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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7. 03. 목요일

논설우원 파토









<파토의 쿡찍어 푸욱>은 


시급한 현안에서부터 해묵은 숙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 사회 관련 문제를 다루는 코너임다.


과학 잡설 <호모 사이언티피쿠스>와 교대하면서 격주로 연재되니


 많은 사랑 주시던가.




지난 기사


<파토의 쿡찍어 푸욱> 1. 공포의 마스터플랜

<파토의 쿡찍어 푸욱> 2. 그들은 왜 변절했을까

<파토의 쿡찍어 푸욱> 3. 지금 우리에게 놓인 투쟁의 현실

<파토의 쿡찍어 푸욱> 4. 시대와 진보에 대한 단상

<파토의 쿡찍어 푸욱> 5. 사회의 품격(1)

<파토의 쿡찍어 푸욱> 6.박정희, 이승만, 일제 그리고 개드립

<파토의 쿡찍어 푸욱> 7. 사회의 품격(2)

<파토의 쿡찍어 푸욱> 8. 하는 김에 하는 교통 이야기

<파토의 쿡찍어 푸욱> 9. 우리는 그들에게 대한민국인가

<파토의 쿡찍어 푸욱> 10. 비극으로 모자라서 이렇듯 철저하게 패배할 겁니까

<파토의 쿡찍어 푸욱> 11. 내가 수퍼맨이라면

<파토의 쿡찍어 푸욱> 12. 위선이라도 떨어라

<파토의 쿡찍어 푸욱> 13. 혁명의 상상









이 란이 어쩌다가 정치 관련글을 쓰는 곳처럼 돼 버렸는데, 원래 의도는 그런 건 아니었다. 그래서 중요한 정치적 현안이 없는 한 가급적 다른 이야기를 할란다. 솔직히 좀 지긋지긋한 맘도 없잖아 있고.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줏대’다. 세상을 제정신으로 살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히 요즘 같은 세상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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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사회심리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사람에게는 타고난 성향이란 게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 성향에서 크게 벗어나 다른 모습으로 사는 건, 쉽지 않은 걸 넘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일시적으로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경우는 있지만 매일매일의 일상 속에서는 가지고 있는 바탕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머 그렇게 생긴대로 살아도 그만인 것 아닌가 싶지만 문제는 내 자신에게서 내 맘에 들지 않는 성향들이 드러날 때, 그리고 그걸 바꾸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때다.


우원의 경우가 그랬다. 우원은 귀가 얇은 편이다. 그래서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음, 그게 맞군’ 하다가 다른 사람이 다른 소리를 하면 또 ‘음, 저게 맞는 건가’ 하는 구석이 없잖아 있었다. 어려서는 특히 심해서 아주 명확한 게 아닌 한 사안의 시비를 가리는 것 자체가 꽤나 어려웠다. 근데 어릴 때일수록 분쟁 상황에 놓였을 때 내용의 옳고 그름보다 목소리 크고 자신감 있는 넘이 이기는 법이라, 이건가 저건가 하고 있다 보면 결국 타이밍을 놓치고 불리한 입장에 놓이기도 했다.


이런 줏대없는 스스로의 모습이 참 싫었다. 근거도 없이 똥고집부리는 사람은 더 꼴보기 싫었지만, 뭐가 옳은 거고 좋은 건지 판단이 안 돼서 우왕좌왕하는 모습 또한 그 못잖게 싫었다. 그래서 이런 걸 바꾸고 싶었는데 초등학생 입장에서 뭘 해야 할지 알 수 있을 리 없고, 80년대 초반 이 사회에 얼라의 이런 의문에 대해 현명한 가이드를 해 줄 부모, 선생 등이 존재했던 것도 아니다.


그래서 결국 기대게 된 건 논리와 합리성이었다. 나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는, 그래서 필요하다면 남도 설득시킬 수 있는 생각의 틀을 만들고 일상화해야 저런 혼란이나 줏대없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초등학교 때 그렇게 구체적인 생각을 했다는 건 아니고 아마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그런 관점이 정리가 됐을 거다. 그리고는 어느 시점에 이르자 그게 우원의 가장 강력한 삶의 무기가 되었다.


머, 살다 보니 그 힘을 과신한 결과 그 덫에 갇힌 적도 있긴 하다. 예컨대 음모론은 논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제일 쉽게 빠지고, 또 그만큼 헤어나오기도 어렵다. 나아가 철학의 역사는 세계과 인간에 대한 논리적으로 ‘명백’해 보이는 온갖 해석과 가치들의 무덤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그 둘다 우원이 기웃거린 분야라는 점, 아는 넘은 아실 거다.


또 합리적인 접근으로 옳은 길을 제시하면 주변의 ‘누구라도’ 설득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때도 있었다. 허나 경험을 쌓으면서 인간의 속성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현실에서는 꼭 그렇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와 합리성을 개발하고 거기에 기대는 방법은 귀 얇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처음에는 파편적이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굵직굵직한 기준들이 설정되어 갔고, 그 기준들을 바탕에 두니 세상의 복잡미묘한 시시비비들을 판단해 낼 수 있게 된 거다. 그래서 그것들이 다 정말 옳기만 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큰 틀에서 벗어나는 이상한 생각들에 빠져 있거나 서로 모순되는 내면의 가치들을 인식조차 못하고 있는 상황은 벗어나게 됐다.


그렇게, 결국 타고 나지 못한 줏대라는 걸 만들어 갖고 살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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줏대라는 단어의 느낌은 소박하고 일상적이지만, 품은 의미는 무척 크다. 그건 줏대가 ‘자기 내면의 기준’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내면의 기준이 인간을 인간으로 살게 만드는 아주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우원은 믿는다. 그래서 실은 개개인의 줏대의 수위와 질이 그 사회의 문명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도 있다.


단적이고도 흔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텅빈 횡단보도에 빨간 불이 들어오고 차 두 대가 그 앞에 도달한다. 근데 그 중 하나가 잠깐 서는 듯하다가 신호를 생까고 지나가 버린다. 그 모습을 보다가 옆에 서 있던 차도 마찬가지로 가 버린다. 이런 모습은 하루에도 여러 번 보는 거고, 열분들 자신이 저 둘 중 하나인 경우도 많을 거다.


이러는 이유는 뭘까. 빨리 가야 할 일이 있어서? 빈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건 비효율적이니까? 나름 이런저런, 그럴듯한 이유를 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사실은 줏대가 없기 때문일 뿐이니까. 좀 유식한 표현을 쓰자면 사회 속의 합리적 룰을 자기 내면의 실천 윤리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 그렇다고 세상의 룰에 무조건적으로 철저히 복종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룰이나 법을 어겨야 할 일도 있고, 실제로 세상에는 그런 행동을 요구하는 잘못된 법이나 관습 등등이 존재하며 때로는 그 수준이 아주 심각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게 더 많다.


예컨대 횡단보도에 건너는 사람이 있던 없던 빨간불에 멈춘다는 룰은 지배자나 정복자가 자기 이익과 편리를 위해 만든 게 아니다. 여러가지 공공적 장점으로 문명 사회 속에서 반복적으로 검증된 합리적인 룰이다. 그런데도 그걸 무시하는 이유는 ‘남들도 다 그러기 때문’ 일 뿐이고 다른 건 다 핑계일 뿐이다. 다들 지나가는데 혼자 바보같이 서 있어야 되냐, 이런 거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남들이 서고 안 서고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그건 그넘의 행동일 뿐이고 내 행동의 결정은 내가 내리는 거 아닌가. 나보다 나을 것도 없는, 심지어 내가 알지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이러고 저러는 데 굳이 영향을 받아야 할 이유가 대체 뭘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 없이 남의 잘못된 행동을 따라해 버리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기준이 그만큼 없고 속이 비어 있다는 걸 만천하에 보여주는 짓이다.


신호등보다 하드코어한 걸로 군중심리에 의한 폭력이 있다. 최근 몇 년간 인도의 패거리 성폭행 살인범들의 범죄 행위가 기사화되곤 했다. 이들은 버스를 타고 있는 여성을 집단 성폭행하고 신체에 심각한 위해를 가해 죽음에 이르게 하고, 또 동네 소녀들을 납치해 성폭행하고 죽여 나무에 매다는 등 차마 인간으로 여기기도 어려운 악행을 저지른다.


그러나 우원은,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로 만나면 그들이 그런 악마 같은 자로는 절대 생각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들을 이렇게 만든 건 군중심리다. 대개 군중심리의 배경을 익명성에서 찾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그건 부차적인 면이고 그 진짜 바닥에는 다수의 사람들을 동료로 삼아 나의 비윤리적 행동을 합리화하는 일종의 최면적 효과가 있다. 이를 통해 멀쩡한 개인들이 잘못된 집단 속에서는 쉽사리 소시오패쓰화 되어 버린다.


이 효과가 가장 극단적으로 발휘되는 곳은 전쟁터다. 전선에 있는 병사는 언제나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 따라서 내가 살기 위해서는 기회가 있을 때 적의 목숨을 먼저 빼앗아야 한다. 이런 전쟁의 속성은 ‘혹시’ 적일지도 모르는 모든 대상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을 합리화 하는데다가, 인간이 원래부터 가진 잔인함에 군중심리의 최면효과가 더해져 최악의 모습을 낳게 된다.


그러다보면 일상에서는 멀쩡했을 사람이 아래처럼 조금씩 짐승으로, 이어 악마로 전락하는 경우가 결코 드물지 않다. 주변 모두와 함께 변했기 때문에 바깥 세상으로 나오지 않는 한 그런 사실 자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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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장면, 혹은 베트남전에서 인간성의 실종을 다룬 영화 <플래툰>의 반즈 상사 같은 이를 보면서 '나는 절대 저러지 않을 거야'라고 되뇌이는 분들이 많을 거다. 하지만 그런 다짐만으로 내 줏대를 유지하기에는 세상은 험하고도 유혹 투성이고, 거대한 이익이나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비일상적인 상황에서는 그저 공염불이기 십상이다.


솔직히, 우원은 교통신호를 예사로 어기는 것과 저런 모습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 물론 모두가 조건만 바뀌면 고문과 살인을 자행하는 악마로 둔갑할 거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일시적으로라도 질서가 무너지고 양육강식의 분위기가 팽배하는 때라면 남의 재산이나 생명을 빼앗는 것마저 빨간 불 지나치듯 예사로 여기게 되는 사람들이 우리 중에서도 등장할 거란 뜻이다. 이런 일들은 인류 역사 속에서 무수히 반복되며 증명되어 왔다.


그들이 그렇게 되는 이유는 심성 자체가 악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내면의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선한 행동은 남다른 노력과 인내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고 보상도 추상적이지만 악한 행동은 본능에 충실함으로써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고 즉각적인 쾌감마저 준다.


이렇게 사람은 선보다 악으로 기울어지기 훨씬 쉬운 존재라서, 타고난 성정이 성자 수준이 아닌 한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논리와 합리성을 통해 평소에 줏대를 갖고 살아야 되는 거다. 다만 그 논리와 합리성에도 그것대로의 바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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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만 년 동안, 세상의 가치 기준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랐다. 때로는 주먹의 힘이 지배하기도 했고 때로는 신앙심이나 충성심 같은 추상적인 정서들이 주된 가치가 되기도 했었다. 그 기나긴 세월동안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은 결과, 근대에 들어서야 우리는 다른 것들과는 차별화되는 보다 항구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사람이다.


사람이 가치 기준이라는 뜻은 인간이 소위 만물의 영장이라서 다른 생물보다 우월하고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 일반에 대한 진정한 존중은 종족적 이기주의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공감력에서 비롯된 이해와 애정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인간 뿐 아니라 생명 전반, 그리고 자연에까지 고루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가 ‘사람사는 세상’이라고 했을 때 인간끼리만 잘 살고 동물이나 자연을 마구 학대, 훼손하면서 무한한 이득을 취하는 세상을 그리지 않는 걸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결국 사람이 중심이 되는 세상은 다른 사람, 생명 등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공감하고 그들의 행복과 고통을 함께 느끼며 도와 나가는 세상인 거다.


그래서 논리와 합리성은 그 자체로서의 냉철함의 기반에 반드시 사람이 서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칫 변질되기 쉽다. 히틀러의 극우국가주의나 일본의 제국주의도 나름대로는 논리적 근거를 갖고 있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그들이 갖지 못한 것은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공감과 애정이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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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남이 아닌 내 자신의 생각을 가지면,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세상의 가치를 판단하고 그 바탕에 사람이라는 보편적인 기준을 두면 우리는 줏대 있는 사람으로 살 수 있고, 실수는 할 망정 큰 오류는 범하지 않는 괜찮은 사람이 된다.


아무 관련없어 보이는 횡단보도의 빨간불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도 단지 기계적으로 룰을 지키는 것을 넘어 남에 대한 배려, 사람에 대한 존중이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운전자가 횡단보도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도 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다들 한두 번 경험하는 거지만 자전거가 갑자기 들어설 수도 있고, 밤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건너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신호를 지키는 것은 그런 가능성에 대한 배려고, 결국은 타인의 권리에 대한 존중인 거다. 이렇게 룰을 함께 존중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킬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설사 그런 존중과 예의를 지키지 않더라도 나는 지키는 것, 이런 게 바로 줏대다.


줏대를 갖고 살면 생각과 행동에 일관성이 생기고 나아가 자신감과 명예심이 생긴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져도 당황하지 않고 판단의 기준에 따라 적합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설사 뭔가 실패하더라도 확실한 기준과 판단을 갖고 결정했기 때문에 크게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줏대가 있으면 없이 살 때에 비해 좀 더 인간답게, 문명인답게 살게 된다. 우원이 그랬듯 우리는 어느 정도 타고난 성정과 자질을 갖고 있고, 그게 항상 좋은 쪽인 건 아니다. 하지만 다들 부족하나마 최선의 모습으로 살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고, 그 부분은 타고난 것과 무관한 나 자신의 선택의 영역이다. 그런 노력조차 없다면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난 값을 다하지 않는 거 아니냐.







파토

트위터 : @patoworld


편집 :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