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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7. 14.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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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보선의 추억 <상>








3. 중진들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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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학규의 재보선 잔혹사(1993년 4월 23일, 2009년 10월 28일, 2011년 4월 27일)


수도권 재보선이 열릴 때마다 소환당하는 재보선 매니아 손학규. 이번 선거에도 남경필의 지역구였던 수원병에 공천을 받게 되었는데... 대체 손학규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영원히 고통 받는' 존재가 되었단 말인가? 시계를 21년 전으로 돌려보자.

 

1993년 4월 23일, 김영삼 대통령 당선 이후 처음으로 국회의원 재보선이 치러졌다. 당시 김영삼의 민주자유당은 하나회 숙청과 공직자 재산공개 등 일련의 개혁 정책으로 인기를 얻고 있던 것...과는 무관하게 재보선 지역 세 곳 중 두 곳이 부산이라는 이유로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결국 승부는 유일한 수도권 지역구인 경기 광명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었는데...


민자당의 선택은 서강대 교수였던 손학규 전략공천이었다. 이는 여당에나 야당에 모두 일종의 충격을 주었는데 손학규는 오랜 기간 재야의 브레인으로 활동하던 인물이었기 때문. 그러나 재야를 끌어들여 개혁성을 강화하고자 했던 김영삼의 의도와, 현실 정치 참여를 통해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손학규의 생각이 맞아 떨어지며 공천이 이뤄졌고, 문민정부의 높은 인기에 힘입어 금배지도 무난히 거머쥐었다. 이후 손학규는 민자당 대변인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하는 등 여당에서 승승장구하게 되지만, 이러한 경력은 손학규가 야권에 합류한 2007년 이후 흑역사로 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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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89년 재보선에서 상대 후보를 매수했다는 이유로 의원직을 상실하게 된 서석재 의원의 부산 사하구에서는, 뒷날 YS의 오른팔로 활동하게 되는 박종웅과 3당 합당 참여를 거부한 김정길이 맞붙어 박종웅이 낙승을 거두었다. 당시 야당에서는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노무현을 광명에, 김정길을 사하에 투입해 쌍끌이 전략을 써 보자는 의견이 오고 갔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무산되었는데 이러한 전략공천이 이뤄졌다면 어땠을는지? 아울러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며 의원직을 사퇴한 박관용의 부산 동래갑에서는 전두환 정권 당시 재무부장관을 지낸 강경식이 민자당 후보로 당선, 4년 뒤 나라를 IMF에 빠뜨리기 위한 게이지를 모으게 된다.

 

YS 정권 내내 잘 나가던 손학규는 1998년과 2002년 연거푸 경기도지사에 도전하며 국회의원직을 내려놓는다.(이로써 광명은 14-15-16대 세 번 연속으로 재보선을 치르는 안습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그 중심에는 손학규가;;;) 그 결과는 앞서 본 바와 같이 1998년에는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이던 조세형의 승리(조세형은 2년 뒤 총선에선 손학규에게 패하며 사실상 정계를 떠나게 된다.), 2002년에는 광명시장 출신 한나라당 전재희의 승리. 16대 비례대표 의원이던 전재희는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국회의원 직을 그만두는 엽기적인 변신을 감행하며 뒷날 4선인 듯 4선 아닌 4선 같은 3선의원이 되었고, 손학규처럼 보건복지부장관도 역임했지만,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의 여성 정치 신인 이언주 변호사에게 패하며 헌정회 회원이 된다.

 

한편 경기지사를 마치고 대권을 꿈꾸던 손학규는 한나라당을 나와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하며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정동영의 17대 대선 패배 후 통합민주당의 대표가 되어 18대 총선을 지휘했지만 당도 망하고 본인도 종로에서 낙선. 이후 춘천에서 닭치고 농사를 지으며 와신상담의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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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28일, 경기 수원 장안(현재의 수원갑으로 수원 지역구 중 유일하게 이번 재보선을 치르지 않는 곳이다.), 경기 안산 상록을, 강원 강릉, 충북 증평-진천-괴산-음성, 경남 양산 등 5개 지역에서 국회의원 재보선이 실시되었다. 노무현, 김대중 두 대통령의 서거 후 처음 실시되는 재보선이었기에 야권으로서도 놓칠 수 없는 한판. 민주당 지도부는 경기도지사를 지낸 손학규에게 수원 장안 재보선 출마를 강권했다. 심지어 지역위원장 이찬열마저 손학규의 출마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할 정도로 당 안팎의 출마요구가 거셌던 상황. 그러나 손학규는 불출마 선언을 하며 이찬열의 선대위원장을 맡아 혼신의 힘을 다한 유세를 펼친다. 그리하여 이찬열은 불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기적같이 당선되었고, 야당에서는 보기 드물게 본인의 금배지보다 당을 위해 헌신하는 훈훈한 모습을 보여준 손학규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높아진다. 이러한 노력들이 높은 평가를 받아 2010년, 손학규는 정동영과 정세균을 꺾고 민주당 대표로 당선되며 정치적 재기에 성공했다.

 

이 무렵 재보선 승리로 기사회생한 이명박 정부는 김황식을 국무총리로, 임태희를 대통령실장으로 쓰는 개각을 단행했고, 경기 성남 분당을 국회의원이던 임태희는 의원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이명박 특유의 꼼수가 발휘되는데, 의원직 사퇴서를 10월 1일자로 처리함으로써 재보선을 이듬해 4월로 미뤄버린 것.(만일 9월 30일에 처리했다면 2010년 10월에 재보선을 치러야 했다는) 굳이 재보선을 해서 어그로를 끌고 싶지 않았던 현명한 판단...일 줄 알았으나 장고 끝에 악수였다는 건 이 글을 읽다 보면 알게 된다. 그 때의 업보였을까? 3년 뒤 평택을 재보선에 출마하려던 임태희는 경선도 해보지 못하고 수원 영통으로 강제공천(?)을 당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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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꼼하신 분과 전 비서실장



2011년 4월 27일 재보선은 이광재의 유죄 확정 판결로 치러지는 강원도지사 선거와, 경기 성남 분당을, 전남 순천, 경남 김해을 등 3곳에 대한 국회의원 선거였다. 여당의 안상수, 야당의 손학규 대표 체제가 사실상 처음으로 맞붙는 빅매치인데다가 성남 분당을을 제외하고는 모두 민주당 소속의 도지사 혹은 국회의원이었다는 점에서 야당은 필승을 다짐하고 있었지만 객관적으로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특히 강원도지사의 경우 이명박 정부로부터 쫓겨나다시피 MBC 사장에서 물러난 엄기영이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는 '엄처구니' 없는 상황이 일어나 민주당을 멘붕에 빠뜨렸다. 민주당은 MBC 사장 출신으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이던 최문순을 내보내며 MBC 사장 출신끼리의 대결구도를 만들었으나, 뉴스데스크 앵커를 맡았던 엄기영의 인지도를 당해내기는 어려웠던 상황. 그러나 선거 중반 엄기영의 불법선거사무소 운영 파문이 불거진 데다, 이광재에 대한 동정여론도 만만치 않아 예상을 깨고 최문순이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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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과 경남 김해을은 야권 단일화가 거센 진통을 몰고 왔다. 특히 민주당 공천 = 당선으로 여겨지던 전남 순천의 경우, 민주당이 독자 출마를 포기하고 민주노동당의 김선동 후보를 단일후보로 지지함에 따라 민주당 공천을 노리던 여러 인사들이 썰물처럼 탈당을 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쇼크가 있었다. 결국 김선동이 당선되며 최루탄을 들고 본회의장에 나타나는데... 그로 인해 김선동은 의원직을 상실했고, 올해 7월 30일 다시 한번 재보선이 치러지게 되었다는 눈물 나는 이야기. 이번에는 선거구 조정으로 곡성이 포함되는 바람에 곡성 출신인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했고, 2011년 재보선의 원인이 되었던 서갑원이 사면복권을 받아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맞붙게 되었다.

 

김해을의 경우, 처음에는 이번 6.4 지방선거에서 경남지사 후보로 나선 노무현의 보좌관 김경수가 야권후보로 유력했으나, 처음으로 원내진입을 노리던 국민참여당이 노무현의 농업특보 출신 이봉수를 내세우며 압박함에 따라 친노 세력의 분열을 우려한 김경수는 출마를 포기했다. 이후 경선 룰을 놓고 벌어진 치열한 밀당과 보이콧을 불사하는 알박기 정신 끝에 이봉수는 민주당 후보 곽진업을 제치고 야권 단일후보가 되었지만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경남지사를 지낸 김태호에게 석패하며, 국민참여당의 원내진출은 무산되었고 유시민의 정치적 입지도 크게 위축되었다. 국무총리 인사청문회에서 낙마했던 김태호는 이 선거의 승리로 정치적 재기에 성공하며, 현재는 새누리당 대표 경선에 도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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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                            



그러나 하이라이트는 역시 분당을. 이곳은 천당아래 분당이라 불릴 정도로 당시 한나라당의 강세였던 지역이자 단 한 번도 야권에게 의석을 내준 적 없던 민주당의 불모지. 그리하여 한나라당에서는 정운찬 전 총리 등 여러 후보들이 거론된 반면 민주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정동영과 천정배 등 중진들의 은근한 등 떠밀기 속에 당대표인 손학규가 직접 출마하며 승부수를 띄운다. 이에 맞서는 한나라당은 강재섭 전 대표가 출마하며 전 현직 당대표의 결투가 성사되었는데...

 

놀랍게도 예상을 깨고 손학규가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강재섭은 쓸쓸히 정계를 떠나게 되었고 보온병 안상수 또한 당 대표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반면,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손학규의 당내 입지는 탄탄해진다. 앞에서 다룬 10.26 재보선이 있기 전까지는. 여담으로 재보선 직후 그 유명한 딴지라디오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가 시작되었다.

 

손학규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릴 수 있지만, 적어도 2009년 이후 재보선에서 보여준 손학규의 모습은 자신보다 당을 먼저 생각하고 쉬운 자리보다는 어려운 곳에 몸을 던져 승부하는 대인의 풍모였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7. 30 재보선을 앞두고 다시 한 번 전략공천을 당한 손학규, 과연 이번에도 승부사의 면모를 보여줄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2) 정동영은 어쩌다 순살동영이 되었나(2009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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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스타 정동영. 2007년 대선 전의 정동영은 분명 현 야권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인물이었다. 준수한 외모, 유창한 언변, 여론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능력 등 어느 것 하나 빠질 게 없는 그는 자타공인 포스트 노무현 시대를 이끌어갈 주역이었다. 비록 노인폄하 발언 등 우여곡절도 있었으나 열린우리당의 초대 당의장으로서 과반의석을 가져온 장본인도 그였다. 그랬던 그가! 박스떼기 경선 등 많은 물의를 일으키며 가까스로 출마한 17대 대선에서 531만 표 차이라는 기록적인 참패를 당하며 추락하기 시작한다. 4개월 뒤 18대 총선을 앞두고 절치부심하던 그에게 통합민주당 지도부는 수도권 출마를 권했다.

 

고민하던 정동영의 선택은 동작을이었다. 이곳은 소선거구제로 바뀐 1988년 이후 20년간, 15대 총선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줄곧 민주당 계열 후보들이 승리를 거두었던 곳. 현직인 이계안(현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이 불출마를 선언하며 무주공산이 되었고, 한나라당에서는 교총 회장 출신 비례대표 이군현이 출마하기로 했으나 정동영의 존재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정동영은 지역구 이동의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동작을에 뼈를 묻겠다'고 이야기하는 등 무난히 원내에 입성할 듯 보였으나...

 

한나라당에서 정동영을 저격하기 위해 정몽준을 투입하는 초강수를 둔다. 왕년의 대권주자 정몽준은, 노무현에 대한 지지철회로 스타일을 많이 구기긴 했으나 울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을 해먹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1988년 13대 총선부터 20년간 한 번의 멈춤도 없이 5선 고지에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천년만년 울산의 토호로 머물러 살 줄 알았으나 더 큰 꿈을 꾸고 있던 그는 2007년 대선 과정에서 한나라당에 입당하며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려 했고, 그것이 바로 수도권 출마였다. 동시에 정몽준의 나와바리 울산 동구에는 정몽준의 지역구 사무장을 하던 안효대가 공천을 받았고, 원래 동작을을 노리던 이군현은 고향 경남 통영으로 가는 연쇄이동이 일어났다.

 

정 vs 정의 불꽃 튀는 대결...이 될 줄 알았던 동작을 지역. 그러나 서울 전역을 강타한 뉴타운 바람은 동작을도 비켜가지 않았고 결국 선거는 예상보다는 허무하게 정몽준의 압승으로 끝났다. 원래 5선 의원이던 정몽준은 이후 한나라당 대표가 되었으나 소원하던 대권에는 이르지 못한 채 동작을에서 재선을 추가해 7선이 되었다. 또 한 번의 승부수가 필요한 상황, 그는 서울시장 선거에 나섰지만, 가족의 맹활약으로 그동안 아껴온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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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대선에 이어 총선까지 패배하며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한 정동영. 한동안 외국에 머물며 권토중래하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2009년 4월 29일 인천 부평을, 울산 북구, 전북 전주완산갑, 전북 전주덕진, 경북 경주 등 5개 지역구에서 국회의원 재보선이 치러졌던 것. 특히 전주덕진은 정동영이 정계에 입문했던 지역구이자, 그에게 2연속 전국 최다득표의 영광을 안겨준 든든한 기반이었다. 그는 금의환향을 꿈꾸며 귀국했지만, 당 지도부의 반응은 싸늘했다. 당선 가능성 높은 전주에는 새 인물을 공천해야겠으니, 기왕이면 수도권에 나가서 싸워달라는 것이었다.(어째 이것도 낯익은 풍경이다.)

 

팽팽한 줄다리기는 결국 공천탈락한 정동영의 탈당 및 무소속 출마로 귀결되었고, 정동영은 '어머니 정동영입니다'라는 감성 돋는 캐치프레이즈로 전주에 돌아온다. 혼자만 나온 것이 아니라, 전주고 선배인 신건 전 국정원장을 이웃 선거구인 전주완산에 무소속 출마시켜 함께 나왔다! 민주당은 전주 완산엔 친노 성향의 이광철 전 의원을, 전주 덕진에는 통일 문제 전문가인 경남대 김근식 교수를 공천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정동영은 고향 사람들의 동정표에 힘입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완산에 출마한 신건도 동반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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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금배지는 얻었지만 정치적 입지는 크게 줄어들었으니, 정동영은 왕년의 대권주자이자 야권 최대 계파의 수장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이 지역의 맹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특히 '동작을에 뼈를 묻겠다'던 발언을 불과 1년 만에 뒤집고 전주에 출마하면서, 뼈는 동작에 묻고 살만 파내서 전주로 간 거냐는 비아냥 속에 '순살동영'이라는 캐릭터를 얻고 말았다. 게다가, 인천 부평을에서 민주당 홍영표 후보가 승리하고 영남권 두 곳마저 무소속과 진보신당이 가져가는 등 한나라당이 0석의 굴욕을 당하는 바람에 정세균 대표는 마치 지지 않은 것처럼 폼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그러니까 한나라당 0 : 민주당 1 : 진보신당 1 : 무소속 3이었던 거다!) 한 달 뒤 노무현 대통령 서거로 추모 정국이 조성되며 정동영의 당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묻혀버렸고 생전의 노무현과 껄끄러운 관계를 해소하지 못한 정동영은 봉하마을에서 쫓겨나는 수모까지 겪는다.

 

어렵사리 민주당에 복당한 정동영은 싸늘한 시선 속에서도 사회에서 소외된 현장 이곳저곳을 발로 뛰며 '실천왕'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아직도 그의 진정성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이 없지 않지만,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가운데에서도 몇 년간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점만큼은 (비록 쇼라 하더라도) 나름대로 의미 있고 평가받아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수많은 실책들 가운데 적어도 재보선만 아니었다면, 지금보다는 더 존중받는 정치인이 되었을 거라는 점은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만일 3년만 더 동작에서 버텼다면 19대 총선에서 정몽준에게 설욕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니라 해도 이번 재보선 공천만큼은 이론의 여지없이 정동영의 몫이 되지 않았을까? 어차피 전주를 떠나 수도권에서 활로를 모색해야 했던 정동영에게 기껏 남아 있던 지역구가 강남을이었다는 것이, 그마저도 진작부터 준비하던 전현희를 경선까지 해가며 제쳤다는 것이, 그리고 나서 한미 FTA의 선봉장 김종훈에게 참패를 당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혹시나 이런 슬픈 사연을 따라할까봐 걱정했던 누군가는 공천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출마를 선언했다.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며 역량있는 정치인인 그의 앞날에 영광이 함께 하길 기도한다. 좀처럼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는 실천왕에게도 역시 재기의 기회가 주어지기를!)

 


3) 김한길의 흑역사(2001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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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남자'를 썼던 베스트셀러 소설가이자 방송인으로 주가를 올리던 김한길. 통일사회당 당수 김철의 아들이자 초대 문화부 장관 이어령의 前 사위, 지금은 탤런트 최명길의 남편이고 새정치민주연합의 공동대표. 화려한 이력에 걸맞게 정계입문도 화려하게 시작했...을 것 같지만 그 첫 출발은 1992년,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에 입당하여 14대 총선에 출마했던 것. 지역구는 하필이면 22년 뒤 재보선을 치르게 되는 '서울 동작을'이었다. 당시 국민당은 창당 2개월여 만에 31석을 얻는 돌풍을 일으키며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지만, 김한길은 그것과 관계없이 3위로 낙선. 이후 김한길은 정주영의 공보특보를 맡기도 했지만 정주영의 정계은퇴와 함께 소리 소문 없이 방송계로 돌아왔고 22년이 지난 지금은 국민당 출신이라는 과거를 완전히 세탁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4년 뒤 15대 총선. 김한길은 신한국당과 새정치국민회의 모두의 러브콜을 받으며 행복한 고민을 즐기다가, 국민회의 선대위 대변인이자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영입되며 4년 전의 아픔을 씻어냈다. 당시 그의 순번은 전국구 6번으로, 김대중 총재가 14번, 권노갑 부총재가 9번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높은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5대 대선에서 맹활약하며 DJ의 신임을 얻은 그는,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거친 뒤 2000년 16대 총선에서도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다. 흔치 않은 비례대표 재선. 그러나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역구 득템과 경험치 렙업이 필요했다. 김한길은 박지원의 후임으로 문화부 장관이 되며 4개월 만에 국회의원을 사퇴했고, 정확히 1년 만에 문화부 장관에서 물러나며 구로을 재보선에 도전했다.

 

구로을 지역구는 애경그룹 회장이며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았던 장영신 의원의 지역이었으나, 대법원 확정판결로 당선무효가 되며 공석이 된 곳. 1999년 3월 30일 이신행 의원의 당선무효로 재보선을 치렀던 구로을은 2년 반 사이에 3번의 선거를 치르는 바쁜 지역구가 된다. 한나라당은 16대 총선에 출마했던 이승철 지역위원장을 공천.

 

그 밖에 서울 동대문을과 강원 강릉에서도 선거무효를 원인으로 하는 재보선이 치러졌으니, 서울 동대문을은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민주당 허인회 후보가 16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 김영구 후보와 맞붙어 3표 차이로 졌던 곳(원래 11표 차이였는데, 재검표해보니 3표 차로 줄었;;; 이후 낙선자들을 위로하려 마련된 청와대 행사장에서 허인회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큰절을 올려 두고두고 구설수에 오른다.)이었으나 김영구 의원의 당선무효로 인해 이번에는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와 배틀을 뜨게 되었다.

 

코미디는 강원 강릉. 한나라당 최돈웅 의원의 지역구였던 이곳은 최돈웅 의원의 회계책임자가 당선무효에 해당하는 형을 받음에 따라 재선거가 치러져야 하는 곳이었으나 판결 확정 전에 최돈웅이 의원직을 사퇴함으로써 보궐선거가 치러지게 되었고, 결국 최돈웅이 다시 출마하는 개그콘서트를 보여주었다. 민주당은 군 출신의 김문기 후보를 공천.

 

이렇게 놓고 봤을 때 민주당과 한나라당 양쪽 모두 팽팽한 대결이 되거나 민주당에 유리한 구도가 될 것처럼 보였지만, 결과는 0:3 한나라당의 압승이었다. 당시 집권당이던 민주당은 국민의 정부 4년차에 접어들며 각종 부패 스캔들과 경제난,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한 조중동의 극심한 저항과 DJP 공조파기 등 안팎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국민들의 피로도 또한 극심했던 상황. 이로 인한 민심이반이 결국 한나라당에 압도적인 승리를 가져다 준 것이었다.

 

땅에 떨어진 지지도에 위기의식을 느낀 김대중 대통령은 새천년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국정운영에 전념하기로 한다. 이후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임하는 관습은 사라지게 되었으나, DJ에 의한, DJ를 위한, DJ의 정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 입장에서는 멘붕이 올 만한 상황. 한광옥 대표 체제 하의 민주당은 뼈를 깎는 쇄신에 나선 끝에 전국 순회 국민 참여 경선을 통해 대통령후보를 선출하는 방법으로 나름의 활로를 모색한다.(그리고 이 도박은 노무현이라는 히트상품과 맞물려 대박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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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은 높은 인지도와 명성에도 불구하고 무명의 야당 후보에게 패배하였지만, 와신상담한 끝에 2004년 17대 총선에서 기어코 구로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3선이 된 그는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를 맡기도 했으나, 노무현 정부의 인기하락과 함께 열린우리당 탈당파의 선두주자가 되어 중도통합신당, 중도통합민주당의 대표가 되는 등 외도에 나섰다. 안간힘을 쓴 보람도 없이 17대 대선에서 참패한 이후에는 불출마를 선언하며 자숙의 시간을 갖기도.(그의 구로을 지역구는 지금 새정치민주연합의 원내대표를 맡고 있는 박영선이 물려받았다.) 4년간 잊혀진 인물로 지냈던 그는 19대 총선 막판에 서울 광진갑 공천을 받으며 기사회생했고, 이후 친노에 대항하는 당내 비주류 계열의 수장으로 민주통합당 최고위원과 대표에 선출되는 등 다시 한번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재보선에서 패하고 정치판의 이슬로 사라져 갔지만, 저력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재기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사례. 그러므로 낙천-낙선자들이여 너무 조급해하지 말지어다.

 

보너스로, 15대 총선 당시 송파갑 국회의원이었으나 당선 무효에 해당하는 판결로 쫓겨났던 홍준표. 그의 지역구였던 송파갑 재보선에서 고승덕이 어떤 사고를 쳤고(못난 사위를 둔 장인어른께 정말 미안하다앜~!) 이회창이 어떻게 수습했는지는 필자의 전작 '고승덕발 나비효과'에서 언급한 바 있다. 미쿡으로 날아가 MB와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던 홍준표는, 사면복권을 받은 뒤 동대문을 재보선을 통해 극적으로 원내에 진입한다. 이후 17, 18대에 연이어 당선되며 4선고지에 오른 그는, 저격수로 맹활약하며 한나라당 원내대표, 최고위원을 거쳐 당 대표에 선출되는 리즈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앞에서 다룬 서울시장 재보선 & 디도스 공격의 후폭풍으로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땅에 떨어지고, 의원들의 사퇴요구가 빗발치며 대표에서 물러난 그는 이듬해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민병두 의원에게 일격을 당하며 한동안 백수가 되었다. 이후 김두관이 대권도전을 위해 사퇴한 경남지사 재보선에 출마하여 권영길을 제치고 도지사가 된 홍준표는 얼마 전 재선에 성공하며 진주의료원 폐업 강행 등 마음대로 도정을 꾸려나가고 있다. 한편 뜬금없는 사퇴로 홍준표에게 재기의 기회를 준 김두관은 이번엔 경기 김포로 지역구를 옮겨 재보선에 도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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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홍문종과 유시민의 크로스오버(2003년 4월 24일)

 

너무 야당 사람들만 거론하니 재미가 없다. 이번에는 새누리당으로 타깃을 옮겨 보기로. 재보선 16일 전인 7월 14일 새누리당에서는 당 대표를 선출하는 전당대회가 열릴 예정이다. 언론에는 김무성 vs 서청원 두 유력주자만이 거론되고 있으나 이 둘을 포함 9명의 후보가 대표 1자리와 최고위원 4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구도이다. 귀찮지만 기호 순으로 읊어주자면 김태호 김무성 이인제 박창달 김을동 홍문종 김영우 서청원 김상민, 이 가운데 유력주자인 김무성과 서청원, 무한도전 PD김태호의 재보선 추억은 앞서 살펴보았고, 나머지 주자들 중에 재보선에 얽힌 추억이 있는 사람은 두 명, 홍문종과 김을동이 되겠다.

 

홍문종의 지역구는 경기도 하고도 의정부. 1992년 이후 이곳의 국회의원은 문희상, 강성종, 홍문종 이렇게 세 사람이 돌아가면서 해먹고 있다. 17대 총선부터 갑-을구로 나뉘어 세 번의 총선에서 두 명씩의 의원을 뽑아온 점을 생각하면 다소 희한한 일. 더 희한한 일은 강성종은 신한대학교를 거느리고 있는 신흥학원 이사장이고 홍문종은 경민대학이 소속된 경민학원 이사장이라는 점. 문희상 또한 학교법인 경해학원의 이사장을 지냈던 걸 감안하면, 이 동네에선 사학재단 이사장 정도 재력은 있어야 국회의원을 할 수 있다는 결론.

 

의정부에서 재선을 한 홍우준의 아들 홍문종은 약관 41세의 나이에 처음 출마한 15대 총선에서 현역의원이던 문희상을 제치고 당선되는 기염을 토한다. 그러나 16대 총선에서는 정권교체와 함께 청와대 정무수석, 국정원 기조실장 등을 역임하며 존재감을 쌓아올린 문희상에게 패배, 3년 동안 학교 운영에 전념하는 귀중한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며 대통령 비서실장에 발탁된 문희상이 의원직을 내려놓았고, 잔여임기 1년짜리 재보선이 펼쳐진다. 그리하여 경해학원 이사장이었던 문희상의 빈 자리에 경민학원 이사장 홍문종과 신흥학원 이사장인 강성종이 맞붙는 학원재벌 빅매치가 열렸는데, '종들의 전쟁'은 홍문종의 승리로 돌아갔고 홍문종은 초선인 듯 초선 아닌 초선 같은 재선이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결과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는데, 그건 바로 인접한 고양 덕양갑 재보선에 출마한 어느 군소정당 후보 탓이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 개혁국민정당. 바로 그 정당의 초대 대표 유시민이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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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대선 과정에서 민주당 내부의 노무현 흔들기를 보다 못한 시민들이 창당한 개혁당은 자연스레 친 노무현 노선을 걷게 되었고, 대선 당일 당선이 유력해진 노무현이 개혁당 당사를 찾아 기쁨을 함께 나눔으로써 공동 여당 내지 정신적 여당 같은 느낌마저 갖게 되었다. 바로 그 정당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유시민이 직접 나서겠다고 하니, '노무현 지키기'에 소극적이었던 민주당에서는 엉거주춤할 수밖에 없었던 것.

 

결국 민주당은 후보를 공천하지 않았고 유시민은 자연스레 여권 단일후보가 되어 노무현 정부의 첫 번째 재보선에 임하게 된다. 그리고 당선. 여기까지는 뭐 그냥저냥 무난한 결론이다. 문제는 처음으로 등원해 의원선서를 하려던 날 발생했는데...

 

정장 차림의 의원들이 가득한 본회의장에 유시민이 청색 재킷에 연한 초록색 셔츠, 그리고 흰색 면바지를 입고 등장했던 것. 충격을 받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고함을 치고 퇴장을 하는 바람에 유시민(그리고 정장입고 멋부리며 나타난 홍문종과 오경훈)은 의원선서를 하지 못했고, 비굴하게도 며칠 뒤 정장 차림으로 의원선서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의 해프닝 같았던 이 사건은 이후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분당 과정에서 '난닝구'로 불리던 구 민주당 당권파 측이 열린우리당 분당론자들을 '빽바지'로 비하해 부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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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사리 국회에 등원한 유시민은 이후에도 많은 비난을 받는데 그 중 대부분은 당 바깥보다는 당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2005년 4월 2일 열린우리당 의장선거에 도전한 그는 왕따라 불릴 정도로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고, 결국 4위로 상임중앙위원이 되는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때 당의장이 된 사람이 문희상. 그는 탄핵 열풍이 몰아친 17대 총선에서 홍문종을 꺾고 1년 만에 의원직을 탈환했던 것이다. 이때 강성종은 분구된 의정부을에 나서 무난히 의원직을 거머쥐었고, 두 사람은 18대 총선에서도 사이좋게 동반 당선되었다. 반면 홍문종은 선거법 위반으로 유죄확정판결을 받은 데다가 2006년 수해지역에서 골프를 치다가 당에서 제명당하는 바람에 18대 총선에선 나와 보지도 못했다는. 강성종은 2009년 16세 연하의 아나운서 출신 여성과 결혼하는 등 계속 잘 나갈 줄 알았으나 66억 원 상당의 교비를 횡령했다는 혐의로 유죄확정 판결을 받아 의원직을 상실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18대 국회 임기만료 20일 전이었기에 별도의 재보선은 치러지지 않았고, 이미 그의 지역구에는 사면복권 & 복당절차를 밟은 홍문종이 컴백하여 당선된 상태였다.


어느덧 친박계의 중진이 된 홍문종은 당 사무총장을 거쳐 최고위원에 도전하고 있다. 든든한 재력과 부친의 후광이 있다 해도 수해골프 및 아프리카박물관 파문 등 이런저런 구설수에 올랐던 데다가 공백기도 길었기에, 재선의원 경력만으로는 당권도전은 물론 사무총장도 쉽지 않았을 상황. 그러나 1년짜리 땜빵 금배지일망정 재보선에 당선된 덕분에 여당에서 흔치 않은 수도권 3선의원이 된 걸 보면, 원외인사들이 재보선에 목매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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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김을동 부녀의 재보선 도전기(2005년 10월 26일)

 

장군의 손녀, 김두한의 딸, 송일국의 엄마로 기억되는 탤런트 김을동. 재선의원(3대, 6대)을 지낸 아버지 김두한의 유지를 이어 김을동 역시 일찍부터 정치에 눈을 떴는데... 1991년 처음 실시된 서울시의원 선거에 꼬마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지만, 1995년에는 같은 지역구에서 서울시 최다득표를 기록하며 여유 있게 당선되었던 것. 그러나 고작 서울시의원 따위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녀는 불과 10개월 만에 시의원을 내던지고 국회의원에 도전한다. 아버지의 나와바리였던 서울 종로에 자민련 공천으로 출마! 한 건 좋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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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종로의 경쟁자들을 살펴보자면 신한국당의 이명박, 새정치국민회의의 이종찬, 통합민주당의 노무현. 대통령만 둘이 출마를 했으니 장군의 손녀로는 역부족일 수밖에. 이후 그녀는 16대 총선에는 지역구(성남 수정)를 바꾸고, 17대 총선에선 당(한나라당)을 옮겨 총선에 도전했으나 번번이 물을 먹었고 등수만 4-3-2등으로 조금씩 상승해 갈 뿐이었다. 아이고 의미 없다.

 

2005년 10월 26일, 대구 동을, 울산 북구, 경기 부천원미갑, 경기 광주 등 4곳에서 재보선이 치러지게 되었다. 9년 뒤 호기롭게도 새누리당 당권에 도전하고 있는 박창달의 의원직 상실로 치러진 대구 동을에서는 한나라당 비례대표 유승민 의원이 전재희처럼 의원직을 버리고 출마해 당선되었고,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의 울산 북구나 열린우리당 김기석 의원의 부천원미갑 역시 한나라당에게 넘어갔다. 재미있는 것은 경기 광주였는데 성남에 인접한 이곳에 김을동이 공천을 신청했던 것. 그런데 김을동 포함 14명이나 되는 신청자 중에 최고의 거물은 단연 홍사덕이었다.

 

5선의 중진이었던 그는 2004년 한나라당 원내총무로서 노무현 탄핵의 주역으로 활약하는 바람에 17대 총선에서는 낙선(그를 아웃시킨 열린우리당 후보는 한명숙이었다.)한 상황이었고, 비루한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 이라크 파병 대신 광주 재보선에 도전하게 되었다. 당 자체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1위 홍사덕, 2위 김을동으로 조사되었으나 공천은 정진섭에게 돌아갔고, 이에 빡친 홍사덕과 김을동은 손을 잡고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하기로 한다. 둘 다 나가면 승산이 없을 것이므로 후보는 홍사덕으로 단일화, 김을동은 선대위원장을 맡아 자기 선거처럼 열심히 뛰었다. 김을동의 아들 송일국이 홍사덕 유세에 참여하며 구설수에 올랐을 정도. 그러나 승리는 정진섭에게 돌아갔고 두 사람은 몇 년간 당 밖을 떠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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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8대 총선에서도 공천을 받지 못한 두 사람은 '친박연대'의 기치를 내걸고 또 한 번 원내진입을 시도했다. 홍사덕은 잘못된 공천을 심판하겠다며 당시 한나라당 대표 강재섭의 지역구인 대구 서구에 나섰고, 김을동은 비례대표 5번으로 출마했던 것. 홍사덕의 기세에 놀란 강재섭이 불출마를 선언하며 홍사덕은 6선 고지에 올랐고 친박 바람에 힘입어 김을동 또한 감격의 금배지를 달 수 있었다.

 

그 뒤 새누리당으로 돌아온 홍사덕은 19대 총선에선 종로에 나섰다가 정세균에게 패했고, 이후 불법정치자금 수수 논란으로 인해 정치일선에서는 한 발 물러선 상태. 반면 김을동은 서울 송파병에서 민주당의 중진 정균환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고, 급기야 최고위원에까지 나서 당선될 예정이다.(규정상 여성 최고위원 1명을 무조건 뽑게 되어 있는데 여성 후보가 김을동 뿐이라는;;;)

 

재미있는 것은 아버지 김두한 또한 재보선을 통해 국회에 진출한 적이 있다는 것. 1965년 한일협정에 반대하여 윤보선 등 5명의 국회의원이 의원직을 사퇴했는데, 서민호 의원의 사퇴로 치러진 서울 용산 재보선에서 한국독립당의 후보로 나선 김두한이 당선되었던 것이다. 이후 내란음모사건에 휘말려 구속되었다가(47년 뒤 모 진보정당의 의원이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며 다시 한 번 김두한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무죄선고를 받았던 그는 국회 대정부 질의에 나서 국무위원석에 똥물을 뿌리는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결국 구속당한 뒤 의원직을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45년 뒤 모 진보정당의 의원이 김두한을 오마주해서 본회의장에 최루탄을;;;) 몇 년 뒤 7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민당 수원시 후보로 나선 그는 유세 중 발언이 문제가 되어 또 한 번 반공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르게 되는데... 고문을 많이 당해서였을까? 짧은 의정생활에도 불구하고 이석기와 김선동을 합쳐놓은 듯한 엄청난 존재감을 보여준 김두한은 1972년 55세의 나이에 뇌일혈로 별세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김을동이 친박 노선을 걷고 있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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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지금까지 2회에 걸쳐 재보선에 얽힌 사연들을 살펴보았다. 다들 이미 알고 있을 법한, 혹은 알 만한 가치 없는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지나치게 장황하게 쓴 것 같아 손발이 오그라든다. 특히 인물 중심으로 서술하다 보니 시간의 흐름도 뒤죽박죽이 되고 특정 정치인에 대해 내 의도와 다르게 심하게 깐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럼에도 굳이 이 시점에서 지나간 일을 들추어 본 것은 이번 재보선을 두고 벌어지는 여야 정치인들의 천태만상도 사실 이미 누군가가 겪었던 일이라는 점, 그리고 그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작게는 개인의 정치생명, 크게는 이 나라의 정치지형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특히 쉬운 선거로 예상하는 듯 밥그릇 싸움에 여념이 없는 야당이, 역대 지방선거 직후의 재보선은 그들의 무덤이었다는 점에서 경각심을 느끼고 선거에 임하길 바라며, 이번 공천은 어찌저찌 마무리되었지만 앞으로도 분명한 원칙이나 명분 없이 공천이 이뤄진다면 다 같이 좋게 된다는 것도 명심했으면 한다. 여당이 못하면 야당을 찍으면 되지만, 야당마저 못하면 정치혐오와 무관심이 판을 칠 테니, 그런 나라는 꿈도 희망도 없는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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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해라







벨테브레 

트위터 : @backtalkking


편집 :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