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5. 07. 24. 금요일

펜더





지난 기사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 러일전쟁1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 러일전쟁2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 러일전쟁3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 러일전쟁4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 러일전쟁5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 러일전쟁6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 러일전쟁7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 러일전쟁8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 러일전쟁9




...이 시대의 명랑함은 이런 낙천주의에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실로 우스꽝스러운 일로 쌀과 비단 말고는 주요 산업조차 없는 이 국가의 녀석들이 유럽 선진국과 같은 해군을 가지려고 했다. 육군도 마찬가지다. 재정이 꾸려질 리가 없다. 허나 그러하더라도 여하튼 근대 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 애초의 유신성립의 제일 큰 목적이었고, 유신 후 신 국민들의 소년과도 같은 희망이었다.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 10편 프롤로그 중 발췌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한 <언덕 위의 구름>.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 중 가장 와 닿았던 말이 바로 이 ‘낙천주의’다. 시바 료타로가 그려 낸 이 시절은 일본에게 가장 아름답던 시절이다. 메이지 유신에 성공했고, 아시아의 최강자로 유럽의 강대국인 러시아를 무너뜨렸던 시절.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서방의 제국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아니, 이미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이라는 자긍심이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20110710_tv_11.jpeg


포츠머스 강화조약 직후 배상금 없는 강화조약이라며 들고 일어났던 일본 국민들이 외쳤던 한 마디는,



“전쟁 속개”



였다. 이들은 전쟁을 계속해, 밀어붙여서 배상금을 받아내겠다고 소리친 것이다. 당시 일본의 상황은 어땠을까? 일반 국민들의 심정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정부 관계자들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미 영국과 미국은 더 이상의 재정지원을 않겠다며 일본을 압박하는 상황이었고, 이들이 지원을 하지 않으면 두 달 안에 일본은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례로 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외국에서 빌린 돈을 다 갚는데 걸린 시간은 무려 80여 년이 걸린다. 일본이 이 전비를 다 갚았던 것이 1986년이다. 우리나라가 86아시안게임을 치렀던 해에 일본은 러일전쟁의 전비를 모두 갚을 수 있었을 정도. 숨이 턱에 닿은 것이 아니라 이미 코까지 물이 들이닥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러일 전쟁 시절의 일본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일본 국민은 일본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들떠 있었고, 일본이 세계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대만을 점령하고, 조선을 합병하고, 만주를 지배하며 차곡차곡 제국주의의 길을 밟아 올라가던 일본. 때마침 터져 준 제1차 세계대전까지 일본은 활기차며, 낙천적인 사회 분위기를(메이지 유신 이후 불과 반세기 만에) 유지하며, 이를 기반으로 세계로 나섰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 호치민이 프랑스와 미국. 특히나 미국을 돌아보고 나서 깨달은 한 가지가 있었다.



“아무리 강한 나라라도 하층민의 삶은 식민 지배를 받는 나라의 하층민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커다란 깨달음이었다. 미국에서 눈 치우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당시 호치민은 슬럼가에 거주하는 이들의 삶이 식민 지배를 받던 자신의 조국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맞는 말이다.


전쟁은 늙은이가 결정하고, 젊은이가 나가서 죽는 것이라고 했던가? 마찬가지다. 전쟁은 가진 자가 결정하고, 가지지 못한 자가 끌려가 죽는 것이다.


러일전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국가가 부강해지고, 제국주의 클럽에 가입했다고 해서 일본 국민의 삶이 나아진 건 없었다. 러일 전쟁 직후의 일본 국민의 세금 부담률은 청일 전쟁 전의 4배가 됐다. 같은 기간 일본 국민의 소득 증가는 약 1.5배에 불과했다. 소득은 별로 늘지 않았는데, 두 배 이상 더 세금을 걷어야 하는 상황. 지옥이 열린 것이다. 게다가 러일전쟁에서 보여준 절망적인 사상자 숫자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 국민은 그저 세금만 꼬박꼬박 내면 됐다. 전쟁이 나더라도 사무라이들 간의 전쟁이었고, 백성들은 눈치 보면 어디에 붙을까만을 생각하면 됐다. 그러나 이제 백성은 ‘국민’이 됐고, 국민은 전쟁에 직접 참여해야 했고, 가서 죽어야 했다.


과연 일본 국민은 행복했을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런 낙관주의의 사회 분위기가 제1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졌다는 점이다. 일본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보면, 선술집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해군과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맹비난하는 일반인이 보인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의 시발점이 되는 진주만 기습 공격 소식에 기뻐 날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체자막.연.합.함_00025.jpg



“이제 경기가 좋아질 것이다.”



1905년 러일 전쟁의 승리, 뒤이은 한반도 점령과 만주 경영, 그리고 일본에게는 천운(天運)이 되어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일본을 한 없이 낙관주의로 몰아간다.



"이번 유럽에서의 전쟁은 일본의 국운 발전을 위한 다이쇼(大正) 신시대의 천우(天佑)"



일본의 초대 외상이었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말이다. 이 한 번의 전쟁으로 인해 일본은 단숨에 세계 5대 열강 안에 들어가게 된다. 전쟁 전(1914년) 약 6억 엔 정도이던 수출이 전쟁이 끝나던 1919년이 되면 연간 21억 엔이 됐고, 러일전쟁의 빚으로 인해 채무국이 됐던 일본이 1919년에는 27억 엔의 채권국이 됐다.


러일전쟁으로 허덕이던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당당히 일어섰던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완전히 망했던 일본이 부활할 수 있었던 건 1950년 6월 25일에 있었던 한반도에서의 전쟁 때문이었다.


이때 일본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 일화가 당시 수상이었던 요시다 시게루가 했던 말이다.



“이제 일본은 살았다.”



근대 이후 한국은 일본의 ‘발판’ 역할에 충실했던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러일전쟁... 그리고 전리품 “조선”


1905년 8월 12일 제2차 영일동맹 조약이 체결된다. 이 조약에서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짓는 조항이 등장하게 된다. 그 주요 내용은,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가지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이익을 보장하며, 일본은 영국의 인도 지배 및 국경지역에서의 이익을 옹호하는 조치를 취할 것.”



이라는 대목이다. 제2차 영일동맹 조약 제3조에 명시된 ‘한반도의 운명’이다. 이 조약이 체결되기 3주 전인 1905년 7월 29일에는 루스벨트의 특사인 육군 장관 윌리엄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가 도쿄에서 하나의 협정을 맺는다. 세간에는 가쓰라 태프트 밀약 혹은 가쓰라 태프트 비밀각서라 불리는 가쓰라 태프트 각서였다(이 밀약은 1924년이 돼서야 공개된다).


가쓰라태프트.jpg


이 밀약의 주요 내용은,



“미국이 미국 스페인 전쟁으로 영유한 필리핀을 통치하고, 일본은 필리핀을 침략할 의도를 갖지 않으며, 극동의 평화유지를 위해 미국, 영국, 일본은 동맹관계를 확보해야 하고, 미국은 러일 전쟁의 원인이 된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을 승인한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자면, 미국과 중국이 손을 잡고 일본의 손을 들어줬다고 보면 된다. 세계 초강대국 두 나라가 일본의 조선 진출을 허락한 것이다.


제2차 영일동맹의 경우는 영국과 일본의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이해 범주 안의 일이지만(당시 조선인 기준으로), 가쓰라 태프트 밀약의 경우는 이야기가 달랐다. 구한말의 혼란스런 상황에서 조선이 가장 믿었던 나라가 바로 ‘미국’이었다. 청나라의 경우는 지난 세월 조공국의 위치였었고, 일본과 러시아의 경우는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며 조선을 집어삼키려 했던 상황. 그나마 믿을 만한 건 ‘엉클 톰’의 이미지로 포장돼 있던 신사의 나라 미국이었다.


일본의 야욕을 분쇄시킬 만한 힘과 그에 걸맞는 높은 도덕성을 지녔다고 믿었던 미국이 조선을 배신한 것이다(구한말 조선에 건너온 수많은 미국 선교사들을 보라. 당시 조선인들이 미국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조선은 그렇게 일본으로의 등기이전 단계에 돌입하게 된다.


러일 전쟁의 결과물인 포츠머스 조약, 제2차 영일동맹조약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사전 정지작업을 다 마친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을 통해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이제 가등기 상태까지 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대망의 1910년 8월 29일 국권침탈이 이뤄지게 된다. 이제 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소유가 됐다. 등기가 완전히 넘어간 것이다.


이 한일합방은 국제정치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제 일본은 식민지를 확보한 명실상부한 제국주의 국가가 됐고, 중국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일본은 더 이상 섬나라가 아니라 ‘대륙국가’가 됐다.


...일본인 입장에서 안타까운 건(아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가 된 시기가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1910년은 이미 제국주의 체제에 낙조가 드리우던 시기였다. 몇 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세계대전이 종전을 앞 둔 1918년 1월 18일이 되면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들고 나오게 된다.


이는 한 시대의 종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wilson1.gif

윌슨 대통령


막차로 제국주의의 대열에 합류했던 일본이지만, 몇 년 누려보지도 않고 시대의 흐름은 제국주의가 끝이 났다고 말하고 있었다. 1차 대전 종결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이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국 영토 안에 있는 독립군들을 분리 독립시키게 된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에스토니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핀란드,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등이었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은 여기까지였다. 아직 제국주의의 대열은 공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들을 흔들기에는 충분했다. 대표적으로 한국이 그랬다.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터진 3.1 운동. 이뿐만이 아니었다. 병든 돼지란 놀림을 받으며, 열강들의 반식민지 상태였던 중화민국 여기저기서도 시위가 일어났고, 영국, 프랑스 등등 대표적인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에서도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일본은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한 지 겨우 9년 만에 제국주의의 쇠퇴를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일본을 최후의 제국(帝國)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 열강과 같은 제국이 되겠다고 온 국민이 나섰지만, 제국주의의 끄트머리에 서서 제대로 누려(?) 보기도 전에 제국주의는 시대에 뒤떨어진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일본은 아주 ‘낙관적’이었다.




*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http://hohodang.com/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펜더


편집: 딴지일보 cocoa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