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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7. 15. 화요일

정치불패 돼끼








편집부 주



이 글은 정치불패에서 납치되었습니다.







지난 기사


[한국 재난사 <1> 와우 아파트 참사]










1. 서해 페리호


서해 페리호는 1990년 10월에 건조된 110톤 급의 배였다. 페리호는 하루에 한 번씩 위도와 부안을 오가는 배였는데, 페리호는 이용객이 너무나 없어서 낙도보조항로(필자 주 : 수익이 안나는 항로를 지자체에서 보조해서 지속적으로 운항이 가능하게 만드는 제도다.)에 들어갈 정도로 한적한 항로였다. 그러나 위도가 낚시 명소로 알려지게 되면서 상황은 변하게 되었다. 수많은 낚시객들이 몰려들었고, 당연히 하루에 한 번 다니는 운항 횟수는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 배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타고 오가자 불안을 느낀 위도 주민들과 불편을 느끼는 낚시객들은 증편을 요구하였으나, 보조금을 받는 배라는 이유로 증편은 거부당했다. 세간에는 별 문제 없이 다니니 설마 가라앉겠냐는 생각으로 증편시에 들어갈 돈이 아까워서 증편을 거부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도 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설마가 사람을 잡는 법이다.


운명의 1993년 10월 10일, 그 날은 파도가 높고 풍랑이 일었다. 배가 절대로 운항해서는 안 되는 날씨였었다. 페리호의 선장은 악천후에 운항을 주저하였으나, 그 날은 일요일이었다. 전 날 낚시를 즐기기 위해서 찾아온 수많은 낚시객들은 집으로 돌아가야만 내일 출근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몇몇 승객들은 폭풍주의보가 내려지지도 않았는데 운항을 왜 안 하냐고 항의했고, 정원 221명을 아득히 초과한 362명을 태운 페리호는 저승으로 직행하는 항해를 시작한다.



2. 배가 가라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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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를 시작한 페리호는 어른 키보다 높은 파도를 힘겹게 헤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날씨는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임수도 근방에서 회항을 결정한다. 그리고 뱃머리를 뒤로 돌리는 그 순간 파도가 페리호를 강타했고 페리호는 전복된다.


배가 까파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필자 주 : 까파지다 = 뒤집히다) 배멀미에 시달려서 선실 1층에서 쉬던 여성들과 아이들은 탈출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러나 탈출하는 이들 또한 녹록치 않은 상황에 마주하게 되는데, 396명이 탄 배에 구명보트는 두 대 뿐이었다. 본디 아홉 대가 있었으나 작동하는 것이 그 두 대 뿐이었다고 전해진다.(다른 이야기로는 풍랑에 떠내려갔다고 한다.) 꽉꽉 채워봐야 탈 수 있는 사람들은 24명이 한계였다. 그리고 구명보트에는 총 22명이 승선하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바다속으로 던져졌다. 허나 천운이라고 해야 하나. 페리호의 주요승객들은 낚시객들이었고, 그들이 가진 아이스박스, 낚시 파카, 그 외 배에서 실려 온 나무토막 등등은 물에 잘 뜨는 것들이었기에, 사람들은 거기에 매달린다.


사고가 일어나고 근방의 어선들이 풍랑을 헤치고 도착했다. 그들은 총 40명이라는 귀한 인명을 구조하는데 성공하나 아직도 322명이라는 사람들이 바다 속에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해군 258함과 경찰, 군 헬기와 어선 30여 척이 도착해 구조작업을 시작했으나, 실질적으로 이들이 도착한 시간은 1시간이나 넘어서였고 시체를 건지는 것 정도로 만족했어야만 했었다. 다만 구조요청이 없어서 구조요청을 한 이들이 40여 명을 건져낸 어선들이라는 것을 감안해야할 것이다.


안타까웠던 점은 구조작업을 진행하는 도중에도 물건에 매달려 있던 여성과 아이들이 힘이 다해서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그날 언론에서 발표한 실종자 수는 약 140여 명이었다.(이는 한겨레의 수치이며 동아는 100여 명으로 계산했다.) 마지막으로 발견된 사망자는 11월 3일에 발견되었다. 인양작업이 끝나고 총 사망자는 273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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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죽었나?


첫 번째로는 앞서서 말했다시피 초과승선이다. 승선 가능한 총 인원이 221명인데 362명이 탑승했기에 배는 운항 전부터 위태로운 상태였고, 거기에다가 묵직한 화물들을 배의 앞부분에 선적하였다. 이는 가라앉히고 싶어서 안달 난 상태나 다름없었다.(그 중에 멸치액젓만 9톤에 달했다.)


두 번째로는 선원들의 부족이었다. 페리호에는 총 7명의 선원이 탑승했는데, 그 중에서 위기시에 승객들을 인도하고 안전장비들의 위치를 숙지하며 사용요령을 설명해야 할 안전요원이 두 명 밖에 없었다. 396명이나 되고 패닉상태에 빠진 군중을 두 명이서 통제할 수 있을까?


세 번째로는 항해사의 부재였다. 배를 모는 데 있어서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세월호를 통해서 뼈저리게 배웠었는데, 페리호의 항해사는 휴가를 가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배를 모는 것은 가장 경험이 많았을 선장이 몰아야 하는 것이 옳았으나, 배를 운전하는 이는 생뚱맞은 갑판장이었다.


네 번째로는 선원들의 오판이다. 페리호는 까파지기 직전에 잠깐 균형을 되찾았었는데, 이 때다 싶어서 선원들은 방송을 통해서 선실에 들어가서 가만히 있어달라는 방송을 내보냈다. 그리고 가만히 있었던 이들은 모조리 물귀신이 되고 말았다. 한 생존자는 이런 방송만 없었어도 살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후에 인양작업을 하던 이들은 창가에 엉킨 시체들을 보고 기겁했다고 전해진다.


다섯 번째로는 거지같은 정부 대응이었다. 사고 직후 정부는 제대로 된 승선인원 수도 파악하지 못했다.(장부기입 규칙을 어긴 선측 문제도 있었다.) 그와 더불어서 유기적으로 상황을 관리해야 할 부처들 간에는 유기적이란 말은 물에 말아 처먹은 지 꽤 되었고, 각 부처마다 대책본부를 설립하여 무려 10여 개나 되는 대책본부가 난립하였다. 그들이 일을 했느냐면 그것도 아닌 것이 서로의 직속상관에게 보고하는 데에 급급했다. 심지어 전라북도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전북도지사와 전북경찰청장은 위도의 파장금에서 머물면서 대통령과 국회의원에게 깔끔한 상황보고를 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이런 대책본부들의 난립은 삼풍까지 이어져서 그때에서야 간신히 고쳐지게 되는데 이는 후에 설명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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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건 쉽다


정부가 이렇게 삽질하느라 여념이 없을 때 언론 또한 삽질을 하느라 바빴다. 페리호의 선장과 선원들이 구조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접한 그들은 재빨리 레이더를 돌려서 페리호의 백 선장을 봤다는 증언을 확보하고 백 선장이 선원들과 함께 배를 버리고 튀었다는 치명적인 오보를 날려버린다.


순식간에 백 선장과 선원들의 가족들은 수많은 인명을 버린 역적 집안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썼고, 검경 합동 수사본부는 백 선장과 선원들에 대한 지명수배를 내리게 된다. 이때 하는 말이 가관이었는데 살아있을 가능성이 98%라고 말하고는 좋게 되었다.


그리고 10월 16일 백 선장과 선원들은 차가운 시신으로 인양된다. 백 선장이 인양된 곳은 조타실이었는데 배가 까파지는 와중에도 구조요청을 보내기 위해 노력하다가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결국 언론계는 유족들에게 대대적으로 사과를 하게되는데 그때 백선장의 큰 딸이 말하길,


“당신들이 살아있다고 했으니, 이제 우리 아버지를 살려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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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언론에서 자중하자는 이야기가 좀 돌았다고 하던데 뭐, 요즘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참고로 후일 검경은 이 오보를 접하고 1%라도 가능성이 있으면 수사하는 게 검경의 일이라는 말을 하기에 바빴다고 한다. 그것 때문에 인력의 절반을 투입했으니 부끄럽기도 할 만하다.



5. 총평


페리호와 세월호 사건은 소름끼치도록 닮아 있다. 쌈싸먹은 안전수칙과, 윗선에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리느라 여념이 없는 정부, 그리고 사실확인도 하지 않고 자극적인 소재나 날려대는 언론까지. 1993년에서 21년이 흘렀다. 우리 사회는 공회전만 했지 앞으로 나아간 건 없다. 아니 오히려 배 버리고 튄 선장같은 게 세상을 숨쉬고 있다는 걸 보면 역회전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이 잘 살자고 경제를 만들고 사회를 만들었다. 그런데 요즘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사람을 갈아 넣는 웃긴 상황이 만들어진다.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가 되는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영원히 쭈욱~


다음은 성수대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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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안전세계 31호 이수경 박사의 대형재난사고와 국가위기관리 논문.

1993년 10월 11일~13일에 이르는 동아, 경향, 한겨레의 기사들.

백선장 관련 기록은 16일까지 포함.

국가기록원의 서해 페리호 침몰 사고 항목.

인천지방해양안전심판원 인해심 재결서 제1994-006호.






전편에 대한 이야기


마빡에 와우 아파트 사고가 올라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거 위키백과에서 긁어다가 쓴 글이었다. 단순히 사고가 이러이러했다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글이었기에 긁어와서 붙이는 수준이었는데, 올라가고 나서 당황했다.


일단 긁은 부분은 김현옥 시장의 인터뷰와 사건의 발생 원인, 그리고 가수 조영남 씨의 일화, 철근 숫자는 매일 경제 기자의 칼럼에서 7개라는 언급이 있었고 그 외 기사에서는 자세한 숫자가 안 나와 있기에 위키의 특성상 신뢰하기 어렵다고 고려해서 70개가 아닌 7개로 넣었다. 솔직히 70개 들어갈 건물에 5개는 너무하지 않은가. 내 생각보다 일이 좀 거창하게 된 것 같아서 페리호부터는 자료조사를 제대로 하기로 했다. 이 글에 나와 있지 않은 유족들에 대한 보상금의 처리라던지 후에 페리호의 처벌관련된 이야기, 혹은 사망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하여 덧글을 달아주신다면 꼼꼼히 답변하도록 노력하겠다.


어찌 되었든 내가 쓰지 않고 베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에 이에 대해서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배낀 건 나쁜 행동이고 이것에 대해서 변명할 여지가 없다. 다시 한번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정치불패 돼끼


편집 :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