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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7. 11. 금요일

벨테브레 








프롤로그

 

바야흐로 재보선의 계절이다. 4년에 한 번 치러지는 전국 단위 선거와 달리 특정 지역에서만 치러지는 재보선은 아무래도 관심이 낮은데다가 평일에 치러지는, 고로 투표율도 저조하게 마련이다. 더욱이 당선되기 위해 고생은 고생대로 하는데도 그 효과는 전임자의 잔여 임기, 즉 최악의 경우 1년짜리 땜빵인생으로 끝나고 마는 상처뿐인 영광이 되기도 한다.


(모든 것의 기준이 당선 횟수인 여의도 정가에선 재보선으로 당선된 의원들을 0.5선 취급하며 무시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문제는 3콤보 후 1턴을 쉬어야 하는 시도지사의 경우인데, 재보선으로 당선된 임기도 얄짤없이 1회로 합산한다는 것. 그래서 남들 12년씩하고 쉴 때 9년밖에 못하고 물러나야 하는 사례가 발생할 수 있다. 이번에 물러난 허남식 전 부산시장이나 박준영 전 전남지사가 그러한 케이스. 2004년 6월 5일 재보선으로 당선된 두 사람은 2006, 2010년 각각 재선과 3선에 성공하는 바람에 연임 제한 규정에 걸려 출마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10년 만에 물러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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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전국 단위 선거의 공백기에 치러지는 재보선은 생생한 민심을 알아볼 수 있는 바로미터로 기능하며 그 결과는 정치권에 큰 파장을 몰고 오는 일이 많았다. 특히 이런저런 사정으로 원외에 있는 거물급 낭인들에게 재기의 기회를 제공하거나 정치신인의 데뷔 무대가 되기도 하는데, 역으로 중진급 정치인이 스타일을 구기거나 몰락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해왔다. 박근혜나 노무현은 물론, 김대중조차 재보선을 통해 국회에 진출한 적이 있다! (이때 김대중이 출마한 지역구는 놀랍게도 강원도 인제였다. 하지만 기껏 당선된 뒤 3일 만에 쿠데타가 일어나는 바람에 서류상 국회의원으로 끝났다.)

 

이렇게 재보선과 관련된 스토리는 아라비안나이트처럼 천일 밤낮을 읊어도 끝이 없을 것이며 웬만큼 이름난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재보선에 얽힌 사연들이 있을 것이나, 전부 다 다루기엔 스크롤의 압박이 만만치 않다. 이에 필자는 7.30 재보선의 시즌을 맞아 재보선의 추억에 관한 썰을 2회에 걸쳐 풀어 볼 예정이다. 상편에서는 현재의 정치지형을 형성한 재보선들과 역대 지방선거 직후 치러진 재보선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편에서는 여야의 당권주자들과 재보선 출마가 거론되고 있는 유력인사들의 재보선 스토리를 다룰 것인 바, 당연히 기준은 엿장수 마음대로!



 

1. 현재의 정치지형을 형성한 재보선

 

2014년 대한민국 정치권의 주인공, 박근혜와 안철수, 박원순은 어떻게 정치권에 데뷔했는가? 새누리당 당권을 놓고 치열하게 싸우는 김무성과 서청원, 그리고 선거를 관리하는 비상대책위원장 이완구 원내대표는 어떻게 컴백할 수 있었는가? 그것을 알려주마!

 


1) 모든 것의 시작, 1998년 4월 2일 재보선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며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나라는 IMF였고 국회는 여소야대의 암울한 상황. DJP가 이끄는 여당은 구심점을 잃은 한나라당 출신 국회의원들을 대거 영입해 안정 의석을 확보하려 했으나, DJ라면 학을 떼던 지역정서에 영남 지역 국회의원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국민회의는 재보선을 통해 정면승부를 걸기로 하는데, 그 타깃이 된 곳이 대구 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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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쌍용그룹 회장 김석원의 지역구였는데, 김석원이 IMF를 맞아 어려워진 그룹 경영에 전념하기 위해 의원직을 사퇴하며 재보선 대상이 되었다. (비슷한 무렵 탤런트 김희애의 남편이자 당시 '한글과 컴퓨터' 사장이던 이찬진도 경영에 전념하기 위해 국회의원 직에서 물러났으나, 그는 비례대표였기에 재보선이 치러지지는 않았다. 참고로 이찬진에게 비례대표를 물려준 사람은 이회창) 


그러고 보면 김석원은 아버지 김성곤으로부터 쌍용그룹뿐만 아니라 지역구까지 물려받은 셈. 김성곤은 아버지 박통 시절 국회 재경위원장, 공화당 재정위원장 등을 맡으며 잘 나갔으나, 1971년 10월 2일 야당이 제출한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 건의안을 가결시키는 소위 '항명 파동'으로 인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콧수염을 뽑히는 등 수모를 겪었다. 결국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한 지 4년 뒤에 타계하는데 고문 후유증 내지 화병이 원인이었을 거라는 이야기가 많다. 그리고 김성곤이 물러난 경북 달성-고령 국회의원 재보선에서는 훗날 국회의장을 세 번이나 역임하는 박준규가 당선되며 최다선 국회의원 타이기록(9선)의 주춧돌을 삼는다.

 

27년 뒤 김석원이 물러난 대구 달성에는 안기부 기조실장, 병무청장 등을 역임한 달성 출신의 엄삼탁이 새정치국민회의 간판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예비역 육군 소장 출신인 엄삼탁은 1997년 대선 과정에서 국민회의에 합류하며 부총재에 임명될 정도로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오히려 한나라당이 대항마를 찾지 못해 골머리를 앓던 상황.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의 승부수는 박근혜였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1997년 IMF 위기와 함께 불어닥친 박정희 신드롬에 힘입어 크게 주가를 올리고 있던 중이었다. 한나라당과 DJP 연대의 러브콜을 동시에 받던 그녀는 선거 막판이던 1997년 12월 10일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이후 본격적인 정계 진출을 모색하던 박근혜는 그 무렵 박정희가 어울리지 않게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던 문경-예천 재보선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기에 몰린 한나라당은 전략공천 찬스를 쓰기로 하고 박근혜를 대구 달성에 꽂아 넣는다. 결과는 팽팽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박근혜의 압승이었고, 그 이후 역사는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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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때를 돌아보는 건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는 데다가, 경상도 전역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던 박근혜였기에 어느 지역구에 나갔더라도 당선 가능성은 높았을 테니까. 그러나 만일 달성군민들이 뜨내기 박근혜 대신 지역 출신 여당 후보 엄삼탁을 찍었다면, 뒷날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거나 자기 선거를 도외시한 채 친박계를 지원하기는 힘들었을 것이고, 2004년과 2012년 총선의 결과도(어쩌면 2012년 대선의 결과도)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2) 오세훈 나비효과, 2011년 10월 26일 재보선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낙승할 것이라던 예상을 깨고 가까스로 재선에 성공한 오세훈 서울시장.(이 선거는 개인적으로도 황당했던 게, 새벽 1시 반쯤 한명숙이 승리를 전제로 기자회견하는 걸 보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오세훈 당선'이라는 결론이 ㅎㅎㅎ) 그러나 1기 때와 달리 시의회 주도권은 민주당에게 넘어가 버렸고, 무상급식 등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정책에 대한 요구도 커져만 갔다. 노무현 말마따나 시장 노릇 못 해먹겠다는 위기의식이 들 만한 상황. 오세훈은 모 아니면 도라는 마음가짐으로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 무상급식에 대한 주민 투표를 통해 여론에 직접 호소하기로 한 것.

 

그러나 이 투표는 사실 개그였던 게, 오세훈도 무상급식을 전혀 안 하겠다는 게 아니고 소득 기준 50%의 학생들에 대해서는 단계적으로 무상급식을 하겠다는 취지의 주장을 내세웠던 것. (반띵정신!) 그러면서 내세운 드립이 '이건희 아들도 공짜 밥을 먹어야 되느냐' 이런 거. 아닌 게 아니라 이건희의 손자는 중학교조차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으로 들어가야 했으니 뭐 틀린 말은 아닐지도. 어쨌거나 8월 24일 실시된 주민 투표는 시민들의 귀차니즘 내지 자기가 상위 50%에 간당간당 걸쳐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을 빡치게 만든 결과 투표율 25.7%를 기록하며 개표조차 못하고 무산되고 말았다.

 

문제는 투표율 제고에 혈안이 되었던 오세훈이 승부수랍시고 차기 대선 불출마는 물론 시장 직까지 걸어버렸던 것. 결국 홍준표의 '사실상 승리' 드립에도 불구하고 오세훈은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는 것은 물론 시장 직에 연연하지 않는 호방한 모습을 보여주며 즉시 사퇴서를 제출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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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의 역풍이 불며 오세훈을 지키자는 촛불시위가 들불처럼 일어... 날 것을 기대했겠지만 나꼼수에 세뇌된 미개한 국민 정서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후임 서울시장 재보선에 대한 관심만 집중된 상황. 한나라당은 스스로 시장이 되고 싶어 했던 홍준표의 소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대안이 없었던 관계로 2010년 당내 경선의 차점자였던 나경원에게 공천을 주었다. 문제는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 오세훈이 사퇴를 선언한 8월 26일, 기다렸다는 듯이 민주당 최고위원이자 경기도 안산을 지역기반으로 하는 4선의 천정배가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했다. 주소지까지 잽싸게 옮긴 전광석화 같은 행동은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부정출발로 실격을 당한 세계기록 보유자 우사인 볼트의 그것을 보는 듯하였고 이를 계기로 천정배는 '천사인 볼트'라는 캐릭터를 득템하게 된다.(3년 뒤, 광주 광산을 재보선에 도전한 천정배는 일찌감치 전세를 구하고 전입신고를 하는 등 확고한 캐릭터 구축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번에도 공천은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묻어버릴 핵폭탄이 지하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으니, 9월 1일경부터 거론되기 시작한 안철수의 서울시장 출마설이었다. v3 바이러스 백신의 개발자로 널리 알려진 안철수는 이 무렵 청춘 토크 콘서트를 통해 꿈도 희망도 없던 청년들에게 힐링의 전도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의 대중적인 이미지를 높이 산 이명박 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영입하려 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여야 모두의 러브콜 1순위였던 안철수. 그랬기에 출마설이 돌기 무섭게 지지도 50%를 넘나드는 압도적 1위로 부상하는 것은 오히려 놀랍지 않은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더더욱 놀랄만한 일은 9월 6일에 일어났다. 이 날 안철수는,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고 돌아온 박원순을 만나 단 17분간의 대화 후 박원순으로의 단일화를 위해 출마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 지지율 50%의 압도적 1위 후보가 5% 남짓한 후보에게 양보를 하는 모습은 국민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었고 안철수는 단번에 서울시장 후보가 아니라 유력한 대권주자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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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박원순은 민주당 후보로 선출된 박영선, 민주노동당 후보 최규엽과의 단일화 경선을 통해 야권 단일 후보가 되었고, 선관위 홈페이지에 대한 디도스 공격 등 악랄한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나경원까지 물리치며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이 선거로 인해 임기 1년 4개월을 남겨둔 이명박 정부의 레임덕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멘붕에 빠진 한나라당은 홍준표 대표 사퇴-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취임-새누리당으로의 변신 등 3단 콤보를 거치며 이듬해 총선과 대선을 준비하게 된다. 야당 역시 기존의 민주당 체제로는 승산이 없다는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혁신과 통합' 등 재야세력과의 통합을 거쳐 민주통합당으로 개편된다.

 

꾸준히 높은 인기를 누리던 안철수는 1년 뒤 대선 출마 선언-문재인과의 단일화 테크를 밟은 뒤 아래에서 언급할 노원병 재보선에 도전하게 된다. 반면 한나라당의 X맨으로 전락한 오세훈은 이번 선거 과정에도 외국을 떠돌고 있으며, 국회의원 직만 날린 나경원 역시 이듬해 지역구 공천에서조차 탈락하는 등 절치부심하다가 이번 재보선에서야 김문수 땜빵으로 동작을 공천을 받는 데 성공했다. 박영선은 국회 법사위원장을 거쳐 새정치민주연합의 원내대표가 되었지만, 천정배는 지역구를 잃고 떠돌다가 총선에는 서울 송파을에서 낙선한데 이어 광주 광산을에 도전한 이번 재보선에서는 공천마저 받지 못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선거는 2014년의 정치구도를 이해하는데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아울러 3년 뒤 시점에서 돌이켜봐도 이 선거는 나꼼수가 아니었다면 이뤄지기 어려웠고, 이뤄졌다 해도 이와 같은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 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나는 꼼수다 제작진과 애청자들이라면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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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야 지도부를 만든 2013년 재보선

 

이건 너무 가까운 과거라 간략히 언급. 2013년 4월 24일 서울 노원병, 부산 영도, 충남 부여-청양 3곳에서 재보선이 치러지게 된다. 뒤의 두 곳이 당선무효에 따른 재선거였다면 서울 노원병은 정의당 노회찬 의원의 삼성 X파일 사건과 관련한 유죄확정판결로 치러진 보궐선거. 사건의 핵심은 삼성의 검찰에 대한 로비의혹이건만, 달을 가리켰더니 손가락을 바라보는 형국이 되어 노회찬만 좋게 된 거지 같은 판결이었다.(그리고 이 사건 수사의 최종 책임자인 법무부장관이 천정배였;;;) 


어쨌건 수도권의 유일한 빈자리가 나면서 대선 당일 미국으로 출국했던 안철수가 귀국과 동시에 직접 출마를 선언한다. 우여곡절 끝에 안철수는 민주당 이동섭 지역위원장을 주저앉히고(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다. 이동섭, 허동준, 기동민... 동트리오인가!), 새누리당의 허준영 전 경찰청장, 정의당 후보로 출마한 노회찬의 부인 김지선 등을 제치며 금배지를 거머쥔다. 그리고 1년 뒤에는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새정치민주연합의 공동대표가 되었다. 반면 금배지는 물론 지역구까지 잃은 노회찬은 동작을 출마를 선언하게 되었고, 새정치민주연합은 허동준 지역위원장을 주저앉히고 뜬금없이 광주 광산을 출마를 준비하던 기동민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동작을에 전략공천하며 이번 재보선은 1년 전과 조금 비슷하지만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한편 부산 영도에는 19대 총선 당시 자기 지역구(부산 남을)에서 공천 탈락을 당한 새누리당의 김무성, 충남 부여-청양에는 충남지사를 하다가 세종시 원안 수정에 반발하여 지사직을 던졌던 새누리당의 이완구가 이변 없이 당선되었다. 이후 김무성은 새누리당 대표에 도전 중이고, 이완구는 새누리당 원내대표이자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다.

 

6개월 뒤인 10월 30일, 경기 화성갑과 경북 포항남-울릉 두 곳에서 재보선이 치러졌다. 경기 화성갑에서는 한나라당과 친박연대의 대표를 역임한 친박계의 원로 서청원이 대망의 7선 고지에 올랐고 지금은 김무성과 치열한 당권 경쟁 중이다. 포항남-울릉에서는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행정자치부 장관이었던 박명재가 새누리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이로써 참여정부는 순장조라 불리는 마지막 내각에서조차 행자-국방 두 장관이 상대 진영으로 이적하는 안습의 행보를 보여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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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적 안습...




2. 지방선거 후의 재보선

 

1998년 이후 지방선거가 치러지는 해에는 어김없이 7월 하순 또는 8월 초순에 국회의원 재보선이 치러지게 되었다. 시도지사에 출마하는 국회의원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올해도 역시 비슷한 구도인 듯. 그리하여 빈자리는 넘쳐나는데 인물은 찾기 어려운(∵현직 아닌 쓸 만한 자원은 이미 지방선거에 참전한 직후) 희한한 상황이 전개되며 여야 모두 공천에 많은 어려움을 겪곤 했다. 그 와중에도 한나라당은 별다른 잡음 없이 선거에 임하여 여당일 때나 야당일 때나 한결같이 승리를 거머쥔 반면, 새정치민주연합의 전신인 민주당 계열 정당들은 여당일 때는 정권심판론에 걸리고 야당일 때는 쉽게 이길 것으로 자신하다가 망하는 등 역대 전적 4 : 0의 안습한 상황이다. 이쯤 되면 징크스로 부를 만한데 이번에는 과연 탈출할 수 있을지, 하나하나 살펴보자.


 

1) 1998년 7월 21일 재보선(한나라당 4 : 국민회의 2 : 자민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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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7월 21일 재보선은 7곳에서 치러졌다. 서울 종로, 서울 서초갑, 부산 해운대-기장을, 대구 북갑, 경기 수원 팔달, 경기 광명을, 강원 강릉을. 대부분 지방선거 출마자들의 지역구였으나,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다가 사퇴한 이명박 의원(!)의 서울 종로와 남평우 의원의 타계로 공석이 된 수원 팔달 정도가 다소 이채로웠다. 지방선거 후 50여 일만에 치러지는 재보선이었음에도 여야 모두 당력을 집중하게 되는데, 집권당이던 새정치국민회의는 총재권한 대행을 맡던 대도 조세형을 광명을에 출마시켰고 야당이던 한나라당 역시 조순 총재가 강릉을에 직접 나서는 등 곳곳에서 빅 매치가 벌어졌다.

 

결과는 국민회의 2 : 자민련 1 : 한나라당 4. DJP 연합으로 공동 여당이 된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합동 공천을 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한나라당의 승리였다. 여야의 조 총재는 모두 당선되었고 서울 종로에서는 국민회의 노무현 부총재가 6년 만에 원내에 진입하는 쾌거를 이룬 반면, 경기 수원 팔달에서는 남평우 의원의 아들인 약관 33세의 남경필이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이후 경기도지사가 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는다. 특기할 만한 것은 16년 뒤에도 똑같은 사유(현직 의원의 지방선거 출마)로 재보선을 치르는 해운대-기장을 지역구인데, 16년 뒤에도 출마를 선언했지만 공천 탈락을 당한 한나라당 안경률 후보를 꺾고 자민련의 김동주 후보가 당선되었다. 다만 자민련이라는 정당의 정체성이나 김동주 의원의 수서비리 연루 의혹, 선거 전후 2년 만에 국민신당-자민련-민주국민당을 넘나든 행적들로 인해 좋은 평을 받지는 못하였다.


 

2) 2002년 8월 8일 재보선(한나라당 11 : 새천년민주당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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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8월 8일 재보선은 무려 13곳에서 치러지며 역대 최다 지역 재보선 신기록을 달성하게 된다.(그 기록은 12년 뒤인 2014년 7.30 재보선으로 깨질 예정이다.) 당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은 전국 순회경선을 통해 노무현 후보를 선출하며 기세를 올렸지만, 오래 가지 않아 지지도 하락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6.13 지방선거에서마저 참패하며 후보를 다시 뽑자는 목소리마저 높아진 상황. 당 밖에서는 월드컵 4강 신화를 통해 인기를 얻은 정몽준이 대권주자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노무현은 8.8 재보선에 운명을 걸기로 하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재경선을 통해 재신임을 묻겠다는 배수진을 친다. 그리하여 유인태는 물론 재야의 고수 장기표까지 불러오는 나름 승부수를 던졌지만 대부분의 승부수가 그러하듯 무리수로 판명. 새천년민주당은 총 13곳 중 호남 두 곳만 승리하고 나머지 11곳에서 모두 패하는 기록적인 참패를 당하고 만다. 그리고 이 선거를 통해 나중에 주중대사가 되는 권영세, 방송통신위원장이 되는 이경재, 부산시장이 되는 서병수 등 친박계 핵심들이 원내에 진입하게 되었다.(그런데 이때 박근혜는 정작 한나라당을 떠나 한국미래연합이라는 1인 정당의 대표놀이를 하고 있었다는!) 


김문수, 이재오와 같이 민중당에 있던 장기표는 홍사덕과 함께 무지개연합을 해보려다가 배신당한 뒤, 민주국민당에 합류했다가, 이번에는 새천년민주당까지 왔으나 끝내 국회의원이 되지 못한 반면, 장기표의 민중당 동료였던 이우재는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 금천에서 재선에 성공하였고, 민국당 동료였던 김상현은 민주당 후보로 광주에서 당선되며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16대 국회에 들어가겠다'는 자신의 공언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참패한 노무현은 안으로는 후보단일화협의회, 밖으로는 정몽준의 단일화 압박 속에 험난한 몇 개월을 보내야 했고, 급기야 서울시장 후보로 밀어주었던 김민석의 탈당 및 정몽준 캠프 합류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 을 줄 알았으나, 놀라운 반전 쇼를 보여주며 정몽준과의 단일화에 성공한 뒤 지지철회라는 해프닝 속에서도 이회창까지 꺾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8.8 재보선 후 4개월 만에 일어난 엄청난 격변을 보면 재보선 따위 별거 없나 싶기도 하다.

 


3) 2006년 7월 26일 재보선(한나라당 3 : 열린우리당 0 : 민주당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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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26일 재보선은 서울 성북을, 서울 송파갑, 경기 부천 소사, 경남 마산갑 등 4곳에서 치러졌다. 5.31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한 다음이었기에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반전을 기대했겠지만, 그런 거 없었다. 8.8 재보선 후 4년 만에 다시 한 번 재보선을 치르게 된 마산갑에서는 현재 해양수산부 장관을 맡고 있는 이주영이 낙승을 거두었다. 그는 원래 창원을 국회의원이었으나,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에게 패하며 원외에 머물렀던 것. 김태호 경남지사 밑에서 정무부지사를 맡던 그는 강삼재 전 한나라당 사무총장 등과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공천장을 거머쥐었고 2년 만에 원내로 복귀할 수 있었다.

 

경기 부천 소사는 요즘 소록도로 봉사활동을 떠난 김문수 의원의 지역구였는데, 그가 '도지삽니다'가 되는 바람에 공석이 되었다. 그 자리를 물려받은 건 김문수의 보좌관 출신인 차명진. 그는 노무현 대통령의 대변인 출신으로 지금은 부천시장이 된 김만수를 꺾고 당선의 영광을 누렸다. 개그는 송파갑이었는데, 여기는 현직이던 맹형규 한나라당 의원이 서울시장 출마를 위해 사퇴했던 곳이었으나, 모두들 알다시피 오세훈 바람이 불며 맹형규는 공천조차 받지 못 했다. 한나라당은 맹형규의 후임자를 열심히 물색한 끝에 도로 맹형규를 공천하는 코미디 같은 해프닝을 연출했다.(그리고 8년 뒤에는 정홍원 총리 후임으로 정홍원을 발탁했긔.) 문제는 열린우리당이 그런 맹형규조차 꺾지 못했다는 것.

 

그러나 이 모든 선거는 성북을의 임팩트 앞에서는 닥치고 버로우. 이곳은 노무현 비서실장을 했던 신계륜의 지역구였는데,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하며 재보선이 치러졌다. 이 자리에 노무현 탄핵을 주도했던 민주당의 조순형이 직접 출마한다. 당시 민주당은 탄핵 후폭풍으로 의석수가 9석까지 줄어드는 등 몰락을 체험했지만, 열린우리당의 인기 하락에 따른 반사적 이익으로 2006 지방선거에서는 광주, 전남 두 곳의 광역자치단체장을 당선시키는 등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이때 열린우리당이 얻은 광역단체장은 전북 한 곳뿐이었다.). 원래 서울 강북을을 지역기반으로 하던 조순형은 17대 총선에서 지역구도 타파를 위해 대구 수성갑에 출마했으나 참패하였고, 대신 형님(조윤형) 지역구였던 성북을에 출마해 예상을 깨고 당선되는 기염을 토한다. 그만큼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인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고, 이듬해 대선을 앞둔 여권의 분위기 또한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4) 2010년 7월 28일 재보선(한나라당 5 : 민주당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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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28일 재보선은 8곳에서 치러졌다. 야권의 선전으로 마무리된 6.2 지방선거의 뒤끝이었기에 재보선 또한 야당이 유리할 것으로 전망되던 상황. 그러나 유리하다 싶을 때면 밥그릇 싸움으로 기회를 놓치곤 하는 야당의 못된 버릇은 이번에도 되풀이된다. 그 백미는 최대 승부처이자 왕년의 대권주자 문국현의 의원직상실로 치러진 서울 은평을이었다.

 

한나라당에서는 이 지역구의 터줏대감이었던 MB 정부의 실세 이재오가 90도 인사로 상징되는 낮은 자세의 선거운동을 통해 권토중래를 꾀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는 민주당은 당초 MBC 앵커 신경민을 전략공천하려 했으나 여러 가지 우여곡절로 인해 무산되었고,(이번 선거에는 MBC 출신 최명길 부국장이 대전 대덕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며 데자뷔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공천장은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가 될 뻔하다가 낙마한 장상에게 돌아가며 무언가 꼬이기 시작. 


문국현의 기득권을 주장하던 창조한국당에서는 공성경 대표가 직접 출마하였고, 민주노동당에서는 2년 뒤 이정희 땜빵으로 관악갑 국회의원이 되는 이상규, 국민참여당에서는 현재 정의당 대표이자 수원 영통 재보선에 출마한 천호선을 내세워 야권후보는 걷잡을 수 없이 난립하게 된다. 심지어 사회당에서조차 2007년 대선 후보였던 금민을 내보냈으니 완전한 단일화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상황.(왠지 동작을 비슷한 느낌이다.) 우여곡절 끝에 장상으로 단일화가 확정되었지만, 선거 이틀 전에 가까스로 이뤄진 단일화의 시너지를 기대하기는 애초부터 힘들었다. 결국 이재오가 승리하며 이명박 정부는 6.2 지방선거 패배의 후유증을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민주당은 원래 자기당 의원의 지역구였던 인천 계양을, 강원 철원-화천-양구-인제, 충북 충주를 한나라당에게 빼앗기고, 한나라당 지역구였던 강원도 원주시만을 탈환하며 최종 스코어는 한나라 5 : 민주 3. 마치 야당이 선전한 것 같은 숫자지만, 원래 한나라 1 : 민주 5 : 자유선진 1 : 창조한국 1이었던 의석 분포라든지 영남권 선거가 한 군데도 없었던 점을 감안해 보면 민주당의 참패. 결국 정세균 대표는 6.2 지방선거 승리의 기세를 살리지 못하고 사퇴할 수밖에 없었고 전당대회 끝에 손학규가 새 대표에 선출된다.

 

특기할 만한 점은 이광재 강원지사의 빈자리에 연극배우 최종원이 당선된 정도? 이시종 의원의 충북지사 당선으로 공석이 된 충주시 재보선에서는 MB의 경제 브레인 윤진식이 당선되었는데, 윤진식이 4년 뒤 절친 이시종과 충북지사 선거에 맞붙어 패배를 당하는 바람에 충주시민들은 쓸데없이 또 한 번 재보선을 치르게 되었다.







벨테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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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