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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7. 25. 금요일

행방불패 에너지전환








편집부 주


이 글은 행방불패에서 납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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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마피아계의 대부들(gotfathers) <1>]








대영제국, 부시의 푸들이 되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영국은 흑연감속가스냉각로를 개발해 국내에 44기의 원전을 짓지만 수렁에 빠져 허덕이다가 결국 1970년대 말 백기 투항해.

 

사실 영국은 미국보다 먼저 핵무기를 손에 넣을 기회가 있었어.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39 9월, 독일의 과학자 루돌프 파이알즈와 오토 프리쉬가 영국으로 망명하는데, 얘들이 순수한 우라늄-235 1kg만 있으면 강력한 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비밀각서를 정부에 제출해. 1940년 봄 영국 정부는 유수한 물리학자들을 불러 모아(모드위원회) 원폭개발 가능성을 검토해. 게다가 그해 6월 히틀러가 파리를 침공하자 프랑스의 과학자 할반과 코왈스키가 중수 185kg을 싣고 영국으로 와. 중수는 프랑스도 노르웨이의 화학회사로부터 어렵게 구했던 거거든.

 

1941 7월 모드위원회는 역사적인 보고서를 발표해. 우라늄농축기술을 개발하면 3년 내에 원폭 제조가 가능하고, 중수를 이용해 핵분열 연쇄반응을 조절하면 발전용으로도 쓸 수 있다는 내용이었지. 농축기술이 개발되면 경수 사용도 가능하다는 전망도 담겼어.

 

영국은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튜브 알로이라는 원폭개발 비밀계획을 추진하지만 곧 중단돼. 히틀러의 폭격기가 런던까지 날아온 거야. 영국은 눈물을 머금고 할반과 코왈스키 등과 중수를 캐나다도 보내.

 

그런 와중에 원폭 개발은 미국이 선점해. 종전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얄타회담에 참석한 처칠은 이제 자신이 루스벨트와 스탈린 사이에 한낱 조역임을 실감해야 했어. 산업혁명을 이끌며 세계의 선두 국가로서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자부심은 미소 양 대국을 필두로 한 새로운 국제 질서에서 무너져 내린 거야. 브라질 월드컵에서 16강에도 못올라가고 짐을 싼 축구 종가 잉글랜드 팀과 같은 신세라고나 할까. 졸라 빡치는 상황이었지만 워쪄, 적응하고 살아야지.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냐"  대영제국의 수상 처칠은 해가 기운 걸 실감했다.



전후 영국은 핵무기 개발에 총력을 기울여. 대영제국의 자부심을 다시 세울 유일한 길로 보였지하지만 미국은 다른 넘들이 이 어마무시한 걸 갖는 걸 원치 않았어. 개발 과정에서는 영국의 과학자들과 협력하는 듯 하더니 지들이 갖고 난 후에는 입을 싹 닦은 거야. 기술은 물론 농축우라늄을 나눠줄 생각도 네버~!


영국은 자체 개발에 나서야 했지. 발전은 나중 문제고 우선 핵무기! 우리도 한방 가져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큰소리 칠 수 있다구!


가장 먼저 할 일은 플루토늄 제조. 천연우라늄에서 플루토늄을 생산하려면 감속재로 흑연이나 중수를 써야 해그런데 중수는 화학공정을 거쳐 만들어 내야 하거든. 흑연은 쉽게 구할 수 있지. 다급한 영국은 감속재로 흑연을 선택해.


근데 문제가 또 하나 있더라구. 미국의 플루토늄 생산 시설은 워싱턴 주의 시골 구석 핸포드에 있어. 핸포드 원자로는 흑연감속 경수냉각형으로 플루토늄을 생산했고 이 넘으로 나가사키에 떨어진 팻맨이 태어났었지. 하지만 좁은 영국 땅엔 그런 오지가 없는 거야. 그래서 스코틀랜드 북단의 한적한 곳을 고려했으나 이번에는 물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거야. 그래서 영국은 공기를 냉각재로 쓰게 되었지. 영국의 흑연감속가스냉각식은 이렇게 시작된 거야.

 

암튼, 열라 빡친 잉글랜드 축구팀은 졸라게 연습했으나 모스크마 월드컵에서도 또 다시 16강 문턱을 넘지 못하고 열라 빡친 영국은 윈즈케일에 설치한 흑연감속가스냉각로를 졸라게 돌려 플루토늄을 생산하고 마침내 1952년 호주 북서부 조그만 섬에서 핵실험에 성공해. 미국, 소련에 이어 세 번째. 체면 치레는 한 셈이야.


원폭 동메달에 한껏 고무된 영국 아해들은 발전용 개발에도 착수해 1953년 윈즈케일 건너편 콜더홀에 플루토늄 생산과 발전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원자로 4기의 건설을 시작해. 윈즈케일 원자로는 플루토늄만 생산하는 거라 냉각 효율이 낮은 걍 공랭식이었지만 발전을 위해서는 냉각효율을 높여야 했지. 그래서 냉각재로 탄산가스를 써. 그리고 알루미늄으로 만들었던 연료 피복관을 마그네슘 합금으로 바꾸는데 이렇게 해서 영국형 흑연감속 탄산가스로는 마그녹스로라는 이름을 얻게 되지.

 

60MW급 콜더홀 원전은 1956 10월 가동을 시작해. 소련이 1954년 발전에 성공한 오브닌스크 원자로는 5MW로 용량이 작으니까 영국은 자기네 것이 세계 최초의 상업용 원전이라고 주장해. 미국은 1957년 가동한 쉬핑필드 원전이 세계 최초의 민간 상업용 원전이라고 주장하고. 서로 지들이 세계 최초라고 주장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어쨌든 소련-영국-미국이 금은동이야.


 2007년 9월, 해체작업에 들어간 콜더홀 원전



플루토늄 생산을 위해 천연우라늄을 원료로 쓰는 흑연감속식, 여기에 가스냉각 방식은 발전용 원자로로서는 최악의 조합인 셈이었지. 하지만 원폭 동메달, 원전 은메달(자칭 금메달)에 현혹된 영국의 자존심은 훗날 원전 마피아계에서 4강은커녕 8강에도 간신히 턱걸이 하는 수준이 돼.

 

시작은 괜찮았어. 1957년 발족한 일본원자력발전㈜이 첫 도입 원자로로 영국의 마그녹스로를 선정해. 1965년 발전을 시작한 이바라키현 도카이무라 원전이 바로 이넘이야.(그 배경은 일본편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하지만 세계 시장에서 마그녹스로는 곧 벽에 부닥쳐.

 

마그녹스로는 경수로에 비해 설비가 크고 열 전달 효율이 낮아서 연료의 출력밀도는 낮고 건설원가는 높았지. 여기다 미국 정부가 평화를 위한 원자력선언 이후 농축우라늄의 해외 공급에 대한 제한을 풀어 버려. 그러자 세계 시장의 관심은 경수로로 쏠리게 돼.

 

암튼, 독자적인 기술로 세계 시장에 나서고 싶었던 영국은 마그녹스로의 기술적 문제 해결에 불알 두쪽을 다 걸어. 경수로에 한눈 파는 건 마피아가 아니라 양아치나 할 짓이라고 여겼지.

 

일단 마그녹스로의 덩치를 줄이기 위해 연료의 온도를 높여 열효율을 향상시키는 연구를 진행해. 나름 성과가 있어 2% 저농축우라늄을 연료로 쓰고, 연료 피복관을 마그네슘에서 스테인레스강으로 바꾼 개량형 가스로를 1962년에 개발해.

 

하지만 개량형 가스로의 보급이 순조롭진 않았어. 우선 이넘을 갖다 써야 하는 중앙전력청이 자꾸 미쿡의 경수로에 곁눈질을 하는 거야. , 넘의 여자가 이뻐보여서라기보단 몇십 년 이넘들하구 씨름을 해야 하는 며느리 입장에서는 건설비, 효율, 안전성이 두루 신경 쓰이잖아.

 

또 하나 문제는 원전 은메달에 고무된 영국 정부가 세계 시장에 진출하겠다고 마그녹스로 제작 콘소시엄을 5개나 발족시킨 거지. 막상 수출도 안되는 데다 좁아터진 국내 시장만 나눠먹다 보니 설계의 표준화나 기술 축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거야.


1970년대 영국은 원전 발주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영국의 독자적인 기술이냐 미쿡의 경수로 도입이냐로 입씨름 하며 세월을 보내. 자존심을 세우는 원자력공사와 실용주의 중앙전력청 사이의 힘겨루기는 1974년 양측의 체면을 살리는 선에서 증기발생중수로로 방향을 잡아. 하지만 100MW 실증로로 달랑 하나 있던 증기발생중수로는 결국 대형 원자로로 빛을 보지 못하고, 1978년 영국 정부는 증기발생중수로의 개발 포기를 선언해.

 

이후 영국 1980년에 개량형 가스로 4, 1988년에 가압경수로 1기를 발주하고 원전은 땡이야.

 

이렇게 원전으로 다시 자존심을 찾아보려던 영국의 헛발질은 속절없이 막을 내리고, 훗날 영국의 총리 블레어는 미쿡의 부시 앞에서 꼬랑지 치는 푸들이 되었더라는 슬픈 이야기뭐래.




england.jpg





캐나다의 My Way


1789년 독일의 화학자 마르틴 클라프로트가 처음 우라늄을 발견했을 때, 우라늄은 보헤미아 지방에서 세라믹 장식용으로 쓰이고 있었대. 그 화합물은 주황, 노랑, 파랑 등 유약 제조에 사용되었으며, 나중에는 사진 윤택 강화제로도 쓰였다는구먼.

 

우라늄광이 본격적으로 채굴된 것은 1905년 퀴리 부인이 개발한 방사능 치료법에 쓰이는 라듐을 추출하기 위해서였대. 그러자 채광지역도 보헤미아뿐만 아니라 미국, 캐나다 등지로 확대되었고. 하지만 1913년 벨기에령 콩고광산(현 자이레공화국 소재)에서 초순도 우라늄광이 발견되면서 다른 지역의 우라늄 광산은 파장 분위기였지.

 

그런데 미국이 1939년 맨해튼계획에 착수하면서 캐나다의 우라늄 광산에는 다시 불이 켜지고, 1942년 캐나다 북부에 있는 포트 라듐광산에서 채광이 재개돼. 1944년 캐나다와 미국, 영국 3개 정부는 연합개발청을 만들어 우라늄 구매를 관장하고 새로운 광산을 개발하지.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만 11개 종합광산에서 우라늄이 채굴되었대.

 

하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기술이 있어야 우라늄을 직접 사용할 수 있는 것. 이런 면에서 캐나다 역시 2차 대전의 덕을 톡톡히 보았지. 독일의 위협을 피해 1942년 여름 영국의 원자력 연구진이 캐나다로 트레이드돼 와. 캐나다는 이적비 한 푼 안 주고 메시급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게 된 거지. 영국은 당초 시설과 자금이 풍부한 미국을 원했지만 맨해튼계획을 추진하고 있던 미국이 프랑스 출신 연구진과 공동으로 연구하기를 기피했기 때문이래. 캐나다는 국립연구협의회 산하에 이들을 거두고 몬트리올에 연구소를 설치하고, 연구의 책임은 프랑스에서 중수를 가져온 할반에게 맡겨.


그런데 뭐, 움직이면 돈이잖아. 전시에 연구 자금을 댈 수 없었던 영국은 미국이 물주가 되기를 바래. 마침 캐나다 국립연구회와 몬트리올 연구소는 미국 맨해튼관구와 협의하여 플루토늄 생산을 위한 중수로를 건설하기로 얘기가 오가던 중이야. 중수로로 채택된 것은 중수를 이용해 핵분열연쇄반응에 성공한 프랑스 과학자 할반과 코왈스키의 연구 덕이었지. 1944 8월에 시작된 시험로(NRX)의 건설은 1947년 운전에 성공했는데, 미국 밖에서 건설된 것으로는 세계 최초의 원자로였어.


그런데 탁상 연구의 실증에 성공한 영국 연구진들이 히틀러의 자살 이후 본국으로 돌아가고, 미국은 처음부터 중수로를 활용할 생각이 없었던 터라 이 원자로는 영국과 미국의 선물로 캐나다에 남겨져. 하여간 되는 넘은 뭘 해도 되는가 봐. 살짝 건드렸는데 걍 자빠져 버린 거지.


이제 캐나다는 자력으로 원자력발전에 나서. 하지만 1952 NRX가 사고로 폐쇄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어. NRX는 감속재로 중수를 썼지만 냉각재는 경수를 사용했는데, 이번엔 감속재, 냉각재 모두 중수를 사용하는 두 번째 시험로 NRU의 개발에 나서 1957년에 운전을 개시할 수 있게 돼.


  1954년. 앞의 것이 NRX, 뒤에 짓는 넘이 NRU.



원래 캐나다는 핵무기 개발엔 관심이 없었어. 미국의 뒤통수에서 그짓을 했다가는 좋게 될 게 뻔하니까. 캐나다는 1952년 국영산업체인 캐나다원자력공사(AECL)를 설립하여 원자력발전 개발 체제를 정비해.

 

한편 실수요자인 온타리오 주영 전력회사인 온타리오하이드로사의 기술진이 1954년 천연우라늄 중수로가 발전용원자로로써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려. 그리곤 갑 캐나다원자력공사와 을 온타리오하이드로사는 공동으로 20MW의 소형 천연우라늄-중수감속-중수냉각형 실증로(NPD) 건설에 착수하지.

 

1956 9월에 개시된 NPD의 개발은 몇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었어. 우선 압력용기가 문제였지. 시험로는 용량이 작아서 가능했지만 캐나다에선 200MW 이상의 상업용 원자로에서 사용할 수 있는 크기의 압력용기를 만들 기술이 부족했거든. 또 하나 문제는 연료 교환. 우라늄-235의 함유량이 적은 천연우라늄을 연료로 사용하는 상황에서 연료를 교환할 때마다 원자로의 운전을 중지한다면 가동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잖아.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진은 압력관을 도입해. 고압의 냉각재만을 압력용기로 싸는 방법도 생각해 봤지만 열을 전달해야 하는 냉각재가 노심과 분리되어 의미가 없었어. 그래서 나온 방법이 연료봉과 그 주위를 흐르는 냉각재를 함께 가느다란 관속에 넣되, 그 관을 고압에 견딜 수 있는 강한 압력관으로 만드는 거야. 때마침 미국에서 잠수함용 가압경수로의 연료피복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르코늄합금을 개발했지. 이 지르칼로이는 중성자 흡수율이 작고, 고압에 견디며 고온에서도 부식에 강한 성질을 갖고 있어 압력관으로써 최적이었던 거야.

 

압력관의 선택은 두 번째 문제도 자동빵으로 해결해 주었어. 연료봉을 50cm 길이의 카트리지에 담은 뒤 수직이 아니라 수평으로 놓인 압력관의 한쪽에서 밀어 넣으면 오래된 카트리지부터 밀려나오는 거야. 이렇게 해서 중수로는 원자로를 가동하는 상태에서 연료 교체가 가능하게 되었지. 가동률을 높임으로써 가격이 높은 중수를 사용하는 경제성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게 된 거야.


1962 6월 건설을 완료하고 운전을 개시한 이 독특한 원자로는 캐나다의 중수 우라늄로라는 뜻의 CANDU(Canada Deuterium Uranium)라고 불렸어. 캔두는 ‘나두 할 수 있지롱~(Can Do)'의 중의적 표현이기도 해.


CANDU 개념도. 나두 할 수 있지롱.



이후 캐나다는 국내에 22기를 건설하고 해외에도 수출하는 성과를 거두어. 동네에서 응큼한 생각을 가진 넘들은 모두 캔두에 러브콜을 보내는데, 인도와 파키스탄, 아르헨티나, 한국 뭐 이런 넘들이지.


얘들이 왜 중수로를 러브했을까? 그러췌~ 바로 플루토늄 때문이야.


중수형 캔두에서 나온 사용후 핵연료에서는 경수로에 비해 플루토늄의 생산이 용이하거든. 인도는 캔두를 도입하면서 받은 실험로(CIRUS)를 통해 획득한 플루토늄으로 1974년 핵실험에 성공하여 골목대장들(핵보유국: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을 긴장시켜. 심심하면 투닥거리던 이웃사촌 파키스탄이 대응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시발점이기도 했지.


비싼 중수를 써야 하는 단점과 핵무기 확산에 대한 우려로 캐나다의 중수로는 세계 시장에서 쇠퇴하게 돼. 1979년 스리마일 원전 사고와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세계 원자력 시장이 완전 찬물을 뒤집어 쓴 곧휴가 된 상태에서 캔두가 설 자리는 없었다고 봐야지.


캐나다로 떠나는 현경호 박사에게 최형섭 장관이 은밀하게 말했다. 

"각하께서 중수로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걸 꼭 기억하세요"





To be continued








행방불패 에너지전환


편집 : 보리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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