 1952년이 되면 해안 보안대와의 통합으로 보안청이 설립됐고, 2년 뒤엔 방위청 설립과 함께 <자위대 설치법>이 만들어 졌으며, 결국 1956년이 되면 그 말 많고 탈 많은 자위대가 만들어진다.

 

어찌 보면, 한국전쟁이 오늘의 논란을 만들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2. 보통국가가 아닌 일본

 

우선 몇 가지 단어의 의미를 알아야겠는데, 대충 꼽아보면 <전수방위>, <비핵화 3원칙>, <무기금수 3원칙> 정도가 되겠다. <자위대 해외파병 금지 원칙>이란 것도 있었지만, 1992년 6월 15일 통과된 PKO 법안으로 자위대 해외 파병이 가능해졌기에 논외로 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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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전수방위.

 

이 단어가 나온 것은 1970년이다. 나카소네가 방위청 장관으로 재직할 당시 일본 방위백서에 최초로 등장한 말인데, 이 전수방위란 단어가 이후 일본 자위대를 규정하는 핵심 단어로 부상하게 된다. 자위대를 둘러싼 수많은 논란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 이 전수방위의 뜻은 뭘까? 간단히 말해 일본은 상대로부터 한 방 맞은 다음에야 공격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공격의 수준도 자위를 위해 최소한으로 제한한다는 것인데, 현대전의 경우 핵무기의 선제공격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재래식 무기를 들었더라도 기습은 공격자에게 최소 1.3배에서 최대 6배의 승수효과를 가져다 준다는 연구통계에서 보여주듯 최초의 일격에 전쟁이 끝났을 수도 있음을 생각한다면, 과연 실효성이 있는 방위전략인지 의구심이 든다.

 

(이 전수방위 조항 덕분에 일본 자위대의 전력은 '삐꾸'가 된다. 냉전 당시 일본은 해공군 위주로 편성되고, 한국군은 육군 위주로 편제시켰는데 그 이면에는 미국이 존재했다, 뭐 이런 이야기는 많이 퍼져 있지만, 실질적인 전력을 보면 상당히 특이하다. 우리나라 육군을 보면 참으로 신기한 게 별 두 개짜리 사단장도 특수부대를 운용한다. 바로 사단수색대다. 너도나도 다 특공대를 가지고 있다. 다 떠나서 해병대를 보라. 해병대는 상륙작전을 전제로 한 부대다. 한마디로 공세작전의 핵심이란 소리다. 일본에는 해병대가 없다. 아울러 우리가 수백 발씩 가지고 있는 지대지 탄도탄이나 대지공격미사일도 일본은 다른 종류의 무기에 비해서 극히 적다. 그나마 가지고 있는 지대지 미사일도 언론 노출을 극히 꺼려했을 정도다. 그들은 방어를 위해 존재하는 전력이지, 공격을 위한 부대가 아니라는 '법적인 제한'을 안고 있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이런 제약은 무기의 이름에도 잘 드러나는데, 누가 봐도 '공격기'인 제트공격기를 '지원기'라 부르는 것이 일본자위대이다.)

 

둘째, 비핵화 3원칙.

 

1968년 11월. 당시 총리였던 사또 총리가 국회에서 답변한 내용을 정부 방침으로 정한 것인데, 핵무기를 보유하지도 생산하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원칙이다.(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처리된 플루토늄은 어쩔 것인가?)

 

셋째, 무기금수 3원칙.

 

1967년 4월 21일 일본 주의원 예결위원회에서 사또 총리가 언급한 것으로 공산권국가, UN 결의 금수국가, 분쟁 당사국에는 무기 수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일본의 안보에 상당한 파장을 안겨준 것 중 하나이다. 일본의 경우 자위대가 사용하는 모든 무기는 자국 생산이 원칙이다. 허울 좋은 무기금수 3원칙이라고 해야 할까? 폐쇄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일본 방위산업 업체의 담합 덕분에 직수입 비용의 2.5~5배의 비용을 더 주고서라도 거의 모든 무기를 자국 생산하는(라이선스하고) 일본. 덕분에 정말 말도 안 되는 가격의 무기(그렇다고 성능이 좋냐면 그것도 아니지만)를 만들어 내고 있다. 물론, 그 덕분에 착실히 기술력을 쌓아나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가격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린 상황이다.

 

이 세 가지 단어만 보더라도 뭔가 좀 이상하단 생각이 들지 않는가? 우리나라 군대와 비교해도 상당히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가? 전수방위라는 정말 '기묘한 방위론'을 들고 나온 덕분에 일본은 전후 반세기가 훌쩍 넘어서는 이때까지 군대 아닌 군대 자위대를 유지했고, 그들만의 염원인 '보통국가'를 향해 달려오게 된 것이다. 그들은 '보통국가'가 아니었다.

 

 

3. <침묵의 함대> 그 미묘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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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코단샤의 <모닝지>에서 처음으로 연재된 이 작품은 '해양만화는 히트칠 수 없다'는 만화계의 속설을 단박에 뒤엎어 버리고, 일본 사회에 하나의 거대한 '담론'을 만들어 낸다. 1991년 일본 사회를 '전수방위'와 'PKO 법안'에 대한 논쟁으로 몰고 간 그 격변의 시기, 이 사회적 담론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이 바로 <침묵의 함대>이다.

 

'The silent security service from the sea'

 

이것은 <침묵의 함대>의 주인공인 시로 가이에다가 주창하는 논리로써 초국가적 핵잠함대를 만들어 세계를 하나로 묶어 놓겠다는 주장이다. 일본 최초의 공격원잠 야마토(やまと : 大和)를 타고 시험항해 중 이를 탈취해 [독립국가 야마토]란 황당무개한 선언을 한 후 'The silent security service from the sea' 라는 자신의 이상을 주창하게 된다. 물론 나름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우리가 주목해 봐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바로 "보통국가로의 복귀"에 대한 담론을 만화 여기저기에 흩뿌려 놨다는 것이다.(초반 일본 근해를 빠져나가는 장면까지)

 

탈주한 야마토를 잡기 위해 출격한 미 제7함대와 소련의 함대, 그리고 야마토를 보호하겠다고 나선 일본 해상자위대의 제2 호위함대. 이들의 격돌장면에서 카와구치 카이지는 '전수방위'의 태생적 한계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미국의 공격에 맞서 싸우지 못하고, 부상자가 속출해도 절대 발포를 해서는 안되는 상황. 이것이 바로 전수방위의 맹점이었다.

 

마침 이 장면들이 연재되던 시기는 바로 일본이 걸프전 여파로 전 세계에서 매도당하던 때였다. 1991년 걸프전 당시 600억 달러에 육박하던 전비 중 일본은 107억 달러라는 엄청난 금액을 부담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는데, 돈은 돈대로 낸 일본이지만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졸부 국가'란 오명을 뒤집어 써야 했다. 당시 한국은 3억 8,500만 달러의 전비와 의료지원단 154명, 공군수송병력 160명, C-130 수송기 5대를 보냈고, 당당히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그 결과 뉴욕에서 있었던 전승 퍼레이드에 참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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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의 사정은 달랐다. 일본 국내외 적으로 걸프전은 경제력에 걸맞은 국제 사회에서의 역할론이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침묵의 함대> 초반 연재 시기, 그러니까 한참 전수방위와 보통국가에 대한 논의가 스토리에 스며나오는 그 대목이 바로 이런 논의가 오갔던 시기에 나왔던 내용들이었다. 일본의 사회분위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이런 분위기를 잘 나타내는 대사가 하나 있는데,

 

시배트 사태는 일본의 군사적 독립을 명백히 하는 전환점이다!

 

작품 중 외무부 차관 야마쓰 고이치로의 말이다. <침묵의 함대> 초반부에 일본은 전후 40여 년간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다가 이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한 첫발을 내딛는 모습으로 나온다. 물론, 일본 내에서의 다양한 목소리가 불거져 나오면서 지금까지의 전수방위란 허황된 논리의(전략상으로 말이다.) 방위 전략과 보통 국가로의 복귀를 원하는 일본의 모습은 일견 타당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다. 비록 일본이 미국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자기 목소리를 못 낸다 하지만, 이미 세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군사 대국이며,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의 국가들이 일본을 경계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미 일본은 강대국의 자리에 올라서 있는 '보통이 아닌 국가'였다.


 

4. PKO가 남긴 것... 아직 끝나지 않은 보통 국가로의 길

 

1992년 6월 15일 PKO법안이 통과됐다.(물론, 일본 이야기다.) 1954년 6월 2일 참의원 결의로 그 동안 금지되어 왔던 자위대의 해외파병 금지 원칙은 그렇게 깨졌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직 전수방위란 족쇄가 남아있었다.

 

1993년 8월 7일 캄보디아로 파견된 일본 자위대를 뒤로하고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패트레이버 2> 극장판이 개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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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초반 5분을 기억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본다면, 이 이야기가 단순히 '로봇' 이야기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츠게 : GONG으로부터 본부에, 적과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다. 발포를 요청한다!!

 

본부 : 발포는 허가할 수 없다. 현재 캐나다 부대가 향하고 있다. 반복한다. 발포는 허가 할 수 없다. 전력으로 회피하라!

 

1999년 동남아시아의 모국(하필이면 캄보디아 느낌이 나는...) PKO활동을 위해 파병된 자위대의 레이버 부대들은 정찰 활동 중 게릴라들의 공격을 받게 된다. 연속해서 날아오는 미사일 사이로 츠게 휴키히토는 본부에 계속 발포 허가를 요청하지만, 본부는 거절한다. 육상 자위대의 최신식 레이버들은 게릴라들의 구형 유선유도 미사일을 충분히 제압할 화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통 국가가 아니었기에 교전을 벌일 수 없었다는 걸 보여주었다. 결국 츠게는 자신들의 부하들이 속절없이 죽어나가는 걸 보게 됐고, PKO 악몽을 뒤로 한 채 일본으로 돌아온 츠게는 일본인에게 '전쟁체험'을 시켜주기로 결심, 쿠데타 흉내(?)를 통해 일본인들에게 전쟁이 어떤 의미인지, 일본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오시이 감독이 무슨 의도로(패트레이버 TV판, OVA판에서도 자위대는 늘상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지만) 이 작품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판단은 관객들 각자의 몫이겠지만, 명확한 사실 한 가지는 적어도 지금의 전수방위와 보통 국가가 아닌 일본의 모습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것을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오시이 감독은 묘한 시점(PKO 법안 통과, 캄보디아 파병)에 묘한 이야기를 하였던 것이다. 그나마 오시이 감독의 경우는 문제 제기와 판단 보류의 선에서 작품을 끝냈지만, 좀 더 노골적인 작품도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히로카네 켄시의 <정치 9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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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헌법은 세계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질 수 없었을 때 만들어졌다.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세계 평화에 공헌할 수 없다.

 

침략에 대한 배상은 당사국 간의 문제이다. 

당사국 간의 문제를 국제회의 석상에서 거론하는 건 옳지 않다! 

(작품 중 전후 배상을 요구하는 북한에 대한 카지의 대응)

 

 국제사회는 일본에게 경제력에 걸맞은 역할분담을 요구한다.

 

주인공 카지 료스케의 발언들이다. 더 놀라운 난징 대학살에 대한 주인공의 발언인데, 카지는 난징 대학살을 10만 명이 죽었느냐 20만 명이 죽었느냐의 숫자 문제로 전락시켜 버리는 뛰어난 화술을 보여준다. 물론, 일본 국민에게는 통쾌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니, 어쩌면 일본인들의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전수방위>와 <보통국가>의 논리를 보면, 북한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아니, 북한이 존재하기 때문에 전수방위 폐기는 당연한 조치라는 논리가 깔려 있다. 일본은 가만히 있는데 깡패국가인 북한이 계속해서 일본을 위협하고 괴롭히기 때문에 일본도 나서야 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일본이 보통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주변을 둘러싼 상황이 일본에게 보통국가로의 진입을 요구한다.

 

라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 논리는 일본의 과거사를 논하는 것은 구태의연한 발목잡기에 불과하며, 국제 사회에서 일본은 좀 더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역사관, 즉 과거사의 거론을 원천적으로 폐기해야 한다는 데까지 치닫게 된다.

 

한국인 입장으로는 좀 황당하다. 이 정도면 일본이 말하는 그 <보통국가>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5. 또 하나의 캐치프레이즈... <보통국가>

 

<보통국가>란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게 된 때는 1991년 걸프전 직후부터였다. 일본 우익들이 에둘러 표현한 '국제공헌'이란 단어. 그리고 이 국제공헌의 핵심인 '인적공헌'에 대한 논의가 불거지면서 부터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적공헌이란, '군사력의 해외투사' 즉, 파병이었다.

 

이 <보통국가론>이 제대로 사회에 나오게 된 것은 일본 자유당의 오자와 이치로가 1993년에 쓴 <일본개조계획>이 출판되고 나서부터였다. 책의 내용은 간단한데, 전후의 반성으로 '평화헌법'을 만들고 일본은 최대한 협력하며 살아왔다. 이 평화헌법은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고, 무력의 투사를 영구히 포기한 상태지만 아이러니하게 군사비 지출에 있어서는 세계 2~3위의 막대한 군사강국이란 것이다. 이미 일본은 군사대국인데, 그 군사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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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란 아이의 몸은 이미 건장한 성인의 몸이지만, 그 지능만은 7세 유아 상태로 묶어놓은 상태이니, 이걸 빨리 정상으로 돌려놔야 한다는 것이 보통국가론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 보통국가론이 설파하는 단 하나의 주장은,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교전권을 가진 국가가 되어야 한다.

 

라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이는 옳은 주장이다. 국가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자면 군대에서 나온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그 군대가 반쪽짜리 군대라면? 타국이 날 한 대 때려야지만 응전을 할 수 있고,(그 나마도 반격의 강도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나라 국방부가 말하는 원점파괴니, 북한이 말하는 천만 배 보복 따위는 남의 나라 이야기다.) 같이 도와주겠다는 국가와 연계작전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분명 정상적인 국가는 아니다.

 

(잠깐 생각해 보라. 칼을 든 강도가 내 집으로 들어와 날 죽이고 도둑질을 하려고 한다. 나 역시 칼을 들고 있지만, 상대가 날 찔러야지만 정당방위가 성립되기 때문에 상대가 찌를 때까지 기다리다가 찌르려고 준비를 하고 있다. 한 수 더 떠서 '과잉방어'를 조심해야 하기에 칼을 잘 휘둘러야 한다는 조건도 따라 붙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강도가 들어오기 강도를 제압할 수 있는 호신장비도 충분히 있지만, 이걸 사용하기 위해서는 강도가 내 집에 침입해 날 찌른 다음이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할까? 극단적인 예이긴 한데 지금 일본의 모습이 이러하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우익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상식선에서 판단한다면, 분명 이상한 존재이다.

 

자, 문제는 다시 평화헌법으로 돌아왔다. <정치 9단>의 카지 료스케의 발언.

 

"일본의 헌법은 세계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질 수 없었을 때 만들어졌다.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세계 평화에 공헌할 수 없다."

 

란 말이 다시금 생각나는 대목이다.



① 일본의 헌법은 세계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질 수 없었을 때 만들어졌다.

 

② 세계평화에 공헌할 수 없다.




둘 다 80년대부터 일본 우익들이 꾸준히 개발해 온 논리들이다. 특히나 '세계 평화에 공헌할 수 없다.'란 대목은 걸프전 이후 일본 우익들이 목 놓아 외쳤던 '국제공헌', '인적공헌'의 또다른 모습이다.

 

"국제정치는 힘의 논리이다. 마지막에 가서는 군사력의 유무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국제정치이다. 전후 이어져 온 국제평화는 강대국의 힘의 논리로 이루어진 것이다. 일본이 경제대국을 넘어서 정치외교적으로도 진정한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교전권을 확보해 보통국가로 진입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일본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일본 우익이 80년대부터 갈고닦아온 논리이다. 힘에 의한 평화. 미국의 보수세력을 비롯해 모든 국가의 우익들이 내놓는 한결같은 논리이다. 논리전개과정에 어떤 문제점이 있고, 총론과 각론 어디에 하자가 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냥 우리 상식에 비춰 봐도 '보통국가'에 대한 주장이 그리 크게 도리에서 벗어난 논리로는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이걸 말한 나라가 '일본'이란 것이다.

 

 

6. 가해자에서 피해자로...그리고 또다시 가해자로...

 

다카하타 이사오의 1988년 작 <반딧불의 묘>만큼 우리 나라에서 그 의견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작품은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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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만화의 최고봉"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스스로를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순간이동시킨 작품"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는 이 작품은 그때까지 그려져 왔던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 즉, 가해자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피해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감독인 다카하타 이사오는 이런 논란을 부담스러웠는지,

 

"이 작품에 대한 나의 의도는 어린 세츠코와 세이타가 어떻게 전쟁을 겪어 나가는지 보여주고 싶었던 것 뿐이다."

 

라며 애써 이 작품의 의미를 축소했지만, 이미 세츠코의 죽음 앞에서 관객들은 눈물을 보이기 시작한 후였다.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우리가(한국인으로서 가지는 과거에 대한 아픈 기억) 느끼는 감정이 고스란히 투영 돼 작품을 곡해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일본의 '비명'이 너무 빠르지 않았는가란 생각을 해 본다.

 

과연 일본이 이런 비명을 질러도 될 정도로 노력을 했는가란 것이다. 같은 전범국가 독일이 겨우 비명을 지른 것이 1993년 요셉 빌스마이어 감독이 연출한 종전 50주년 기념작 <스탈린그라드>였다는 걸 생각한다면, 일본의 비명은 빨랐다. 게다가 독일은 전후 50년간 꾸준한 사과와 그에 합당한 배상으로 전범국가로서의 할 도리를 다했다. 만약 일본이 독일에 버금가는 자기반성과 사과를 했다면, 그들의 '보통국가'로의 진입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할까? 일본이란 나라가 가지고 있는 '모순'에 대해서 이해를 구하기 이전에 그들의 말하는 태도가 문제였던 것이다.

 

 

7. 마치며...

 

1991년 걸프전은 40여 년간 이어져 오던 일본의 '평화'에 대해 일본인 스스로 의문을 던지게 만든 계기였다. 오시이 마모루가 <패트레이버 2>에서 말했듯 '가짜평화'라고 불리는 것일 수도, 혹은 '정의롭지 않은 평화'라 말할 수도 있던 냉전 기간 동안의 일본의 평화, 그 속에서 싹튼 것이 일본 우익세력이 내놓은 <보통국가론>이다.

 

이 논리가 명시적으로 나온지 20년 만에 일본은 드디어 <보통국가>가 될 수 있었다. 임시각의에서 헌법해석이 결정되자마자 한미일 합참의장이 하와이에 모여서 북 핵미사일 위협을 논의했다. (그들 말로는 군사정보공유나 군사교류확대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고 하지만...) 이미 물밑에서는 한미일 삼국의 군사교류 확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 (미국과 일본이 요구하고, 한국은 인상 쓰는 상황.)

 

중국이라는 공통의 적 앞에서 미국과 일본은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고, 예전 같지 않은 경제력 앞에서 동북아의 파트너인 일본을 끌어안은 뒤에 일정부분 이상의 부담을 넘겨야 했던 미국으로서는 환영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재빨리 환영성명 발표하는 미국.)

 

한국 역시도 껄끄러운 마음이 있지만, 대세를 인정하고 타이밍을 보는 모습이다. 합참 관계자가 현 단계에서의 군사교류 확대와 합참의장회의의 정례화(한, 미, 일) 필요성을 못 느끼지만, 일본의 반응(역사인식의 변화라던가... 기타 등등)에 따라 검토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 걸 보면, 이제 일본이 '보통국가'가 됐다는 걸 실감할 수 있게 됐다.

 

그들이 20년에 걸쳐 얻어낸(전후로 따지면 60여년이 넘는 긴 세월이지만) '보통국가'의 논리. 앞으로 20년 뒤에 일본이 어떤 국가로 변해있을지 쉽사리 예측하기 어려운 지금이다.









 군사부장 펜더


편집 :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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