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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7. 07. 월요일

단&두






 색다른 여행기 지난 기사


[아바나Havana 뒷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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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세상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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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 델 문도 Fin del mundo, 아르헨티나의 최남단, '세상의 끝'이라는 아련한 수식어가 붙어 있는 이곳 우수아이아 Ushuaia. 그리고 또 하나의 이름 티에라 델 푸에고 Tierra del Fuego.


‘불의 땅’이라는 뜻의 두 번째 이름은 마젤란 해협 건너편에서 바라본 이 땅이, 해질 무렵 새빨갛게 물드는 모습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 한다 (다른 어원도 있긴 하지만) 세상의 끝에서 불처럼 타오르는 석양이라니. 이것이야말로 처절한 센티멘탈의 극치, 남자의 참된 로망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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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참으로 먼 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건만, 폼 나는 이름을 두 개나 꿰어 찬 이 곳은 실상 '세상의 끝'이 아니라 한다. 남쪽으로 비글 해협을 건너면 칠레의 나바리노섬이 있고, 더 아래에는 케이프혼이 있다. 여기는 그저 국경에 가로막힌 아르헨티나의 끝일 뿐이다. '불의 땅'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멀리서 이 땅을 바라보는 제삼자의 감상일 뿐, 정작 우수아이아에 서는 그 장엄함을 느낄 겨를이 없다.




여기가 세상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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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한적한 마을을 기대했다.


사람을 만나려면 한참을 걸어야 하는, 담배가 떨어지면 꽁초를 뒤져야 하는, 옆 마을을 가려면 몇 시간이고 기다려 지나가는 차를 잡아타야 하고, 문도 잘 열지 않는 조그만 구멍 가게에는 유통기한이 거의 다 된 과자나 몇 봉지 놓여 있을 법한 그런 마을.


그러나 이곳은 자정이 넘어도 요란한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고, 숙소에서 5분만 걸어가면 'X마트'만 한 대형 마트가 있으며, 언덕 위 나이트 클럽에는 야한 옷을 입은 언니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다.


도시 전체는 면세 구역에 쇼핑 천국이고, 눈에 띈 카지노만 해도 서너 곳이 넘는다. 호스텔은 북적북적, 하릴없는 젊은 여행자들은 모여 앉아 노래를 하고 공을 차고 술을 마신다.


결국 이 곳에는 지리적으로든 심정적으로든 ‘세상의 끝’에 어울리는 서사는 없다.


극점에 가까운 도시라 할 지라도, 극성을 느낄 만큼 가깝지는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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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그저 평범한 곳은 아니다.


‘세상의 끝’은 아니더라도 ‘세상의 적당한 끝’ 정도는 될 지도 모른다.


‘비행기로 갈 수 있는 세상의 끝’ 혹은 ‘타협 가능한 세상의 끝’으로써 이곳은 이곳 나름의 적당하고도 경박한 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곳은 시간 없고 게으른 여행자들이 ‘세상의 끝에서’라는 호기로운 페북을 날리기에는 제격인 곳이다. 더불어 '세상의 끝'으로 가기 위한 관문 혹은 경계로써의 기능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


논산훈련소 앞에 늘어선 술집들처럼, '세상의 끝'과 마주한 거리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방탕함과 해이함의 덕목을 우수아이아는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우수아이아에서 해피투게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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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와 칠레를 지나면서 나와 아내단의 단촐한 여행은 어느덧 다섯 명으로 일행이 늘어 있었다. 요리사와 소설가와 예비 전문직 종사자와 백수 부부.


이야기 거리가 떨어지지 않는 조합이었다. 거의 매일 밤을 술로 지새웠다. 저녁 무렵이면 모두 주방에 모여 마늘을 까고, 양파를 다지고, 고기를 구우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뱉어냈다. 좋은 고기와 좋은 와인으로 밤을 지새워도 강남역에서 떡볶이 사먹는 돈밖에 들지 않았다.


낮에는 정처 없이 걷다가 배가 고프면 피자를 사먹고, 심심해지면 카지노에 들렀다. 가끔은 부둣가에 서서 멍하니 설산과 바다를 바라보았다.


우수아이아에 왔으니 왕가위감독의 영화 '해피 투게더'를 봐야 한다며 만 이틀 동안 영화를 다운 받았다. 호스텔 침대에 다섯 명이 나란히 걸터 앉아 이불을 뒤집어 쓰고 영화를 보기 시작할 때는 왠지 감격에 겨웠다. 이과수 폭포로 시작한 영화는 우수아이아로 끝났다. 영화 속 모든 장면들이 손 닿을 곳에 있었다. 몇 주 후면 나도 이과수에 있을 것이다. 며칠 후면 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을 것이다. 지금 내 손에는 화면 속 저들이 마시는 맥주가 쥐여 있다. 그렇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아휘'와 '보영'의 이야기를 좇았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아휘의 그리움이 '세상의 끝 등대'에 전해질 때에는 모두가 침묵했다.



다음날, 우리는 그 등대를 보러 갔다.




세상의 끝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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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오기 시작한 비글 해협은 무척이나 추웠다. 작은 요트는 제법 빠른 속도로 물살을 갈랐다. 돌고래와 펭귄은 만나지 못했다. 가이드는 펭귄을 닮은 새를 가리키며 우리를 위로하려 했다.


눈이 많이 내렸다.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바다표범의 코 끝에 생경한 차가움이 닿았다.


세상의 끝 등대는 처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 곳만은 세상의 끝에 걸맞은 적막함이 흐르고 있었다. 왠지 나도 이곳에 뭔가를 내려놔야 할 것 같았다. 소리 없이 외쳐야 할 것 같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등대에 각자의 사연과 슬픔을 묻어두었는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손끝이 시려왔지만 아주 오랜만에 담배를 태웠다.


그리고 함께 오지 않은 아내를 생각했다.




나의 여행, 아내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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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우수아이아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한 달 남짓이었다.


나는 볼 것은 봐야 했다. 남들이 가는 곳은 가봐야 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곳을 가보는 것도 좋았지만, 남들이 가는 곳을 가지 않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여행의 흔적을 가급적 많은 곳에 남기고 싶었다. 여행의 기록은 빼곡할수록 좋았다.


덕분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일정이 촉박해지고 있었다.


아내는 달랐다.


아내는 타인의 걸음에 신경 쓰지 않았다. 많은 곳을 가보는 것보다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무는 것이 더 중요했다. 아내는 나로 인해 빨라진 호흡이 영 거북했다.


하루 남은 '세계의 끝'에서 아내는 결국 바다사자와 등대가 아닌, 혼자만의 시간을 선택했다. 한참을 혼자 걷다가 카페에 앉아 진한 커피와 펭귄 모양의 빵을 먹으며 일기를 썼다고 한다. 연일 계속되는 술자리와 밤늦은 수다에 말은 하지 않았어도 제법 지쳐있었던 모양이다.


요트에서 내려서 만난 아내는 왠지 오랜만인 것 같아 무척이나 반가웠다. 아내도 표정이 밝았다.


그리고 내 몸에서 나는 담배 냄새를 귀신 같이 알아차렸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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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인상에 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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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타에 도착한 날 밤 자정이 넘은 시간에 한국인 한 명이 숙소에 체크인을 했다. 잠결에 들으니 칼리에 갔다가 강도를 당하고 모든 짐을 잃은 채, 한국 대사관이 있는 보고타로 돌아왔다는 것 같았다. 더 듣고 싶기도 했고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기도 한 마음으로 몸을 뒤척이다 이내 다시 잠이 들었다. 그날 밤 악몽을 꾸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다음날 아침에 만난 그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고 피부가 검은 젊은 남자였고, 전세계 180개국을 여행했다고 했다.


우리보다 먼저 보고타로 향한 여행자는 쿠바에 있던 우리에게 “보고타 구시가지 쪽은 정말 위험하니 가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거리에서 강도 당하는 장면을 직접 보았다고도 했다. 미리 예약한 우리 숙소는 구시가지 끝에 있었다. 가이드북에는 “요즘은 예전만큼 위험하지는 않다”라고 적혀있다. 안심이 되기는커녕, 콜롬비아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확인시켜주는 글이었다. 그리고 콜롬비아는 중남미에서 유일하게 외교부에서 지정한 ‘여행 주의 국가’ 이기도 했다.


여행에서 안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는 그래서 콜롬비아에 가지 않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콜롬비아’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코 끝에 스치는 커피향이 마음에 걸렸다.


콜롬비아 거리에선 정말 커피향이 날까, 확인해보고 싶었다.




콜롬비아 보고타에 비가 내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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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다음날부터 보고타에는 부슬비가 왔다. 쿠바에서 같이 보고타로 넘어온 예은이에게 보고타에선 위험하니까 꼭 우리랑 함께 다니자고 다짐을 받았다. 하지만 그 후로도 며칠간 함께 다닐 일은 거의 없었다. 비가 온다는 핑계로 숙소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으니까. 사실은 보고타 거리를 걸을 용기가 나지 않았던 거지만...


노란 벽과 초록 창틀의 호스텔은 2층짜리 건물이었는데, 1층에는 주인장 존이 묵는 방과 부엌, 화장실 겸 샤워실이 있고 2층에는 방 세 개와 거실이 있는 아담한 곳이었다. 유난히 깨끗하고 포근한 이불 속에 파묻혀 숙면을 취하고 아침에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가면 부스스한 머리의 주인장 존은 잠이 덜 깬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커피?” “응!” 존은 커피 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 우린 후, 융으로 한번 걸러서 커피를 큰 잔으로 한잔씩 내려주었다.


대충 내려주는데도 커피 맛이 기가 막혀서 어떤 커피인가 알아봤는데 그냥 슈퍼마켓에서 흔하게 파는 가루 커피였다. 아침으로 모닝빵 맛이 나는 작은 빵도 함께 주었는데, 전날 저녁에 존이 숙소 근처 허름한 빵집에서 사온 빵이었다. 파란 봉지째로 식탁에 대충 펼쳐져 있는 빵은 고소하고 부드러워서, 봉지 한 가득 든 빵을 앉은 자리에서 다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다른 여행자를 위해 참아야 했다. 막 내린 콜롬비아 커피와 빵을 먹고 나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창 밖을 내다보면 보고타 거리엔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숙소 2층에 좌식 거실이 하나 있었는데 테라스를 개조한 곳인지, 창이 넓고 천정은 유리로 되어있었다. 저마다 책이나 가이드북, 노트북 등을 챙겨 들고 그곳에 띄엄띄엄 모여 앉았다. 빗소리가 ‘후두둑 후두둑’ 들리는 그곳에 하릴없이 앉아있자면 금방 오후가 된다. 그리고 존이 이층으로 조용히 올라와 묻는다. “커피?”


보고타에 왔지만 정작 보고타를 보지 못하고 지낸 날들. 하지만 상관없었다. 우리의 보고타 여행이 이 곳 호스텔에서 끝난다 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은 휴식의 날들.




보고타는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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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점심 때면 밥을 먹기 위해 잠깐씩 외출을 했다. 남미 대표 길거리 음식 '엔빠나다'가 특별히 맛있다는 곳도 찾아가보고, 콜롬비아 전통 음식이라는 '반데아빠이사'도 먹으러 갔다. 거리에 앉아 조각 피자를 먹기도 했고, 맥주 전문점에 가서 하우스 맥주를 마셔보기도 했다.


어느 날은 볼리바르 광장에 큰 장이 섰다길래 나갔는데, 커다란 쇠 꼬치에 꿴 고기 덩어리를 직화로 굽고 있었다. 한 접시 사서 한입 먹고는 환호성을 지르며 광장을 뛰어다녔다. 뛰어다니는 우리에게 콜롬비아 아저씨는 커다란 고기 한 덩어리를 더 얹어주었다. 콜롬비아를 여행하는 ‘동양 여자’만 받을 수 있는 특급 서비스.


응, 콜롬비아는 음식이 매우 맛있었다. 오기 전엔 몰랐던 일이다. 음식이 맛있는 동네의 특징 중 하나는 시장이나 마트 역시 아주 잘 되어있다는 것이다. 사서 먹는 음식도 맛있고, 또 시장에서 파는 재료도 신선해서, 우리는 매 끼니 사먹을지 해먹을지 행복한 고민을 해야 했다. 보통 점심은 사먹고 저녁은 장을 봐와서 숙소에서 해먹었다.




나는 보고타가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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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아예 날 잡고 관광을 나서 몬세라테로 향했다. 그곳에 올라가면 그 고도가 백두산보다 높아지는데, 보고타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곳이라고 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서 보고타를 내려다보다가 전망대에서 멀리 조금 더 깊숙한 곳으로 걸어갔다. 높은 고도 탓에 잠깐만 걸어도 헥헥 거리다 나무 둥치에 털썩 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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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다른 나라에서도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웃었지만, 콜롬비아의 웃음은 그것들과 많이 다르다. 음... 오랜만에 만난 조카가 좋아하는 친척이모를 향해 웃는 웃음과 비슷하다. 수줍지만 다정하고 스스럼이 없다. 그 해맑은 웃음에 전염되어 나도 자꾸 웃었다.


한 가족이 역시나 웃으며 지나다가 머뭇머뭇 돌아서더니 같이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묻는다. 한바탕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술 한잔 걸친 동네 아저씨들이 다가와서는 콜롬비아 좋으냐고 묻는다. 처음 받아보는 질문. “아 좋아요. 좋아” 했더니 마치 아저씨 좋다고 고백 받은 냥 수줍게 웃으며 악수를 청한다.


모르는 사람과 마주 보고 웃는 일이 나에게 얼마나 좋은 기운을 주는지, 콜롬비아에서 처음 알았다.


웃기 시작했더니 긴장이 풀렸고, 경계심도 풀렸다.


조금씩 숙소 밖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보고타 구시가지 골목을 구석구석 걸었다. 고풍스러우면서도 세련된 동네. 오랜 시간 섬세한 손때가 탄 아름다운 거리. 작은 식당과 카페와 바가 골목 구석구석에 각자의 개성을 뿜어내며 자리잡고 있다. 남미 여행 중 제일 마음에 드는 소품 가게도 이곳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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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뿐인가, 거리에는 커다란 도서관이 있는데 우리 같은 여행객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어있다. 책 냄새가 가득한 도서관에 한번 발을 들이면 도무지 나가기가 싫어졌다. 도서관 맞은 편에는 보테로 미술관이 있는데, 이곳 역시 무료. 골목을 걷다가 문턱을 하나 넘으면 따뜻하면서 시크한 보테로의 그림과 조각을 쉽게 마주할 수 있었다.




나에겐 완벽한 도시, 보고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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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 맛있고, 커피와 맥주 역시 끝내주며, 아름다운 거리를 걷다가 도서관이며 미술관을 쉽게 드나들 수 있는 도시. 사람들은 (특히나 여자여행자에게) 친절하고, 숙소는 아늑한 도시. 이곳에서 나는 거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실실 웃으며 다녔다.


현대에 천국이 있다면, 양이 뛰어다니는 푸른 초원이 아니라, 에메랄드 바다가 펼쳐진 해변이 아니라, 보고타 이곳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보고타를 여행하며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았고, 아무 데도 다치지 않았다.


보고타와 천천히 친해졌고 보고타를 오래 그리워했다. 좋은 건 보통 그렇다.



이 글을 쓰며,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다시 보고타를 걸었다. 


슬퍼질 줄 알았는데 행복해졌다. 진짜 좋은 건 보통 그렇더라.


 

 




편집부 주



이 글은 딴지일보의 무규칙 이종매거진 

<더딴지> 14호에 실린 글의 전문입니다.


단&두의 여행 글은 지금까지 쭈~욱 

<더딴지>에 연재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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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두 @nadaun


편집 : 너클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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