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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8. 21. 목요일

파토








<파토의 쿡찍어 푸욱>은 


시급한 현안에서부터 해묵은 숙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 사회 관련 문제를 다루는 코너임다.


과학 잡설 <호모 사이언티피쿠스>와 교대하면서 격주로 연재되니


 많은 사랑 주시던가.




지난 기사


<파토의 쿡찍어 푸욱> 1. 공포의 마스터플랜

<파토의 쿡찍어 푸욱> 2. 그들은 왜 변절했을까

<파토의 쿡찍어 푸욱> 3. 지금 우리에게 놓인 투쟁의 현실

<파토의 쿡찍어 푸욱> 4. 시대와 진보에 대한 단상

<파토의 쿡찍어 푸욱> 5. 사회의 품격(1)

<파토의 쿡찍어 푸욱> 6. 박정희, 이승만, 일제 그리고 개드립

<파토의 쿡찍어 푸욱> 7. 사회의 품격(2)

<파토의 쿡찍어 푸욱> 8. 하는 김에 하는 교통 이야기

<파토의 쿡찍어 푸욱> 9. 우리는 그들에게 대한민국인가

<파토의 쿡찍어 푸욱> 10. 비극으로 모자라서 이렇듯 철저하게 패배할 겁니까

<파토의 쿡찍어 푸욱> 11. 내가 수퍼맨이라면

<파토의 쿡찍어 푸욱> 12. 위선이라도 떨어라

<파토의 쿡찍어 푸욱> 13. 혁명의 상상

<파토의 쿡찍어 푸욱> 14. 줏대이야기

<파토의 쿡찍어 푸욱> 15.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바

<파토의 쿡찍어 푸욱> 16. 양식냉장고







2011년 8월 1일 아침. 우원은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북부를 가르는 거대한 피레네 산맥을 허위허위 걸어 넘고 있었다. 밤새 눈도 못 붙이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10킬로그램의 배낭을 지고, 있는 힘을 다해 세 시간쯤 걸어 올라가자 극도의 허기와 갈증이 몰려왔다. 때마침 눈앞에 식수 펌프가 나타났고, 물 2리터쯤을 한꺼번에 마셔 버렸다. 갈증은 풀려 좋았지만, 온  몸에 힘이 다 빠져 버렸다. 그때부터는 말 그대로 네 발로 기어 올라가다가 길옆 풀밭에 쓰러지는 상황이 반복됐다.


체력적으로 준비가 잘 된 사람이라면 하루 만에 넘는, 총 거리 28킬로미터의 피레네 산맥 횡단. 하지만 나는 죽을 힘을 다했건만 고작 3분의 1을 가서 중간의 피난소에서 뻗어버렸다. 남들은 세 시간 남짓이면 가는 9킬로 산길을 6시간이나 걸렸다. 


내 산티아고 순례길은 이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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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은 프랑스 남부의 생 장 피드포르에서

스페인 서북부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800여킬로미터를 걸어가는 여정이다.

원래는 가톨릭의 순례길이었지만 지금은 종교와 아무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걷는다.


그렇게 호된 신고식을 치른 다음 날 아침, 우원은 남은 18킬로미터를 걸어 원래 첫 목표지였어야 할 론세스바예스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했다. 열 시간쯤 자서 좀 나아지긴 했지만, 몸 상태가 엉망이라 걸음이 느렸던 우원은 어느 초로의 흑인 아저씨와 보조를 맞춰 걷게 됐다. 지친 와중에도 굳이 말을 나누게 된 이유는 이 분이 신기하게도 목에 한글이 적힌 수건을 메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적어도 당시에는, 여름 극성수기인데도 한국인은 물론 동양인조차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둘째 날부터 한글 수건을 둘러멘 흑인을 만나다니!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봤더니, 탄자니아 출신의 가톨릭 신부인데 한국에 두어 번 왔었다는 거다. 와서 사역도 좀 하고 한국말도 조금 배우고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우원은 아, 가난한 탄자니아 시골 신부님이 우리나라에서 주관하는 봉사 프로그램 같은데 참가해서 오셨나  보구나, 그래서 교육도 받고 수건도 얻어 가셨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그분과 몇 시간을 터벅터벅 걸어 올라갔다. 순례길에서는 마음이 쉽게 열려서 낯선 이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게다가 신부님이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삶의 의미 등에 대해 많은 생각을 나누게 됐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 분 학식이 엄청나게 높은 거다. 게다가 느리게 걷는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하고 간혹 말을 나누는데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등을 능란하게 구사한다. 


어, 이분 뭐지…? 후진국 촌동네에서 우리나라에 견학 왔다 수건 얻어 간 신부님 아니었나. 그래서 깔봤던 건 절대 아니지만, 탄자니아라는 국적과 흑인, 한글 수건 등이 알게 모르게 편견을 만들고 있었던 거다. 


알고 보니 그분은 자그마치 교황청, 즉 바티칸의 신부였다. 5개 국어를 구사하며 철학, 신학, 음악 등에 박학다식했던 그는 탄자니아 출신으로 가톨릭 세계의 중심인 바티칸까지 가게 되어 7년째 일하는 중이었다. 이듬해면 사역 25주년이 되는데 목회자로서 출세하면서 나태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고, 스스로 반성하고 예수를 다시 발견하고자 순례길에 올랐단다. 이런 이야기를 낯선 동양인인 내게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해 줬다. 적지 않은 나이에 무릎까지 좋지 않아 등산 스틱 두 개를 짚고도 느릿느릿 걷는 상태였지만 반드시 완주할 거라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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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대구 파티마 병원 수건이 보이시는가.

나중에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탄자니아에서 

큰 수도원의 원장까지 하시다가 바티칸에 간 분이었다.


첫날 이 분과 같이 걷게 된 건 참으로 행운이었다. 위 사진에서 풍기듯 지위를 짐작도 할 수 없는 소탈함과 놀라운 학식, 그리고 깊이 있는 성찰의 자세 등은 일종의 멘붕 상태에서 대책 없이 먼 길을 덤벼든 우원에게는 큰 격려였다.


하지만 그분은 정확히 한 달의 기간밖에 없었기 때문에 비교적 여유를 부리던 우원과 계속 보조를 맞출 수는 없었다. 노령과 아픈 다리에도 불구하고 거북이와 토끼 이야기의 거북이 같은 꾸준함으로, 나중에 연락받은 바로는 확히 한 달 만에 끝내시고 바티칸으로 복귀하셨단다. 참고로 우원은 39일이 걸렸다.


그렇게 신부님과 헤어지고 수많은 사람들과 자연스레 만나고 갈라서며 2주일이 흘렀다. 이때쯤이면 하루에 2, 30 킬로미터씩 걷는 것에 나름 이골이 나는데, 한편으로는 왜 한여름 스페인 땡볕에서 그 고생을 하고 있는지, 지금이라도 버스를 잡아타고 한가로운 지중해 쪽 해변으로 가서 뒹굴거릴까 하는 유혹에 하루에도 몇 번씩 빠지던 시점이다.


그렇게 8월 15일, 우원은 길 친구 몇몇과 순례길에서는 큰 도시인 부르고스에 도착했다. 그런데 사람이, 특히 청소년들이 너무너무 많았다. 대체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 다음 날부터 가톨릭 세계 청년 대회가 스페인에서 열린다는 거였다. 지난주 우리나라에서 펼쳐져서 교황도 참석한 아시아 청년 대회의 모대회쯤 되는 행사다. 그래서 그곳 부르고스에서 모인 청년들이 그날 집회를 하고 다음 날 마드리드로 떠난다. 마드리드에는 교황도 오기로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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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찾은 그날의 사진. 부르고스 대성당이 뒤에 보인다.

이날 우원도 여기 있었다. 저 시간대면 딱 저 대성당

정면 쪽에 있었을 듯.


젊고 순수한 열기로 가득했지만, 무거운 배낭을 멘 우원 입장에서는 걷기 힘들게 만드는 피곤한 인파였다. 가톨릭교도가 아닌 내게는 그저 구교도들의 부흥회였을 뿐이고 교황이 오든 말든 나하고는 관련 없는 일이었다. 


와중에 같이 걷던 독일 친구들은 그야말로 치를 떨었다. 무엇보다 당시 교황이던 보수적인 베네딕토 16세를 아주 싫어했다. 같은 독일 출신으로서 조금이나마 팔이 안으로 굽을 만도 한데 말이다. 심지어 어두운 인상과 나치 협력 의혹 등을 상기시키며 '악마'라는 표현까지 썼다. 그래서 오랜만에 발을 딛은 대도시의 가톨릭 축제는 우리에게 걷기도, 식당 가서 밥 먹기도 어려운 시끌벅적한 난장판이었을 뿐이다. 


이런 경험들이 우원의 맘 속에서 가톨릭에 대한 미묘한 이미지를 형성했다. 탄자니아인 신부님과의 산뜻한 추억, 이어지는 청년 대회의 혼란과 피로, 그리고 음험해 보이던 당시 교황의 느낌. 와중에 끝없이 마주치는 가톨릭 국가 스페인의 아름답고도 성스러운 성당과 교회들. 심지어 그 교회들에서 때로는 잠까지 자 가면서 가톨릭 순례길을 열심히 걷고 있던 무신론자 우원. 이런 조합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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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한 인상 하신다. 

여기에 미심쩍은 과거, 보수적인 언행으로 

욕 많이 먹었다.


이 순례길을 시작할 때, 우원은 여러 가지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일종의 구원의 길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이 오래되고도 신비한 길의 끝에 도달하면 뭔가 거대한 깨달음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 매일 쉬지 않고 800킬로미터를 걷는, 대단하다면 대단한 일 자체가 내 지친 영육을 환골탈태시켜 줄 수 있을 거라는 환상도 있었다. 종교적 계시든 뭐든 내 세계관을 확 뒤집어 버리는, ‘번쩍’하는 뭔가를 보고 싶었다.


그렇게 4주쯤 걸어 이제 순례길도 슬슬 막바지에 가까울 때다. 어느 비 오던 밤, 겨우 찾아 들어간 순례자용 숙소의 독일인 주인장과 와인을 한 잔하게 됐다. 그는 저런 내 이야기를 듣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순례길은 당신이 원하는 걸 주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걸 줄 뿐이죠."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기나긴 길을 걸어 마침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에 구원의 빛이나 돈오돈수의 깨달음은 없었다. 거대한 성당의 아름다움과 성취감, 다소의 허탈감, 이어지는 현실 복귀의 두려움만이 있었을 뿐이다.


헌데 순례를 끝내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노인장의 말이 서서히 와 닿기 시작했다. 이 멀고도 오래된 길의 의미는 그 끝에 있는, 성 야고보가 누워있는 800년 된 대성당이 아니라 그곳을 찾아가기까지의 여정 자체에 있었다. 말로는 쉽지만, 이걸 정말로 느끼기는 그리 간단치 않았다. 그래서인지 번개 같은 각성이 아니라 그 길의 추억 속에서 조금씩, 그렇지만 묵직하게 다가왔다. 


순례길은 구원으로 안내하는 문이 아니었고 나는 내가 필요한 것이 뭔지 알지도 못했다. 순례길은 그저 나 스스로 필요한 것을 찾아가도록 도와줬을 뿐이다. 부르튼 발로 걷는 걸음 하나하나가 준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명확히 대답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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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던 순간에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그 멀고 고된 길을 마감한 지도 어느새 3년이 지났다. 이제 나는 순례길을 걷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바쁘게 살고 있다. 그동안 세계정복의 음모를 꾸밀 것 같던 베네딕토 16세도 인상과는 달리, 598년 만에 생전에 사임한 첫 교황이 됐다. 아무래도 독일 친구들이 오해했던 모양이다. 


그리고는 새로운 프란치스코 교황이 등극했고, 소탈한 태도와 진보적인 발언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만인의 어른이 됐다. 새 교황은 한국이란 먼 나라에까지 왔고, 예전과는 달리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조차 반기고 환호하고 먼발치에서라도 그를 보러 나섰다. 2011년 부르고스에서 약간의 짜증과 함께 바라보던 그 청년 대회의 모습을 보고 교황은 하필 이때 와서 이 난리냐 싶던 우원조차 이번에는 그의 방한을 통해 위로를 느꼈다. 


기댈 곳 없던 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자신들의 고통과 고민을 토로했고 나아가 해결을 주문했다. 교황은 그 사람들 하나하나를 챙기며 손을 잡고 말을 듣고 안아 주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이 사회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사랑과 공감이 퍼져 나갔고, 희망과 기대가 반짝였다. 그래서 그가 있는 동안 이 깜깜한 나라에도 빛이 비쳤다.  


하지만 이제 그는 떠났고 그렇게 우리는 좌절이 감도는 공허한 현실로 돌아왔다.


허나 순례길의 목적지가 그랬듯 그는 단지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없고 해결하려 들어서도 안 되는 존재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류 세계의 한쪽 꼭대기에 약하고 억울한 이의 하소연을 듣고 공감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정치나 경제 등이 외면한 지점에 말이다.


그에게서 어떤 형태로든 구원을 바란다면, 남는 것은 실망일 뿐이다. 하지만 그가 인간으로서 남겨놓고 간 빛은 기억으로 남는다. 그 빛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지만, 우리가 필요한 것을 찾도록 도울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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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베네딕토 16세의 얼굴이 인격을 드러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분은 정말 얼굴대로의 삶을 살아온 것 같다.


그래서인지 지금 우원은 순례길을 다시 처음부터 걷던 그 느낌이 든다.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기어서 걸어 올라가던 그 산길, 가뭄에 단비처럼 만난 우물 때문에 되려 탈까지 나서 풀밭에 쓰러져 있는 우원을 힐끗거리며 올라가는 다른 순례자들을 보던 그 기억. 


나는 대체 왜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이 나라까지 온 걸까. 첫날부터 지쳐 쓰러진 꼴이라니. 벌써 이런데 과연 이 길을 다 걸을 수 있는 건지. 걷는 중에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는 건 아닌지. 과연 이럴 가치가 있는지. 


그때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하나밖에 없다. 그 순간 한 걸음 더 내디딜 힘을 내서, 결과나 결말을 너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걷는 것뿐이다. 순례길을 걷는다고 매 순간 복잡한 고민에 빠지거나 성찰에 집중하고 있을 필요도 없다. 다만 내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만 ‘잊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열심히, 정신 차리고 걸으면 언젠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알게 될 거다. 눈앞에 얻어낸 어떤 성과나 지표나 수치 따위가 아니라 그동안 걸었던 걸음들이야말로 바로 진짜였음을. 아무리 멀고 높고 화려한 곳에 도달해도 찬란한 천국의 문은 나타나지 않지만, 대신 내 걸음 하나하나가 구원의 진짜 얼굴이었다는 점을. 그리고 그것을 깨달아야만 지금까지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도. 


세월호를 비롯해 많은 것들이 실려있는 그 '잊지 않음'이라는 짐은 마냥 가볍지 않다. 그래서 벌써 지겹다며 내려놓으려고들 하고, 나아가 짐을 든 이들을 타박까지 하는 약해빠진 자들 천지다. 하지만 생물학적 인간이 아닌 진짜 ‘사람’으로 살려면 반드시 이 배낭은 짊어지고 걸어야 한다. 무거워도 어쩔 수 없다.


성찰을 위해 아무도 시키지 않은 힘든 길을 걷던 그 신부님이나, 유민 아빠를 따듯하게 안아주던 프란치스코 교황을 통해 우리가 만난 것은 신이나 구원이 아니라 바로 그 배낭을 기꺼이 지고 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신부나 교황의 지위에 있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 그런 이들은 많고 또 많다. 


사실 여러분들이 다 그런 사람들 아니냐.







파토 

트위터 : @patoworld


편집 : 퍼그맨